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01:53:12

지타(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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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be673> 사로 6촌 신라 6부 성씨 시조
알천 양산촌 급량부 이씨 알평
돌산 고허촌 사량부 최씨 소벌도리
취산 진지촌 본피부 정씨 지백호
무산 대수촌 점량부 손씨 구례마
금산 가리촌 한기부 배씨 지타
명활산 고야촌 습비부 설씨 호진
삼국사기 기준.# 삼국유사에서는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를 정씨로 취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를 최씨로 기록했다. 또한 6촌의 순서도 셋째가 무산 대수촌(점량부), 넷째가 취산 진지촌(본피부)이라고 기록했다.# }}}}}}}}}



<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금산 가리촌장
지타 | 祗陀
파일:배씨 시조 문양공 지타 유허비(遺墟碑).jpg
▲ 경주 경덕사에 있는 문양공 지타 유허비(遺墟碑)[1]
출생 연대 미상
고조선
사망 연대 미상
사로국 금산 가리촌
능묘 미상[2][3]
재위기간 금산 가리촌 촌장
기원전 69년 전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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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배씨
지타(祗陀)
직위 진한 사로국 금산 가리촌 촌장 }}}}}}}}}
1. 개요2. 유래3. 여담

[clearfix]

1. 개요

신라 건국시기 경주시 6부촌의 하나인 금산가리촌의 촌장으로 배씨 성을 처음으로 받은 사람.

2. 유래

배씨(裵氏)의 뿌리는 멀리 2천여년 전 신라 건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파일:경주 경덕사 전경.jpg
경주 경덕사 의 전경[4]

지타는 신라의 모체인 6부 촌장의 한명이었던 금산가리촌[5]의 촌장(村長)이었다. 금산가리촌의 영역은 동해안쪽 일대인 감포,양남,양북이었다.

금산가리촌은 신라 초기 경주 지역에 있던 6촌 중에서 하나의 고을로 금강산 백률사(栢栗寺) 부근에 있었다고 전하며, 지타[6]가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와 촌장이 되었다고 한다.

서기전 69년(壬子) 3월의 어느날 다른 5부촌장들과 함께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가 양산 기슭에서 6부가 한데 뭉쳐 나라를 세울 일 을 의논하였다.

이에 6부 촌장들은 다시 모여 서로 합의하여 임금으로 받들기로 하니, 이때가 한나라 오봉 원년 갑자년(기원전 57년)이며, 그가 곧 신라 태조 박혁거세이다. 국호는「서라벌」이요, 신라 천년왕국의 출발이었다. 서라벌은 서벌, 또는 사라라고도 하였는데, 탈해왕 때에 계림(鷄林)이라고 고쳤다가, 지증왕 4년인 503년에 신라(新羅)로 정하였다. 신라 건국 4년째인 기원전 54년에 개국공신들의 위치를 정할때에 지타공을 비롯한 여섯 촌장들을 각각 ‘개국좌명 1등원훈 총재태사’ 에 봉해졌고, 제3대 유리왕 9년인 33년 봄에 6촌의 이름을 개칭하면서 촌장들에게 성을 하사 하였는데, 금산가리촌을 한지부(漢祗部)라 하고 배씨(裵氏)성을 하사하였다. 문양공 지타는 배씨 성을 하사받은 후 6두품(六頭品) 귀족으로 활약하였다.

원년(서기 전 57년) 갑자에 13세의 박혁거세를 세워 왕으로 삼고 국호를 서라벌로 정하였다

신라 태조 3년(서기전 55 병인년)에 6부(六部) 공신(功臣)의 위차(位次)를 정할 때 지타공은 개국좌명1등원훈총재태사(開國佐命一等元勳宰太師)에 이르렀다.

신라3대 유리왕(儒理王)9년(서기32년)에는 서라벌 6촌 마을을 6부로 개칭하고, 각기 성(姓)이내려졌다. 금산 가리촌은 한지부가 되고 배(裵)씨성을 받았다. 그때 함께 성을 받은 이씨, 최씨, 정씨, 손씨, 설씨와 함께 배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가 되었다.

법흥왕(法興王) 3년 병신(서기516년)에는 시호(諡號)를 문양(文讓)으로 내리며 무열왕(武烈王) 3년 (병진 서기 656년)에는 장열왕(壯烈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고 기록이 전한다.

금산가리촌의 이름을 바탕으로 논할때 금산근어인(金山根於仁), 가리화어의(加利和於義)이니 지타는 백성을 다스림을 인(仁)과 의(義)를 바탕으로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파일:지타_경덕사.jpg
경주 경덕사의 정문[7]

3. 여담


[1] 경북 경주시 탑동 843번지[2] 금산 가리촌장이 내려온 명활산 아래 유허비는 배씨 성을 사성받은 시조 문양공 사실록을 기록하여 1948년에 세운 비석이다.유허비를 모신 유허비각을 1955년에 건립하였다.1984년에 경북 경주시 탑동에 경주 경덕사를 마련하고 유허비와 유허비각을 이전하고 1995년에 경덕사를 새단장 했다.[3] 일반인은 경주 경덕사 안을 들어갈 수 없고 문중의 자손들만 입장 가능하다.[4] 지타(신라)를 모시는곳[5] 지금의 경주 명활산 아래 분황사 일대 지역이었다.[6] 지타는 祗沱 또는 只他로 읽는다.[7] 음력 1월 5일과 양력 4월 18일에 제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