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의 아버지에 대한 내용은 덕흥대원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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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비정통 국왕 덕흥군 | 德興君 |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지지파 | 원(元) | |
봉호 | 덕흥군(德興君) | |
성씨 | 왕(王) / 백(白)(?)[1] | |
휘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 혜(譓) |
몽골 | 타스테무르(塔思帖木兒) | |
부왕 | 충선왕 | |
출생지 | 백문거(白文擧)[2]의 집 | |
생몰년도 | 1314 ~ 13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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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선왕의 서자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궁인(宮人) 소생. 이름은 왕혜(王譓), 몽골식 이름은 왕타스테무르(王塔思帖木兒). 봉호인 덕흥(德興)은 이후 조선 중종의 서자이자 선조의 아버지가 되는 덕흥대원군과 한자까지 동일하다.2. 생애
어릴 때 승려가 되었으나 종손자 충정왕이 폐위되고 조카 공민왕이 즉위할 때 원나라로 도주했다.공민왕이 친원파의 거두였던 기철을 숙청한 직후, 그의 여동생이자 원나라의 황후였던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 왕혜를 왕으로, 조카인 기삼보노(奇三寶奴)[3]를 세자로 세우려고 했다.
1363년(공민왕 12년) 12월, 덕흥군은 최유 등과 함께 1만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최영과 이성계에게 패하고 원나라로 되돌아갔다.
공민왕은 그를 고려로 송환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원나라는 그가 곤장 107대를 맞은 후 종기가 났다는 이유로 송환을 보류하게 된다.
중략
왕이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유(金庾)를 원나라에 보내 타스테무르를 압송할 것을 요청했다. 김유가 요양(遼陽)에 이르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흑려(黑驢)가 김유에게,
“황제께서 저에게 타스테무르를 장 107대를 친 다음 자기나라로 돌려보내라고 지시하셨으나 마침 그가 등창이 났으니 다 나은 후에 곤장을 쳐서 돌려보내겠다.”고 하므로 김유가 그냥 돌아왔다.
앞서 호군(護軍) 배자부(裴自富)가 타스테무르와 내통해 밀직부사(密直副使)라는 거짓 관직을 받았다가 그 일이 탄로나 참형을 당했다.
고려사 열전 충선왕(忠宣王) 왕자 덕흥대원군
이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4]왕이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유(金庾)를 원나라에 보내 타스테무르를 압송할 것을 요청했다. 김유가 요양(遼陽)에 이르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흑려(黑驢)가 김유에게,
“황제께서 저에게 타스테무르를 장 107대를 친 다음 자기나라로 돌려보내라고 지시하셨으나 마침 그가 등창이 났으니 다 나은 후에 곤장을 쳐서 돌려보내겠다.”고 하므로 김유가 그냥 돌아왔다.
앞서 호군(護軍) 배자부(裴自富)가 타스테무르와 내통해 밀직부사(密直副使)라는 거짓 관직을 받았다가 그 일이 탄로나 참형을 당했다.
고려사 열전 충선왕(忠宣王) 왕자 덕흥대원군
3. 기타
- 덕흥군을 옹립하려고 했던 원나라의 시도는 실패했으나, 이 사건으로 고려에서는 덕흥군과 관련된 반란들이 몇 차례 일어났다. 덕흥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주사충(朱思忠), 호군(護軍) 배자부(裴自富)가 처형당했으며, 여진에서 자란 고려인 김삼개(金三介)는 형 삼선(三善)과 함께 덕흥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이성계가 출병한 틈을 타 화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돌아온 이성계한테 패배하고 도주한 기록이 있다.
- 1377년 안주(安州)에서 승려 달명(達明)이 덕흥군의 아들을 자처해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가 잡혀 죽은 일이 있었다.
4. 대중매체
[1] 경복흥 열전에서 언급이 되는데, 아마도 덕흥군이 반역을 일으키면서 과거 동오의 손침과 손준의 경우처럼 왕씨 성을 박탈당하고, 그리고 왕실 족보에서 파이면서 덕흥군이 백문거의 집에서 태어난 이유로 백씨로 성이 바뀐 경우라고 볼 수 있으나,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2] 궁인이 출궁한 뒤 재혼한 원나라 사람이다.[3] 성이 기씨(奇氏)이고, 이름이 삼보노(三寶奴)이다. 즉 기황후가 고려 왕실을 아예 왕씨에서 자신의 가문인 기씨로 바꾸려는 역성혁명을 시도를 한 것이다. 참고로 대략적인 나이차는 덕흥군이 기삼보노보다 두 세대 위이다.[4] 두산세계대백과사전엔 그가 원나라로 돌아간 후에 죄를 저질러 봉호도 삭탈당한 뒤 유배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사료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