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03:27:22

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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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시기3. 진한 12국
3.1.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3.2. 《삼국사기》 기록3.3. 기타 서적이나 야사 기록3.4. 구전
4. 관련 역사기록
4.1. 중국
4.1.1. 《후한서》 <동이열전>4.1.2. 《삼국지》 <위지> -오환 선비 동이전-4.1.3. 《진서》 <동이열전>4.1.4. 《양서》 <동이열전>4.1.5. 《북사》 <열전>
4.2. 한국
4.2.1. 《삼국유사》
5. 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만든 세력인가?
5.1. 결론
6. 역사귀속과 계승인식7. 문화재8. 진한 관련 인물9. 외부 링크10.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진한(辰韓)은 고대 한반도 남부 삼한(三韓) 지역 중에서 오늘날의 경상도 지역에 위치했던 12개의 제국(諸國)[1]이었다. 고조선이 한(漢)과 중계 무역을 하던 진국은 바로 이 나라를 의미한다. 한자를 다르게 써서 진한(秦韓)이라고도 불렀다.

2. 시기

고대 한반도 중남부의 진국 시대에 이어 출현한 삼한 시대에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했던 소국들을 지칭한다.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서 낙동강 동쪽 지역이 '대부분 옛 진한에 해당'되며, 그 중 하나였던 '경주 사로국이 점점 성장'해 다른 '소국들을 흡수'하면서 《삼국사기》 기록 상으로는 1세기~3세기, 고고학적으로는 4세기~5세기 경 (늦게 잡으면 6세기), 대부분 '사로국이 발전한 신라에 완전히 흡수/통합'되었다.

진국의 어느 시점부터 영남 지역, 특히 경주·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위만조선계 청동기·철기문화와 한(漢)계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낙랑계 유물이 현저하게 증가하는데, 진한 소국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지역 진한 지배층 유적인 '경주입실리유적'의 경우를 보면 세형동검, 다뉴세문경, 청동 간두령 등은 기존 진국 시기부터 존재했던 문화 양식이며, 그 밖에 고깔동기 같은 청동 거여구(車輿具)와 청동검파, 철검 등은 서북한 지역의 위만조선이나 낙랑 계통 무덤에서 먼저 보이는 유물이다.# 그리고 나무 덧널로 널방을 만드는 '목곽묘(木槨墓)' 문화의 경우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는 서북한 지역의 낙랑 무덤에서 나타나며, 한반도 중·남부에서는 영남 지역에서 2세기 중엽부터 보이고 있다.#

진한 12개국이 진왕(辰王)에게 복속되어 있었다던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이를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을 존중해 마한목지국 왕으로 보는 설이 있는 한편 《양서》 <신라전>에서는 진왕 대신 '진한 왕'이라고 하고 있으며 《진서》 <진한전>에서는 3세기에 '진한 왕'이 중국에 조공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적인 '진한 왕'에 대한 기록에서 후대 판본으로 넘어가면서 글자가 빠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전자는 마한의 진한에 대한 영향력을, 후자는 진한 12국을 아우르는 중심적 정치체의 존재(아마도 사로국?)를 입증해야 하는 과제가 있지만 어느 쪽도 확실하지는 않다. 일단 어느 쪽이 됐든 서로간에도 영 따로 놀던 진한 지역을 후대의 중앙집권국가마냥 직접적으로 관할하는 능력이 있었다기는 힘들고, 명목상의 지배자였다고 보는 편이다.

고고학적으로도 3세기 진한 각 지역을 비교해봤을 때 경주 덕천리, 조양동, 황성동, 울산 중산리, 하대리, 포항 옥성리, 경산 임당 등의 목곽묘 크기와 부장품을 비교해 보면 서로 비슷비슷한 수준이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다. 서열 정도는 존재했겠지만 세력간 격차가 커서 특정 국가가 나머지 소국들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강력한 진한 왕 같은 건 이 무렵에 존재하기 힘들다. 초기 신라(사로국)가 독보적으로 강해지는 것은 100여 년이 지난 4세기 경(마립간 시기)부터였다.

2014년 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경북 의성 지역 고분에서 전형적인 백제식 금동관모[2]가 출토되어 논란이 되었다. 이 지역은 진한 소국 중 하나인 소문국(조문국)이 있었던 지역으로서, 백제식 금동관모와 함께 '의성 양식 토기'#[3]와 규두대도(圭頭大刀), 삼엽문 환두대도(三葉文 環頭大刀) 등의 최상위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도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 ‘조문국은 서기 185년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벌휴 이사금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역 사학자들은 5~6세기 당시 의성 일대의 진한이 신라에 의한 ‘정벌’이나 ‘합병’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독자적인 세력이나 정치체제를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신라뿐만이 아닌 백제와도 교류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 경북 상주 일대의 진한 사벌국의 경우 삼국사기에서는 사로국 첨해 이사금 시기(3세기)에 사벌국이 백제와의 결속을 도모하자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여 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상주 일대의 토광묘 유적을 보면 4세기 중반까지는 독자성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는 5세기에 이미 진한 지역이 신라에 통합되었다고 보지만 #, 더 길게 잡을 경우 6세기에 법흥왕대에 사벌국의 옛 지역에 상주(尙州)를 설치하고 군정과 행정을 담당한 군주를 파견함으로써 사벌국이 독자성을 완전히 상실했을 것으로 보인다.

문화는 마한과는 달리 성벽이 있었으며 각 마을에는 우두머리 군장을 두었다고 한다. 이들 군장중 최고 우두머리는 신지(臣智), 그 다음은 검측(儉側), 그 다음은 번지(樊秖),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 했다고 한다.

낙동강 건너편의 변한과는 편의상 구분을 하긴 했지만 《후한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언어, 법속, 의식주가 다 똑같고, 다만 제사 풍속만 약간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4][5] 애초에 진한과 변한 사람들은 '뒤섞여 산다'(雜居)고 표현하고 있었으므로 경계 자체가 뚜렷하지 않았다. 고고학적으로도 《삼국지》에서 말하는 2세기 진한과 변한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을 보면 그다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무덤만 해도 진한과 변한이 거의 공통 양식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만큼 비슷하다가 4세기 후엽쯤 가야 가야의 석곽묘, 신라의 적석목곽묘로 구분되기 시작한다. 얼핏 보면 낙동강이 변한과 진한의 경계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세세하게 따지면 부산 지역 같이 낙동강 동쪽이 변한권이라든가 반대로 낙동강 서쪽이 진한권인 경우도 있었다. 칼 같이 나뉘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낙동강 상류는 진한에, 중류와 하류는 변한인 편이었다.

변한과 마찬가지로 이 풍부한 지역이라 철을 화폐로 삼았으며,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머리를 로 눌렀다고 한다. 이걸 '편두'라고 하는데, 이 전통은 후에 가야로까지 이어져 가야 시대 무덤을 발굴하면 두개골이 납작하게 눌린 채로 발견되는 무덤이 있다. 진한의 후신인 신라도 편두를 했다고 추정되는 몇몇 기록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고 그런 두개골은 발견된 적이 아직 없다. 편두한 것으로 추정되는 변형 두개골이 실제로 발견된 곳은 김해 예안리 고분군인데 여기가 진한이랑 가까운 편이긴 하지만 어쨌든 낙동강 건너 변한권이다. 근데 또 그 옆에 있는 금관가야의 중심지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편두 유골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신생아의 머리를 돌로 누르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이다. 신생아의 두개골은 숨골이 열려 있기 때문에 어른의 손으로 눌러도 아기에겐 위험한데 무거운 돌로 누르면 아기를 죽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머리를 돌로 누르는 건 어른도 버티기 힘들다. 이 문제 때문인지 청나라의 《만주원류고[6]에서는 건륭제가 직접 집필한 《어제삼한정류》(御製三韓訂謬)를 인용해 《후한서》의 기록을 반박하고 있다. 만주족의 풍습에 아기가 태어나면 요람에 아기가 하늘을 바라보는 자세로 반듯이 오랫동안 눕혀두었는데 그렇게 하면 머리 형태가 편두처럼 평평해진다는 점을 들어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볼 때 정말로 머리를 돌로 눌렀다기보다는 아이를 요람에 반듯하게 눕혀서 재웠기 때문에 머리가 평평해졌다고 보는 게 훨씬 더 합리적이라는 추측도 있다.

여담으로 알렉산더 보빈은 진한의 언어가 일본어족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반도 일본어설 참조.

3. 진한 12국

파일:진한위치비정.jpg
위 지도는 천관우설과 정인보설을 적절히 혼합한 지도로, 현대까지 그나마 가장 정확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colbgcolor=#4a2d5b><colcolor=#ffd700> (1) 이저국(已柢國) <colbgcolor=#4a2d5b><colcolor=#ffd700> (2) 불사국(不斯國) <colbgcolor=#4a2d5b><colcolor=#ffd700> (3) 근기국(勤耆國) <colbgcolor=#4a2d5b><colcolor=#ffd700> (4)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5) 염해국(冉奚國) (6) 군미국(軍彌國)[7] (7) 여담국(如湛國) (8) 호로국(戶路國)
(9) 주선국(州鮮國) (10) 마연국(馬延國) (11) 사로국(斯盧國) (12) 우유국(優由國)

기록에는 진한이 12국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 12국은 기록 당시 파악한 나라가 12개라는 것이며, 다양한 기록에 따라 나라 이름이 다른 것 등으로 미루어보아 여러 나라가 없어지고 생겨나는 과정을 반복했을 것으로 보인다.

3.1.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소개된 진한 12개국의 구성국 목록 및 추정되는 위치이다. 진한의 역사는 아직까지는 많은 부분이 추측 뿐이며 추정되는 위치 또한 많은 나라들이 그때 그때 다르다. 이병도설과 천관우설, 정인보설 등등이 있다.
국가명 현재 추정 위치
사로국(斯盧國) 경상북도 경주시 인근.
기저국(己柢國)[8] 불명[9]
불사국(不斯國) 불명[10]
근기국(勤耆國) 불명[11]
난미리미동국(難彌理彌凍國) 불명[12]
염해국(冉奚國)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동.
군미국(軍彌國) 경상남도 사천시 인근.
여담국(如湛國) 경상북도 군위군.
호로국(戶路國) 불명[13]
주선국(州鮮國) 불명[14]
마연국(馬延國) 불명[15]
우유국(優由國) 경상북도 울진군 혹은 영일만 인근.

3.2.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에는 신라에 병합된 소국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삼국지》 <위지> - 동이전-과 겹치지 않는 나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명 현재 추정 위치 소개
감문국(甘文國)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에 위치 231년에 신라에 병합
골벌국(骨伐國)
혹은 골화국(骨火國)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화산면, 신령면 일대에 위치 236년 신라에 병합
다벌국(多伐國) 대구광역시 108년 신라에 병합
비지국(比只國)(혹은 불사국) 경상남도 창녕군 108년 신라에 병합
소문국(召文國)(혹은 조문국) 경상북도 의성군 추정 185년 신라에 병합
실직곡국(悉直谷國)
실직국(悉直國)
실직(悉直)
강원도 삼척시 104년 신라에 병합
압독국(押督國), 압량국(押梁國) 경상북도 경산시 102년 신라에 병합
우시산국(于尸山國)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경상남도 양산시 웅상 79년[16] 신라에 병합
음즙벌국(音汁伐國)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102년 신라에 병합
이서국(伊西國)
이서소국(伊西小國)
이서고국(伊西古國)
경상북도 청도군 추정 297년 신라에 병합
초팔국(草八國)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과 초계면 사이로 추정 108년 신라에 병합

3.3. 기타 서적이나 야사 기록

국가명 현재 추정 위치 소개
사량벌국 경상북도 상주시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 등장. 첨해왕 때 신라 병합
염사국 미상 삼국지 동이열전
창녕국 경상북도 안동시 연려실기술》에 나옴
구령국 경상북도 안동시
소라국 경상북도 안동시
장산국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장산 일대 동국여지승람》에 나옴

3.4. 구전

국가명 현재 추정 위치
어모국(禦侮國) 경상북도 김천시
문무국(文武國)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문무리
배산국(盃山國)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장암리
아포국(牙浦國)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아포국을 제외한 세 국가 모두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국가명으로 존재했다는 근거는 없다. 아포국은 이종휘가 지은 《동사》(東史)에서 감문국이 아포가 반란하자 토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유득공의 《이십일도회고시》에도 이에 관련된 시가 한 편 실려있다.

4. 관련 역사기록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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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무제기(武帝紀)」 2권 「문제기(文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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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 ,학소 진랑 맹타, 조방 ,장특, · 조모 · 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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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후비전(后妃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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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 ,이각 곽사 마등 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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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엽 ,유도, · 장제 · 유방 ,손자,
유복 ,유정, · 사마랑 · 양습 ,왕사,
장기 ,유초 장집, · 온회 ,맹건, · 가규 ,가충,
임준 · 소칙 · 두기(畿) ,두서 악상,
정혼 ,정태, · 창자 ,안비 영호소,
17권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18권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藏文呂許典二龐閻傳)」
장료 · 악진 · 우금 · 장합 · 서황 ,주령, 이전 · 이통 · 장패 ,손관, · 문빙 · 여건 ,왕상,
허저 · 전위 · 방덕 ·방육 ,조아, · 염온
19권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20권 「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조창 · 조식 ,양수 정의 정이, · 조웅 조앙 · 조삭 · 조충 ·조거 · 조우 ·조림(林) · 조곤 · 조현 ·조간 ·조표 ·조정 ·조림(霖)
21권 「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傳)」 22권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23권 「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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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권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25권 「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26권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한기 · 최림 · 고유 · 손례 · 왕관 신비 ,신헌영, · 양부 ,왕이, · 고당륭 ,잔잠, 만총 · 전예 · 견초 · 곽회
27권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28권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서막 · 호질 ,호위, · 왕창 · 왕기 왕릉 ,선고 영호우, · 관구검 ,문흠, · 제갈탄 ,당자, · 등애 ,주태, · 종회 ,장창포 왕필,
29권 「방기전(方技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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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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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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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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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중국

4.1.1. 《후한서》 <동이열전>

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其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城柵屋室. 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次有儉側 次有樊秖 次有殺奚 次有邑借【皆其官名.】土地肥美, 宜五穀. 知蠶桑, 作縑布. 乘駕牛馬. 嫁娶以禮. 行者讓路. 國出鐵, 濊、倭、馬韓並從巿之.凡諸(貨,貿)易, 皆以鐵爲貨. 俗憙歌舞飲酒鼓瑟. 兒生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扁音補典反.】
진한(辰韓)은 늙은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로 진(秦)나라 망명인인데, 힘든 노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을 때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나누어 주었다 한다. 국(國)을 방(邦),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술을 권하는 행위)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를 부를 때 도(徒)라 하여 진나라 말과 유사했는데 이 때문에 때로는 진한(秦韓)이라 불리기도 한다. 성책(城柵)과 옥실(屋室)이 있다. 여러 작은 별읍들은 각각 거수(渠帥.우두머리 혹은 군장)를 두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 그 다음은 검측(儉側), 그 다음은 번지(樊秖),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 한다.[17]토지가 비옥하고 오곡에 적당하다. 잠상(蠶桑)을 알고 겸포(縑布.비단의 일종)를 짓는다. 우마(牛馬)를 타고 혼인하는 예법이 있다. 보행하는 자들은 길을 양보하는 풍속이 있다. 나라에 철(鐵)이 산출되고 예(濊), 왜(倭), 마한(馬韓)에서 모두 와서 사 간다. 무릇 재화를 교환할 때 모두 철을 화폐로 삼는다. 그 풍속으로 가무(歌舞), 음주(飲酒), 고금(鼓瑟)을 좋아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모두 돌로 누른다.[18]

4.1.2. 《삼국지》 <위지> -오환 선비 동이전-

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有城柵。其言語不與馬韓同,名國爲邦,弓爲弧,賊爲寇,行酒爲行觴。相呼皆爲徒,有似秦人,非但燕、齊之名物也。名樂浪人爲阿殘;東方人名我爲阿,謂樂浪人本其殘餘人。今有名之爲秦韓者。始有六國,稍分爲十二國。
진한(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어느 노인이 대대로 전해지는 바를 말했는데, 옛날 망명인이 진(통일왕조)(秦)의 사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고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성책(城柵)이 있고 그 언어마한과 같지 않다. 국(國)을 방(邦),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술을 권하는 행위)를 행상(行觴)이라 부른다. 서로 부르기를 모두 도(徒)라 하여 진(통일왕조)(秦) 사람과 비슷한 점이 있는데 연(燕), 제(齊)의 명칭은 아니다. 낙랑 사람을 불러 아잔(阿殘)이라 하고 동방인(東方人)은 스스로를 아(阿)라고 했으니, 이는 낙랑 사람이 그들의 잔여인(殘餘人)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지금 진한(秦韓)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 6국이었는데 점점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다.

弁辰韓合二十四國,大國四五千家,小國六七百家,總四五萬戶。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爲王。【魏略曰 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土地肥美,宜種五穀及稻,曉蠶桑,作布. 乘駕牛馬嫁娶 禮俗男女有別。以大鳥羽送死,其意欲使死者飛揚。【魏略曰 其國作屋 橫累木爲之 有似牢獄也。】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市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俗喜歌舞飮酒。有瑟,其形似筑,彈之亦有音曲。兒生 , 便以石厭其頭,欲其。今辰韓人皆頭。男女近倭,亦文身。便步戰,兵仗與馬韓同。其俗,行者相逢,皆住讓路。
변한과 진한은 모두 24개 국인데 대국은 4천 - 5천 가(家), 소국은 6백 - 7백 가(家)로 총 4만 - 5만 호다. 그 12국은 진왕(辰王)에 속한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이 맡아 세세토록 계승한다. 진왕은 스스로 즉위하지는 못한다.【위략에 이르기를 유이민이 뛰어났으므로 마한의 제어를 받았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농사에 적합하고 누에 치는 법을 알아 겸포(布)(비단의 일종)를 만든다. 결혼할 때 우마(牛馬)를 타고 예속에 남녀의 구별이 있다. 장사 지낼 때 큰 새의 깃털을 쓰는데 죽은 자가 날아 오르도록 한다는 뜻이다. 【위략에 이르기를 그 나라가 집을 지을 때 나무를 가로 질러 묶는데 그 모습이 감옥과 비슷하다 】 철(鐵)이 산출되는데 한(韓), 예(濊), 왜(倭)에서 모두 와서 취한다. 시장에서는 모두 철을 사용하는데 중국에서 전(錢)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한 2군(낙랑, 대방)에도 공급한다. 그 풍속이 음주 가무를 좋아한다. 금(瑟)이 있는데 그 형태가 축(筑)과 비슷하고 또한 연주하는 음곡(音曲)이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돌로 누르는데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려는 것으로, 지금 진한 사람들은 모두 편두(頭-납작머리)다. 남녀가 왜(倭)와 가까워 또한 문신을 한다. 보전(步戰)에 익숙하고 병장기는 마한과 같다. 그 풍속으로, 길가던 사람이 서로 마주치면 모두 멈추어 길을 양보한다.

4.1.3. 《진서》 <동이열전>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진한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진(秦)의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韓)에 들어왔는데, 한(韓)이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성책(城柵)을 세웠으며, 언어는 진(秦)나라 사람들과 비슷한 점이 있어 이로 말미암아 혹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하였다.

4.1.4. 《양서》 <동이열전>

신라(新羅)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辰韓)의 종족이었다.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하는데, 양(梁)나라와는 서로 1만리 쯤 떨어져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진(秦)나라 때 유망인(流亡人)들이 역(役)을 피하여 마한(馬韓)으로 가니, 마한에서는 동쪽 땅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진(秦)나라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나라(국,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궁,弓)을 고(孤), 도둑(적,賊)을 구(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행주,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데는 모두 도(徒)라고 하여 마한과 같지 아니하다. 또 진한(辰韓)의 왕(王)은 항상 마한(馬韓)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 가고, 진한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한(辰韓)은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4.1.5. 《북사》 <열전>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나라(국,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궁,弓)을 호(弧), 도둑(적,賊)을 구(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행주,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데는 모두 도(徒)라고 하여 마한(馬韓)과 같지 아니하다. 또 진한(辰韓)의 왕(王)은 항상 마한(馬韓)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가고, 진한(辰韓)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한(辰韓)은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진한은 처음 6국(國)이었다가 차츰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는데, 신라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일설에 의하면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인들은 옥저(沃沮)로 쫓겨 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는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중국· 고구려· 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沃沮)·불내(不耐)· 한(韓)·예(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왕(王)은 본래 백제(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당초에는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군역(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신라에 귀화하니, 신라는 마침내 강성하여졌다. 그리하여 백제를 습격하고, 가라국(迦羅國)을 부용국(附庸國)으로 삼았다.

4.2. 한국

4.2.1. 《삼국유사》

《삼국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혹자는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혹은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하고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제2대 남해왕

5. 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만든 세력인가?

앞서 살펴본 중국 측 기록들에 따르면 진한(辰韓)은 진(秦)나라에서 노역을 피해 망명한 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마한(馬韓)이 나눠준 동쪽 땅에서 세력을 만든 게 그 기원이라고 기록해놨다. 심지어 몇몇 어휘가 마한(馬韓)과 달리 진나라 말(秦語)과 비슷하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진한(辰韓)이 후에 그대로 신라로 발전하기 때문에 만약 이러한 내용들을 필터링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신라의 기원은 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노역을 피해서 도망쳐와 만들어진 집단에서 시작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된다. 최근 중국학계에서는 이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진한(辰韓)을 진(秦)나라의 유민들이 세운 망명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동북공정고구려 뿐만 아니라 삼한(三韓)의 역사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럼 정말 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만든 세력일까?

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노역으로 부터 도망쳐 진한(辰韓)을 세웠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에 대한 의문점들은 시공간적으로 그 중간에 위치한 위만조선의 존재를 염두에 둘 때 어느정도 해소된다.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 [收] 中國亡命 何焯曰, 故字當作收. 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 爲 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진(秦)나라의 통일 이후) 20여 년 후 진승항우가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 제(齊) · 조(趙)의 백성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점점 에게 망명하여 갔는데 은 이에 그들을 서쪽에 두었다. …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에게 항복하였다. 에게 말하여 서쪽 경계에 살게 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중국의 망명인을 거두어 조선의 번병(蕃屛)이 되겠다고 을 설득하였다. 이 (그를) 믿고 총애하여, 그에게 박사직을 주고 홀[圭]을 내렸으며 100리를 봉하여 서쪽 변경을 지키도록 하였다.
위략(魏略)》#
중국 역사의 첫 통일 제국 진(秦)나라가 얼마 못가 멸망하고 그 유명한 초한전쟁이 일어나 중원이 다시 혼란해지니 기원전 3세기를 기점으로로 중원계 유민들이 고조선으로 대거 망명한다. 위의 사료에 따르면 당시 이들은 진(秦)나라에 의해 멸망 당한 옛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세력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진(秦)나라에게 패배 후 강제로 진(秦)나라 피지배층으로 흡수 되었으니 중국 역사상 첫 통일 제국 진(秦)나라가 유지되는 약 20년 간의 짧은 기간 동안은 진(秦)나라의 백성들로 살았을 것이다.

이렇게 고조선으로 망명한 이후 이들은 위만[19]을 주축으로 준왕[20] 세력을 몰아내고 왕위 찬탈에 성공하고 조선인 집단에 동화되어 고조선의 주요 구성원으로 합류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위만조선은 86년간 존속하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와의 왕검성 전투 패배 후 멸망하고 위만조선 유민들은 한반도 남부로 남하하기 시작한다.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일찍이 우거왕이 격파되기 전에, 조선의 상(相) 역계경우거왕에게 간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들이 따라 나선 것이 2,000여 호가 되었다. (그들도) 또한 조선에 공납하는 번국(蕃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위략(魏略)》#
有三種, 一曰馬韓,註 二曰辰韓,註 三曰弁韓校勘. 辰韓者, 古之辰國也.
한(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辰韓)은 옛 진국(辰國)이다.
삼국지》<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위략》에 따르면 기원전 110~109년 즘 위만조선 멸망 직전 우거왕의 신하인 역계경전한의 전쟁을 피해 2,000호(약 8,000~10,000명)를 데리고 다른 나라로 망명한 사실이 나오는데 이 망명한 나라가 진국(辰國)이다. 《삼국지》에서는 진한(辰韓)은 옛 진국(辰國)이라는 내용도 서술하고 있다.

진국(辰國)은 고고학적 관점에서 기원전 4세기 즘에 삼한(三韓) 이전 한반도 중부, 남부 즘 존재 했던 세력으로 추정된다. 진국(辰國)은 《후한서》 내용에 따라 이후 삼한(三韓) 전체로 이어진다고 보기도 하고 《삼국지》의 기록과 진국(辰國)과 진한(辰韓)의 이름의 연계성을 들어 진국(辰國)이 그대로 진한(辰韓)으로 이어진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던 위만조선 세력들이 전한과의 전쟁 전후로 해서 한반도 남부로 대거 이주한 사실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렇게 한반도 남부로 들어온 위만조선 세력들은 마한 구성원 중 하나인 침미다례로 들어가고 일부는 진한(辰韓) 땅에 들어오게 된다.
시조의 성은 박(朴)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B.C. 57) 갑자년(甲子年) 4월 병진일(丙辰日)에 즉위하여 호칭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니, 이때 나이가 13세였다. 나라 이름은 서나벌(徐那伐)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
삼국사기》권 제1 신라본기#
중국 측 사료 말고 한국 측 사료에서는 《삼국사기》에서 진한(辰韓)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는데 기원전 57년 박혁거세신라의 모체인 사로국을 세우기 전에 조선계 유민들이 먼저 들어와 산과 계곡 사이에 나누어 살며 진한(辰韓)이라는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노역을 피해서 도망쳐와 만들어졌다." 식의 내용은 《삼국지》에 처음 등장하는데 삼국사기》의 참고문헌에 《삼국지》가 있는 것을 보아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 역시 이 내용들을 읽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해당 내용이 전혀 나와있지 않는 것을 보면 진한(辰韓)의 어느 한 노인 말이 전설처럼 전승되어 내려온 내용들을 서술한 《삼국지(정사)》의 내용보다 《삼국사기》의 참고 문헌 목록에 있는 《국사(신라)》, 《신라고기》, 《제왕연대력》같은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선조에 대해서 직접 저술한 다수의 신라 측 문헌들을 더 신뢰했다고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해당 문헌들은 소실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해당 문헌들 중에서 당대 신라인들 시각에서 서술한 진한(辰韓)의 기원이 나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당시 진한(辰韓) 땅에는 위만조선 유민들이 들어오기 전에도 기원전 3세기 즘 고조선-연 전쟁 당시 남하한 조선인 집단, 기원전 194년 위만조선 성립기에 내려온 조선인 집단들이 먼저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멸망기에 내려온 조선인 집단까지 합세하면서 크게 3개의 조선인 집단들이 어느 쪽도 명확한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병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진한(辰韓)의 유물에서 위만조선의 영향을 받은 유물들은 발견되지만 중원계 문물 요소들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니[21] 설령 진한(辰韓)으로 망명한 위만조선 집단 내에 중원계 이민자 집단을 선조로 두고 중원계 정체성을 유지하던 소수 세력들이 있었다 한들 신라의 모체가 되는 진한(辰韓) 6부 성립에 존재감을 나타내지 못했으며 대부분은 위만조선 성립기부터 멸망 후 진한(辰韓) 땅으로 남하하는 거의 100년이 조금 넘는 세월 동안 조선인 집단과 부대끼면서 아예 흡수 내지 동화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진한(辰韓)이 마한(馬韓)의 제어를 받았고 자체적으로 왕을 세우지 못했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 역시 모호한 대목이다.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註 自號韓王. 魏略曰: 其子及校勘 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준왕은 가까운 궁인(宮人)들과 도망쳐 바다로 들어가서 한(韓)의 땅에 자리 잡았으므로, 호칭을 한왕(韓王)이라고 하였다. <위략>에서 말하기를, "그 아들과 친척들 중에 나라(고조선)에 남은 자들이 이를 모방하여 한씨라고 하였다."고 했다. 준왕은 해외(마한)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
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당초 조선준왕위만에 패했을 때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깨트리고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절멸되자, 마한(馬韓)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후한서》 동이 열전 #
위 사료들 살펴보면 기원전 194년 위만고조선 왕위 찬탈로 인해 준왕마한(馬韓) 땅으로 망명하여 '한왕(韓王)'을 자칭하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준왕위만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측근 일부와 몇 천의 병력만 이끌고 남하한 상황에서 큰 저항 없이 마한(馬韓)을 지배한 것을 보아 기원전 194년까지만 해도 마한(馬韓)이라는 세력이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한(馬韓)이 삼한(三韓) 중 제일 강력했을 수는 있지만 기원전 194년 위만 세력에게 쫒겨 내려온 준왕 세력에게 쉽게 제압 당했다는 것을 보면 기원전 57년 사로국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약 150년 간 진한(辰韓)을 속국화했을 만큼 강했는지 의문점이 드는 대목이다. [22]

그리고 진나라 말(상고 중국어)과 비슷하다는 기록 역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 范書東夷傳,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 光武, 封蘇馬諟, 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謁. 章懷注, 廉斯, 邑名也. 魏略曰: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註 漢書,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乃使人殺朝鮮王右渠, 來降.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註 亦與朝鮮貢校勘 蕃不相往來. 貢, 疑作眞.至王莽地皇時, 廉斯鑡爲辰韓右渠帥, 聞樂浪註 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語非韓人. 問之, 男子曰:「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 爲韓所擊得, 皆斷髮爲奴, 積三年矣.」 鑡曰:「我當降漢 樂浪, 汝欲去不?」 戶來曰:「可」 (辰)校勘 鑡因將戶來(來)校勘 出詣含資縣, 兩漢志, 樂浪郡含資, 三國魏, 改爲帶方郡. 晋志, 屬帶方郡. 一統志, 故城, 今朝鮮京畿道城之南境. 官本考證云, 辰鑡辰字·來出來字, 疑皆衍.縣言郡, 郡卽以鑡爲譯, 從芩中乘大船入辰韓, 逆取戶來. 降伴輩尙得千人.
왕망의 지황(기원후 20년 ~ 23년) 때에, 염사치(廉斯鑡)가 진한의 우거수[23]가 되었는데 낙랑 땅이 비옥하여 사람들의 삶이 풍요롭고 안락하다는 말을 듣고 도망쳐서 내항하고자 했다. 살던 읍락을 나오다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가 쓰는 말이 한(韓)[24] 사람(의 것)과 같지 않아 이유를 물어보자,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한(漢)[25]의 사람으로 이름은 호래(戶來)라고 불린다. 우리들 1,500명은 목재(材木)를 벌채하다가 한(韓)[26]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우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 고 하였다. 이 때 염사치(廉斯鑡)는“나는 한나라낙랑군(樂浪)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 하니, 호래(戶來)는,“좋다.”하였다. 그리하여 염사치(廉斯鑡)는 호래(戶來)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含資縣)으로 갔다. 함자현(含資縣)에서 낙랑군에 연락을 하자, 군(郡)에서는 염사치(廉斯鑡)를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辰韓)에 들어가서 호래(戶來)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위략(魏略)》#
위의 기록은 진한(辰韓)의 군장 중 한명인 염사치[27]라는 인물이 한나라가 설치한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에 항복하러 가는 내용이다. 여기서 염사치는 통역을 맡았다는 것을 보아 진한어상고한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보이며 호래(戶來)라는 사람은 한사군 출신 한족으로 벌목하다가 진한(辰韓) 사람들한테 잡혀 노예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해당 기록을 통해 당시 진한어는 상고 중국어와 명확하게 구분됐으며 진한인과 중국 한족은 정체성 역시 달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진한(辰韓)은 사로국을 주축으로 그대로 신라로 발전했고 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신라어는 현대 한국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만약 진한어가 상고 중국어와 어족이 같았다면 지금 현대 한국어 역시 중국어와 비슷했어야 한다. 따라서 진한어가 상고 중국어와 비슷하다는 기록이 있는 건 두 언어의 어족 자체가 같다고 해석하기 보다 삼한(三韓) 언어 중에서 진한어가 중원계 어휘를 일부 차용했기 때문에 해당 기록들이 남아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당시 진한이 위만조선낙랑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어휘도 함께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진한(辰韓) 사람들은 박(瓠)을 박(朴)이라 일컬었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표주박과 같았던 까닭에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진한(辰韓)의 말로 왕을 뜻한다(혹은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권 제1 신라본기#
역시 다른 기록을 보면 중원계 어휘만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 《삼국사기》를 통해 진한(辰韓)만의 자체적인 어휘 역시 사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5.1. 결론

중국 측 기록들을 총 종합해 봤을 때,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멸망 후 내려온 고조선 유민들이 진한(辰韓) 성립에 일정 기여를 했고 이들 중 소수는 앞서 언급된 것처럼 연(燕) · 제(齊) · 조(趙)중원계 이민자들을 선조로 모시고 있었을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이들 선조들이 전국시대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진(秦)나라의 피지배층으로 복속 되었던 시대적 상황을 봤을 때 중원 기준 동북면에 위치했던 이들 조상 중 일부가 고조선으로 망명하기 전 짧은 기간 동안 중국 측 기록대로 만리장성 건설 노역에 동원되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후손들은 늦어도 진한(辰韓) 6부가 성립되는 시점에는 조선인 집단으로 완전히 흡수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인 집단에 흡수되는 과도기에 중원계 이민자들이 진한(辰韓) 땅으로 들어갔다는 식의 내용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중국 측에 흘러 들어갔고 이게 몇 번 꼬여서 후대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전승되면서 진(秦)나라에서 노역을 피해 도망친 노역꾼 집단들이 진한(辰韓)을 세웠다는 식의 와전된 기록이 남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28]

물론, 이는 중국의 기록들을 기반으로 둔 이론일 뿐, 역사적으로 중국이 워낙 중화사상이 심하다 보니 상술된 것들이 정확한 정보인지는 불명. 애당초 "진나라의 진한"이란 어느 "늙은 노인"의 발언을 계기로 퍼진 논리이며 그의 동기 또는 신상, 심지어 이름까지 알려지지 않는 상태다. 즉, 카더라식 정보를 중화사상에 포함하기 위해 추가한 것으로 추정된다.[29] 그리고 삼한 국가들 중 가장 이름이 유사한 진한을 찝어서 "진나라=진한"이라고 가정한 듯. 생각해보면 매우 비상식적인 논리이며, 당시에 "진(辰)"은 "동쪽"을 의미했다고 대만담강대학의 첸궈핑 교수가 밝혔다.
「馬」是南邊的意思、「弁」是明亮的意思、「辰」是東方的意思,而「韓」則是大的意思。很明顯的,「馬韓」是南方大國,「弁韓」是明亮、光明的韓國,「辰韓」則是東方大國的意思。
마한의 "마(馬)"자는 '남쪽'을, 변한의 "변(弁)"자는 '밝음'을, 그리고 진한의 "진(辰)"자는 '동쪽'을 의미했으며 한국의 "한(韓)"자는 '크다'는 뜻을 의미했다. 즉, "마한"은 '남쪽의 큰나라(대국)', "변한"은 '밝은 큰나라' 및 "진한"은 '동쪽의 큰나라'라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진한"이라는 뜻 자체는 "진나라"가 염두에도 없는 채 작명됐다는 뜻. 뿐더러, "한(韓)"은 고대 발음으로 "Gar/가르"로 발음됐다고 전해지며 일본어의 고대 한반도를 일컫는 "카라(から)"를 비교했을 때 두 한자 다 "한국어족"의 의미를 담아낸 것으로 추정되지, 중국티베트어족을 반영한 이름이 아닌 것이 명확해진다.[30]
또한, 지리적으로도 그렇고[31] 역사적으로도 진한은 진국을 계승했다고 하였기에 한국의 기록에서는 진나라 기원에 대한 정보를 일절 찾을 수 없다.

6.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삼한이 '한국 역사 상의 국가와 민족을 통칭'하게 되면서, 진한 역시 마한, 변한과 함께 한국(자체)를 부르는 명칭으로도 굳어졌다. 그중 진한삼한의 다른 마한이나 변한과는 다르게, 아주 '강력한 특징'으로는 '수장국'이 '단 한 번도 바뀐 바 없었다는 점'과, 마한의 '최초 수장국'은 건마국이었으나,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목지국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고, 그 목지국마저 백제에게 강제적으로 편입당했다.

한편 변한은 '초기에는 구야국(금관국)'이, '후기에는 반로국(반파국)'이 '주도권을 차지'하긴 하였으나, 마한이나 진한과는 달리 '나머지 소국들 모두'가 너무나도 '경제/군사적으로 역량이 뛰어'나, 어느 '한 소국이 순조롭게 다른 소국들을 병탄해, 고대 국가로 성장하기 어려운' 구조[32]였다. 한편 진한의 경우, '원래부터 수장국인 사로국이 순조롭게 성장해'나가면서 다른 '진한 소속 소국들을 공납 지배-직접 지배로 전환'하면서, '고대 국가'로 거듭난 경우다.[33] '신라가 진한을 계승했다기'보다는, 진한 자체가 순조롭게 진화하고 발전해서 신라가 되었다고 보는 게 실상에 더 가깝다.

고려시대에는 만월대 내 별궁 중 하나를, '진한궁(辰韓宮)이라 명명'했는데, 이는 '진한을 한국사를 이루는 고대국가 중 하나로 인식'했고, 계승의식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 문종의 11번째 아들 왕유(? - 1099년)는 진한후(辰韓侯), 진한공(辰韓公)라는 작위를 지낸 기록이 있으며, 공예태후의 어머니 이씨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요나라가 고려로 보낸 국서에도 고려를 진한(辰韓) 또는 진한과 변한(辰卞)으로 지칭한 기록이 남아있다.

7. 문화재

8. 진한 관련 인물

9. 외부 링크

10. 같이보기



[1] 나라들[2] 백제식 금동관은 경기 화성, 충남 천안, 서산, 공주, 전북 익산, 전남 고흥에서 출토되었으며, 수도 지역이 아닌 지방에서만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지방세력 포섭을 위한 하사품으로 추정된다. # 백제 중앙세력은 금동관이 아닌 오라관(검은 비단모자)를 쓰고 금제, 은제 장식을 부착하는 방식이었다.[3] 경북 북부지역인 의성, 군위, 상주, 예천, 안동, 영주, 봉화, 청송 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로 경주 지역 토기와는 다르다.[4] 주보돈은 《삼국지》 기사에서 진한인의 경우 이주민이라는 자의식이 있다고 나오는데 반면 변한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비록 진한과 변한 모두 토착인이 다수긴 하지만 지배집단이 외래계인 진한과 토착인인 변한으로 나눠진다면, 모시는 조상신이 다르다는 것이 《삼국지》를 쓴 중국인에게는 제사를 지내는 신이 다른 것으로 비춰진 것이 아닐까 추론하기도 했다.[5] 어차피 제사의 예법이란 건 기본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문화라 현대에도 같은 도시 같은 마을에서도 집안마다 서로 신기해할 정도로 다른 경우가 많으니 다른 문화가 같은데 제사만 약간 다르다는 정도는 유의미한 문화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6] 사실 이 서적은 청나라 시절 만주족들이 진한, 변한, 마한, 백제, 신라, 옥저, 발해 등등 여기저기를 모두 만주족 역사(...)로 왜곡하기 위해 만든 서적이었다. 왜곡을 하기 위해서라지만 나름 연구도 했던 모양.[7] 변군미국(弁軍彌國)[8] 이저국(已柢國)이라고도 한다.[9] 울주군 언양읍으로 추정되기도 한다.[10] 경상남도 창녕군 으로 추정.[11] 경상북도 포항시로 추정.[12] 울주군 온양읍으로 추정.[13]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으로 추정.[14]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으로 추정.[15] 경상북도 경산시 혹은 경상남도 창녕군으로 추정.[16] 《삼국사기》에는 거칠산국(부산광역시)과 같이 병합되었던 사건만 <거도 열전>에 있고 시기에 관한 내용은 없으며 79년은 《동국통감》, 《동사강목》 기록.[17] 모두 그 나라의 관직 명이다.[18] 편(扁)의 발음은 보전(補典)이라 한다.[19] 위만이 연나라 사람인지 연나라 땅에 거주했던 고조선계 사람이었는지는 해석이 엇갈린다. 자세한 내용은 위만조선 문서를 참고 바란다.[20] 준왕은 여기서 죽는 게 아니라 한반도 남부로 남하에 마한의 왕이 된다.[21] 실은, 더 발굴해봐야 그런 근거가 나올 개연성 역시 없는 상태다. 서라벌은 후삼국통일 이후 지방 도시로 떨어지고 중심지도 바뀌면서 오히려 고고학적 자료들은 더욱 보존이 훨씬 잘 되었기 때문.[22] 다만 국력차는 상대적인 것이니 마한이 준왕 세력보다 약했다고 해서 진한을 복속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게다가 준왕 세력이 마한에 합류한 이후에는 마한의 국력 자체는 오히려 강해졌을 것이다.[23] 군장 칭호[24] 진한[25] 중국 한족[26] 진한[27] 해당 기록에서는 염사치를 진한의 우거수(군장)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염사치진한(辰韓)을 구성하는 주요 12국 출신이 아니라 경주·대구 세력권과 가까운 어느 소국의 신지(臣智)로 간주하고 있다.#[28] 심지어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계 도래인들도 이 중국 망명인 전승을 간직하고 가서, 진나라의 진(秦) 글자를 성으로 써서 하타(秦)씨가 되었다. 신찬성씨록에서는 하타씨가 진시황의 후손이라 기록돼있지만, 현대 학계에선 신라 출신으로 여겨지는 편이다. 하타 문서 참조.[29] 이는 중국에서 자주 있었던 일이므로 신라의 선도성모도 중국인이라고 주장했었다. 이를 처음 접한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은 그 당시에도 왜곡을 의심하여 삼국사기에 추가하지 않았던 사례가 있다.[30] 만약 그렇다 한들, "진한(秦韓)"은 중국어 + 한국어 혼종이 되어버린, 전혀 말이 안되는 현상이 돼버린다. "한국"을 "한컨트리(韓Country)"라고 한국어 + 영어로 짓는 것과 마찬가지.[31] 현재 만주에 위치한 고조선에서 진한까지 내려온다는 것 자체가 의문점이다. 진국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그나마 가까운 마한이나 변한 주변이면 모를까 중국 보단 일본에 더 가까운 진한에 정착한 것은 실질적으로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진다.[32] 즉 금관국이나 반파국이 못나서가 아니라, 안라국이나 고자국 등 여러 소국들의 역량이 지나치게 뛰어났음.[33] 다시 말해 변한, 마한의 관계와는 대단히 진행 양상이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