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2 17:26:01

석우로

이름석우로(昔于老)
생몰년도? ~ 253년

1. 개요2. 생애
2.1. 무인으로서의 전성기2.2. 비참한 최후
3. 평가4. 기타

1. 개요

신라 초기 석씨 왕가의 귀족, 장군. 내해 이사금의 아들이자 조분 이사금의 큰사위다. 기록이 모호한 신라 초기에서도 여러 전쟁에서 활약한 몇 안 되는 명장. 조분 이사금 시대에 대장군으로서 경상도 지역 안쪽의 신라 주변 소국의 반란이나 고구려, 의 침략을 방어해내며 활약했다. 하지만 후술되어있듯 입 한 번 잘못 놀렸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 생애

2.1. 무인으로서의 전성기

아버지 내해 이사금 재위기 태자이던 시절 209년 7월, 가야(함안 안라국 혹은 김해 금관국)가 한반도 남부 8개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자(포상팔국의 난)[1] 이음(利音), 물계자 등과 함께 6부의 군사를 이끌고 출진, 포상팔국 연합군을 제압하고 적장을 죽이고 가야인 포로 6천여 명을 되찾아왔다. 이후에도 231년 7월 지금의 김천시에 있었던 소국 감문국 정벌, 233년에는 동해 바다를 건너온 왜군의 침략을 영덕군 사도성에서 바람의 방향을 읽어 화공을 사용해 격파했고 243년에는 고구려의 북쪽 변경 침략을 방어하러 출정했으나 여기서는 이기지 못하고 퇴각했다.

245년 고구려가 신라 북쪽을 침입했을 때는 신라군이 고전해 마두책이라는 곳에 물러나 있었는데 이때 밤에 군사들이 추위에 괴로워하자 석우로가 몸소 다니며 위로하고 손수 풀섶에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해줘 군사들 모두가 마음 속으로 깊이 감격했다고 한다. 고위 귀족 출신이지만 그런 권위를 휘두르지 않고 신분이 낮은 아랫사람들과도 친밀하게 지내려고 하는 지휘관이었던 듯.

그리고 247년 사량벌국(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의 소국)의 난[2]에서 활약하였다. 아마 군공의 갯수만 따진다면 삼국시대 장군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이렇듯 완벽한 군공을 지녔고 태자의 지위에 있었지만 정작 내해 이사금 이후의 왕위는 계승 서열이 더 낮아 보이는 조분 이사금에게 돌아갔다. 우선 조분 이사금에게 왕위가 돌아간 이유는 조분이 전전왕 벌휴 이사금의 적장손이었던 점이 가장 컸다. 골정과 이매가 벌휴 이사금 시기 때 모두 태자에 올랐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그 다음 왕위는 당연히 골정의 아들 조분에게 넘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내해 이사금의 어머니 내례부인의 힘으로 인해 조분보다 나이가 많았던 내해가 대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물론 내해는 골정의 딸 즉 조분의 누이와 결혼하면서 골정의 사위 신분이라는 것도 이용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한 점이 마음에 걸렸는지 내해 이사금은 조분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켰고, 아들이 있었음에도 조분을 자신의 사위로서 왕위계승 1순위로 올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우로는 왕이 되진 못했지만 조분 이사금 시절 때는 곧바로 대장군과 최고관직인 서불한에 임명이 되었고, 조분 이사금의 장녀와 혼인하면서 내해 이사금 재위 때의 조분과 마찬가지로 왕위 계승서열 1순위가 되었다. 하지만 조분 이사금이 죽은 이후 왕위는 조분 이사금의 동생인 첨해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2.2. 비참한 최후

첨해 이사금 재위 3년, 석우로는 일생일대의 말 실수 혹은 의도적인 도발을 하고 마는데, 바로 왜국 사신 앞에서 왜왕을 모욕하는 발언을 한 것이었다. 때문에 분노한 왜는 신라와 전쟁까지 치르게 된다.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서 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첨해왕 7년 계유(서기 253)에 왜국 사신 갈나고가 방문하자 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사신을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于柚村)(현재의 울진으로 추정)으로 피난해 있게 되었다. 우로가 아뢰었다. “지금의 환란은 제가 말을 삼가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마침내 왜군에게 가서 말했다. “전에 한 말은 농담일 뿐이었는데 어찌 군대를 일으켜 이 지경까지 이를 것을 생각하였겠느냐?” 왜인이 대답을 하지 않고 그를 붙잡아 장작더미 위에 얹어 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가버렸다.
자신의 태도로 자초한 일이니 스스로 전쟁에 책임을 지겠다며 적진으로 갔지만 분노한 왜군에 의해 그 자리에서 붙잡혀 화형을 당한다. 왜 굳이 이런 거친 표현을 써서 화를 불렀는지는, 위에도 적혀있듯 석우로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왜군과 싸운 경력도 있는 만큼 평소에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석우로가 화형당한 부분에 대해 첨해 이사금이 선왕의 핏줄이자 공적과 군권을 가지고 있던, 한마디로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석우로를 왜군의 침략을 핑계삼아 숙청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당시 신라 왕실은 '골정'계와 '이매'계 두 파벌로 나뉘어 있었고 석우로는 이매계의 핵심인물, 첨해이사금은 골정계였다. 실제로 이후 권력은 석우로가 사라졌으니 골정계가 쥐게 된다.

그런데 이후 왜 사신이 찾아오자, 이번엔 원한을 품고 있던 석우로의 부인이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 사신을 불태워 살해하는 복수사건이 일어났고, 왜가 살해된 사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 다시 쳐들어왔다(...) 그러다 신라 측이 막아내서 결국 돌아간다. 그야말로 복수가 복수를 낳는 상황.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는
미추왕(味鄒王) 때 왜국 대신이 와서 예방하였는데, 우로의 처가 국왕에게 청하여 왜국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하게 되었다. 그가 흠뻑 술에 취하였을 때, 그녀가 장사(壯士)를 시켜 뜰에 끌어내려 불태워서 지난날의 원수를 갚았다. 왜인들이 분개하여 몰려와 금성을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고 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는데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을 포로로 삼고 해변으로 와서 무릎뼈를 뽑고 돌 위에 포복시켰다. 조금 있다가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에 있는 대사로 하고 돌아갔다. ... 죽은 왕의 처는 신라인과 공모하여 일본 대사에게 "왕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 그대와 결혼하겠다"고 속여 왕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자 곧바로 대사를 죽이고 왕의 시신을 꺼내 다른 곳에 묻었다. 그때 대사의 시신을 왕의 시신 밑에 묻고 "존비(尊卑)의 순서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천황이 이 소식을 듣고 진노하여 신라를 정벌하러 군대를 보내자 신라인들이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여 일본군은 철수했다.
라고 되어 있다. '우류조부리지간'에서 우류(宇流)가 이름 부분에 해당하며 (석)우로와 음운상 공통점이 크다. 조부리지간은 관등인 서불한이다. 여기서 신라왕이라 한 이유는 당시에는 왕을 귀족층들의 존칭으로도 사용했었다. 그 예로 영일냉수비리에서 간지(干支)층의 귀족들도 왕(王)으로 칭하고 있는걸 볼 수 있다. 혹은 죽인 석우로를 왕으로 높여 신라왕을 죽였다고 각색 했을 수도 있겠다. 일본서기와 신공황후기 기록 특성상 각색일 확률이 높지 않을까 싶다.

3. 평가

외국에 취한 태도와 달리 아군에겐 솔선수범하는 장수였고, 병사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이를 보여주는 한 일화로 고구려가 쳐들어와서 그걸 막으러 북쪽으로 갔을 때, 음력 10월인 겨울이어서 갑자기 한파가 불었다. 때문에 군사들이 힘들어하자 우로는 직접 나무를 해서 불을 피우며 병사들을 배려하고 거기에 병사들이 감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전장에서는 명장이었을지 몰라도, 정작 외교 현장에선 무례한 실언을 해 쓸데없는 전쟁을 하게 해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물론 스스로 목숨을 걸고 책임을 지는 모습으로 전쟁을 막기는 했지만. 그의 아내 역시, 아내로서는 복수를 한 셈이나 그 결과 나라가 다시 전쟁통에 휘말리게 됐으니 참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다.

4. 기타

일부 기록에선 16대 흘해 이사금이 석우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내용도 있는데, 해당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지만 아들이라고 하기엔 시대차가 너무 난다. 석우로가 죽은 딱 그 해에 유복자로 태어났다고 쳐도 죽을 때 100살을 넘는다는 말인데 아주 장수했다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이런 부분이 한두 번도 아니고 신빙성이 좀 낮다. 아들이 아니라 손자 혹은 증손일 가능성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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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현대 학계 연구상으로는 어느 종주국에 반기를 드는 그런 난(반란)이 아니라 당시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던 여러 가야계 도시국가들 간의 국제 전쟁이라고 해석되는 편이다. 다만 임진왜란도 그렇듯이 전통적으로 사용돼왔던 용어가 포상팔국의 '난'이라 계속 사용하는 것.[2] 백제 쪽에 붙으려고 했다. 후삼국시대아자개에서도 다시 한 번 재현되지만 상주시 지역은 고대 신라와 백제의 가운데쯤인 요충지라 단순한 지역 하나 이상의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