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건국설화의 등장인물 가계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호경 강충의 어머니(전처) | 평나산신(후처) | ||
강충 구치의 | |||
이제건 | 보육(손호술) 덕주 | ||
덕주 보육 | 진의 당숙종 | ||
진의의 언니 | 작제건 저민의(서해용녀) | ||
강씨부인 | 용건 몽부인(성모천왕) | 왕평달 | |
도선 | 왕건 | 왕식렴 | |
※ 아랫첨자는 배우자를 나타낸다. ※ 보라색 바탕은 혈연 관계가 없는 인물. | }}}}}}}}} |
1. 개요
고려 건국설화의 등장인물.2. 기록
2.1. 편년통록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름이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불렀다.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두루 유람하다가 부소산(扶蘇山)의 왼쪽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를 들고 살림을 차렸는데 집은 부유했으나 자식이 없었다.
활쏘기를 잘하여 사냥을 일삼던 터에 하루는 같은 마을 사람 아홉 명과 평나산(平那山)에서 매사냥을 했다. 마침 날이 저물어 바위굴에서 하룻밤을 묵으려 하는데 범 한마리가 굴 입구에 와서 울부짖었다.
열 사람은, ‘범이 우리들을 잡아먹으려 하니 시험삼아 쓰고 있는 관을 던져 범이 움켜잡는 관의 임자가 맞서기로 하자’고 상의한 후 모두 관을 던지자 범이 호경의 관을 움켜잡았다. 호경이 나가 범과 싸우려 했는데 범은 갑자기 사라지고 바위굴이 무너져 아홉 명은 모두 빠져 나오지 못했다.
호경이 돌아가 평나군(平那郡)에 알린 후, 되돌아와 아홉 명의 장사를 지내려고 먼저 산신제를 올렸는데 산신이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과부의 몸으로 이 산을 주관하고 있소. 성골장군을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고서 같이 신정(神政)을 펴고자 하니 성골장군을 이 산의 대왕으로 봉하고 싶소.’
말을 마치자 호경과 함께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이에 평나군의 백성들은 호경을 대왕으로 봉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며 아홉 사람이 함께 매몰되었다 하여 산 이름을 구룡산(九龍山)으로 고쳤다.
산신이 된 호경이 옛 부인을 잊지 못하고 밤마다 항상 꿈결처럼 와서 교합하여 아들을 낳으니 강충(康忠)이라 했다. 강충은 외모가 단정하고 근엄하며 재주가 많았는데, 서강(西江) 영안촌(永安村)의 부잣집 딸인 구치의(具置義)를 아내로 맞아 오관산(五冠山) 아래 마아갑(摩訶岬)에서 살았다.
당시 신라의 감간(監干) 팔원(八元)은 풍수에 밝았는데, 부소군(扶蘇郡)에 왔다가 군이 부소산(扶蘇山) 북쪽에 있을 뿐 아니라 산의 형세는 빼어나나 초목이 나지 않은 것을 보고는 강충에게 ‘만약 군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 삼한(三韓)을 통일할 인물이 태어날 것이오.’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강충이 고을 사람들과 함께 산의 남쪽으로 거처를 옮긴 후 온 산에 소나무를 심고 군의 이름을 송악군(松嶽郡)으로 고쳤다.
강충은 군의 상사찬(上沙粲)이 되었으며 또 마아갑의 집을 영업지(永業地)로 삼고서 두 곳을 오가며 생활했다.
재산을 많이 모으고 두 아들까지 낳았는데 막내의 이름을 손호술(損乎述)이라 부르다가 보육(寶育)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보육은 성품이 자혜로웠으며 출가하여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도를 닦고는 평나산(平那山)의 북갑(北岬)으로 돌아와 살다가 다시 마아갑으로 이사했다.
어느 날 곡령(鵠嶺)에 올라가 남쪽을 향해 소변을 보니 삼한(三韓)의 산천에 오줌이 넘쳐 은빛 바다로 변한 꿈을 꾸었다. 다음날 그의 형 이제건(伊帝建)에게 꿈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이제건이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걸출한 인물을 낳게 될 것이다.’라 하고 자기 딸 덕주(德周)를 아내로 삼게 했다.
“이름이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불렀다.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두루 유람하다가 부소산(扶蘇山)의 왼쪽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를 들고 살림을 차렸는데 집은 부유했으나 자식이 없었다.
활쏘기를 잘하여 사냥을 일삼던 터에 하루는 같은 마을 사람 아홉 명과 평나산(平那山)에서 매사냥을 했다. 마침 날이 저물어 바위굴에서 하룻밤을 묵으려 하는데 범 한마리가 굴 입구에 와서 울부짖었다.
열 사람은, ‘범이 우리들을 잡아먹으려 하니 시험삼아 쓰고 있는 관을 던져 범이 움켜잡는 관의 임자가 맞서기로 하자’고 상의한 후 모두 관을 던지자 범이 호경의 관을 움켜잡았다. 호경이 나가 범과 싸우려 했는데 범은 갑자기 사라지고 바위굴이 무너져 아홉 명은 모두 빠져 나오지 못했다.
호경이 돌아가 평나군(平那郡)에 알린 후, 되돌아와 아홉 명의 장사를 지내려고 먼저 산신제를 올렸는데 산신이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과부의 몸으로 이 산을 주관하고 있소. 성골장군을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고서 같이 신정(神政)을 펴고자 하니 성골장군을 이 산의 대왕으로 봉하고 싶소.’
말을 마치자 호경과 함께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이에 평나군의 백성들은 호경을 대왕으로 봉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며 아홉 사람이 함께 매몰되었다 하여 산 이름을 구룡산(九龍山)으로 고쳤다.
산신이 된 호경이 옛 부인을 잊지 못하고 밤마다 항상 꿈결처럼 와서 교합하여 아들을 낳으니 강충(康忠)이라 했다. 강충은 외모가 단정하고 근엄하며 재주가 많았는데, 서강(西江) 영안촌(永安村)의 부잣집 딸인 구치의(具置義)를 아내로 맞아 오관산(五冠山) 아래 마아갑(摩訶岬)에서 살았다.
당시 신라의 감간(監干) 팔원(八元)은 풍수에 밝았는데, 부소군(扶蘇郡)에 왔다가 군이 부소산(扶蘇山) 북쪽에 있을 뿐 아니라 산의 형세는 빼어나나 초목이 나지 않은 것을 보고는 강충에게 ‘만약 군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 삼한(三韓)을 통일할 인물이 태어날 것이오.’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강충이 고을 사람들과 함께 산의 남쪽으로 거처를 옮긴 후 온 산에 소나무를 심고 군의 이름을 송악군(松嶽郡)으로 고쳤다.
강충은 군의 상사찬(上沙粲)이 되었으며 또 마아갑의 집을 영업지(永業地)로 삼고서 두 곳을 오가며 생활했다.
재산을 많이 모으고 두 아들까지 낳았는데 막내의 이름을 손호술(損乎述)이라 부르다가 보육(寶育)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보육은 성품이 자혜로웠으며 출가하여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도를 닦고는 평나산(平那山)의 북갑(北岬)으로 돌아와 살다가 다시 마아갑으로 이사했다.
어느 날 곡령(鵠嶺)에 올라가 남쪽을 향해 소변을 보니 삼한(三韓)의 산천에 오줌이 넘쳐 은빛 바다로 변한 꿈을 꾸었다. 다음날 그의 형 이제건(伊帝建)에게 꿈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이제건이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걸출한 인물을 낳게 될 것이다.’라 하고 자기 딸 덕주(德周)를 아내로 삼게 했다.
의종(고려) 시기 김관의가 편찬한 편년통록[1]에 의하면 호경(신라)의 손자로, 강충의 장남이다.
동생으로 손보육이 있는데, 보육이 어느 날 곡령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는데 삼한땅을 잠기게 하는 꿈을 꾸었다고 이제건에게 말하자 이제건은 자신의 딸 덕주와 손보육을 혼인시켰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불명.
2.2. 제왕운기
성골장군(聖骨將軍)[원주]의 자손으로, 여자로서 현명하고 아름다운 이가 있었네.[원주2] 드디어 〈당 숙종과〉 합하여 경강을 낳았으니[원주3], 활을 잘 쏘고 비범하였다네.
제왕운기(帝王韻紀) 권하(卷下) >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
제왕운기(帝王韻紀) 권하(卷下) >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
[1] 현재는 실전되었으나 일부 내용이 고려시에 인용되어 있다.[원주] 휘(諱)는 호경(虎景)이며, 지금의 구룡산천왕(九龍山天王)이다. 처음에 백두산(白頭山)에서 9명을 데리고 사냥하러 〈송악에〉 왔다. 이로 인하여 사냥을 하다가 산혈(山穴)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호랑이가 〈동굴에〉 와서 울부짖고는 가지 않았다. 10인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각자 가지고 있는 의물(衣物)을 던지니, 호랑이가 장군의 옷을 받았다. 장군이 나오니 동굴이 무너져 9인이 모두 파묻혔다. 호랑이가 변신하여 여인이 되어 말하기를, “나는 과부로 이 산에 살고 있는데, 원컨대 당신과 함께 신정(神政)을 다스리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혼인하여 신(神)이 되었다. 이 때문에 호경이라 이름하였고, 〈그〉 산은 구룡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는〉 대저 산정(山精)을 근본으로 한 것이다.[원주2] 휘는 진의(辰義)이고 시호(諡號)는 정화왕후(貞和王后)이다. 아버지는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휘는 보육(寶育)이다. 조부(祖父)는 송악군(松岳郡)의 사찬(沙粲)이고 휘는 강충(康忠)이다. 증조부는 성골장군이다. 어머니의 휘는 덕주(德周)이고, 외조부는 사찬이며 장자는 휘가 이제건(伊帝建)이다.[원주3] 대왕의 휘는 작제건(作帝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