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7:27:19

안사의 난


당나라 실패한 내란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내란 주도 세력
이경업의 난
,684,
<colbgcolor=#ffffff,#1f2023> 이경업
경룡정변
,707,
이중준
이중복의 난
,710,
이중복
안사의 난
,755 ~ 763,
안록산의 난
,755 ~ 757,
안록산
사사명의 난
,758 ~ 763,
사사명
구보의 난
,859,
구보
방훈의 난
,868,
방훈
황소의 난
,875 ~ 884,
황소 }}}}}}}}}

<colbgcolor=#c0c0ff> 안사의 난
安史之亂
시기 755년 12월 16일 ~ 763년 2월 17일
장소 북중국
원인 당(唐)의 사회기반인 율령제 붕괴.
교전세력
지휘관 당현종
당숙종
당대종
봉상청
고선지
양국충
가서한
복고회은
이광필
곽자의
장순
안녹산
안경서
사사명
사조의
병력 600,000 ~ 700,000 명 200,000 ~ 300,000 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당(唐), 반란진압 성공.[1]
영향 당(唐)의 지방통제력 약화 및 중앙아시아에서의 주도권 상실.

1. 개요2. 배경
2.1. 역사적 배경2.2. 사회적 배경2.3. 군제의 변화(군사적 배경)2.4. 정치적 배경
3. 상세4. 파급효과
4.1. 종결 이후
4.1.1. 전후 처리4.1.2. 위구르의 전횡과 새로운 불씨
4.2. 이어지는 전란(763~765)
5. 의의
5.1. 대내적인 영향5.2. 대외적인 영향
6. 그 외7.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안사의 난의 전개[2]

당나라 중엽인 755년부터 763년까지, 즉 당현종부터 당숙종, 당대종에 이르는 약 8년 동안 연속적으로 벌어진 대규모 군사반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안사의 난으로 인해 당나라가 아주 작살이 난다. 중국사에 아예 나라가 사분오열되고, 서로 다투는 군웅할거가 워낙 많다보니 안사의 난은 중국 내부의 단기성 전란이라 크게 다가오지 않지만, 실제로는 당나라 최대의 내전으로 현재까지도 역대 중국의 전란 및 동란으로 인한 사망자 순위에서 압도적 순위를 기록하고 있는 거대한 사건이다.[3]

안사의 난이라는 이름은 초기 주동자인 녹산(安祿山)과 후기 지도자 사명(史思明)의 성을 따온 것이며, 사사명을 배제하고 그냥 안녹산의 난, 혹은 당시 연호를 따서 천보(天寶)의 난으로 부르기도 한다. 당시까지 중국 역대 통일왕조에서 있었던 반란 중 가장 대규모였고, 그 파급력도 가장 컸던 전란으로, 사실상 당제국을 붕괴로 몰고가기 시작한 전란이었다. 그러나 비록 큰 사건이었긴 하지만 이후 당나라는 당헌종 때에 원화의 중흥기를 맞이하여 150여 년의 기간 동안 제국을 유지했다.

2. 배경

2.1. 역사적 배경

멀게 잡자면 남북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로, 관중에 뿌리를 두고 있는 관롱집단과 하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산동사족이 대립하였고 수말당초에는 최종적으로 관중에 기반을 둔 당고조 이연과 하북에 기반을 둔 두건덕이 대립했다. 두건덕은 하북에서 상당한 인망을 얻고 있었으므로 이연에게 패배, 항복하여 처형당한 뒤 하북의 민심이 반발하고 유흑달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하북 지역은 좀체로 당나라에게 쉽게 복속되지 않았다. 그나마 당태종 이세민이 산동사족을 포용하면서 좀 다독여지나 싶었다. 하지만 하북 지역은 거란 등 유목민족의 유입이 많았고 이들의 영향으로 관중과는 다소 이질적인 정체성을 형성해갔다. 하여 측천무후 시기에 또다시 이진충의 난이 발발하였다.

종합하자면 반란의 진원지인 하북 지역은 전통적으로 당나라에 쉽게 복속되지 않던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안사의 난이 평정된 후에도 지속되었다.

2.2. 사회적 배경

당제국의 기본 사회체제인 율령제는 토지분배를 기본으로 한 균전제와, 균전제를 기반으로 한 조세제도인 조용조 체제, 그리고 마찬가지로 균전제를 기반으로 한 부병제로 이루어진 제도로, 북위 시절부터 내려오던 여러 제도를 당제국이 보완하고 연계시켜 완성시킨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당은 농민생활을 크게 안정시키고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켰으며 군비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가히 고대 ~ 중세 사회제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율령제는 당제국의 최전성기인 8세기 초중반을 기점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근본적인 원인은 호적에 오른 백성만 조세와 군역을 부여할 수 있다는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균전제 하에서 호구를 등록한 농민들은 명목상으로는 상당한 토지를 부여받았으나 실제로는 이미 인구가 지나치게 증가해 규정의 절반 이하에 달하는 토지만을 받았으며, 그 대가로 져야 할 부담은 너무 컸다. 굵직한 것만 들어보자.
  • 한번 등록되는 순간 몇 년동안 변방 오지에 무보수 자비 부담으로 끌려간다.
  • 죽을 때까지 머리수대로 무거운 세금이 떨어진다.
  • 현지 주민도 구하기 힘든 지방 토산품을 대량으로 바치라고 압력이 들어온다.
  • 심심하면 부과되는 각종 잡세와 임시세금의 압박이 가중된다.
  • 역시 무보수 자비 부담으로 험악한 공사현장에 강제로 끌려간다.

이러니 대체 누가 호구 등록을 하고 싶어하겠는가? 덕분에 농민들은 서로 호구 등록을 기피했고, 이로 인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율령제는 막대한 미파악 인구를 양산했으며, 이것이 당 현종대에 들어서는 1 / 4 정도 되는 인구가 정부의 호구수 파악 대상에서 벗어난 상태[4]가 된다. 농민들은 상당수가 조용조 제도에서 벗어나는 귀족의 사유지 및 사원전 아래로 들어갔고, 관헌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친 도호(逃戶)도 다수 있었다. 이에 대한 처벌조항도 있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사실 율령제의 이러한 문제는 1,000년 가까이 지난 청나라대까지 이어지며, 강희제 ~ 옹정제 시기의 지정은제라는 호구 수에 따른 세제 부담을 토지세로 통합해 이월한 제도가 시행된 후에야 해결되었다. 여담이지만 지정은제의 시행 이후 청나라의 호적에 등록된 인구 수는 자연 증가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폭증하는데, 이는 호구 수에 따른 세제 부담으로 호적 체계에서 벗어나 있던 농민이 그만큼 많았고, 그러한 부담이 사라지면서 이 체제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게다가 유교 질서하에서는 호구 수를 꼼꼼히 기록해 세금을 걷는 것을 오히려 학정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호적의 부실로 인한 전반적인 세제 구조의 붕괴는 후대에 오히려 더 강하게 나타나기까지 한다. 호적의 최대 40%까지 등록되지 않은 인구를 가산해 인구를 세기도 할 정도다. 심지어 등록되지 않은 호구와 은전의 색출을 기조로 총체적 개혁에 나선 명나라 말기의 재상 장거정은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죽은 뒤에 모든 영예를 박탈당했다.[5]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대토지 소유자, 호족의 세력이 강성해진 건 당연한 일이다. 이를 감시 감독해야 할 조정은 문제에 무관심해졌고, 또 문제를 해결할 힘을 잃었다. 천보 연간에 접어들자 이는 표면화되었다.

2.3. 군제의 변화(군사적 배경)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부병제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절도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이 시기에 접어들어서 당의 부병제가 붕괴되면서 군제가 크게 변화한다.

그동안 당은 외부의 적들을 잘 막아내고 되리어 공격도 많이 가는 편이었으나, 700년 전후가 되면서 토번이 강성해지면서 수도 서쪽을 위협하였고, 돌궐, 발해, 거란도 꽤나 껄끄러운 적들이었다. 기존의 도호부와 군진 체제로는 막기가 어려웠다. 결국 이러한 외적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진들을 통합하는 번진이 등장하게 되었고, 그것을 지휘하는 절도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절도사는 군정과 군령 그리고 지방행정까지 더해지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군 지휘에 있어서는 중앙에서도 쉽게 못 건드리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거기다 균전제의 붕괴로 인한 부병제의 붕괴도 결국 모병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 모병의 중심은 군대의 중심인 절도사들에게 집중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2.4. 정치적 배경

직접적으로 안녹산양국충으로 대표되는 황궁 내 궁중권력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양국충은 양귀비의 사촌오빠로서 사촌여동생을 등에 업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안녹산은 동북방 변방의 절도사임에도 여러 공적이 있는 덕분에 장안에 자주 드나들며 현종과 양귀비의 신임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양귀비와 안녹산이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소리가 나돌기도 했다. 그 와중에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며 안녹산을 통제했던 재상 이임보가 병사했고[6], 궁중권력은 양국충이 장악했다.

양국충은 재물을 모으는 재주와 재무능력은 우수한 편이었으나, 그것 빼고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면서 앞서기만 좋아했다. 중앙군 70,000여 명을 이끌고 남조[7] 원정을 갔다가 제대로 패배하자 병력을 억지로 끌어모아 다시 공격했지만 이것도 완전히 박살이 나서 병력 손실이 20만명에 달하는 엄청난 망신을 당한 것이다. 또한 자신이 황제라도 된 것마냥 대부분의 관직을 독점했고, 매관매직을 벌여 재산 축적에만 열을 올렸다. 더 큰 문제는 이임보와 그 일파인 관롱집단 귀족세력의 영향력이 너무 강했던 탓에, 명색이 명군으로 불렸던 황제인 현종과 과거를 통해 올라온 비관롱계열 관료들이 이런 양국충의 행태를 눈감아주거나 오히려 도와주기까지 한 것이었다.[8]

이윽고 중앙세력을 장악하다시피 한 양국충은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절도사들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자연히 그 절도사 중 제일 큰 세력을 가진 안녹산을 가장 경계하게 된다. 실제로 안녹산 또한 자기 멋대로 중앙에서 세력을 키우는 양국충을 좋아하진 않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차근차근 군비를 증강시키며 여차하면 역모를 저지를 기회까지 보고 있었다. 이 당시 정확히는 천보 14재(년)[9]의 안녹산은 당나라 최대•최강의 절도사로, 다수의 절도사직을 겸직하고 이를 장기간에 걸쳐 역임하면서 동북변의 강대한 군대를 자신의 사병으로 만들었다.

이 당시 안녹산의 세력이 얼마나 큰지는 이 시기의 절도사들과 금군 장수들의 명단을 보면 알 수 있다.

보다시피 안녹산은 혼자서 3개 절도사직을 겸직하며 사실상 당제국 동북면의 모든 군사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의 휘하의 병력만 해도 10개 절도사의 총병력인 약 45만명의 4할이 넘는 약 18만 4천명이었고, 자신과 양부자 관계를 맺은 이민족들을 통해 수만명에 달하는 개별 사병집단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상술했듯 안녹산은 장기간 수많은 공적을 쌓아올려 장수로서의 경력도 풍부했다. 이에 비해 금군은 근위대란 특성상 그 권위에 비해 가지고 있는 군사 자체는 많은 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시 상황조차도 안녹산 쪽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당의 중앙군은 부병제의 붕괴, 그리고 착기 제도의 실패로 인해 유명무실화되었으며, 개원 25년 '장정건아제'의 실시로 인해 모병제 체제로 돌아서면서 과거의 부병제 시절처럼 급할 때 대규모로 동원할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안녹산에게 위협이 될 만한 다른 절도사들은 국경 방위 문제로 마음대로 움직이기 힘들고, 예비병력이라 할 수 있는 단련병들은 그 질이 천차만별인데다 바로 직전에 양국충 본인이 벌인남조 원정에서의 대패로 인한 병력 손실이 극심하였고, 안녹산은 이런 환경에서 거리낌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사실 안녹산도 751년에 평로절도사, 범양절도사 휘하 병력 10만여명을 끌고 거란을 공격했다가 다 날려먹은 적이 있으므로 군사적 재능이 양국충보다 그리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군대 지휘 경험이 풍부하다는 강점이 있었다.

물론 당 조정도 바보는 아니라 천보 13재(년) 즈음엔 당현종을 보좌하던 내시 중 하나인 고력사가 이를 간파하고는 "변방 장군들이 이리 많은 병사를 다스리는데, 이걸 그대로 놔둬도 이들이 가만히 따라줄거라 생각하십니까?"라는 식으로 변방 장수들의 약화를 건의하는 등 중앙에서도 여러모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안녹산의 경력이 경력인지라 그리 쉽게 통과될 이야긴 아니었고, 어찌저찌 안녹산을 조정으로 부르고 그가 맡고 있던 절도사 3개는 가순, 여지회, 양굉홰에게 각각 주기로 반쯤 결정했지만 당 현종의 신임 때문에 이 안건의 가결은 계속 미뤄졌고, 결국 그 사이 안녹산이 난을 일으키고 말았다.

3. 상세

3.1. 안녹산의 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안녹산의 난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55년 11월 10일 범양에서 거병한 안녹산은 본거지에 일부 수비대를 남겨두고, 15만 병력에 투항한 거란족, 해족의 기병 8,000여 기를 선봉에 내세워 진군했다. 당은 초기 대응에 실패해 그 해 12월 낙양을 내주고, 다음해 동관과 수도 장안까지 내주면서 당현종이 옛날 의 수도이었던 성도로 파천했으나, 이후 757년 칭제한 안녹산이 수세에 몰리고 그해 자신의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하면서 세력이 약해져 일단락된다. 자세한 것은 안녹산의 난 참조.

3.2. 사사명의 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사사명의 난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당이 전후 처리를 허술하게 하는 틈을 타 758년 사사명이 재봉기하여 759년 낙양을 점령하나, 761년 그 역시 안녹산처럼 아들 사조의에게 살해당한 후 세력이 약해져 결국에는 진압된다. 먼저 일어난 안녹산의 난에 가려지는 감이 있지만 당 조정은 이번에도 초기 대처에 실패하고 수도권인 관중을 빼앗겨 피해의 수준은 더 심했고, 역시 전후 수습 과정에서 복고회은의 난으로 이어졌다. 자세한 것은 사사명의 난 참조.

4. 파급효과

당은 안사의 난을 정말 간신히 진압했으며 뒤이은 토번 제국의 침공과 복고회은의 난 또한 곽자의의 맹활약으로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안사의 난은 간접적으로는 당이 멸망할 때까지 그 영향을 끼쳤으며, 직접적으로는 당헌종의 '원화중흥' 이전인 약 40여 년 동안 수차례에 걸친 국가존망의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

4.1. 종결 이후

거진 8여 년에 걸친 기나긴 전란이었던 안사의 난은 사조의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혼란은 멈추지 않았다. 반란의 뒷처리 문제는 상당한 시간을 소요했으며, 두 번에 걸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 장안이 함락되기도 했다. 간신히 평화가 찾아왔을 때 이미 동쪽의 번진들은 사실상 독립왕국으로 뿌리를 내린 상태였고, 이후 장기간에 걸친 번진과 당 중앙정부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반란의 종결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던 것.

4.1.1. 전후 처리

763년 윤정월[12], 당은 전란의 종결을 확인하고 전후처리에 들어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안녹산과 사조의 측에 붙었던 절도사들에 대한 처우였다. 당 조정은 이에 대해 원래 관장하던 지역을 대부분 인정해 주면서 용서하는 유화책을 사용했다. 이는 반란 진압에 당의 국력이 심각하게 소모되었던 데다가 사사명의 아픈 기억 때문인 걸로 보인다. 19일, 당 조정은 설숭을 상·위·형·명·자 6주 절도사로 삼고, 전승사를 위·박·덕·창·영 5주 도방어사로 삼았으며, 이회선은 유주·노룡 절도사로 임명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조의가 임명했던 연나라의 번진의 이름을 바꾼 셈이므로 이는 이들이 항복하기 전에 절도사로서 지배하던 지역을 거의 그대로 인정한 것이었다. 거기다 이들의 항복을 받은 복고회은도 이들이 재반란을 일으킬 경우 반란을 평정한 자신의 공로가 퇴색할 것을 우려해 이들의 통치권을 인정해줄 것을 당에 요청함과 동시에 스스로 이들의 후원세력으로서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번진 병사들이 절도사를 제멋대로 세우는 관행도 꾸준히 이어졌는데, 산남동도절도사 내진이 비명에 간 후 그 휘하의 제장이었던 행군사마 방충이 군을 움직여 양주를 습격하는 등 도적화할 모습을 보이자 좌병마사 이소와 부사 설남양이 군을 이끌고 이를 막았다. 그런데 휘하 병사들이 우병마사 양숭의를 지휘관으로 추대한 후 이소와 설남양까지 죽여버리고 말았다. 이는 반역이지만 당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진압은 커녕 손을 쓸 수도 없었으며, 결국 양숭의를 양주자사·산남동도 절도유후로 사후임명하고 말았다. 4월 27일, 이광필이 '원조를 사로잡고 절동을 모두 평정하였다'는 주문을 올렸다.

5월 25일, 당 조정은 하북의 여러 주들을 나누어주었다. 유주·막주·규주·단주·평주·계주는 유주에서 관장하여 노룡절도사로 삼고, 항주·정주·조주·심주·역주는 성덕군에서 관장하여 성덕절도사로 삼았으며, 상주·패주·형주·명주는 상주에서 관장하여 상위절도사로 삼고, 위주·박주·덕주는 위주에서 관장해 천웅군절도사로 삼았으며, 창주·체주·기주·영주는 평로번진에 더하여주고[13] 회주·위주·하양은 택로번진에 더하여 주었다. 이를 통해 하북의 모든 지역은 절도사들이 관장하게 되었으며, 이는 여타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 763년 7월에는 연호를 '광덕'으로 고쳤으며, '보응원성문무효'라는 존호를 받았다.

4.1.2. 위구르의 전횡과 새로운 불씨

이 당시 위구르의 기세는 매우 강성했고, 당을 상당히 우습게 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정월 5일 밤에 위구르인 15명이 황궁으로 돌진해 들어오자 문지기들이 감히 막지 못한 일까지 벌어질 정도였고, 위구르군이 주둔했던 지역은 너무 심하게 약탈당해 조세 징수를 면제해 줘야 할 정도였다. 이에 당은 빨리 위구르를 북방으로 돌려보내고자 노력했고, 가한(카간)과 가둔(카툰)을 높이고 휘하 장수들 또한 왕과 국공으로 봉함과 동시에 20,000호에 달하는 실봉을 덧붙여 주는 등 크게 후사하여 만족한 위구르로 하여금 돌아가게끔 했다.

그러나 위구르는 귀환하면서도 약탈을 자행했고, 그들이 지나가는 지역의 절도사들은 이런 애꿎은 피해를 막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때마침 진정·택로 절도사인 이포옥이 어떻게 해서든 위구르의 만행을 억제하려 시도하자 조성의 현위였던 마수가 자원하여 나아가 위구르군 지휘관과 대화하여 위구르군에 대한 군령권을 일시적으로 획득해 이를 통해 약탈을 억제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당덕종 시대 당나라를 지켜낸 세 대장이라 일컬어지는 이성, 마수, 혼감 중 한 명인 마수가 본격적으로 주목받는 사건이었다.

위구르가 당을 무시한 것, 그리고 지독한 약탈을 자행한 것은 또다른 불씨를 낳았다. 위구르와 가까운 사이이자 전쟁 종결의 최대 공로자 중 한 명인 복고회은이 다른 마음이 있다고 의심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마수 또한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면서 이포옥에게
"복고회은은 공로를 세운 것을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며 그 아들인 복고창은 용감한 짓을 좋아하고 가벼운데, 지금 안으로 네 명의 장수[14]를 세워놓고 밖으로는 위구르와 왕래하니, 반드시 하동과 택로를 넘볼 뜻을 가지고 있다."
며 경고했으며, 하동절도사 신운경 또한 복고회은이 위구르를 전송하기 위해 태원으로 왔을 때 문을 열어주지 않기도 했다. 이에 복고회은은 불만을 가지고, 또한 토사구팽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복고회은의 난이 일어나는 하나의 큰 원인이 되었다.

4.2. 이어지는 전란(763~765)

사사명의 난까지 종결되면서 대란은 종식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이은 두 번의 대규모 전란, 즉 토번의 장안 침략과 복고회은의 난이 몰아닥쳤고, 이 모든 전란이 끝나는 건 사조의가 죽은 뒤 2년 후인 765년이었다. 다만 이 두 큰 사건은 결국 안사의 난과 연관되어 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안사의 난 기간 동안 강성해진 토번과 약해진 당의 현실을 보여주고, 또한 절도사들이 당의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사건이 토번의 장안 침략이며, 안사의 난의 최고 공로자가 반란의 주동자가 되고, 당-토번-위구르가 서로 물고 물리는 삼각관계를 형성함을 보여주는 것이 복고회은의 난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안녹산의 봉기로 시작된 전란이 거의 쉼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이곳에 기술한다.

덤으로, 이 두 사건을 통해 곽자의는 그 위상이 하늘을 뒤덮었다 할정도로 절정에 다다랐고, 반대로 복고회은은 결국 반역자로 몰락해 사망했으며, 이광필은 그 중간 정도의 위치에서 일찍 죽는다. 이 세 인물이 안사의 난을 통해 군왕까지 오른 최고 공로자로 꼽힌다는 걸 생각하면 참 명암이 갈린 운명이 아닐 수 없다.

4.2.1. 토번장안 침략

당이 안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한참 정신없던 동안 토번은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토번이 장안을 점령하고, 노략질한 사건이다. 가르친링 사후의 토번사를 살짝 보면, 토번은 안사의 난 이전까지는 당에게 조금씩 밀리고 있었던 상황이라 볼 수 있다. 당 현종 개원 연간에 이루어진 절도사체제로의 군제개혁과 그로 인한 군사력의 강화는 오랫동안 토번을 압박했으며, 청해성 전역, 운남성 일대, 사천성 북서부의 요충지가 당에게로 넘어가고, 고선지의 활약으로 인해 서역도 대거 상실하는 등 토번의 입장에서 본다면 상당히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안사의 난이 일어나면서 이러한 구도는 역전된다. 하서와 농우의 정예 부대가 동쪽으로 이동하자 토번은 여러 요충지를 수복했을 뿐만 아니라 꾸준히 당을 공격해 기여코 광덕 원년(763년) 대진관으로 들어와 하서와 농우의 모든 당의 영토를 점령하고 말았다. 비록 난주를 통해 가느다란 선이 이어져 있기도 하나, 이는 위구르의 호의에 통행 여부가 갈리는 길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절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하서, 농우는 오랫동안 북방 유목민족들과 토번을 맞상대하는 최전선이자 매우 중시되는 지역으로, 천보 연간의 10개 절도사들 중 2개가 이 지역 방위를 위해 존재하며 거진 15만명에 육박하는 병력이 배치될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 당은 이 지역에 수십 개 주에 달하는 행정체계를 구축하기까지 하면서 중시했었으나, 그 모든 지역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하서와 농우의 상실은 곧 중앙아시아에 설치되었던 당의 군현과 절도, 즉 안서와 북정의 고립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 지역은 하서와 농우를 통해 당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서와 농우의 상실로 인해 위구르, 토번 양대 세력 사이에 섬처럼 고립된 것이다.

당 숙종은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막대한 양의 선물[15]을 토번에게 주어 침략을 막으려 했으나 토번은 후에 전승비에 기록하기를 '재물과 땅을 매년 바치기로 했다'고 하면서 지속적으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거기다 당 대종이 즉위하면서 선물을 주는 것을 중지하자 토번은 이것을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 이러한 토번의 대대적인 침략은 하서와 농우를 모두 장악한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하서, 농우의 침탈과 동시에 검남{지금의 쓰촨성(사천)}지역에도 계속 공세를 가해 성도 근방까지 침탈해 들어온 것이다. 거기다 상시적으로 주던 선물(토번 입장에선 조공)을 당 대종이 거부하자 토번은 20만 병력을 동원해 관중 그리고 장안을 향해 침공했다.

763년 10월 1일, 전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기, 토번은 장안 서쪽의 경주(涇州, 감숙성 경천현)를 점령한 후 그대로 서진해서[16] 10월 2일엔 봉천과 무공까지 진격했다. 장안과 무공의 거리는 100km 미만. 그러나 당대에 정국을 좌지우지하던 정원진은 변방에서 날라온 급보를 계속 가로막았고, 결국 당 조정이 이를 파악한 것은 무공이 점거당한 이후였다.

사실 토번의 장안 공격은 절묘한 빈집털이라고 할 수밖엔 없는데, 당시 당은 사조의의 난 진압과 사후 처리를 위해 금군의 주력이 신책관군용사(神策觀軍容使) 어조은의 지휘하에 하북에 있었다. 당의 다른 군대도 마찬가지여서 사실상 장안 주변에는 관군이 없었다. 이 때문에 당 조정은 각지의 절도사들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대의 권신으로 정국을 농락하던 정원진이 하도 절도사들의 원망을 많이 사서 심지어는 복고회은과 이광필마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당나라 수도 장안은 토번에게 함락당했다. 곽자의가 분투하지 않았다면 당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토번의 장안 침략시에 분투한 곽자의의 활약은 곽자의 문서에 수록. 여기서는 토번이 10월 9일 장안에 입성했으며, 허수아비 황제까지 세웠다가 10월 21일 곽자의의 활약에 의해 장안을 떠났다는 사실만을 기록한다.

이후 당 조정 내에서는 이런 사태를 불러온 정원진을 문책하기 시작했다. 조정 내에서도 충용스러운 절도사들마저 움직이지 않은 것은 모든 이가 정원진을 원망했기 때문이라는 걸 파악하고 있었으며, 태상박사 유향은
정원진을 처형하고 모든 환관들을 조정에서 내보내며, 신책병들의 지휘권은 대신들에게 붙이고 스스로 존호를 깎아 책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만약 그래도 군대가 이르지 않다면 내가 능지형을 받아 폐하께 사죄하겠다
는 요지의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다. 결국 11월 2일, 당대종은 정원진의 관직을 삭탈하고[17] 고향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로 인해 환관에 대한 배척 분위기가 짙어지자 환관이었던 광주시박사 여태일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기도 했다. 이후 정원진은 어떻게 해서든 복귀해보려고 몰래 여장을 하며 장안에서 로비하다가 걸려서 강릉으로 유배된 후 사라졌다.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당 조정 내에서 절도사들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리 사정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자의적인 판단 내지는 감정에 따라 수도인 장안이 공격받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반역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복고회은은 이전에 의심받은 일에 더해 이때 움직이지 않음으로 인해 사실상 반란의 길로 내몰리게 된다.

4.2.2. 복고회은의 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복고회은의 난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 의의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난은 그 당시 당나라의 내•외적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 할 만하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이전까지의 당은 그래도 토번과 돌궐의 협공을 어찌저찌 버텨가며 국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당현종 집권시기만 해도 성공적인 방어와 그 사이 틈틈이 행한 군제개혁으로 돌궐 제2제국의 멸망과 토번의 쇠락을 일으킨 희대의 역공을 성공시키기도 했으며, 방해꾼을 없앰으로서 실크로드 일대의 각국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을 정도의 강국이었다.[18]

문제는 이 전쟁들이 너무 장기간 동안 쉬지않고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의 중앙집권제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전란 자체의 피해도 막심한 상태에서 절도사들이 반 독립국화해버리기까지 하면서 당의 전력은 말그대로 반토막이 났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면 적어도 토번과 돌궐 제2제국 양대 세력을 상대로도 방어하는 덴 문제없었던 당 현종 이전까지보다도 못 할 정도로 토번이나 위구르 둘 중 하나 막는 데만도 절도사의 지원이 없다면 힘들어할 정도였다. 특히 다시금 세력을 키운 토번을 막기 위해 당나라는 위구르, 남조, 아바스 칼리파조 등을 전부 끌여들여 대포위망을 만들었는데, 이는 언뜻보면 아직 당나라의 외교력이 강대하단 의미도 있지만 그 외교력에 의지하지 않는 한 당나라로선 토번을 감당하지 못한단 뜻이 된다. 즉 중앙아시아 최강국이라 불리던 당나라의 이미지가 무너지게 된 것.

이후 당나라의 외교는 어쩔 수 없이 절도사들의 비위를 최대한 맞추며 통제하는 한편 다른 국가들과 외교를 통해 최대한 전쟁을 벌이지 않고 세력을 보존하고 겨우겨우 보존하는 세력으로 당에 반발하는 세력에 맞서는 방법으로 고착화되었다. 그나마 이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전쟁은 몰라도 중소규모의 전쟁이 계속 벌어졌을 정도로 주변국에게 만만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5.1. 대내적인 영향

안사의 난이 당나라 내에 미친 가장 핵심적인 영향은 율령제의 파괴와 지방통제력의 약화다. 율령제가 무너지자 순차적으로 당의 재정도 매우 빈약해졌다. 균전제, 부병제, 조용조라는 제도적 뒷받침을 받는 율령제는 그 세 가지가 모두 무너져 내리면서 형식적인 것으로 전략했고, 급격한 인구 감소와 기존의 토지대장 및 호적부의 손실에 이어 절도사들의 득세가 이어지면서 이들이 사실상 독립정부를 꾸리다시피 한데다가 상술한 내란으로 재정이 빈곤해진 것까지 겹쳐서 당나라의 재정은 매우 위태로운 상태였다.

당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조용조 대신 양세법을 도입하고 소금 전매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전란에서 자유로웠던 강남(중국)에 전적으로 의지했는데, 결국 이는 강남의 백성들을 어떻게든 더 짜내서 부족한 재정을 회복시키자는 방침인지라 백성들의 반발이 심했고, 이는 이후 당이 망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거기에 자충수에 가깝더라도 완화의 여지라도 있었던 자금사정과 달리 지방통제력의 약화는 당에게 매우 치명적이었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전, '천보 10절도사'라 칭해지던 10명의 절도사들은 강력한 군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권에 비하면 그 통치영역이 매우 협소한 편이었다. 당장 4개 절수를 동시에 역임하고 27만명이라는 대군의 통솔권을 가짐으로서 당나라 역사상 장수로서는 곽자의와 비견될 정도로 군권을 휘둘렀던 왕충사가 직접적으로 통치 가능하던 주가 15개밖에 안 됐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절도사 하나당 평균 3~4개가량의 주만 관리할 수 있었던 셈.

그에 비해 안사의 대란 이후 득세한 내지번진은 지방의 통솔력이 매우 컸다. 덩치가 큰 번진의 경우, 아예 번진 하나가 7, 8개 주를 지배한 것은 예사요. 평로치청번진, 노룡번진, 산남동도번진처럼 10개 이상의 주를 지배한 사실상 독립국가에 가까운 거대 번진도 다수 실재했다. 내지번진이 득세하며 조정은 수도 장안과 그 인근을 제외하면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이 즈음엔 내지번진에 의해 나라가 유지되는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이들은 상술했듯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조세와 호수를 조정에 신고하지 않고 자신들 선에서 통제하였으며 원화중흥 이전까지 당나라의 중앙정부에 조세와 호적을 바치지 않고 단지 명목상으로만 충성하면서 독립세력화한 절도사들의 지배영역은 당시 당나라 강역 전체의 절반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다가 중앙정부와 분진간의 대립은 이들 선에서 멈추지 않고 자연스레 외부 세력의 포섭까지 영향을 끼쳤고 당연히 그 외부 세력의 대표격이던 토번과 위구르를 포함한 다수의 이민족들이 중간과정에서 막대한 이득을 받았으며 발해와 신라 또한 이 당시에 당의 요청에 따라 대규모로 군대를 파견한 적이 있다

'원화중흥'을 이룩한 여러 재정개혁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세율을 통해 백성들을 쥐어짜고, 이를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강대한 금군을 편성한 것인데, 이런 식의 수탈이 일어난 이유 또한 번진의 난립으로, 절반밖에 남지 않은 영토에서 나머지 절반을 장악한 절도사들을 제압하고 외적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환관들의 군권 장악 또한 이때부터 이루어졌다.이보국, 정원진, 어조은 등 이 시기에 권세를 누린 환관들은 모두 군권과 군 인사권을 움켜쥐고 있었으며, 이때문에 황제도 이들을 함부로 제거하지 못했고, 심지어 상황이 된 당현종이 유폐된 상태로 죽어가는 것도 따지지 못했을 정도로 황권이 실추했다. 당대종이 어조은을 숙청하는데 성공한 이후 금군의 지휘권을 회수했지만 이는 이미 전례가 되었으며, 장군들을 불신한 당헌종이 다시 환관에게 군권을 부여하면서 환관들의 천하가 시작된다. 이들은 중앙에서 각종 부정부패를 자행했으며, 안 그래도 고세율이었던 당 중후기의 조세정책은 부정부패와 가렴주구에 의해 심하게 망가져 그 부담은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결국 절도사들의 난립, 이들을 제압하기 위한 고세율과 소금 전매, 환관들의 전횡과 그로 인한 부정부패가 세트로 겹치면서 당을 멸망시키는 대반란, 황소의 난이 일어난다.

다만 실제로 이 시기에 존재하는 당나라 견문록이라든가 여행기 같은 걸 보면 번진들이 난립하여 서로 치고받고 싸우거나, 그걸 제압하기 위해 고세율의 수취제도를 구축한다고 해서 무슨 생지옥이 펼쳐지거나 한 건 아닌 모양이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는 시기를 전후로 해서는 몰락한 민생과 그로 인한 농민봉기가 나타나지만, 번진 난립시기나 이를 평정한 원화중흥 초반에는 이런 일이 드물었으며, 그 이전의 번진 난립기에도 어느 정도 질서가 성립한 후에는 그럭저럭 살아갔던 듯 싶다.[19] 한편, 문화적으로는 당나라가 왕조의 특징이었던 북방민족 특유의 국제성과 개방성을 상실해 가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전까지 당은 매우 개방적인 사회여서, 당현종 붕어시에 당에서 관리로 일하던 이민족들이 수백명에 달할 정도였고, 당현종이 장안에서 파천할 때 태자를 분조로 보내면서 '서북 사람들에게 잘 해 줬으니 그들을 힘으로 쓸 수 있을 것'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인종 차별이 적고 개방적인 사회였다.

그러나 반란이 지속되면서 이러한 개방성은 차츰 사라져 갔고, 문화적으로도 개방적이고 국제적이던 것이 차츰 폐쇄적으로 변해갔다. 처음에는 한유, 이고 등의 고문파들이 등장해 불교를 비판했고, 845년 당무종의 회창폐불로 상징되는 대대적인 불교 탄압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해 교종 불교는 쇠퇴하고, 대신 선종 불교가 이 공백을 메우며 남송 시대 성리학의 완성 이전까지 중국 사상계를 이끌게 된다. 경교(네스토리우스교)도 마찬가지로, 원화중흥 이전에는 대진경교중국유행비가 세워지는 등 그 세가 강성해지기도 했으나, 845년에는 폐불정책 때 덤으로 같이 탄압당해 사실상 중국에서 소멸했다. 명교(마니교)와 현교(조로아스터교)도 불똥을 피하지 못했다.

그나마 상업은 쇠퇴하지 않고 북송으로 이어졌다. 황소의 난 당시 남쪽 광주에서 황소군에 의해 살해된 회회인(아랍인)의 수가 거의 10만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그러나 이런 장거리 무역 또한 점차 약해지고 신라 등과의 근해 교역이 이를 대체하게 된다. 한국사에서 신라방청해진이 한참 전성기를 맞던 시기가 당과 신라의 전성기였던 8세기 초가 아닌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초까지였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발해도 내지는 엔닌의 중국 여행과 법화원의 건립과 같은 일이 이때에 일어난 것이다.

5.2. 대외적인 영향

당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중앙아시아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민족을 누르고 있다는 것과 이를 토대로 중앙아시아만이 아닌 서역까지 외교나 무역을 진출할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런 만큼 서역을 포함해 주변국에 그 강성함을 알릴 수도 있던 만큼 중요한 부분이었으나 안사의 난을 거친 이후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당현종 시기에 당은 돌궐 제2제국을 붕괴시키고 토번에 대해 우세를 점하며 실크로드 각국의 통제권을 거머쥐는 등 중앙아시아 국제정세 측면에서 주도국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시기 위구르는 아직 통일 유목제국으로 성장하지도 못했다. 탈라스 전투의 패전 이후 아바스 왕조에 살짝 밀리긴 했으나 이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여전히 상당수 서역 국가들은 당의 통제를 받았다.[20][21]

그러나, 안사의 난을 통해 당은 완전히 주도권을 박탈당한다. 당이 대규모 내란을 겪는 사이 위구르는 통일 유목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고, 토번은 아예 서역 각국을 아우르며 중앙아시아의 패자가 되었다.[22] 내란의 뒷처리도 끝나지 못한 데다가 절도사가 반쯤 독립한 상황이라 당의 중앙정부는 저런 정세를 알고도 별다른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나마 토번에 의해[23] 안서, 북정 지역이 고립되자 이를 어떻게 뚫어보려 했으나 대패하고 물러갔다.

결국 당은 차선책으로 위구르, 남조, 아바스 칼리파조를 싸그리 끌어들여 대 토번 포위망을 구축해 토번을 억제하는 동시에 곽자의, 이성, 마수, 혼감 등의 명장의 활약으로 토번의 동쪽 침탈을 막는 것이 한계였다. 그나마 위구르는 역병으로, 토번은 내부 정쟁으로 스스로 무너져가느라 숨통이 트이나 하자마자 바로 남조가 세를 확장하는 바람에(...) 당은 여전히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후 토번이 약화되고 사주(돈황)의 호족 장의조가 사주 일대의 토번군을 몰아내고 량주를 제외한 하서 일대를 당에 바치나[24], 하서 일대는 사실상의 독립 군벌화가 되고 만다. 결국 이렇게 상실한 지배권은 송대까지 회복할 수 없었고 청의 준가르 원정까지 역대 중국 왕조가 서역에 진출할 수 없었다 .

아이러니하게도 당의 이런 혼란과는 반비례로 한반도의 국가들은 나름 이득을 챙겼는데, 이 당시 발해군왕으로 취급받던 문왕은 혼란을 틈타 한 단계 높은 관등인 '발해국왕'의 칭호를 정식적으로 하사받고,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발해를 전성기로 이끌었으며, 당의 중앙정부도 충성적인 발해를 포섭해 하북지역의 번진을 견제하고자 발해를 우대했다. 신라는 혜공왕이 들어서며 자체적으로 말기 증세를 나타내 발해만큼의 이득은 보지 못했지만 기록상 토번과 동급인 최상위의 대우를 받았으며, 많은 유학생을 당으로 보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이 흐지부지 된 시점에서 이미 충분한 이득을 누렸다.[25]

6. 그 외

이 시기에는 바로 전 '개원의 치' 시대까지 이름을 날리던 문필가들 또한 살아있을 때라, 당의 문학 작품을 공부하면 이 시기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다. 미(美)이론이 크게 바뀌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예술 창조의 원동력에 대한 인식이 유가와 굴원에 바탕을 둔 희로애락의 발동, 발분(發憤), 동태(動態)에서 불교와 도가를 바탕으로 한 정(靜), 허정(虛靜), 무아지경으로 바뀌게 되었다.

두보는 장안이 점령되고 고향에 갈 수 없자 그리운 심정을 노래한 <춘망>을 지었다. 또 그의 시 <강남봉이구년>에서 당의 중흥기와 기왕 이범이 이구년을 매일같이 불러 놀던 시절, 그리고 안사의 난으로 망가진 나라와 늙어버린 두보 / 이구년이 만난 시절이 일치함을 생각하면 세월무상을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두보의 중장년(56세에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말년이다) 시절 작품의 거의 다수에 안사의 난속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의 모습이 처절하게 그려져 있는데, 심지어 두보의 막내자식도 이 시기에 굶어죽었고, 그 슬픔이 시에 절절히 나타나 있다.

이태백의 경우, 안사의 난 사이에 일어났던 영왕 이린의 난에 가담했다가 귀양가서 죽을 뻔했지만 곽자의의 요청으로 간신히 용서받은 바 있으며, 왕유는 이때 장안에 머무르다 안녹산의 반란군에 붙들려 낙양으로 끌려가 협박에 못 이겨 안녹산의 치하에서 관직을 맡았고, 이 일이 문제가 되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가 동생의 도움으로 살아났는데, 이때의 경험을 통해 인간 사회에 대한 환멸을 처절하게 느끼고, 불교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한유의 작품 또한 이 혼란기를 그린 사례가 존재한다. 한편 이 시대 사람은 아니지만 백거이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피란을 <장한가>로 노래했다.

지방 세력을 끌어들인 국가 중앙 세력의 반란, 그리고 그로 인한 혼란으로 비롯된 1세기 뒤쯤의 군벌 난립 등은 같은 시대를 보내던 신라와 무섭도록 일치한다. 반면 발해의 경우, 이 시기 문왕 대흠무의 통치 아래 전성기를 맞고 있었으나, 상경과 동경으로의 천도가 안사의 난으로 인한 혼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 또한 존재한다.

7. 대중매체

전설적 로맨스를 자랑하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안사의 난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데, 다만 사극 《양귀비비사》《대당부용원》, 영화 《요묘전》, 1990년대 CCTV 사극 《당명황》에서는 난리를 피하여 도망가다 양귀비가 죽거나 일본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끝을 맺기에 사망 배경으로 잠깐 나온다. 다만 2017년 국내에 소개된 사극 《대당영요》는 기본적으로 삼각관계 로맨스 사극이지만, 안녹산의 난사사명의 난 등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거의 직전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안녹산의 난이 종결되고 드라마가 끝을 맺는 데다가 궁정암투물이라 실제 역사를 따라가면서 스토리가 전개되기에, 전반적으로 전란의 진행과정을 보고 싶으면 추천하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대당영요(大唐荣耀): 사라진 황후》는 중국의 당나라 안사의 난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중국 문화의 황금기, 대당제국의 역사 이야기로 2017년 4월 중국 BTV, 한국 아시아N 에서 방영 되었으며 경첨, 임가륜, 진준걸 주연으로 나왔다. 당현종을 배경으로 하여 안사의 난과 당숙종, 당대종의 즉위까지를 다뤘다. 대당영요:사라진 황후
[1] 다만 후술되는 내용을 보면 알듯이 약간만 잘못되었어도 패배했을 정도로 여러모로 상황이 처참했다. 애초에 안사의 난은 종합적으로 따져봤을 때 당군의 분전으로 이겼다기보단 반란군측의 결속력의 부족함이 원인이 되어 자괴한 것이 컸다.[2] 본 문서에 나와있는 안사의 난 종료 이후 사건인 토번 제국의 장안 침략과 복고회은의 난은 나와있지 않다. 또한 해안선의 모양이 현재와는 조금 다른데, 이유는 황하 문서 참조.[3] 《전쟁의 역사를 통해 배우는 지정학》에서는 안사의 난으로 인한 사망자를 약 3,600만 명으로 추정하며, 1, 2, 3위인 중일전쟁, 마오쩌둥 시대(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 몽골 제국의 정복에 이은 4위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의 인구를 감안했을 때 이러한 수치는 터무니없다고 여겨지며, 정작 3,600만 명이라 추정한 학자 역시 후에 1,300만 명으로 대폭 줄여 수정하기도 했다. 확실한 건 근대의 태평천국 운동으로 인한 사망자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 대비 사망자 수는 1위라고 여겨지기도 한다.[4] 이는 당 중기의 학자인 두우가 《통전》에서 주장한 수치였다. 실제 호구수를 1,300~1,400만 호라고 기술했다. 출처는 《중국의 역사 - 수당오대》.구리하라 마쓰오 외 지음[5] 다만 장거정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바로 제자인 만력제를 가혹하게 괴롭히고 도덕적인 삶을 강요하면서 정작 본인은 부패에 찌들었던 것이다. 결국 1582년 장거정이 사망하자 만력제의 분노를 사 명예를 잃게 된 것이다.[6] 안녹산이 당나라에서 가장 두려워한 사람이 이임보였으며, 이임보 앞에선 땀을 뻘뻘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임보 문서에도 있듯이 이 사태의 원인을 만든 것이 바로 이임보였다.[7] 南詔, 지금의 윈난 성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국가. 대리국의 전신[8] 사실 비관롱계열 관료들 입장에선 양국충이 의도야 어쨌든 관롱계열 관료들의 힘을 눌러준 덕분에 자신들의 출세가 어느정도 편해진게 있기 때문에 이러나저러나 은혜받은 입장에서라도 함부로 적대할 순 없었다.[9] 당현종은 천보 3년부터 년(年) 대신 재(載: 실을 재)를 쓰게 했다.[10] 안녹산의 혈족으로 안녹산과 가까운 사이였다.[11] 고선지가 가장 신임하던 부하로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 패전 책임을 지고 안서절도사 직에서 물러나면서 봉상청에게 직을 넘긴 것이다.[12] 1월은 1월인데, 중국 사서에서는 음력을 쓰다보니 윤달이다.[13] 이로써 평로치청번진은 총 10개의 주를 관장하게 되었다.[14] 설숭(상위절도사), 전승사(천웅군절도사), 이회선(노룡절도사), 이보신(성덕절도사)[15] 매년 비단 50,000필. 토번의 기록에는 조공으로 기록된다.[16] 경주자사 고휘가 향도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17] 그래도 이전에 이보국을 도와 당대종을 세우는 데 공이 있었다 하여 죽이지는 않았다.[18] 굳이 따지면 이 과정에서 발해와 사이가 좀 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발해가 세워진지 얼마 되지않은 국가라 당나라와 대놓고 틀어질 순 없는 입장이었고, 문왕 대흠무 재위시기엔 당나라가 발해를 인정해주는 대신 발해 또한 친당적인 색채를 띄었다.[19] '혼란스럽기는 해도 의외로 살 만했던 분위기'는 5대10국시대까지도 쭉 이어지는데, 절도사들이 자기 나와바리를 지키려다 보니 생각보다 어느정도 사람 살 만하게 통치를 하긴 했던 측면도 있다. 황소의 난 때 황소가 여기저기 도망다니다 장안을 점령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인데, 절도사들이 잘 지키고 있는 동네보다 장안이 여러모로 점령하기도 훨씬 만만하고 통치자에 대해 인심도 사나웠었기 때문이다.[20] 고선지의 후임 안서절도사 봉상청이 대발률국을 정복하고 서돌궐의 십성 지역을 탈환하였으며, 서역 국가들이 당에 조공했다.[21]자치통감》에는 서역에 미치는 당의 영향력이 막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2] 토번은 안사지란을 틈타, 하서와 농우 일대를 정복했다.[23] 781년 토번의 상치싱얼이 돈황을 점령함으로써 안서와 북정은 당과 연락이 끊겼다.[24] 량주는 나중에 장의조가 수복[25] 원래 일본은 발해의 협조를 얻어 위아래로 신라를 침공하려 했으나 애초에 발해 입장에선 신라 침공이 계륵이나 다름없어 딱히 흥미를 가지지 않은 상황에서 안사의 난까지 벌어져 북방 국경 지대가 불안정해지자 무난하게 지내던 신라보다는 북방 측에 전력을 집중하느라 남쪽에서 아예 신경을 껐으며 일본도 발해의 이런 사정을 파악하고 단독으로는 신라를 상대하기 어렵다 여겨 결국 침공 계획을 파기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