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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번진(藩鎭, 蕃鎭), 혹은 줄여서 번(藩,蕃)이라고 한다.[1] 당나라의 군진으로 중당에서부터 북송 때까지 있었던 군영이자 반독립 군벌세력. 번진의 총수에 관해서는 절도사 문서로.2. 번진과 절도사의 등장
한 개 진이 많아도 1천명을 넘기지 못했던 진수제에 반해 군진제하에서의 각각의 군진은 최대 1만여 이상에 달하는 강대한 방위부대들이었다. 그러나, 당이 직면한 방위압력은 이것으로도 막아내기 쉽지 않았다. 초당 이래 부병제의 붕괴와 기미체제의 실패로 당 주변의 민족들이 중흥하면서 당 중기의 주적이라 할만한 토번이나 돌궐 모두 한 정면에 십여만 이상을 투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며, 발해나 거란 등도 당과 싸울 때면 수만 이상의 대군을 투입하곤 했다. 이런 강대한 외적들의 침공을 1만단위 단위부대가 막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그렇기에 나온 것이 '번진' 이다. 즉 여러 군진을 하나로 묶어서 '번진'으로 칭하고, 그것을 지휘하는 직책인 절도사가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절도사는 당예종 시기부터 등장했으며, 설인귀의 아들인 설눌이 첫 절도사로서 그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절도사는 율령제의 예외적 관직이었다. 이는 당의 율령제가 수의 그것을 대부분 이어받았으며, 수나라가 시행한 군제개혁의 핵심이 군령과 군정, 지방행정의 분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에 역행하는 절도사가 율령제와 맞지 않는 관직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인 필요에 따른 것이었으며, 천보연간의 10 절도사들의 창설 시기는 모두 해당 지역의 군사적 압박이 심화되었을 때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면 절도사직의 창설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절도사들은 평시에는 해당 지역의 군진들을 총괄 관리 감독하고, 전시에는 자의적으로 이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섰으며,[2] 군진들이 존재하는 여러 주의 지방행정관으로써[3] 지방행정을 살피고, 또한 단련사직까지 겸하여 지방행정 및 후방의 단련병들의 통솔권도 가지고 있었다.[4] 거기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제한적이나마 외적에 대해 약간의 외교권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군사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고는 하나 그 힘은 거의 해당지역의 군주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안사의 난을 시작으로 이러한 절도사직이 내지에도 설치되면서 관할하는 주의 영역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변경지역의 경우 보통은 두세개 주의 변경만을 관할했었으나 내지화되면서 그 관할 영역은 십여개 주 이상 되는 절도사들마저 종종 생겨난다. 이를 구분하여 변경번진과 내지번진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3. 번진의 구조
3.1. 통치구조
일례로 대표적인 내지절도사였던 이보신(성덕절도사)은 실질적으로는 성덕군절도항정등주관찰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고, 항주자사를 겸임했다. 이 직함은 크게 삼등분된다.- 성덕군절도 - 이는 성덕군 번진의 절도사로서, 해당 지역의 군권을 다루는 직책이다.
- 항정등주관찰사 - 관찰사직은 당태종 이래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되여 여러 주를 감찰하는 직책. 이것이 차츰 광역행정단위로 성장하였다. 현종 시기에는 채방사라 불렸으나 당숙종이 관찰사로 명칭변경. 해당 지역의 민정을 관장하는 직책이 되었다. '항정등주'라 함은 항주, 정주 등을 포함하는 여러개의 주를 의미한다.
- 항주자사 - 가장 중요한 주로 판단된 항주의 직접적인 민정권을 가진다. 이렇게 번진의 중추가 된 주를 회부(會府), 그렇지 않은 주를 지군(支郡)이라고 부른다.
이를 통해 당의 지방지배체제는 중앙->주->현에서 중앙->번진->주->현의 형태로 바뀌었다. 이렇게 사이에 끼어든 번진은 두개의 지배기관을 통해 실질적으로 지방을 통치했다. 하나는 기존의 지배기관인 '주원(州院)'으로, 핵심지역인 회부인 주의 통치를 맡은 기관이며, 여타 주를 관할하는 새로운 지배기관인 '사원(使院)'을 통해 지군에 속하는 주들을 통치했다. 주원은 절도사가 직접 담당하고, 사원은 '막직관'이라는 담당관이 존재했으며, 그 아래에 판관, 장서기 등의 문관과 행군사마, 참군(참모) 등의 무관직이 존재했다. 번진은 무력으로서 성립되는 집단이니만큼 무관이 문관보다 많은 편.
절도사는 이렇게 많은 관직을 겸임하였다.[5] 이렇게 겸임한 관직이 많았기에 휘하의 속관들 또한 방대하였다. 절도사들은 벽소[6]라는 제도를 이용해 마음에 맞는 인사를 속관으로 앉힐 수 있는 권리가 있었고, 절도사의 독립성은 점점 강해져갔다. 한 예로 최치원 역시 고병의 속관이었다.
이러한 행정체계는 보통 당의 체제를 그냥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으나, 평로치청번진처럼 독자적인 체계를 수립하는 경우도 있었다.
3.2. 군사 체계
이들 번진의 군사체계는 세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단련병, 관건, 아병이 그것이다.단련병은 위에서도 언급했듯 부병제의 붕괴 이후 지방의 치안유지를 담당하며, 또한 유사시의 예비병력으로 존재했다. 안사의 난 당시 당측이나 반란군측 모두 단련병을 적극적으로 병력에 편입시켜 병사들의 규모를 증대시켰으며, 그로인해 이들은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민병대' 에서 '유사시의 예비병력이 되어주는 군사체계' 로 변모했다. 그러나 이들은 기본적으로 촌락 자기방어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번진군대 내에서는 가장 비중이 떨어졌다.
관건병은 안사의 난 이전의 군진병이며, 모병제로 운용되는 상비군적 성격을 띠었다. 그만큼 정예한 군대였으며, 양세법 성립 후에는 양세를 통해 부양되었고 국가재정에 가장 큰 압박을 주었다. 이는 아예 조세 자체를 올려보내지 않고 당에 적대적이던 번진이든, 당에 순응하던 순지번진이든 할 것 없이 마찬가지로, 순지번진이라 하더라도 관건병의 군비를 제공하지 않으면 언제든 당에 반항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관건병은 아외군이라고도 불렸다.
아병(牙兵)은 절도사 개인의 사병집단으로, 가장 신뢰하던 군사력이였다. 그만큼 전투력도 강력했고, 대우도 잘 받았다. 이들의 시작은 안록산이 자신과 양부자관계를 유지하면서 확보했던 수만에 달하는 대규모 사병집단인 예락하이며, 이러한 절도사 개인과 사적으로 연루된 사병집단의 전통은 사사명을 거처 이들 내지번진들에게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아병은 곧 절도사 개인에게 위협이 되기도 하였는데, 마치 로마제국의 근위대가 로마 황제를 갈아치우는 것처럼 이들이 절도사를 갈아치우는 사례가 빈발하기도 하였다.
3.3. 평가
언뜻 보기에 절도사직은 안정적인 듯 보이나 실제로는 상당히 불안정했다. 절도사들은 자신의 신변보장을 친위대인 아병에 맡겼으나, 이 아병이 절도사들을 가장 많이 갈아치웠다는 점만 보더라도 이는 명백하다. 내지번진이 성립된 후 당이 멸망할때까지 150여년간 번진 내에서 일어난 병란의 수만 세도 거의 200여 회에 달한다.이들 번진의 병사들은 대대로 세습되었고, 견고한 단결력과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며 절도사들을 마음껏 갈아치웠다. 절도사들은 이들의 의지에 따라 정책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고, 절도사가 마음에 안들면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러나 또한 이들이 절도사 체계를 계속 유지하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스스로의 신변을 절도사의 신변과 동일시했으며, 절도사가 추방되거나 사망했을 때 이들은 곧 후임자를 옹립했다. 절도사들 자신도 스스로의 지위를 세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승사로부터 시작해 5대를 이어간 천웅군번진과 이정기에서 시작해 4대를 이어간 평로치청번진을 제외하면 제대로 성공한 번진은 극히 드물다.
이 때문에 이러한 절도사들은 당 조정의 허락을 받아 권위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으며, 절도사직을 인정받기 위해서 무력행사도 서슴지 않았다.
4. 절도사의 역사
4.1. 당현종 시기
당현종 시기는 절도사직이 등장한 시기이며, 가장 유명한 절도사직은 대부분 이때를 창설 시기로 한다. 보통 이때 절도사직이 10개 창설되었다고 하는데, 문헌에 따라서는 절도사직은 8개, 또는 9개이며 하나 또는 둘 정도는 절도사직보다 급이 낮은 경략사였다는 말도 있다.이들 10절도사직의 창설 시기와 병력은 문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는 상황에 따라 병력이동과 증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각각의 절도사들의 전력 구성과 임무, 창설시기, 안사의 난 당시 담당자는 다음과 같다.
- 안서절도사 - 710년 창설, 대서돌궐, 2만 4천 명, 말 2700필, 봉상청[7]
- 북정절도사 - 712년 창설, 대돌기시, 2만 명, 말 5천 필, 봉상청(북정도호)[8]
- 하서절도사 - 710년 창설, 돌궐과 토번의 연계 단절, 7만 3천 명, 말 7900필, 가서한[9]
- 삭방절도사 - 721년 창설, 대돌궐, 6만 4700명, 말 1만 3300필, 안사순(안록산의 혈족)
- 하동절도사 - 711년 창설, 대돌궐, 5만 5천 명, 말 1만 4800필, 안록산
- 범양절도사 - 713년 창설, 대거란, 해, 9만 1400명, 말 6500필, 안록산
- 평로절도사 - 719년 창설, 대말갈, 발해, 실위, 3만 7500명, 말 5500필, 안록산
- 농우절도사 - 713년 창설, 대토번, 7만 5천 명, 말 1만 필, 가서한
- 검남절도사 - 714년 창설, 대토번, 남조 3만 900명, 말 2천 필[10]
- 영남절도사(또는 경략사) - 711년 창설, 대이료(남만계), 1만 5400명, 말 0필
이 중 장성 밖에 안서, 북정, 평로번진이 존재했으며, 나머지 지역은 장성 안에 위치했다. 그러나 장성 안의 번진도 국경선쪽에 주로 위치해 있으며, 장성 외부지역까지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일종의 이중방어선으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 또한 이들의 지휘를 받는 병력이 거진 44만~47만에 달해 당의 군사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초기에는 장성 밖의 절수직(절도사)은 무관들을, 장성 안의 절수직은 문관들을 임명하였고, 특히 장성 내 절수직은 재상으로 오르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거치는 일종의 관직 코스에 가까웠다. 그러나, 천보 연간에 경쟁자의 등장을 반기지 않은 이림보에 의해 내지절도사, 즉 장성 안쪽의 절도사직에도 무관들을 기용하도록 변화하면서 장성 내 절수직에도 무관직이 임명되고, 이민족이 유달리 많았던 당나라 군대 특성상 이민족들이 이런 장성 내 절수직에 올라가기도 했다.
또한 당현종은 후에 '사해를 삼킬 뜻이 있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호전적이고 대외팽창적 정책기조를 취한 황제였다.그에 따라 지휘관 한 명이 다수의 절도사직[11]을 차지하는 사례가 급증했다. 유능해 보이는 장수 한 명에게 병력을 몰빵해준 것이다. 이런 사례 중 최초는 무려 4개 절수직을 혼자 아울렀던[12] 왕충사였고, 이후 가서한[13]과 안록산[14] 등 절도사직 겸직 사례가 여럿 나왔다.
이러한 절도사직 겸직은 당의 군사적 방위 필요성과 당현종의 야심으로 인한 것이었으며, 또한 동시에 절도사 임기(규정 2년)를 한참 넘겨가면서 관할 구역을 맡기는 사례가 증가한다. 이는 일개 개인의 손안에 해당 지역의 정치, 경제, 군사권한은 물론 정규군의 상당수를 임의로 무한정 맡기는 것이라 매우 위험하다. 아닌 게 아니라 결국 안사의 난이 촉발되는 최대의 원인이 되었다.
4.2. 당숙종~당헌종 시기
이 시기는 내지절도사의 등장과 번진할거 시대의 전반기에 해당한다.내지절도사는 안사의 난 시기에 등장한 것으로서, 시초는 756년 대운하의 변주(카이펑)에 세운 하남절도채방처치사이다. 안록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무관을 절도사로 임명해 진군로로 파견, 해당 지역의 단결병, 단련병들을 모아 군을 편성하여 안록산을 막게끔 하면서 시작되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절도사들은 채방사나 주자사 같은 지방 행정관직을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으며[15]그 결과 이러한 내지절도사의 파견은 곧 해당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군벌들의 양성을 초래했다. 이는 안록산, 사사명도 마찬가지여서 곳곳에 그들 자신이 임명한 절도사를 파견했다. 그리고 안사의 난이 종결되는 과정에서 난의 진압에 기운이 빠진 당 조정은 혼란을 빠르게 종결하기 위해 당에 귀순한 이러한 안록산, 사사명의 절도사들도 모두 그 영역을 인정해 주었다.
그 결과 변경지역 뿐만 아니라 전 국토에 번진이 들어차 버렸으며, 이 중 절반가량은 당이 명목상으로만 지배할 뿐 사실상 독립세력이나 마찬가지가 돼 버린다. 그 수는 40~50개. 넓디넓은 중국 전역에 40개 이상 반독립적 왕국이 세워진 것이다.[16] 주요 번진과 그 위치는 다음과 같다.
- 이보신의 성덕절도사 (항익번진)
- 이회선의 노룡절도사 (범양번진)
- 전승사의 천웅절도사 (위박번진)
- 이정기의 평로절도사 (치청번진)
- 이충신의 선무절도사 (변동번진)
- 이희열의 회서절도사 (채주번진)
- 장효충의 의무절도사, 횡해절도사 (역정번진, 창경번진)
이 중 가장 당에 반항적이었던 번진들로 하북삼진[17]과 평로번진측이 안사의 난 과정에서 해당지역 주민과 병사들을 청주로 이동하여 자리잡은 평로치청번진,[18] 호북지역에 위치한 산남동도번진, 여남지역에 위치한 회서번진이 손꼽히며, 선무군번진, 의무군번진, 황해군번진도[19] 가장 강성하여 사실상 독립왕국 행세를 했던 번진으로 꼽히곤 한다. 대략 산동, 하남의 상당지역, 하북의 대부분 지역에 위치한 번진들이다. 이 중 하북 삼진과 평로치정번진이 손을 잡고 당에게 절도사직의 부자세습 허락을 요구하면서 반기를 든 것이 사진의 난이며, 이시기에 또한 회서번진에서도 독자적으로 황제를 칭하며 당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당은 이에 대응해 진압에 나섰으나, 다른곳도 아닌 수도 장안에서 주차-이회광의 난이 동시에 터지고, 이후에도 토번의 팽창을 회흘(위구르) 등과 협력하여 막아서는 등 서쪽에서 장기간에 걸친 전쟁까지 벌어지는 바람에 사진의 요구를 인정하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짓는다. 물론 당나라 역시 번진할거에 대응하여 여러 차례 토벌과 번진 절도사 상호 간의 이이제이, 그리고 환관을 파견하여 군을 감독하는
4.3. 당헌종(원화중흥) 시기
당의 삼대 명군을 꼽는다면 당태종, 당현종과 함께 비중은 떨어지지만 당헌종(805~820)이 손꼽힌다. 당제국의 권위와 존속을 위협하던 이런 반항적인 번진들에 대한 토벌에 들어가 당덕종 시기에 실시한 양세법을 철저히 하여 국고를 채우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금군을 양성[20]하여 하북삼진과 평로치청번진을 토벌, 가장 반항적이고 강성하던 평로치청번진을 확실히 제압하고 하북삼진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일단락되는 듯 했다. 당헌종은 강력한 금군을 육성하여 모든 번진들을 제패하고 대부분 지역을 다시 당의 통제 하에 넣었다. 그렇기에 그의 통치는 '원화중흥' 이라는 칭송을 받았다.원화중흥을 상징하는 것은 807년 작성된 <원화국계부>와 813년 작성된 <원화군현도지>이다. <원화국계부> 당시에는 당의 명령에 불응하여 호구 수를 보고하지 않던 7개 번진이 7년 후에는 노룡번진과 평로치청번진을 제외하면 모두 호구 수를 보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평로치청번진이 초토회되는 819년 시점에서 당은 일시적으로 전 국토를 통제하였다. 이는 두 번에 걸친 번진제도개혁에 성공한 덕이었다.
이 시기 양세법으로 거두어 들인 조세는 현, 주 번진 등 각급 통치기관에서 먼저 경비를 떼고 남은 것을 직속 상급 통치기관으로 보내도록 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주에서는 유주(留州)라는 이름으로, 번진에서는 송사(送使)라는 이름으로 경비를 제하고, 조정에 올리는 상공(相供)은 그 나머지에 해당했다. 또한 양세법이 농민들에게 직접적인 과중한 부담이 되는 것을 완화하기 위해 처음에 양세법 도입 당시 당 조정은 상공물품(공물)의 가격을 시가보다 높게 책정했는데, 각각의 번진은 이를 이용해 자신에게 돌아오는 상공의 현물가격은 싸게 후려치고 상공물품의 가격은 높게 책정해 받으면서 차액을 착복하였다.
809년, 즉위 직후 절도사들의 반란을 몇 차례 진압하면서 자신감이 붙은 당헌종은 첫 번째 번진개혁에 들어갔다. 이는 양세법의 개혁과도 동일했다.
당헌종은 개혁을 통해 회부에서의 상공은 아예 면제하고, 대신 지군에서의 송사를 폐지해 각주의 필요경비인 유주를 제외한 모든 액수를 상공으로 했다. 이는 지군과 중앙의 관계를 강화하고 대신 지군과 회부의 관계를 약화시킨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러 주를 관할하는 대번진일수록 번진의 핵심 주였던 회부가 호수도 많고 부유했다고 해도 지군 전체에 비하면 그 영역도 적고 호수도 적은 경우가 보통이었기에 대번진들은 막대한 재정 손실을 입었고, 당 조정의 재정은 크게 확충되었다. 또한 상공의 현물가격을 시가에 맞춰 받음으로써 차액을 활용해 이득을 챙기던 것을 막는다. 이러한 개혁은 당 조정 측이 반항하는 번진을 토벌하던 토벌전을 시작하면서부터 행해졌고, 토벌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개혁 범위가 확대되었다.
819년, 번진 토벌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무렵 당헌종은 2차 개혁에 들어갔다. 이는 재정부분에 손을 댄 1차개혁과는 달리 번진의 핵심 유지기반인 군권에 손을 댄 것이었다.
당헌종은 2차 개혁을 통해 각 주의 장관들에게 해당지역의 관건병 및 단련병들의 지휘권을 주고, 절도사들에게는 직접적인 관할구역인 회부의 관건병, 단련병과 개인 사병인 아병의 지휘권만을 남겨 주었다. 이를 통해 절도사들은 군사력의 상당 부분을 빼앗겼다. 그리고, 절도사들이 관할하는 병력이 감소하면서 회부에서 거두는 세금만으로도 흑자가 나자 그 흑자 부분을 조정에 상공으로 바칠 것을 강요했다. 이는 지군이 군대를 직접 유지하게 되면서 조정으로 올려보내는 상공의 액수가 감소한 분량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당은 이러한 개혁 과정에서 상공의 액수를 줄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당 조정은 818년 절도사가 탁지영전사를 겸임하여 둔전 수입을 전용하거나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고 거기서 거둔 수입으로 번진을 운영하던 것을 중지시키고, 중앙에서 직접 관할하게 하였다.
이러한 번진 개혁을 통해 강력한 중앙정부가 각각의 번진을 순지화시키고 국력을 상당히 회복했다. 번진의 절도사 대부분은 중앙에서 내려보낸 문관들과 금군 출신의 무관들로 채워졌으며, 이들은 절수직을 천보 이전처럼 일종의 '고위직으로 올라가기 위한 관직 코스'로 여기기도 했다. 이러한 '중흥' 은 대략 40여 년간 지속되었다.
4.4. 당목종~당선종 시기
당헌종은 '중흥'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당의 국력을 증대시켰으나, 번진의 순지화를 마무리지은 후 얼마 가지 못해 환관 세력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후 즉위한 당목종을 비롯한 황제들은 대개 무능 무력하여 환관 세력에게 전횡당하였고 더구나 당목종은 국가지출을 줄이기 위해 금군에 대한 감축을 시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병력 감축을 미숙한 형식으로 수행하여 병사들의 반감을 샀으며, 이렇게 해산된 금군들을 번진들이 흡수하면서 세를 불린 후, 결국 다시 당 조정에 대해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이 선두에 선 것은 물론 하북삼진이었다.당 목종은 이에 대한 재진압을 시도했고, 여타 지역은 모두 재평정하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하북 삼진의 제압에는 실패한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대부분의 호구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조세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변함이 없었기에 당은 이 정도의 중앙통제에서 만족하며 안정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번진이 약화됨과 반비례해서 환관들이 갈수록 강력해졌으며, 이들 환관은 문관 출신 절도사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요구했다. 이러한 뇌물은 결국 병사들에게 돌아갈 급여를 전용하거나, 가혹한 가렴주구를 통해 마련한 것이었다. 그 결과 국가는 갈수록 어지러워졌으며, 결국 강남 번진병란이 일어나기 시작(858년)하면서 당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4.5. 당의종~당희종 시기
당선종 말년 일어난 강남 번진병란은 당에게는 상당한 위기감을 안겨주는 병란이었다. 강남 번진이야말로 당의 재정을 지탱하는 주된 버팀목[21]이었기에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그러나 이미 당나라는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859년 구보의 난이 일어난 것. 구보의 난은 이전까지 번진들에서 일어났던 병란과는 달리 소농과 빈농, 도적떼 등을 기반으로 하는 반란이었으며, 통일왕조의 멸망시 대규모로 일어나던 농민봉기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당 조정에서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남조의 팽창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증대시키고, 가렴주구를 강화했다. 이로인해 868년, 방훈의 난이 일어난다. 이는 당 조정에게는 마지막 경고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은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 결과 결국, 당을 끝장내는 마지막 반란, 황소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구보의 난을 시작으로 다시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번진들은 황소의 난을 통해 완전히 독립세력화했는데, 이는 황소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도적이든 뭐든 일단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면 끌어들여 절수직으로 임명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들 난립한 번진들은 서로 싸우며 상호겸병하는 사례가 증가했고, 다수의 외부 할거세력들도 번진의 지위를 획득하면서 개입하였다. 사실상 당은 황소의 난으로 멸망하고 이로써 오대십국시대가 시작했다.
4.6. 당소종~오대십국시대
이시기엔 각지의 번진들이 완전한 독립된 왕국으로 등장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주전충, 이극용 등이 이때의 인물들이다. 당 조정은 황소의 난 이후에도 얼마간 이어갔지만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주전충에 의해 간단히 찬탈이 이루어져 멸망하고 만다.(907년)이후 당이라는 테두리가 사라진 번진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했으며, 오대십국시대라는 난세의 여러 소국들은 이러한 절도사들이 성장하여 이루어졌다. 또한 이들 소국들은 자 세력 내에 다시 절도사들을 임명하고 정국이 뒤집히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북송이 건국된 뒤 끝났다. 송태조 조광윤은 이를 교훈 삼아 배주석권병이란 행위로 평화적으로 절도사들의 군권을 회수한 다음 군권을 더 철저하게 쪼개어 중앙집권 및 황제독재권의 통제 아래 넣었다. 이후에도 절도사의 관직명은 남았으나 명목상의 관위에 불과했고 이전과 같은 번진할거는 일어나지 않았다.
5. 관련 문서
[1] 일본의 번 유래 중 하나다.[2] '군정과 군령의 결합이다.[3] 보통은 '채방사(관찰사'를 겸했다. 채방사는 당의 최고 광역 행정구역인 '도'단위의 행정감찰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도안찰사를 계승한 직책이다.[4] 군령, 군정과 지방행정의 결합이다.[5] 절도사가 겸임한 관직들은 사(使)자로 끝나는 직책이 많아 사직(使職)이라고 불렸다.[6] 안사의 난 때 등장하였다.[7] 초대 절도사는 고선지였다. 봉상청은 그의 부하 겸 후임이다.[8] 봉상청이 무고로 죽고 이사업이 계승했다.[9] 난주 지역으로, 776년 토번에게 정복됨.[10] 지금의 사천(쓰촨)지역에 해당하며 안사의 난 당시 당현종이 피난을 왔던 곳으로, 당의 최후의 보루였다.[11] 보통 '절수직'이라고도 한다.[12] 그것도 삭방, 하동, 하서, 농우절도사였다. 가서한과 안록산을 합친 규모로 동원 가능 병력이 27만에 육박한다. 병력이 주둔한 주만 합쳐도 15개. 그것도 당의 서북방 전 지역에 걸처져 있다. 채방사 직도 여럿 겸해 실질적인 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13] 하서, 농우절도사직을 겸직했다.[14] 범양, 평로, 하동절도사직을 겸직했다.[15] 전승사의 천웅절도사(위박번진)를 예로 들면, 절도사에 더해 지탁사, 영전사, 관찰사라는 세개의 관직을 더 떠맡았다.[16] 지역 리스트 - 봉상, 정난, 정해, 동주, 소무, 소신, 소의, 영새(정새), 영국(정국), 영원(정원), 보대, 보애, 봉국, 정난, 하서, 하양, 하중, 호국, 위기(위융), 위성(위정), 위무(복건 일대에서 위무군을 칭함), 위성, 서천, 행영, 진주, 사면행영, 청해, 무영, 무안, 무창, 무진, 무정, 무정贞, 무신, 무순, 보국, 감화, 충의, 충무, 충국군, 성덕, 노룡, 영원, 영국, 의무, 의성, 의창, 빈녕, 회남, 형남, 형주, 낙주, 자주, 동주, 산남서도, 산남동도, 검중, 진해, 진동, 진남, 진국, 영남동도, 영남, 영남서도, 창의, 광국, 위박(천웅天雄을 칭함), 평호, 천평, 선무, 선의, 치청, 석방, 옹주, 정강, 유주, 융소, 서강, 진녕, 안남, 영무, 보평..... 모두 독립 상태로 춘추전국시대 보다 더하다.[17] 노룡번진, 성덕번진, 위박번진이다.[18] '치청'은 치소명이다. 그런데 구 평로번진이 북쪽에 있을때와 헷갈린다는 이유로 같이 붙여서 부른다.[19] 이게 환빠들에게 황해도와 엮여서다.(...)[20] 신책군이라 한다.[21] 순지 절도사, 순지번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