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7-30 08:37:44

필영대왕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추존
국조 의조 세조
대종 안종
비정통
안경공 승화후 덕흥군
성격 불명
문원대왕 ▨▨대왕 필영대왕
정간왕 양헌왕
}}}}}}}}}

<colbgcolor=#FFB200><colcolor=#670000>
고려 추존왕(?)
필영대왕 | 弼榮大王
생몰 ? ~ ?
본관 개성 왕씨 (추정)
미상
부모 부왕 태조 (추정)
모후 불명
봉호 불명
시호 불명

1. 개요2. 상세3. 둘러보기

1. 개요

고려 초기의 금석문인 〈징효대사탑비〉에서 확인되는 인물이다.

2. 상세

[04] 王堯君
[05] 王昭君
[06]   ▨▨大王 弼榮大王 英章正匡 王景大承
[07] 淸端宮主   金鎰蘇判 兢達蘇判 王規佐承
[08]   權悅佐承 王詢佐承 王廉佐承 誠俊元甫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의 음기(陰記) 중 弼榮大王 부분 탁본 및 판독문 일부. 판독문은 세로로 써진 비문을 편의상 가로로 고쳐 적은 것이다.

위의 〈징효대사탑비〉는 혜종 1년인 944년에 만들어졌고, 1994년부터 학술적인 검토가 이뤄졌다.

비석의 뒷부분에 적힌 음기에는 징효대사의 제자 목록이 발견되는데, 징효대사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승려들과 당시 흥녕사(興寧寺)의 실질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던 여러 유력자의 명단이다.

여기에는 정종이 '왕요군(王堯君)', 광종이 '왕소군(王昭君)'으로 지칭되어 있으며, ▨▨대왕과 필영대왕, 태조 후궁인 월화원부인(月華院夫人)의 아버지 영장(英章), 태조 후궁인 정목부인의 아버지 왕경(王景), 태조의 왕녀 또는 후궁으로 보이는 청단궁주(淸端宮主), 소판 김일(金鎰)[1], 유긍달, 왕규 등이 적혀있다.

923년생인 정종과 925년생인 광종이 언급되고 있는 점에서, 음기 부분의 후원자 명단은 924년에 작성된 비문과 별개로 비석이 세워진 944년 시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혜종 즉위 무렵의 정치 세력의 동향을 파악하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대왕과 필영대왕은 《고려사》《고려사절요》에서 찾아볼 수 없는데, 태조의 왕자가 문원대왕으로 봉작된 사례가 있어서, 필영대왕은 광종과 ▨▨대왕보다 항렬이 낮은 태조의 아들로 파악된다. 이에 따르면 광종보다도 항렬이 낮은 필영대왕이 '대왕'으로 명기되어 있는 점은 〈징효대사탑비〉가 만들어진 시점에는 이미 죽어서 왕작이 추봉된 상태로 추측된다. 다만 '필영(弼榮)'은 시호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고, 같은 비문에 적힌 '왕요군'과 '왕소군'의 사례를 통해 보면, 자(字) 또는 별명이 적힌 사례로 짐작된다.

학계에서도 ▨▨대왕과 필영대왕을 막연하게 태조의 왕자나 혈족으로 추측해 왔다.[2] 그러나 〈징효대사탑비〉의 ▨▨대왕과 필영대왕 부분의 판독을 '▨▨大匡' 및 '弼榮大匡'으로 정정하는 의견이 제기되었다.[3] 이에 따라 ▨▨과 필영의 칭호에 관한 부분은 판단을 유보[4]하거나 대광(大匡)으로 정정하는 판독을 지지[5]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대광으로 정정하는 의견에 따를 경우, 대광 ▨▨과 대광 필영은 같은 행에서 언급되는 영장 및 왕경과 함께 태조의 장인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데, 필영은 태조의 후궁 중에 아버지가 확인되지 않는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의 부친이자 박질영과 형제 관계일 가능성이 있다.

3.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670000> 상보 상보 낙랑군왕 실직군왕 문원대왕
견훤 김부 김위옹 왕정
<rowcolor=#670000> 정간왕 양헌왕 (성격 불명)
왕기 왕도 ▨▨대왕 필영대왕
<rowcolor=#670000> 탐라국왕 우산국왕
}}}}}}}}}

[1] 경순왕의 장남이 김일(金鎰)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에 의하더라도 징효대사탑비에 나오는 소판 김일과는 동명이인이다.[2] 노용필, 2007, 『신라고려초정치사연구(新羅高麗初政治史硏究)』, 한국사학.[3] 이인재, 2008, 「충주 정토사 玄暉와 영월 흥녕사 折中: 고려 혜종대 정변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 49, 한국고대사연구회, 315쪽의 각주 70. 해당 논고에서 어떠한 경위에서 '大王'을 '大匡'으로 정정한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匡'자에서 '匚' 획이 결락(缺落)된 탁본이거나 비문 자체의 오기(誤記)로 판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김창현, 2009,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한국고대사연구』 55, 한국고대사연구회.[5] 황향주, 2022, 『10~13세기 고려(高麗) 왕실(王室)의 구조(構造)와 편제(編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후 해당 학위논문을 보강한 논문(「고려 태조~목종대 왕실의 편제 -왕실 남성의 ‘태자(太子)’·‘군(君)’ 칭호를 중심으로-」, 『한국중세사연구』 71, 한국중세사학회.)에서도 동일한 견해를 피력했다. 정종(왕요군), 광종(왕소군), 청단궁주 등 왕족으로 확인되는 인물들은 다른 인물들과 달리 대두(擡頭) 표기되어 있으나 ▨▨과 필영은 그렇지 않기에 왕족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을 논거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