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 동아시아의 호칭 개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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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봉호(封號)는 호의 일종으로 작위가 수여될 때, 수여자를 지칭하기 위하여 지정된 고유명 또는 고유명과 작호(爵號)를 결합한 이름을 가리킨다.보통 고유명은 작위를 수여받을 때 주어지는 영지(식읍)의 지명을 사용하지만, 관념상의 미칭을 존호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1]
2. 지명을 사용하는 경우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봉호는 책봉 당시에 영지 또는 식읍으로 설정된 지명을 그대로 봉호로 사용하는 것으로, "지명+작호" 형태로 결합된다. 예를 들어 명목상이든지 실재로든지 '진안(晉安)'이라는 영지를 받고 후작(侯)에 책봉된 이는 '진안후(晉安侯)'로 지칭하는 것이다. 또한 지명에서 살짝 비틀어서 바리에이션으로 '진평후(晉平侯)', '진양후(晉陽侯)', '진산후(晉山侯)' 등으로 호칭되는 경우도 있다.이는 보통 작위가 영지와 함께 수여되는 서양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사용법으로, 원어상으로는 보통 칭호(작위)+전치사+지명 형태로 쓰인다. 이를 번역할 때에는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지명+작호 형태로 결합하는 형태로 적용하는데, 예를 들어 '부르고뉴'라는 지역을 영지로 삼은 '공작'의 경우 보통 '부르고뉴 공작(Duc de Bourgogne)'으로 번역한다.
본래 봉호는 같은 나라에서 같은 시점에 중복되어 사용될 수 없는 고유명사이기에, 서진 때부터 동일한 지역 안에 여러 제후의 봉국(封國)을 설치하면서 해당 지역의 옛 지명을 봉호로 사용하거나 그 지명을 변형시킨 형태로 봉호를 지정하기도 했다. 일례로, 광년현(廣年縣)에는 같은 시기에 세 명의 제후가 책봉되었는데, 각각 광년현후(廣年縣侯)·광안현공(廣安縣公)·광흥후(廣興侯)로 봉호가 지정되었다.
특히 한자문화권 지역에선 이른 시점부터 식읍이 명목상으로만 수여되는 개념이 되면서, 보통 가문의 출신지를 의미하는 본관 지명을 봉호로 지정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럴 때 같은 지역에 여러 인물이 중복될 경우에도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옛 지명을 사용하거나 그 지명을 변형시킨 이름을 봉호로 지정했다. 고려의 경우에는 아예 별도로 각 고을마다 별명을 가리키는 '별호(別號)'를 제정하기도 했는데, 이때 제정된 별호는 조선 때까지 사용되어 봉호로도 쓰였다.
봉호로 지명이 쓰인 경우에 간혹 실제 영지의 지명과 다른 경우도 있다. 일례로 후한 때 동해왕(東海王)은 그 봉호로 볼 때 동해군(東海郡)을 봉국으로 삼은 제후로 볼 수 있으나, 처음 동해왕으로 책봉된 유강만 동해군을 봉국으로 삼았을 뿐, 그를 세습한 후임 동해왕들은 실제로는 노군(魯郡)에 봉국을 두고 있었다. 이 경우는 동해공왕이 원래 황태자였으나 어머니의 폐후 문제가 얽혀 반강제로 동생에게 그 지위를 양보했기에 이에 대한 위로의 차원에서 그 봉국의 규모도 거대했는데, 후손들이 봉국을 그대로 세습하는 것을 인정받지 못하여 봉국이 축소변경되었으나 봉호만 유지되어 세습된 특이한 사례였다.
3. 존호를 사용하는 경우
다소 특수한 사례로 관념상의 미칭을 봉호로 제정하는 사례도 제법 있는데, 보통 왕족들의 경우에 해당되기에, 이를 존호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고려와 조선 왕실의 초창기에 이러한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청나라의 경우 친왕과 군왕의 책봉에는 대부분 한 글자로 된 존호를 지정했다. 대한제국의 친왕도 한 글자로 된 존호가 지정되었는데, 청나라의 사례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4. 기타 사례
지정된 봉호 이외에도 별칭을 일반적인 호칭으로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고려 왕실이 있다. 고려 왕족들은 거처의 이름을 별명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궁군(宮君)·전군(殿君)·궁주(宮主)·전주(殿主) 등이 이에 해당된다. 궁군과 전군은 봉작제가 시행되면서 더이상 쓰이게 되지 않게 되었으나, 궁주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칭호로 굳어져서 공식 작호인 공주(公主)나 비(妃)·빈(嬪) 등을 대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전한 초기에 특이한 사례가 있는데, 갱갈후(羹頡侯)라는 봉호가 있다. 이는 유방이 황제가 된 뒤에 큰형의 아들인 유신(劉信)에게 책봉한 작위인데, 실제 봉토는 구강군 서현(舒縣)이었음에도 '서후(舒侯)'라고 칭하지 않고 갱갈후라고 칭했다. 여기에는 《사기》에 특별한 사연이 전해지고 있는데, 유방이 건달 시절에 큰형네 집에 건달 친구들을 데리고 가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형수가 일부러 솥을 긁는 소리를 내며 국을 퍼와 유방 일행을 쫓아낸 적이 있었다. 유방은 이 일에 앙심을 품고 황제가 된 뒤에도 그 형수의 아들 유신 만큼은 제후로 책봉하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유신에게도 작위를 주라고 책망하자 마지 못해 제후로 책봉하게 되었는데, 봉호를 일부러 "국[羹] 솥 긁는[頡] 제후[侯]"로 지정해버렸다.(...) 이 일에 대해서는 그냥 '갱갈'이라는 지역에 제후를 봉한 것에 불과한데 사마천 등이 그 지명가지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비판이 있긴 하지만, 해당 지역에 '갱갈'이라는 지명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갱갈후의 탕목읍이 설치되면서 생겼으며, 《사기》의 주석서인 색은(索隱)과 정의(正義)에서도 '갱갈'이 지명이 아닌 작호로 설명하고 있기에 고의적인 명명임은 분명하다.
모욕적인 봉호를 지정한 사례가 금나라 때도 있는데, 포로로 잡힌 요나라 마지막 임금을 "바닷가에서나 사는 왕"이란 뜻으로 해빈왕(海濱王)으로 책봉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정강의 변 때 사로잡은 북송의 휘종을 "혼미하여 덕을 망쳐서 이 꼴이 되었다"는 의미로 혼덕공(昏德公)으로, 휘종의 아들 흠종을 "아버지의 혼미함을 반복했다"는 의미로 중혼후(重昏侯)로 책봉했다. 그래도 식읍을 챙겨주며 대접(?)은 해준 갱갈후 사례를 넘어서, 대놓고 조롱을 한 것이다.
5. 시호와 결합하는 방식
작위를 수여한 사람에게 시호가 주어질 경우, 보통은 고유 봉호와 작호 사이에 시호를 결합한다. 무향후(武鄕侯) 제갈량에게 사후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지자, 이를 무향충무후(武鄕忠武侯)로 부르는 것이 그 예이다.그러나 동진 이후로 개국작(開國爵)이라는 개념이 생겨나면서 봉호와 시호를 결합하는 것이 곤란하게 되었다. 일례로 파양현개국후(鄱陽縣開國侯)에게 '충소(忠昭)'라는 시호가 내려진다면 이를 어떻게 결합할까? 당대 사람들도 이를 곤란하게 여겼는지, 이때부터 개국작 등에는 일반적으로 봉호와 시호를 결합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에는 제후의 시호를 실제 작호에 결합하지 않고 '공(公)'으로 높이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는데, 여기에서 영감을 따왔는지 봉호와 시호를 별개로 사용할 경우에는 시호에 공(公)자를 덧붙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려와 조선에서 봉호와 시호를 결합하지 않고 시호에만 공(公)자를 붙이는 것도 이러한 관례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당 인물이 공작으로 추증되거나 그와 같게 취급되었기에 공(公)자를 붙인 것이 아니다.
[1] 미칭을 봉호로 사용할 경우 역대 동아시아 왕조에서는 유교를 국시로 삼은 경우가 많으므로 유교적 이념에 맞는 글자나 단어나 문장에서 따와 봉호를 짓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시가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