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20:17:56

소속(서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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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邵續
생몰연도 미상

서진의 인물로 자는 사조(嗣祖). 사예주 위군 안양현 출신으로 서진 시기에 산기시랑을 지낸 소승(邵承)의 아들이다.

2. 생애

어릴 적부터 책을 많이 박식했고 천문과 지리에 밝았으며 원대한 포부를 품었다고 한다. 성도왕 사마영은 똑똑하다 소문난 소속을 참군으로 삼아 데리고 다녔다. 팔왕의 난이 일어나 사마영이 하간왕 사마옹과 손 잡고 장사왕 사마예를 치려 할 때 반대하며 간했으나 사마영이 듣지 않았다. 이에 사마영을 떠나 연주자사 구희의 참군이 되었다가 승진해 심수(沁水)에 현령으로 부임했다.

314년 2월, 영가의 난으로 천하가 어지럽자 소속은 심수현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람 수백 명을 모으고 나라를 지키고자 다짐하였다. 유주자사 왕준은 그런 소속을 가상히 여겨, 그를 안무장군, 낙릉태수로 삼아 염차(厭次)를 진수하게 했다. 소속이 난으로 흩어진 백성들을 달래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소속은 석륵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아들 소예(邵乂)를 독호로 삼아 부평성(富平城)에 주둔시켰다.

314년 3월, 석륵은 하북의 최대 세력을 자랑하던 왕준을 기만해 그 군대를 섬멸하고 유주와 기주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하북에서 석륵에게 반항하는 세력은 계성을 점거하고 있는 선비족 단부의 단필제와 낙릉군의 소속 뿐이었다. 석륵은 소속의 아들을 사로잡아 소속을 강제로 복종시킬 심산으로 부평성을 함락하고 소예를 사로잡았다. 소속은 어쩔 수 없이 석륵에게 항복했고, 석륵은 행여나 소속이 변심할 것을 우려해 소예를 인질 겸 자신의 독호로 삼아 곁에 두었다. 그때 소속에게 의탁하고 있던 유윤은 소속이 강제로 항복했음을 알고 강동의 낭야왕 사마예에게 귀부하자 권했고, 소속 또한 동의하여 그의 말을 따랐다. 어떤 이가 아들이 위험할 것이라 조언했는데 소속은 울면서 말했다.
"나는 고향에서 사람을 모집했을 때부터 국가를 위해 이 한 몸을 바치기로 맹세하였거늘, 어찌 아들을 중히 여겨 국가의 반역자가 될 수 있겠는가!"
소속이 석륵과 단교를 선언하자 과연 석륵은 소예를 단숨에 죽여버리고 낙릉을 쳤다.

이미 석륵의 공격을 예상하던 소속은 서둘러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단필제에게 원군을 요청하니 단필제의 동생 단문앙(段文鴦)이 선비기병 부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그러나 단문앙이 도착하기도 전에 석륵이 8천 기병으로 먼저 염차성에 도착해 맹공을 개시했다. 하지만 소속이 직접 성벽 위에 올라 분전하니 며칠 동안 함락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단문앙의 구원군이 도착하자, 석륵은 선비기병의 위명을 익히 들어 두려워했으므로 공격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후퇴했다. 소속과 단문앙은 석륵을 안릉(安陵)까지 추격해 석륵의 부하들을 포로로 잡고, 갈족 3천여 호를 북방으로 쫓아낸 뒤, 상산 일대의 2천여 호를 약탈해 돌아왔다. 이윽고 사마예에게 보냈던 사자가 돌아와 소속이 평원태수로 임명되었음을 알렸다.

314년 12월, 낭야왕 사마예가 또다시 사자를 보내 소속을 기주자사로 승진시키고, 유하(劉遐)를 평원내사로 삼았다. 소속은 동향 출신인 유하를 알아보고는 귀히 여겨 자신의 딸 소씨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유하는 기주에서 연주로 통하는 길목에 요새를 세워 석륵의 공세를 막으면서 든든한 아군이 되어주었으나, 오래지 않아 하비내사로 옮겨져 소속과 헤어졌다.

317년 6월, 소속은 태위 순조(荀祖), 청주자사 조억(曹嶷), 영주자사 왕손, 동이교위 최비(崔毖)와 함께 진왕 사마예에게 칭제를 권하는 표문을 올렸으나 사마예가 사양하였다.

319년 4월, 단말배와 석륵군에게 패해 계를 빼앗긴 단필제 형제는 낙릉으로 도망쳐 소속에게 의지했다. 석륵 휘하에 있던 남화령 조령(趙領) 등도 수천 호를 거느리고 소속에게 항복해왔다. 결국 낙릉군은 하북에서 고립되어 홀로 석륵과 싸우는 형세가 되고 말았다. 동진의 황위에 오른 원제 사마예는 소속에게 평북장군을 겸하게 하고 축아자(祝阿子)에 봉했다.

동진은 낙릉군으로부터 2천여 리 이상 떨어져 있었으므로 응원 메세지가 담긴 조서 외에는 중앙으로부터 어떠한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에 소속은 영지 확장과 둔전을 통한 식량 확보에 무리하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소속은 단문앙과 자신의 조카인 무읍내사 소존(邵存)을 보내 부평성 탈환함으로써 영토 확장의 첫 발판을 내딛으려 했으나 석륵에게 패배하면서 좌절되었다. 여기에 더해, 같은 편인 청주자사 조억은 소존이 패한 것을 기회로 삼아 낙릉군을 노략질해댔다. 분노한 소속이 소존과 단문앙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제남에서 무력 시위를 하도록 명하자, 조억은 놀라 화친을 맺고 군대를 물렸다.

320년 2월, 단필제가 소속을 설득해 병력을 지원받아 동생 단문앙과 함께 계의 단말배를 정벌하러 갔다. 석륵은 소속의 전력이 약해진 틈을 타 맹장 석호를 보내 염차성을 치게 했다. 석호는 소속이 백성들을 애지중지하는 마음을 이용해, 인근 지역 주민들을 납치하여 성벽 앞까지 끌고 와 능욕하고 잔인하게 살육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성벽 위에 올라 그 참상을 보던 소속은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군사들을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와 석호군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석호가 대기시켜 놓은 기병이 소속군의 뒤를 잘라 퇴로를 차단했고, 이내 석호가 돌격 명령을 내리면서 소속의 군대는 앞뒤로 공격받아 전멸하였다.

소속을 사로잡은 석호는 그에게 성을 지키는 부하들을 향해 투항을 권유하라 명했다. 소속은 성 앞까지 걸어가 머리를 치켜 들고 가슴을 핀 뒤 소리쳤다.
"나는 국난을 씻음으로써 국가에 보은하려는 뜻을 세웠는데, 불행히 지금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너희들은 앞으로 온 힘을 다하여 단필제를 대장으로 섬기고 두 마음을 품지 말도록 하라!"
석호는 서둘러 소속을 붙잡아 군영으로 끌고 들어간 뒤 다시 염차성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으나 성을 지키던 소속의 조카 소축(邵竺) 등은 소속의 말을 받들어 필사적으로 싸웠다. 석호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잠시 물리고 소속을 후조의 황제 석륵이 있는 양국(襄國)으로 보내 그 처분을 맡겼다.

석륵은 직접 소속을 만나지 않고 사자 서광을 보내 그를 문책하였다.
"무릇 황제란 국가를 바로 세우고 마땅히 혼란을 수습함으로써 팔방에서 귀의해 오도록 만들어야한다. 짐의 명성은 이미 널리 퍼졌음에도 그대는 오히려 사마예에게 의지하여, 교만하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짐의 황명을 받들지 않았다. 그대는 짐이 오랑캐라 황제의 자격이 없다 여기는가? 그대는 어찌 이리도 식견이 짧은가? 천하는 덕이 있는 자가 차지한다 하였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리도 명료하게 차별하는가?"
그러자 소속이 답했다.
"천하가 대란하니, 각 지방의 호걸들이 영웅으로서 본색을 드러냈다. 이럴 때 나라를 지키는 것이 의사(義士)의 소임이다. 내가 진나라(동진)에 귀순한 것은 나의 충심일 뿐, 다른 것은 없었다. 나와 함께하는 지사(志士)들은 의리가 투철한 자이니 결코 네게 항복하지 않을 거다. 한족이고 아니고가 무슨 상관인가? 주나라 문왕도 서역에서 태어났으며, 하나라 우왕도 강족이었다. 당대 제왕의 탄생은 하늘의 뜻이고 은덕의 확산이니, 거기에 무슨 이치가 있겠는가! 이르노니 나는 그저 죄수일 뿐이며 형장에서 그 최후를 장식하고 싶구나. 그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이니 당당히 임하겠다."
서광으로부터 소속의 말을 전해들은 석륵은 감격하며 말했다.
"소속의 충성과 용기는 무척이나 아름답도다! 그의 이런 충성심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다!"
석륵은 역관에 대기중이던 소속을 환대하고, 그를 종사중랑에 임명해 함께 성밖에서 사로잡힌 부하들을 모두 살려주어 다시 소속 휘하에 배속시켰다. 그러나 소속은 끝내 석륵을 위해 일하려 하지 않았고, 녹봉도 거절하면서 홀로 채소밭을 일궈 자급자족하며 살았다.

321년, 석호가 마침내 염차성을 겨우 함락시켰고 소속의 조카 소축(邵竺)과 소집(邵緝), 단필제 형제 모두 사로잡혀 양국으로 끌려왔다. 소속은 염차성 함락 후 얼마 안가 살해되었다고 모호하게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와 오랜 기간 동료로 활동했던 단필제가 석륵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있었던 걸 고려하면 소속도 이때 연루되었을 가능성은 높다.

3. 기타

소속의 딸 소씨는 아버지 소속의 기풍을 이어받아, 유하가 석륵의 기병대에게 포위당했을 때도 기병 몇 명만 거느리고 돌진하여 남편을 구출했을 정도로 용감하였다. 또, 유하가 죽고 유하의 매부 전방(田防)과 그 무리들이 반란을 획책할 때, 은밀히 반란군의 무기와 갑옷을 수거하여 전부 소각함으로써 반란을 사전에 방지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