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1 14:08:26

노순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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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盧循
(? ~ 411)

동진해적, 농민 봉기의 주도자. 노심(盧諶)[1]의 증손자.

2. 생애

손은의 매부로 402년에 그가 사망하자 무리 수천 명이 그를 주군으로 삼자 서도복과 세력을 이끌었으며, 정신, 안색이 맑고 수려하면서 재주, 기예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젊을 때 승려 혜원은 그에게 비록 몸에 풍류가 있지만 뜻은 불궤한 일에 두고 있으니 어찌 하냐고 했다.

402년 5월에 임해에서 동야으로 들어왔다가 유유가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 격파되어 영가로 달아났으며, 403년 봄 정월에 서도복에게 동양을 노략질하도록 시켰고 유유의 공격을 받아 영가에서 격파되자 추격을 받아 진안에서도 여러 차례 격파당하고 바다로 나아가서 남쪽으로 달아났다.

404년에 남해를 노략질하고 번우를 공격해 겨울 10월 9일에 백여 일을 싸운 끝에 밤에 성을 습격해 함락시키고 관서, 백성들의 집을 모두 불사르면서 광주자사 오은지를 사로잡았으며, 평남장군이라 자칭해 광주 지역의 일을 간섭했다. 불에 탄 뼈를 모아서 공동의 묘를 만들어 작은 섬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해골이 3만여 개나 되었고 서도복에게 시흥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왕탄[2]을 평남장군부 장사로 삼았다가 왕탄이 유유에게 후한 대우를 받아 북쪽으로 돌아가면 관직을 맡을 것이기에 후한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하면서 사양했다.

405년 여름 4월에 동진 조정에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쳐 21일에 광주자사에 임명되었으며, 노순이 익지종을 보냈다가 유유가 속명탕을 되돌려보냈다. 유유가 편지를 통해 오은지를 돌려보내도록 했지만 노순은 이를 따르지 않았는데, 왕탄이 유세하자 오은지를 왕탄과 함께 돌려보냈다.

410년에 유유가 남연을 공격하기 위해 북벌을 시행하면서 후방이 비자 서도복이 빈 틈을 타 건강을 공격하라고 했지만 듣지 않다가 서도복이 번우에 와서 유세하자 이를 승낙해 410년에 서도복과 군사를 나누어 공격하면서 노순은 시흥에서 출발해 상에 있는 여러 군을 공격했으며, 형주자사 유도규가 군사를 파견해 맞서 싸우자 장사에서 격파하고 노략질을 했다.

3월 20일에 서도복과 예장에서 합류해 하무기가 이끄는 군사가 오자 격파했으며, 나아가서 파릉에 이르러 강릉으로 향하려고 했다가 서도복으로부터 유의가 도착한다는 소식과 함께 그 군사를 격파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서도복과 함께 5월 7일에 파릉에서 출발해 상락주에서 유의의 군사를 격파했다.

심양에 도착해 유유가 남연을 멸망시키고 남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강릉을 공격해 형주, 강주 등을 점거하고 동진 조정과 싸우려고 했는데, 서도복이 이긴 기세를 타고 지름길로 진군해야 한다고 주장해 다투어 여러 날을 미루다가 서도복의 의견을 수용했다. 노순은 강주, 예주 등에서 이기고 4월 14일에 회구에 도착해 안팎에서 경계를 엄하게 했는데, 서도복이 신정에서 백석에 도착해 배를 불태우고 올라가서 여러 길로 유유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지만 노순은 모든 것을 안전하게 하는 것으로 계책을 삼고 거절했다.

노순은 군사들을 남쪽 연안에 매복시키고 늙고 약한 사람들을 배에 태워 백석으로 향하게 하면서 겉으로 소리쳐서 백석에서부터는 걸어서 위로 올라가려고 했으며, 유유가 사포를 차단하고 경계해 견고하게 지키게 했지만 29일에 노순이 사포를 불 지르고 진군해 장후교에 도착했다. 노순의 정예병을 이끌고 대규모로 올려보내 단양군에 도달했으며, 노순은 여러 현을 노략질해도 얻은 바가 없어 심양으로 돌아가 힘을 합친 후에 형주를 탈취하기로 한다.

가을 7월 10일에 채주의 남쪽에서 심양으로 돌아가 범숭민을 남겨 5천 명을 거느리고 남릉을 점거하게 했으며, 강주자사 유열이 파양태수 우구진을 선봉으로 앞세워 공격하자 노순은 격파되어 예장을 빼앗기고 양도가 끊어졌고 광주를 지키던 노순의 부하들은 손처의 공격으로 격파되었다. 노순은 유유가 뇌지에 진을 치자 겉으로는 강줄기를 타고 신속히 내려가야 하면서 싸우려고 했는데, 유유가 이를 간파해 12월 1일에 대뇌에서 진을 쳤다. 2일에 서도복과 함께 무리 수 만 명을 거느리고 강을 꽉 채우면서 내려가다가 유유가 가벼운 배를 보내 공격하고 센 쇠뇌로 노순의 군영을 쏘면서 화공을 사용해 대패해서 심양으로 돌아갔다.

411년 2월, 노순은 흩어진 군졸 수천 명을 모아서 시흥, 번우로 돌아가 재차 포위했지만 심전자가 손처를 구원하고 공격하자 격파되어 1만여 명이 죽는 피해를 입는다. 노순은 심전자, 손처의 추격을 받아 창오, 울림, 영포 등에서 격파되었다가 손처가 병으로 진군하지 못하자 노순은 교주로 도망갔으며, 노순은 합포를 습격해 깨뜨리고 두혜도가 문무 관리들을 인솔하자 노순은 석기에서 방어하고 이들을 격파했다.

이탈이 이끄는 이족, 요족 등의 5천여 명에게 호응을 받았고 3월 24일에 용편 남쪽 나룻가에 도착해서 두혜도와 싸웠지만 여러 배가 불태워지거나 군사가 궤멸해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아내, 아들에게 짐주를 마셔 죽게 하고 기첩들 중에 죽기를 사절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면서 노순은 스스로 물 속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1] 염민이 후조를 멸망시킬 때 죽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학자 노식의 고손자이자 노육의 증손자다.[2] 이전에는 낭야의 내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