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23:35:21

의조(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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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국조 의조 세조
대종 안종 영헌공
인숙공 인혜공 인효대공
비정통
안경공 승화후 덕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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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추존 국왕
의조 | 懿祖
본관 개성 왕씨
미상[1]
부모 부왕 국조
모후 정화왕후
형제자매 무녀독남[2]
배우자 원창왕후
자녀 4남 1녀[3]
묘호 의조(懿祖)
시호 경강대왕(景康大王)
능묘 온혜릉(溫鞵陵)

1. 개요2. 고려사의 기록
2.1. 태조실록2.2. 편년통록
2.2.1. 당숙종(또는 당선종)이 진의와 사랑에 빠지다
2.3. 편년강목
2.3.1. 아버지를 찾으러 배를 타다2.3.2. 용왕을 위해 여우를 잡다2.3.3. 저민의와 결혼하다
2.4. 왕대종족기2.5. 성원록2.6. 평가
3. 출신에 관한 논란
3.1. 고려 사람
4.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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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왕조의 추존 왕이자 왕륭의 아버지.

묘호는 의조(懿祖), 시호는 경강대왕(景康大王). 손자 태조가 등극한 뒤 추존한 세 국왕 중 한 명이다.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록》, 《편년강목》 기록상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이다.

이름은 미상[4], 성씨는 왕씨(王氏).[5]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

《고려사》의 《편년강목》 기록 기준으로 서해 용녀 저민의와 결혼해 아들이 넷, 딸이 하나 있었다. 아들 중 용건, 왕평달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으나 다른 둘은 기록이 없다. 딸은 어머니와 같은 황룡으로서 어머니를 따라 서해 용궁으로 사라졌다.

2. 고려사의 기록

2.1. 태조실록

의조(懿祖)는 경강대왕(景康大王)으로, 비(妣)는 원창왕후(元昌王后)로 하였다.
《고려사》 <고려세계> 《태조실록》 중.
고려왕조의 정사라 할 수 있는 《고려왕조실록》의 《태조실록》은 아주 짧게 의조와 원창왕후에 대해 설명했다.

2.2. 편년통록

고려 건국설화의 등장인물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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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경
강충의 어머니(전처) | 평나산신(후처)
강충
구치의
이제건 보육(손호술)
덕주
덕주
보육
진의
당숙종
진의의 언니 작제건
저민의(서해용녀)
강씨부인 용건
몽부인(성모천왕)
왕평달
도선 왕건 왕식렴
아랫첨자는 배우자를 나타낸다.
보라색 바탕은 혈연 관계가 없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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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당숙종(또는 당선종)이 진의와 사랑에 빠지다

작제건을 신성시하기 위한 <작제건 설화>가 전해내려져 온다.
당(唐) 선종(宣宗)의 나이 13세 때는 당 목종(穆宗)의 재위 때인데 장난 삼아 황제의 용상에 올라가 신하들에게 절(揖)하는 자세를 지었다.

목종(穆宗)의 아들 무종(武宗)은 마음으로 그를 꺼리더니 무종(武宗)이 즉위하매 선종(宣宗)이 궁중에서 해(害)를 만나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여 몰래 빠져 나와 멀리 도망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고루 세상의 험난함을 맛보았다.

염관(鹽官)의 안선사(安禪師)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대우가 특히 각별하였으므로 염관(鹽官)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또 선종은 일찍이 광왕(光王)이 되었는데 광군(光郡)은 곧 양주(楊州)의 속군(屬郡)이요. 염관(鹽官)은 항주(抗州)의 속현(屬縣)이니 다 동해에 접하여 있어 상선이 왕래하는 지방이었으므로 화를 무서워하여 항상 깊이 숨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산수를 유람하는 것으로 명목 삼아 상선을 따라 바다를 건넜다.

선종이 신라 송악 마가갑(摩訶岬) 양자동(養子洞)에 이르러 보육(寶育)의 집에 머무를 때 두 딸을 보고 기뻐하며 옷이 따진 곳을 꿰매 주기를 청하였다.

보육(寶育)은 중국에서 온 귀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마음 속에 "과연 술사(術士)의 말과 부합된다."고 생각하고 곧 큰딸로 하여금 명에 응하게 하였더니 문턱을 넘다가 코에 피가 흘러나오므로 진의(辰義)를 대신으로 드디어 천침(薦枕)하게 되었다.

기월(期月) 동안 머무르다가 임신하였음을 깨닫고 작별할 때 말하기를, "나는 당(唐)의 귀성(貴姓)이라." 하고 활과 화살을 주며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라."고 하였다.

곧 아들이 태어나니 작제건(作帝建)이다.
《고려사》 <고려세계> 《편년통록》 중.
《편년통록》과 《편년강목》은 같은 설화를 기록했는데 여기서 의조의 아버지는 당숙종 또는 당선종이다.

당나라의 황제가 진의에게 활과 화살을 맡긴 뒤 아들이 태어나니 바로 작제건이다. 작제건은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 어머니에게 내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단지 당나라 사람이라고 했다.

작제건이 이 것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은 고구려의 유리명왕 전설과 은근히 비슷하다. 작제건은 활을 들고 배를 타 당나라로 떠났다.

2.3. 편년강목

2.3.1. 아버지를 찾으러 배를 타다

작제건은 성인이 되자, 아버지를 찾으려고 당나라로 가는 신라 사신단의 호위무사가 되어 배에 오르는데, 이후의 내용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명궁 <거타지 설화>와 똑같다.

조금 상세히 서술하자면, 당나라 태자가 육지에 상륙을 하려고 했는데, 해변이 너무 펄밭이라 엽전을 깔아서 길을 만들게 하여 그것을 밟고 육지로 향했으니, 이 해변을 후에 '자전포'라고 일컬었다.

태자가 한 집에 머무르기를 청했는데 집 안에 아리따운 여식이 있으므로 집 주인에게 간청하여 그 여식을 얻었다. 동침을 하고 여인이 임신했으나 아이를 낳기도 전에 본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어 아이가 자라면 당나라로 날 찾아오도록 보내라는 말을 남기고 당으로 돌아간다.

아이가 태어나 작제건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어린 나이에 벌써 궁술에 통달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일찍이 말을 깨우쳐 어머니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를 여쭙곤 했다고 한다.

성장한 후에 상술한 대로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아버지를 찾으러 배에 올랐다. 그런데 뱃길에 안개가 너무 자욱해 더 이상 항해가 불가능할 지경이 되어 뱃사람이 점을 쳤는데 "고려인을 내려놓고 가라. 그래야 순풍이 분다"는 점괘가 나왔고, 마침 그 배에 타고 있던 '고려인'은 작제건이었다.

2.3.2. 용왕을 위해 여우를 잡다

결국 작제건은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밑이 바다가 아니라 외딴 섬의 해변이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배가 떠나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서해의 용왕인데 내가 그대를 만나고자 붙잡았다. 근래에 늙은 요호(妖狐)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의 모습으로 나타나 구름과 안개 사이에 해 ‧ 달 ‧ 별들을 벌여놓고는 나각(螺角)를 불고 북을 치며 음악을 연주하며 와서는 이 바위에 앉아 『옹종경(臃腫經)』을 읽어대니 내 두통이 극심하다. 그대의 궁술이 출중하다 들었으니 그대의 활로 그 요호를 잡아주기 바란다."하니, 작제건이 승낙해 요호를 잡으러 갔다.

과연 하늘을 날아오는 불상의 모습이 보이니 작제건은 눈을 감고 활을 쏘아 맞추었는데 맞아 떨어진 것은 과연 늙은 여우였다. 이 대목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명궁 <거타지 설화>와 거의 90% 일치한다.

용왕은 감사를 표하며 작제건을 당으로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생각하니 '이미 세월이 많이 흘렀고 아버지는 황제가 되어 자식을 많이 얻었을 테니 가봤자 날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나는 동방의 왕이 되길 원하니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용왕은 "왕이 되려면 '건'자가 붙은 이름으로 3대를 거쳐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6]

본인은 끝까지 왕이 되지 못했으나 훗날 손자 왕건이 옥좌에 앉아 아버지 용건, 할아버지인 작제건을 왕으로 추증했으니 반은 이루어진 말이다.

이상은 고려사 고려세계에 나온 것이고, 고려세계에는 또 민지의 편년강목을 인용해서 이런 버전도 쓰고 있다.

배에서 거의 내쫓기다시피 해서 바위섬에 내리게 된 작제건이 바위 근처에서 한 갈래 길을 보고 그 길을 따라 1리 남짓을 가니 또 한 개의 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 다시 한 채의 전각이 있었다. 문이 활짝 열렸고 안에 금자(金字)로 사경(寫經)하는 곳이 있어 가 보니 붓으로 쓴 글자의 점획(點劃)이 아직도 촉촉하였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어서 작제건이 그 자리에 앉아 붓을 잡고 불경을 사경하기 시작했는데,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여자가 작제건 앞에 서 있었다. 작제건은 그 여자가 관음보살의 현신인 줄 알고 놀라 일어나 자리에서 내려와 절하려 하였으나 여인은 홀연히 사라져버렸고, 희한한 일이다 싶어 다시 자리에 앉아 사경을 계속했는데, 한참 뒤에 그 여인이 다시 나타나 "나는 용녀(龍女)로서 여러 해 동안 불경(佛經)을 베꼈으나 아직도 다 쓰지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그대는 글씨도 잘 쓰시고 또 활도 잘 쏘시니 그대가 머물면서 제 공덕(功德) 닦는 일을 도와주셨으면 하고 또 우리 집안의 어려움을 없애 주셨으면 합니다. 그 어려움은 7일을 기다리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라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7일 뒤에 때가 되자 공중에서 풍악 소리가 들리더니 과연 서북쪽에서 오는 자가 있었고, 그것이 부처의 모습으로 변신한 늙은 여우였다.

2.3.3. 저민의와 결혼하다

그때 웬 노파가 "왜 사위로 받아달라 하지 않느냐" 하고 귀띔을 하니 작제건이 딸을 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용왕이 그를 용궁으로 데려가 딸 저민의를 처로 주고 칠보를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저민의가 작제건에게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를 달라고 청하라"고 귀띔을 하니 작제건이 그대로 청했다. 그러자 용왕이 고심을 하다가 내주고 둘을 보내었다.

그런데 집에 돼지를 들여보내려 했는데 돼지가 말을 듣질 않았다. 그러자 저민의가 '영험한 돼지이니 따라가 보라' 라고 해서 결국 돼지가 가는대로 먼 길을 따라가다 돼지가 갑자기 자리를 잡고 드러누우니 작제건 부부는 거기에 새로 집을 지었다.[7] 저민의가 집 앞에 은주발로 우물을 팠는데 그 우물은 용궁으로 가는 통로였으니, 저민의가 수시로 친정에 들러 보물들을 들고 왔다고 한다. 저민의가 판 우물은 개성대정(開城大井)이라 불리며 조선 시대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그런데 작제건에게 충고하기를 "내가 집에 가는 모습을 봐서는 안된다. 보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경고하므로 작제건은 그리했다. 세월이 흘러 용건을 비롯한 4형제를 낳은 뒤, 막내딸이 태어난 후에는 딸을 데리고 용궁으로 가는데 어느날 호기심을 견디지 못한 작제건이 몰래 뒤를 따라가 아내를 엿보니 아내와 딸이 황룡으로 변해 우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을 눈치 챈 저민의는 용궁에서 돌아와 추궁하며 분노하기를, "용궁의 일족은 이 땅에서 1,000년의 영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 당신이 부부의 약속을 저버렸으므로 500년 밖에 누릴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 후 딸과 함께 용으로 변해서 우물을 통해 용궁으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8]

이 이야기는 <선녀와 나무꾼> 복붙이다. 참고로 <선녀와 나무꾼>은 한국에서는 전래동화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몽골족만주족의 시조 신화였다.

2013 고1 모의평가 국어 영역에 해당 내용이 출제되었다.

2.4. 왕대종족기

《고려사》가 인용한 이제현의 <논평>엔 당숙종이 작제건의 할아버지, 국조가 작제건의 아버지라고 서술했다. 그리고 이제현이 증거로서 인용한 '《왕대종족기》'엔 국조의 성씨가 왕(王) 씨였다고 기록했다.

2.5. 성원록

《고려사》엔 이제현이 인용한 《성원록》이 두 줄 남아있다.
흔강대왕(昕康大王), 즉 의조(懿祖)의 처(妻)인 용녀(龍女)란 자는 평주 사람(平州人) 두은점(豆恩坫) 각간(角干)의 딸이다.
《고려사》 <고려세계> 《성원록》 중.
《성원록》엔 의조의 시호가 '흔강대왕(康大王)'이라 적혀있는 듯 하다. 아마 '경강대왕(康大王)'을 헷갈린 듯?

또한 원창왕후 용녀는 신라 평주 사람으로 두은점이란 자의 딸이다. 《편년통록》보단 현실적인 셈. 근데 두은점이란 자의 관등이 무려 각간(角干)이고 딸의 이름은 그대로 용녀다. 비현실적인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는 셈.

물론 두은점이 각간 관직으로 나온다고 해서 그게 실제 관직이었다고 볼 필요는 없다. 이제현도 신라 시대에는 귀인의 존칭으로 이름 뒤에 ~~간이라고 붙이던 관습이 있었음을 지적하며 작제건이나 용건(왕륭) 그리고 왕건의 이름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대충 현대에도 조금 거리가 있긴 하지만 친하게 지내고 싶은(혹은 그렇게 될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기분 맞춰주기로 사장님, 선생님 이러는 느낌이랑 비슷하게, 신라 시대에도 현지에서 행세하던 사람(이 경우는 지방 호족)을 띄워주느라고 실제로 그가 진골이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각간이라고 높여 불렀던 호칭으로 생각해도 충분히 말이 된다는 얘기다.

2.6. 평가

<작제건 설화>는 상당히 작위적인 설화다. 실제로 고려 충선왕 대에 원나라의 한림학사가 "당숙종은 젊었을 때는 궁을 벗어난 적이 없고 황제의 지위에 올랐을 때는 안사의 난을 수습하느라 바빴는데 언제 고려까지 갔다는 거임?"이라고 충선왕에게 설화의 내용이 사실인지 물어봤으나 왕이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편년강목》의 저자인 민지가 당숙종이 아니라 당선종이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 이에 대해 원나라 의 한림학사는 "당선종 이분은 외방에서 산전수전 다 하셨으니 그러셨을 수도 있겠음." 하고 수긍하였다.

이러한 작제건의 설화는 당시 고려 왕실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팔관회천령과 오악, 명산대천, 용신에게 고려의 안위를 바라는 행사였다. 여기서도 용신을 언급하며 고려 왕족들이 스스로 용의 후손임을 선전하였다. 사실이 어쨌든 <작제건 설화>를 토대로 '고려 군주는 당 황실의 후계자다', '고려 왕족은 용의 후손이다'라는 프로파간다가 나온 것이다.

또한 민간의 전설인 '우왕이 자신은 용의 후손이라며 겨드랑이의 용비늘을 보여주었다'는 전설, '우왕이 용의 후손이라 죽이지 못해 이성계가 전어도로 죽였다'는 전설을 보면 민간에서도 고려 왕실은 용의 후손이란 전설이 꽤 알려져 있었던 걸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인데, 그 고구려는 신라와 연합했던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지 오래되었고, 새로이 일어난 고려의 왕씨 왕실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이씨 황족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라면, 어떤 의미에서 <작제건 설화>는 한미했던 왕실의 선조에 대해 숭조 사업을 하면서 의도치 않게 국가 정체성을 블랙 코메디급으로 전락시킬 위험성이 있었다.

3. 출신에 관한 논란

국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국조는 태조 왕건의 외고조부인지 증조부인지 헷갈리는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증조부로 여겨지며 《왕대종족기》에서는 고려 태조의 가문이 증조부 때부터 왕씨 성을 쓰고 있었다고 나온다.[9]

게다가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는 《편년통록》, 《태조실록》, 《왕대종족기》와 《성원록》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 책들의 내용을 인용한 내용이 있는 책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고려사》에는 이에 대한 내용을 모두 적고 있는데, 고려 말의 유학자 이제현이 이에 대해 말한 부분이 있다. 그가 말하길, 《성원록(姓源錄)》에 '흔강대왕(의조)의 처인 용녀(龍女)는 평주(平州) 사람인 두은점 각간의 딸이다.'라고 나온다고 했다.

여기서 평주는 중국 평주가 아닌 황해북도 평산군의 고려 초기 지명이다. 중국에서 평주는 위진남북조 시기, 수나라, 당나라 시기에도 있었으나[10] '두은점 각간'은 두은점이라는 인물이 신라의 1등위 관등인 각간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므로 그가 중국 평주 사람이 아닌 걸 알 수 있다. 고려 초기에 황해도 평산군이 평주로 불렸고, 고려가 여기에 도호부를 설치했기 때문에 《성원록》에 나오는 평주는 황해도 평산군임이 분명하다.

이는 의조 작제건의 아내 용녀를 용왕의 딸이라고 한 《편년통록》의 기술과 다르다. 10세기에 편찬된 《태조실록》과 달리 《왕대종족기》의 편찬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편년통록》의 저자가 12세기 고려 의종 때의 사람이고, 13세기의 유학자 이제현이 《태조실록》과 《왕대종족기》를 근거로, 국조와 보육이 동일인물이고, 당숙종이 작제건의 아버지라는 《편년통록》의 <작제건 설화>의 내용 일부가 사실이 아님을 논파했기 때문에 《왕대종족기》는 《편년통록》보다 이전에 작성된 문헌인 건 분명하다.

<작제건 설화>가 최초로 고려 문헌에 수록된 건 고려 의종 시기의 《편년통록》이 최초이다. 상당히 작위적인 설화인 만큼 작제건 개인에 대한 내용도 많이 가공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더군다나 《편년통록》, 《편년강목》의 저자인 김관의, 민지 등은 고려 의종, 충숙왕 때의 문신으로 역사가가 아니라 무기나 보물 관리를 담당하던 하급 관리였다.

다만 작제건이란 인물 자체가 가상인물이라고 보긴 어렵다. 증조부부터 왕씨 성을 썼다는 기록이 이미 있는 상황에서 태조의 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완전히 가상인물을 지어내서 만들어낸 것이라면 기왕 지어낼 김에 태조의 조부가 성씨를 가진 귀족이라고 설정하는 게 더 나은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설화는 거타지의 것을 복붙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차용의 형태였다면 굳이 이름만 다르게 지을 이유가 없다.

3.1. 고려 사람

《고려사》 <고려세계>가 인용한 《편년통록》, 《편년강목》은 특이하게 작제건 '고려 사람(高麗人)'으로 따로 부르고 있다. 원문을 보면:
(전략)...그리하여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상선(商船)에 (몸을) 맡겨 바다를 지나던 중, 구름과 안개가 앞을 가리고 배(舟)가 사흘 동안 나아가질 않았다. 배의 사람들이 점을 쳐 말하니 "마땅히 고려 사람을 치워야 한다(宜去高麗人)."고 했다.
민지(閔漬)의 《편년(編年)》[11]이 혹 이르길: 신라 김양정[12]이 사신으로서 당에 가려 하니 (작제건이) 그 배에 (몸을) 맡겼다. 양정이 꿈을 꿨는데 백두옹(白頭翁)이 말하길 "고려 사람을 남기면 순풍을 탈 수 있다(留高麗人, 可得順風)."고 했다.
《고려사》 <고려세계> 중.

당시엔 고(구)려가 없었으며, 송악은 패강진 일대로 남북국 시대 신라의 영토였다. 또한 호경은 성골장군, 강충은 상사찬, 보육은 신라 술사의 말을 전해 듣는 등 작제건 일가는 신라의 관직과 문화를 따르고 있었다.

두 기록 중 첫번째 기록을 보면 '배의 사람들'이 어디 출신인지 알 수 없다. 즉 그들은 당인일 수도 있다. 배는 상선이라고 했으니 신라로 무역을 하러 온 당인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작제건 설화>가 고려 건립 이후 만들어졌다고 가정하면 그들이 신라 사람 작제건을 우리나라의 별칭 중 하나인 '고려'로 불렀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배에서 유일한 신라인이어야만 한다는 추가 조건이 붙지만. 당시 고(구)려를 멸망시킨 그 신라가 '고려'란 별칭으로 불렸다는 가능성은 차치하고 후대 고려 사람들의 전설이다 보니 자국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두 기록 중 두 번째 기록은 '신라' 사신 김양정과 '고려' 사람 작제건을 완전히 분리하고 있다. 당시 송악을 포함한 패서(패강진) 일대는 여전히 고(구)려 사람이란 의식이 강했다. 고구려계로 보이는 호경 일가는 송악이 신라의 영역이 됐으니 신라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나 후손 왕건 대까지 고(구)려계 정체성을 가졌다.[13]

고구려계 왕씨 가문은 분명히 여러 기록에 나오는데다,[14]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 이전에 아예 낙랑군 시대부터 세력을 떨친 고조선계 토착 가문이었다.[15] 즉 이 작제건은 고구려계 귀족 가문 왕씨 일가의 후예로서 고구려 멸망 후 산동성에 정착한 가문의 후손으로 볼 개연성이 있겠다.

일단 왕건이 후당측에 통보한 스스로의 출신은 '장회무족(長淮茂族)'[16]이었음을 이 대목에서 다시 눈여겨보아야 한다. '장회'는 당-후량-후당 사람들 기준으로는 이정기 일가의 평로치청번진이 있었던 산동성 양저우시 일대인데, 이 지역은 신천 강씨의 선조로도 유력한 호경의 연고지인 백두산 근처 옛 고구려 일대 및 패서 지역과는 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왕건 일가의 부계측 선조인 작제건과 관련이 있는 걸로 볼 수도 있겠다. 한편 고려사 전문의 박종기 교수 및 후삼국사 전공의 김기동 교수는 이를 선진시대 동이 일족 중 회이 일족이 산동성에 살았던 연고로 왕건의 가문이 동이의 명문거족 회이에게 가탁한 걸로 보았으나, 동이의 개념은 진한시대 이후 산동성이 아닌 한반도 및 왜로 바뀌었고 회이는 여러 산동성 동이 중 한 부족으로서 동이 자체와 동일시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17] 이는 역으로 중국 동북공정론자들에게 강력한 반론을 받을 여지가 있다. 게다가 훗날의 당숙종 조작에서 보듯 이왕 가탁하려면 더 좋은 소재는 많은데 어째서 하필 동이도 아니고 회이를 찝어서 장회무족이라고 하게 했는지도 설명이 어렵다. 작제건의 정확한 출신은 현재로서는 추측의 영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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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 왕후 · 왕태후 · 왕태자
후궁 : 태조 ~ 예종 · 의종 ~ 공양왕
왕자 : 국조 ~ 문종 · 선종 ~ 공양왕
왕녀 : 태조 ~ 문종 · 선종 ~ 공양왕
※ 작호가 있거나 성년까지 생존한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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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년통록에 고려 의조의 이름이 작제건(作帝建)이라 나오나 이는 고려 왕실 공식 가계도인 왕대종족기나 고려성원록 등에 기록되어있지 않는 인명이기에 실제 인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2] 진짜로 무녀독남인지 다른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알려지지 않은건지는 불명이다. 무녀독남이면 중세시대에서는 굉장히 이례적인 케이스다.[3] 왕륭, 왕평달, 아들, 아들, 딸[4] 고려 왕실 공식 가계도에 편년통록같은 전설과 민담이 출처인 기록들에서 나오는 고려 의조의 이름인 작제건(作帝建)이란 이름은 기록되어있지 않다.[5] 《고려사》에서 이제현은 작제건이 왕씨(王氏)라고 주장했다.《고려사》 <고려세계>, 《편년통록》, 《편년강목》에서는 성씨에 대해서 따로 언급이 없다.[6] 아들 왕륭의 초명이 '용건(龍建)'이다. 손자 왕건도 이름이 '건'이니 3대가 '건'자 이름을 가진 것.[7] 재미있게도 삼국사기유리왕국내성으로 천도하게 된 일화와도 비슷하다.[8] 그래서 그런지 고려왕조가 500년이 채 안돼서 멸망했다.[9] 실제로 이 지역은 고구려 때부터 왕씨들이 유력가문이었다. 고구려 유민 출신의 장수로 유명한 고구려계 당인 왕사례의 사례도 있다.[10] 링크.[11] 《편년통록》과 《편년강목》 중 민지가 쓴 《편년강목》을 말한다.[12] 진성여왕의 막내 아들.[13] 자칭 미륵불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 고(구)려의 원한을 갚겠다고 천명하고, 국명을 고려라 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패서 일대는 고구려의 부활을 원했기 때문이다.[14] 왕산악이나 왕고덕, 왕모중, 왕사례 등의 예시도 있다.[15] 즉 동북공정론자들이 믿고 싶어하는 것처럼 한족 계열 왕씨 가문이 아니라는 얘기다.[16] 장회, 즉 회하(淮河) 일대에서 번성한 가문 출신이란 뜻.[17] 동북아역사재단 발간 서적 동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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