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비에 대한 내용은 신덕왕후 문서 참고하십시오.
康妃
? ~ 915년 (향년 불명)
1. 소개
후삼국시대의 인물로, 궁예의 부인. 《삼국사기》에는 부인 강씨라고만 적혀 있다.기록에 나오는 궁예의 부인은 그녀뿐이기 때문에 태봉의 왕후로 여겨지지만, 시호나 이름이 기록에 남아 있지 않기에 현대엔 왕비 강씨나 강비, 왕후 강씨라고 불리는데 이 중 강비가 가장 많이 쓰인다.[1] 한국의 왕후 중에서 '성씨+비'로 된 명칭이 많이 쓰이는 것은 충선왕의 4비 조비와 명성황후를 민비로 부르는 것과 함께 셋뿐인 사례다. 다만 비는 후보다 격이 낮기 때문에 왕후 강씨가 아닌 왕비 강씨(강비)라 하는 건 낮춰 부르는 것이 된다. 궁예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와 함께 915년 남편에 의해 처형당했다.[2]
2. 생애
정확치는 않지만 황해도 신천군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기록상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지리적인 여건이나 성씨를 보면 그녀는 신천 강씨 집안 사람으로서 패서 호족 출신인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된다. 왕건의 후궁 중 하나인 신주원부인의 성씨가 강비와 똑같은 강(康)씨며, 이 신천 강씨 집안은 다름아닌 왕건의 조상 중 하나인 강충이 속했던 집안일 가능성이 높다.[3] 강충은 왕건의 선조지만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강충 아들 보육의 외손자기에 성씨까지 이어지진 않기 때문. 즉 왕건 집안과는 멀지 않은 인척이란 얘기며, 지역에서 구전되는 설화처럼 집안끼리 교류했거나 적어도 아는 사이였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그녀가 언제 궁예의 왕후가 되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고 송악에 도읍하면서 왕후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궁예가 신천 출신인 그녀를 왕후로 삼은 것은 지금의 황해도, 평안도 일대인 패서(浿西) 지역 고구려계 호족들과 연대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그녀가 정사 기록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부분은 《삼국사기》 <궁예열전>의 단 몇 줄뿐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가 폭정을 일삼자 강비가 "옳지 않은 일을 많이 한다"라고 간언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자 궁예는 "네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니 어찌된 일이냐"라고 하면서 강비의 음부에 쇠방망이를 달궈 쑤셔 죽였다는 끔찍한 기록이 그것이다.[4][5] 게다가 그녀가 낳은 궁예의 두 아이들마저 살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반적으로 왕후를 폐해 쫓아내는 일은 있어도 죽이는 일은 극히 드문 데다가[6], 왕후가 낳은 아들들까지 모조리 죽였다는 점에서 궁예의 광기가 극에 달했다고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해석도 있긴 하다. 패서 출신 호족 강비는 당연히 패서 호족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입장에 서 있었을 것이고, 궁예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패서 호족들이 밀리게 되자 이를 막으려다 궁예에 의해 죽임 당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왕자들까지도 죽음을 당했다는 점에서 그녀가 궁예를 밀어내고 왕자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액션을 취한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결국 그녀의 죽음으로 패서 호족들과 궁예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이는 결국 왕건의 역성혁명까지 이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3. 관련 설화
묘하게도 설화에서는 그녀에 대한 인상이 다르다. 강원도 철원군 쪽의 설화에서는 그녀가 원래 왕건의 배필감이었다가 궁예에게 시집갔지만 왕건을 못 잊어서 왕건과 밀통하다가 발각돼 죽음을 당한 것으로 묘사된다.[7] 또한 궁예의 폭정이란 것도 실은 궁예의 잘못이 아니라 강비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반면 경기도 가평군 쪽의 설화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난다. 강비가 궁예에게 폭정을 그만둘 것을 간하다가 궁예의 노여움을 사서 역사와는 달리 가평의 산으로 유배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후에 궁예가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도망치게 되면서 자신에게 충언을 한 강비를 잊지 못해 강비가 유배된 가평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강비는 죽은 뒤였다고 한다.[8] 가평에는 강비가 유배된 산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강씨봉이 있으며, 궁예는 강씨봉을 내려와서 다른 산으로 올라갔는데, 이 산에서 강비의 죽음과 망국의 슬픔에 대성통곡하자 산도 따라서 울었다는 명성산이 있다.
4. 대중매체에서
4.1. 소설 마의태자
이광수의 《마의태자》에서는 강비에게 '강난영'이라는 이름을 주고 무예와 지략이 출중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궁예의 폭정에 실망해 왕건과 밀통하다가 결국 궁예에게 죽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는 이광수 특유의 "조선민족은 안 될 거야 아마"의 사상에 입각한 것으로 해석돼서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4.2. 영화 태조 왕건
1970년 영화 태조 왕건에선 배우 사미자가 연기하였다. 여기선 간신배와 간통을 하면서 궁예를 농락하다 죽이는 모습으로 나온다. 아마도 경기도 가평군에서 전해진 강비의 부정적 설화와 위의 이광수의 소설 마의태자를 참고한 것으로 추정된다.4.3. 드라마 태조 왕건
연화 문서 참조.4.4. 맛있는 한자
<조선일보>에서 아동, 청소년 한자 학습만화 콘텐츠로 지금까지 연재하고 있는 맛있는 한자 시리즈의 2부는 신라의 후삼국 분열과 고려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후삼국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는데,[9] 여기서는 궁예의 철원 천도와 국호 개정, 연호 제정 등 일련의 정책을 그간 궁예를 원조한 자신들의 노고를 존중하기는커녕 오히려 대제국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자기들의 세력을 꺾어놓으려는 술책으로 판단하고 불만을 품은 고구려계 호족들이 강 장자를 추대하여 궁예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강비가 그 반란으로부터 궁예를 지키려다가 반란군에게 죽음을 당한 것으로 각색되었다. 해당 학습만화에서 강비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궁예에게 강비가 보인 모습은 그야말로 순정 그 자체. 반란군에게 크게 다친 뒤 "가엾으신 분... 어쩌면 이렇게도 가혹한 운명을 타고 나셨다는 말입니까..."라는 말로 궁예를 마지막까지 다독이다 결국 사망하자 궁예는 강비를 껴안고 통곡한다.[10] 이 시리즈물로 학습케하려는 대상자에게 강비가 간통 혐의를 받고 음부를 불에 달군 쇠방망이로 지져 죽였다든지 하는 잔혹한 묘사를 할 수 없어서 매우 순화된 방향으로 각색한 듯.5. 둘러보기
태봉의 역대 왕후 | ||||
신규 책봉 | → | 궁예비 강비 | → | 고려의 역대 왕후 |
[1] 정사에 나온 명칭인 '부인 강씨'의 경우, 명칭만 봐선 그녀가 왕후라는 걸 알기 어렵기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 편이다.[2] 흔히 강비와 처형당한 두 아들을 청광보살, 신광보살로 추측하나 마땅한 사료적 근거는 없다.[3] 신호철 교수의 후삼국시대 호족 연구 저서 참조[4] 야사도 아니고 정사인 《삼국사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물론 《삼국사기》 역시 고려의 신하인 김부식이 쓴 것임을 상기해본다면 왕건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일 수도 있다.[5] 정사 《고려사》태조 총서에서는 강비 처형에 대한 기록은 나와있지 않으나 "궁예가 쇠로 3척이나 되는 쇠절구공이를 만들었는데,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그것을 불에 달구어 음부에 찔러 넣어 입과 코로 연기를 뿜으며 죽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아녀자들(士女)이 무서워 벌벌 떨었으며 원망과 분노가 날로 심하였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6] 일단 기록에서 강비를 폐했다는 언급은 없다.[7] 아마도 왕건의 부인 중 하나이자 광종의 양육을 담당했던 신주원부인 강씨와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있다.[8] 다만 사인이 자살인지 병사인지 타살인지는 불명.[9] 이 시리즈물은 매주 토요일 <조선일보> 별지부록으로 10여 년 전부터 이어져오고 있는 장기연재물로써 1부는 중국의 위촉오 삼국시대, 3부는 조선 시대, 4부는 사마천의 《사기》를 토대로 하여 연재하였고 2019년 9월 현재 연재 중인 5부는 《명심보감》을 토대로 연재하고 있어 역사를 비롯한 동양고전으로 저변을 넓히고 있다.[10] 궁예의 흑화에 결정타를 때린 것이 이 사건이었다는 설정도 덧붙여졌다. 실제로 해당 학습만화에서는 그래도 이 사건 이전까지는 어느 정도 말은 통하던 군주였던 궁예가 반란 사건 및 강비의 피살 이후로는 완벽하게 흑화되어 폭정을 일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