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8-17 15:11:42

요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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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무소제 문환제 말제
추존
경원제 · 위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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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966cc><colcolor=#ece5b6>
후진 제3대 황제
요홍 | 姚泓
출생 388년
후진 장안
(現 산시성 시안시)
즉위 416년
후진 장안
(現 산시성 시안시)
사망 417년 9월 (향년 30세)
동진 건강
(現 장쑤성 난징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후진 제3대 황제
416년 1월 ~ 4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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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966cc><colcolor=#ece5b6> 성씨 요(姚)
홍(泓)
원자(元子)
부모 부황 고조 문환제
모후 불명
배우자 불명[1]
자녀 불명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제호 말황제(末皇帝)
연호 영화(永和, 416년 ~ 4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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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태자 시절2.2. 즉위
2.2.1. 계속되는 반란2.2.2. 후구지와 북하의 침략
2.3. 유유의 북벌
2.3.1. 낙양 함락2.3.2. 태원공 요의의 난2.3.3. 제공 요회의 난2.3.4. 동관 방어전2.3.5. 요류 전투2.3.6. 위수 전투
2.4. 후진의 멸망과 최후
3. 후일담4. 둘러보기

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의 16국 중 하나인 후진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멸망군주이기 때문에 묘호와 시호는 없다. 통칭 말황제(末皇帝)이다.

2. 생애

2.1. 태자 시절

요홍은 문환제 요흥의 장남으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 또, 사리에 밝아 식견이 있었고 마음이 너그러웠으나, 세상을 다스릴 만한 계략은 없었으며, 몸이 나약하여 잔병이 많았다. 요흥은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이러한 점으로 인해 오랫동안 망설이며 결단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태자(太子)로 세웠다. 이후 요흥이 정벌이나 순행에 나설 때마다 항상 요홍을 남겨 후방의 정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요홍은 경전과 서적을 널리 읽었으며, 특히 담론을 잘하였고 평소 시를 짓고 읊는 것을 좋아하였다. 상서 왕상(王尚), 황문랑 단장(段章), 상서랑 부윤문(富允文)은 유학에 능하여 곁에서 경전을 강론하였고, 호의주(胡義周)와 하후치(夏侯稚)는 문장으로 그와 교류하였다. 또한 요홍은 박사 순우기(淳于岐)에게 경전을 배웠는데, 순우기가 병이 들어 집에 머물자 요홍은 이렇게 말했다.
"스승이란 사람들의 모범이며 선대의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이다. 또한 임금, 부모와 더불어 존중해야 할 세 가지 가운데 하나이니, 소홀히 대할 수 없다."
이에 직접 순우기의 집으로 찾아가 병을 살피고 그의 침상 아래에서 절하였다. 이때부터 공경들도 자신의 사부(師傅)를 만나면 절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상서 왕민(王敏)과 우승 곽파(郭播)는 형벌과 정사가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여겨 법제를 더욱 엄격하게 만들 것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요홍이 말하기를,
"사람은 좌절하고 모욕을 당하면 분노하고 격한 마음이 생기고, 정치와 교화가 번잡하고 가혹해지면 법망을 어떻게든 피하려는 행동이 생겨난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교화하는 것은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지는 것과 같다. 그대들은 조정의 교화를 보좌하고 정치의 법도를 널리 밝히는 자들인데, 어질고 너그러운 도리를 힘쓰지 않고 오직 법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려 하니, 어찌 이것이 윗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도리이겠는가?"
라 하니, 왕민 등은 이에 그 논의를 그만두었다.

홍시 11년(409년) 2월, 문환제 요흥이 평량(平涼)으로 갔을 때, 빙익(馮翊) 사람 유궐(劉厥)이 수천 명을 모아 만년(萬年)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요홍은 진군장군 팽백랑(彭白狼)에게 동궁(東宮)의 금군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였고, 이내 유궐을 참수한 뒤 나머지 반란 무리는 사면하였다. 이때 여러 장수가 모두 요홍에게 권하였다.
"저하의 신묘한 계책이 번개처럼 발하여 추악한 역도를 깨끗이 평정하였습니다. 마땅히 노포(露布)를 올려 승전을 보고하면서 적의 수급 수를 넉넉히 기록하여 멀고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요홍이 거부하며 말했다.
"주상께서 나에게 후방의 일을 맡기시며 도적과 반역을 막게 하셨거늘, 내가 다스리고 위무하는 데 조화를 잃어 도적과 간악한 무리가 자라나게 하였다. 마땅히 내 허물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책망하며, 군중의 장병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지 않아야 할 판인데, 어찌 감히 지나치게 스스로를 자랑하고 공을 과장하여 죄책을 더욱 무겁게 만들겠는가?"
상서좌복야 위화(韋華)가 이 말을 듣고 하남태수(河南太守) 모용축(慕容築)에게 말했다.
"황태자께서는 참으로 공손하고 인자한 덕(德)을 지니셨으니, 이는 사직의 복이오."

아버지 문환제 요흥이 병들어 눕자, 요홍의 동생 광평공 요필(姚弼)은 적통의 지위를 빼앗으려는 행태를 대놓고 드러냈지만, 요홍은 예전과 다름없이 은혜를 베풀어 대하였으며 낯빛으로도 불쾌한 기색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숙부인 동평공 요소가 번번이 요필의 우익이 되어 그를 도왔지만, 요홍은 그에게도 마음을 다하여 종친의 어른으로 섬기며 조금도 꺼리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요소 역시 이에 감복하여 마음을 요홍에게 돌리고 충절을 지켰다.

2.2. 즉위

2.2.1. 계속되는 반란

홍시 18년(416년) 정월, 남양공 요음(姚愔)은 요홍과 요필의 동생으로, 요홍의 다른 형제들과 달리 요필을 지지하였는데, 아버지 문환제 요흥의 병세가 심히 위중해지자 그가 붕어한 줄로 착각하고 거병하여 궁중에서 소란을 피웠다. 그러나 요흥이 아픈 몸을 이끌고 군중 앞에서 요필을 자결하게 하니, 요음의 군대는 결국 무너져 흩어졌고 요음은 여산(驪山)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반란이 정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흥은 신임하는 대신들을 침실로 불러들여 요홍을 보좌할 것을 부탁하고 곧 붕어하였다.

요홍은 처음에는 상을 당한 사실을 비밀에 부쳐 발표하지 않고, 도망친 남양공 요음과 그의 당파인 건강공 여륭, 대장군 윤원(尹元) 등을 체포하여 모두 처형하였다. 또, 제공(齊公) 요회(姚恢)에게 명하여 안정태수(安定太守) 여초(呂超)를 죽이게 하였는데, 요회는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한참 뒤에야 여초를 죽였다. 이에 요홍은 요회가 은밀히 다른 음모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였고, 요회 역시 이때부터 두 마음을 품고 몰래 병사와 무기를 모아 반란을 꾀하였다.

영화 원년(416년) 정월, 요홍은 마침내 문환제 요흥의 붕어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려 사형에 해당하는 죄 이하를 모두 사면하고, 연호를 '영화(永和)'로 고쳤다. 요홍은 자의당(咨議堂)에 여막을 짓고 거처하며 상을 치렀고, 장례가 끝난 뒤에는 상복을 벗고 평상시의 복장으로 돌아와 직접 여러 정사를 처리하였다. 또, 조정 안팎의 모든 관리에게 관등을 한 등급씩 올려 주었고, 명령을 내려 문무 관리들이 각자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하게 하면서 말했다.
"정치 가운데 현재의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이나, 종묘와 사직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다면 각자 마음껏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말라."

영화 원년(416년) 2월, 이보다 앞서 문환제 요흥은 이윤(李閠)의 강족 3,000여 호를 안정(安定)으로 옮겼다가, 곧이어 다시 신지(新支)로 이주시켰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그 강족 부락의 추장 당용(黨容)이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요홍이 무군장군 요찬(姚讚)을 보내 그들을 토벌하게 하니, 당용은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요홍은 그 부족의 추장과 유력자 수백 호를 장안(長安)으로 이주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이윤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북지태수(北地太守) 모옹(毛雍)이 조씨오(趙氏塢)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동평공 요소가 이를 토벌하여 모옹을 사로잡았다.

당시 요홍의 동생인 장락공 요선(姚宣)은 이윤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아직 모옹이 패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요선은 부장 요불생(姚佛生) 등을 보내 장안을 보위하게 하였고, 그 병력이 이미 출발한 뒤에 요선의 참군 위종(韋宗)이 모옹의 반란 소식을 들었다. 위종은 간사하게 아첨하고 분란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요선에게 말하기를,
"주상께서 새로 즉위하시어 위엄과 덕망이 아직 널리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혁련발발(赫連勃勃)은 세력이 강성하여 앞으로 침략과 피해가 더욱 심해질 것이니, 국가의 환난이 어느 정도까지 이를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황실의 울타리가 되는 중책을 맡고 계시니 깊이 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망(邢望)은 지세가 험하고 견고하며 세 방면의 요충지를 모두 장악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만약 그곳을 차지하고 마음을 비워 사람들을 위무하여 모은다면, 단지 황실의 울타리로서 자신을 굳게 지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왕들 가운데 으뜸이 될만한 기반까지 마련할 수 있습니다."
라 하니, 요선은 그의 말을 따랐다. 이에 38,000호를 거느리고 이윤을 버린 뒤 남쪽의 형망(邢望)으로 옮겨가 그곳을 지켰다. 이로써 요선이 남쪽으로 옮겨가자 여러 강족 부락들이 곧바로 이윤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동평공 요소가 진군하여 이들을 토벌하고 격파하였으며, 요선은 요소에게 가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였다. 이를 들은 요소는 크게 노하여 요선을 죽였다. 처음 요선이 형망에 있을 때, 요홍은 요불생을 돌려보내 요선에게 타이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요불생은 도리어 요선의 계획에 찬동하고 그 일을 부추겼기에, 요소는 그의 죄목을 하나하나 열거한 뒤 요불생도 함께 죽였다.

요홍은 조서를 내려 나라의 일을 위해 싸우다 죽은 병사들에게 작위와 관직을 추증하고, 그 가족에게는 영구히 부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다. 또, 동궁의 신하 16명을 오등작(五等爵)의 자작과 남작에 봉하려 하자, 무군장군 요찬이 간하였다.
"동궁(東宮)의 문무 관리라면 본래 충성을 지켜야 할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직 뚜렷하게 드러난 공적도 없는데 어찌 이처럼 많은 사람을 책봉하시려 하십니까?"
요홍이 말했다.
"조정에 작위를 마련해 두는 것은 장래의 공적을 권장하고 선악에 따라 상벌하기 위한 것이며, 훌륭한 덕을 밝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나는 장남으로서 집안의 큰 불행을 당하였고, 동궁의 신하들과 함께 이 온갖 근심을 겪었다. 한데 나 혼자만 황제의 복을 누린다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에 요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 동평공 요소가 나아가 아뢰었다.
"폐하께서 은덕을 잊지 않고 이들을 봉하려 하시는 것은 옳은 일이나, 옛사람은 일을 공경히 처리하면서 시작할 때부터 시기를 신중하게 정하였습니다. 내년 봄까지 기다린 뒤에 다시 논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요홍은 이를 받아들여 일단 봉작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영화 원년(416년) 4월, 서진의 왕 걸복치반이 장수 담달(曇逹) 등을 보내 상규(上邽)를 공격하였다. 상규를 진수하던 진주자사(秦州刺史) 요애(姚艾)는 성을 지켜 내지 못하고 달아났다.

영화 원년(416년) 5월, 병주(幷州) 정양군(定陽郡)에서 수만 개의 이민족 부락이 요홍에게 반란을 일으켜 평양(平陽)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흉노보(匃奴堡)를 진수하는 입의장군 요성도(姚成都)를 공격하고, 흉노족 조홍(曹弘)을 대선우로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이들이 가는 곳마다 노략질하고 잔혹하게 해쳐 남겨 두는 것이 없으니, 정동장군 요의(姚懿)가 포판(蒲阪)에서 출병하여 이들을 토벌하였다. 요의는 평양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고 조홍을 사로잡아 장안으로 압송하였으며, 그 유력 호족 15,000명을 옹주(雍州)로 이주시켰다.

2.2.2. 후구지와 북하의 침략

영화 원년(416년) 6월, 후구지의 구지공 양성이 기산(祁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건절장군 왕총(王總)을 사로잡은 뒤 진주(秦州)를 압박하였다. 후장군 요평(姚平)이 이를 구원하자, 양성은 비로소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상규를 수비하던 장수 요숭(姚嵩)이 양성을 추격하기 위해 출병하려 할 때, 여러 관료들이 완강히 만류하였으나, 요숭은 듣지 않고 말했다.
"만약 불길한 일이 있다면 이것 역시 운명이다. 어디로 달아난다고 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농서태수(隴西太守) 요진도(姚秦都), 약양태수(略陽太守) 왕환(王煥), 요평과 함께 양성을 추격하여 죽령(竹嶺)에 이르렀다. 이때 무군장군 요찬도 요숭 등을 도우러 출병하였으나, 요찬이 청수(清水)에 이르렀을 때에 이미 요숭이 대패하여 요숭을 포함해 요진도, 왕환이 모두 전사하였다. 이에 요찬은 군대를 이끌고 복귀하였고, 양성 또한 구지(仇池)로 물러났다.

얼마 뒤, 북하의 황제 혁련발발이 기병 40,000기를 거느리고 상규를 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킨 다음, 그 성을 모두 헐어버렸다. 이어 음밀(陰密)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주자사(秦州刺史) 요군도(姚軍都)와 장수 요량자(姚良子)를 사로잡았으며, 후진의 나머지 장수와 병사 5,000여 명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그럼에도 요군도는 눈을 부릅뜨고 엄한 목소리로 혁련발발의 잔인한 죄악을 하나하나 꾸짖으며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는데, 혁련발발은 노하여 다시 요군도와 요량자 및 그 장수와 병사 15,000여 명을 추가로 죽였다. 이에 영북(嶺北)의 여러 잡호(雜戶)는 모두 오장산(五將山)으로 달아났다.

한편, 요군도가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북장군 요회는 안정(安定)을 버리고 5,000호를 거느려 신평(新平)으로 달아났다. 그때 안정 사람 호엄(胡儼), 화도(華韜)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요회의 앞길을 막자, 요회는 혼자 말을 타고 장안으로 달아났고, 입절장군 미저성(彌姐成)과 건무장군 배기(裴岐)는 호엄에게 살해당했다. 또, 요홍의 동생인 진서장군 · 박릉공 요심(姚諶) 역시 주둔지인 옹성(雍城)을 버리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이에 혁련발발은 진동장군 양구아(羊茍兒) 등에게 선비족 5,000여 명을 거느리고 비어있는 안정을 접수해 그곳에 주둔하게 하고, 자신은 직접 옹성을 점거한 뒤에 미성(郿城)을 약탈하였다.

이보다 앞서 천수군(天水郡) 기현(冀縣)에서 북 모양의 돌이 저절로 울려 그 소리가 수백 리 밖까지 들렸으며, 들판의 꿩들이 모두 울어댔다. 또, 진주(秦州)에서는 지진이 일어난 곳이 32곳이었고, 땅속에서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난 곳이 8곳이었다. 바위산과 산등성이가 무너지고, 사람들의 집 또한 기울거나 무너지니, 사람들은 모두 이를 불길한 징조라고 여겼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요숭이 패하고 서쪽의 수많은 성들이 북하에게 넘어가자, 식견 있는 사람들이 말했다.
"진주(秦州)는 요홍의 고향인데, 이제 진주를 잃었으니 장차 나라가 멸망할 징조로다."

동평공 요소는 정로장군 윤소(尹昭), 진군장군 요흡(姚洽) 등과 함께 보병과 기병 50,000명을 거느리고 혁련발발을 토벌하였고, 정북장군 요회는 정예 기병 10,000기를 거느리고 후속군이 되었다. 요소의 군대가 횡수(橫水)에 이르자, 혁련발발은 물러나 안정(安定)을 지키려 하였으나, 호엄이 안정의 성문을 닫고 혁련발발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양구아와 그가 거느린 선비족 수천 명을 죽이고 다시 안정을 들어 후진에 귀순하였다. 요소는 이 틈을 타서 진격해, 도망치는 혁련발발을 마안피(馬鞍陂)에서 따라잡아 한 차례 격파하고, 조나(朝那)까지 추격하였으나 끝내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후구지의 구지공 양성은 다시 조카 양권(楊倦)을 보내 장사(長虵)를 침공하였다.

평양의 저족 구갈(茍渇)은 1,000여 명을 모아 오장원(五丈原)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요홍은 진원장군 요만(姚萬), 회무장군 요난(姚難) 등을 보내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들은 구갈에게 패하였다. 이에 진서장군 요심 등이 다시 구갈을 토벌하여 마침내 그를 사로잡았다.

구갈의 반란을 평정하여 급한 불을 끈 요홍은 보국장군 염만외(斂曼嵬)와 전장군 요광아(姚光兒)를 보내 진창(陳倉)에서 양권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에 양권은 산관(散闗)으로 달아났다.

혁련발발이 다시 조카 혁련제(赫連提)를 보내 남쪽으로 지양(池陽)을 침공하게 하였으나, 거기장군 요유(姚裕), 전장군 팽백랑, 건의장군 사현(虵玄)이 이를 공격하여 물리쳤다.

2.3. 유유의 북벌

2.3.1. 낙양 함락

영화 원년(416년) 9월, 동진의 권신인 태위 유유가 대군을 총지휘하여 후진을 공략하기 위해 팽성(彭城)에 주둔하였다. 이윽고 유유는 관군장군 단도제와 용양장군 왕진악을 보내 회수(淮水)와 비수(淝水) 방면으로 들어가 칠구(漆丘)와 항성(項城)을 동시에 공격하게 하였다. 아울러 신야태수 주초석과 녕삭장군 호번은 양성(陽城)으로 향하고, 진무장군 심전자와 건위장군 부홍지는 무관(武闗)으로 향하였다. 또, 건무장군 심림자(沈林子)와 팽성내사 유준고는 수군을 거느리고 석문(石門)으로 나아가, 변수(汴水)를 타고 황하로 진입하여 창원(倉垣)을 공격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정로장군 왕중덕(王仲徳)에게 선봉의 여러 군대를 통솔하게 하여 거야(巨野)의 수로를 열고 황하로 진입하게 하였다.

동진군이 여러 갈래로 한꺼번에 들이닥치자, 후진의 장수 왕구생(王茍生)은 칠구를 들어 왕진악에게 항복하였고, 서주자사(徐州刺史) 요장(姚掌)은 항성을 들어 단도제에게 항복하였다. 단도제가 마침내 영구(穎口)로 들어가니, 여러 주둔지의 장수들은 동진군의 기세만 보고도 잇달아 투항하였는데, 오직 신채태수(新蔡太守) 동준(董遵)만이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단도제는 신채(新蔡)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동준을 결박하여 군문 앞으로 끌고 왔다. 동준이 엄한 낯빛으로 말하기를,
"왕자(王者)가 다른 나라를 정벌할 때에는 선비를 예로써 대하는 법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군사를 움직이고 국사(國士)를 예가 아닌 방식으로 대하는가?"
라 하니, 단도제는 노하여 동준을 죽였다. 이어 그는 허창(許昌)을 함락시키고 영천태수(穎川太守) 요탄(姚坦)과 대장군 양업(楊業)을 사로잡았다.

한편, 동진의 건무장군 심림자는 변수를 타고 황하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양읍(襄邑) 사람 동신호(董神虎)는 1,000여 명을 모아 유유에게 항복하였는데, 유유는 그를 임시로 참군으로 삼고 양무장군을 더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심림자와 종군하게 하였다. 이후 심림자가 동신호와 함께 창원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연주자사(兗州刺史) 위화가 자신의 군(郡)을 들어 항복하였다. 동신호가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제멋대로 양읍으로 돌아가자, 심림자는 그를 붙잡아 죄목을 하나하나 꾸짖은 뒤 처형하였다.

동평공 요소는 동진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장안으로 돌아와 요홍에게 아뢰었다.
"진(晉)의 군대는 이미 허창(許昌)을 지났는데, 예주(豫州)와 안정(安定)은 외따로 멀리 떨어져 있어 갑자기 구원하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여러 진(鎭)의 백성들을 내지로 옮겨 경기(京畿)를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정예병 10만 명을 얻을 수 있으니 천하를 횡행하기에 충분하며, 설령 두 적이 함께 침입하더라도 나라가 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진(晉)은 예주(豫州)를 침공하고 하(夏)는 안정(安定)을 침공할 텐데,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미 결단해야 할 때가 닥쳤으므로 속히 결정하셔야 합니다."
상서좌복야 양희가 나아가 말했다.
"제공(齊公) 요회(姚恢)는 용맹하고 위명도 있어 영북(嶺北)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그곳의 진호(鎮戶)들도 이미 혁련발발(赫連勃勃)과 깊은 원한을 맺었으니, 이치상 죽음을 각오하고 지킬 뿐 두 마음을 품지는 않을 것입니다. 혁련발발은 끝내 안정(安定)을 넘어 멀리 경기(京畿)까지 침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안정(安定)이 없다면 적의 기병은 반드시 미성(郿城)에까지 이를 것입니다. 지금 관중(闗中)의 병력과 군마만으로도 진(晉)을 막기에 충분하니, 미리 스스로 세력을 깎아 약하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요홍은 양희의 말을 따랐다. 그때 이부랑 의횡(懿橫)이 은밀히 요홍에게 아뢰었다.
"요회는 광평공(廣平公) 요필(姚弼)의 난 때 폐하께 충성을 다한 공이 있으나, 폐하께서 황제에 올라 대통을 이으신 뒤에도 아직 그 마음에 보답할 만한 특별한 상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밖으로는 그를 죽을 곳에 내몰고 안으로는 조정의 권력에 참여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안정(安定) 사람들은 자신들이 외롭고 위태로운 데다가 적의 압박까지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남쪽으로 옮기고 싶어 하는 자가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나 됩니다. 만약 요회가 정예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북을 울리며 경사(京師)로 곧장 향한다면 어찌 사직의 근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먼저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여 마음을 위로함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요홍이 말하기를,
"요회가 만약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오히려 화를 재촉하는 일이 될 것이다."
라며, 따르지 않았다.

동진의 정로장군 왕중덕의 수군이 황하로 들어가 활대(滑臺)를 압박하려 하였다. 이에 활대를 수비하던 북위의 연주자사 울건(尉建)이 겁을 먹어 군대를 거느리고 성을 버린 채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도망쳤다. 왕중덕은 활대에 들어간 뒤 이렇게 선언하였다.
"우리 진(晉)나라는 본래 비단 70,000필을 위(魏)나라에 주고 길을 빌리고자 하였을 뿐이다. 위(魏)의 수비장수가 성을 버리고 달아날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북위의 명원제 탁발사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숙손건공손표를 보내 하내(河內)에서 방두(枋頭)로 향하게 하였다. 숙손건과 공손표는 군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넌 뒤, 울건을 성 아래에서 참수하여 그 시체를 황하에 던졌다. 그리고 왕중덕의 군사들에게 외쳐 침입한 까닭을 물었다. 왕중덕은 사마 축화지(竺和之)를 시켜 대답하게 하였다.
"유 태위께서 왕 정로장군에게 황하를 따라 낙양(洛陽)으로 들어가 선대 황제들의 산릉을 깨끗이 정비하게 하셨을 뿐, 감히 위(魏)를 침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위(魏)의 수비장수가 스스로 활대(滑臺)를 버리고 떠났으므로 왕 정로장군이 빈 성을 빌려 병사들을 쉬게 한 것입니다. 이제 곧 서쪽으로 이동할 것이니 진(晉)나라와 위(魏)나라의 우호 관계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건만, 어찌 굳이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려 위세를 과시하십니까?"
하지만 명원제가 다시 숙손건을 보내 유유에게 이 일을 따져 묻자, 유유가 겸손한 말로 사과하며 대답하였다.
"낙양(洛陽)은 진(晉)의 옛 수도인데 지금 강족(羌族)이 점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진(晉)나라는 오래전부터 선대 황제들의 산릉을 수복하고 정비하고자 하였습니다. 또, 환씨(桓氏) 종족과 사마휴지(司馬休之) 형제, 노종지(魯宗之) 부자는 모두 진(晉)의 좀벌레와 같은 자들인데, 강족이 이들을 받아들여 진(晉)의 근심거리로 삼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을 토벌하려 하여 위(魏)에 길을 빌리고자 하는 것일 뿐, 감히 위(魏)에 불리한 일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명원제는 이를 받아들이면서도 장수 우율제를 보내 황하 상류에 보루를 쌓게 하여 동진이 침입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영화 원년(416년) 10월, 동진군이 진군하여 성고(成皋)에 이르렀다. 당시 정남장군 · 진류공 요광(姚洸)이 낙양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급히 장안으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요홍은 월기교위 염생(閻生)에게 기병 3,000기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가게 하였고, 무위장군 요익남(姚益男)에게 보병 10,000명을 거느리고 그 뒤를 이어 낙양의 수비를 돕게 하였다. 또, 정동장군 · 태원공 요의를 남쪽 섬진(陜津)에 주둔시켜 성원하게 하였다. 녕삭장군 조현(趙玄)은 요광의 부장으로서 요광에게 이렇게 권하였다.
"금용성(金墉城)을 굳게 지키기만 하면 가만히 앉아서도 적이 지치는 것을 기다려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도제와 내통하던 요광의 사마 요우(姚禹)와 요우와 결탁한 주부 염회(閻恢), 양건(楊虔) 등이 조현이 충성을 다하는 것을 미워하여 모두 함께 그를 헐뜯었다. 이에 요광은 조현에게 정예병 1,000여 명을 거느리고 남쪽의 백곡오(柏谷塢)를 지키게 하였고, 광무장군 석무휘(石無諱)에게는 동쪽의 공성(鞏城)을 지키며 동진군을 막게 하였다.

때마침 양성(陽城), 성고, 형양(滎陽), 호뢰(虎牢) 등 여러 성이 모두 단도제에게 항복하니, 단도제 등은 기세를 타고 거침없이 진군하였다. 석무휘는 석관(石闗)에 이르렀다가 적군의 진격 속도에 놀라 다시 달아나 돌아왔고, 조현은 유유의 사마 모덕조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요우는 성을 넘어 단도제에게 달아났다.

10월 20일[2], 동진군이 진격하여 낙양을 압박하자, 이틀만인 22일에 요광이 성문을 열고 나와서 단도제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단도제는 후진의 장수와 병사 4,000명을 사로잡았는데, 부하들은 이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그 시신을 쌓아 경관을 만들자고 하였다. 그러나 단도제가 말했다.
"죄 있는 자를 토벌하고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이에 포로들을 모두 풀어 돌려보냈다. 당시 염생은 신안(新安)에 이르렀고, 요익남은 호성(湖城)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낙양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그대로 주둔한 채 더 이상 진군하지 않았다.

2.3.2. 태원공 요의의 난

영화 원년(416년) 12월, 태원공 요의는 성품이 편협하고 경박하며 남의 말을 쉽게 믿어 현혹되곤 하였다. 그의 사마 손창(孫暢)은 간사하고 교활하며 아첨을 잘하였고, 분란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며 재앙이 생기는 것을 즐겼다. 손창은 요의에게 장안을 기습하여 숙부인 동평공 요소를 죽이고 형 요홍을 폐위한 뒤 직접 그 자리를 대신하라고 권하였다. 요의는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군대를 이끌고 섬진에 이른 뒤 곡식을 풀어 하북(河北)의 이민족과 한족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는 나라의 비축 식량을 소모시키는 한편, 화융(和戎)의 여러 강족을 끌어들여 자신의 사사로운 은혜로 베풀려는 것이었다. 이에 요의의 좌상시 장창(張敞)과 시랑 좌아(左雅)가 굳게 간언하였다.
"전하께서는 황제의 친동생이라는 가까운 혈연으로 한 방면을 맡는 중책에 계시니, 나라와 안위와 화복을 함께하는 처지입니다. 한(漢)나라 시기에 칠국(七國)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실로 양왕(梁王)의 힘에 의지하여 위기를 넘겼습니다. 지금 오(吳)에서 온 적군이 안으로 침입하여 네 주(州)가 연달아 무너졌고, 서쪽으로는 오랑캐가 변경을 어지럽혀 진주(秦州)와 양주(涼州)가 패망하였습니다. 조정의 위태로움은 마치 알을 쌓아 놓은 것과 같으므로, 바로 지금이 제후들이 황실을 위해 힘써야 할 때입니다. 또한 곡식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한데 전하께서 까닭 없이 이를 흩어 나라의 비축분을 소모시키시니 장차 어찌하시려는 것입니까? 만약 조정에서 전하께 그 연유를 묻는다면 무슨 말로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요의는 노하여 두 사람을 채찍질하여 죽였다.

장안의 요홍은 이 소식을 듣고 동평공 요소 등을 조당(朝堂)으로 불러 은밀히 대책을 의논하였다. 요소가 아뢰었다.
"요의는 성품과 식견이 얕아 남의 말에 따라 쉽게 마음이 움직입니다. 이런 계책을 꾸민 자는 틀림없이 손창일 것입니다. 우선 급히 사신을 보내 손창을 불러들이고, 무군장군 요찬을 보내 섬성(陜城)을 점거하게 하십시오. 신(臣)은 동관(潼關)으로 가서 여러 군대를 총지휘하겠습니다. 만약 손창이 조서를 받들고 온다면 신이 요의에게 하동(河東)에 주둔해 있는 병력을 거느리고 함께 오(吳)의 적을 평정하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반역의 기미가 드러나 조서를 거역하고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죄를 천하에 밝히고 북을 울려 토벌해야 합니다."
요홍이 말했다.
"숙부의 말이 바로 사직을 보전할 계책이오."
이에 요찬과 관군장군 사마국번(司馬國璠), 건의장군 사현을 보내 섬진에 주둔하게 하고, 무위장군 요려(姚驢)를 동관(潼關)에 주둔하게 하였다.

과연 요의는 조서에 응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자칭하며 각 주와 군에 격문을 돌렸다. 또 흉노보의 곡식을 운반하여 진호(鎮戶)들에게 나누어 주려 하였으나, 녕동장군 요성도(姚成都)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요의는 몸을 낮추어 공손한 말로 요성도를 회유하고, 깊이 결탁하려 하면서 자신의 패도(佩刀)를 보내 맹세의 증표로 삼았다. 그러나 요성도는 따르지 않고 그 패도를 요홍에게 보냈다. 결국 요의는 효기장군 왕국(王國)에게 갑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요성도를 치게 하였으나, 요성도는 도리어 이를 격파하고 왕국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 요의를 꾸짖었다.
"명공(明公)께서는 황제의 친동생이라는 가까운 혈연으로 한 방면의 군사를 맡는 중임을 받으셨습니다. 지금 사직이 마치 끊어질 듯 매달린 면류관의 구슬처럼 위태로우니, 마땅히 공경하며 근면하게 황실을 바로잡아 보좌하셔야 할 터인데, 도리어 간악한 마음을 감추고 종묘를 위태롭게 할 음모를 꾸미고 계십니다. 삼조(三祖)의 영령이 과연 명공을 도와주시겠습니까? 이 진(鎭)의 군량은 한 지방 전체가 의지하는 것입니다. 진호(鎮戶)들이 무슨 공을 세웠기에 그것을 나누어 주려 하십니까? 왕국(王國)은 뱀에게 발을 그려 넣듯 쓸데없는 일을 더하여 일을 그르쳤으니 나라의 죄인입니다. 이미 사로잡아 가두었으니 폐하의 조서를 기다려 처형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의로운 무리를 규합하여 명공의 죄를 징벌하려 합니다. 다시 대군이 모두 집결하기를 기다렸다가 명공과 황하 가에서 만나겠습니다. 서로 만날 날이 멀지 않았으니 명공께서는 부디 세 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어 요성도는 여러 성에 격문을 돌려 순행과 반역의 도리를 설명하고 화와 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우쳤으며, 말을 먹이고 병기를 갈며 군대를 정비하고, 군량을 징발하였다. 그 결과 하동(河東)의 병사 가운데 요의에게 가담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요의는 이를 크게 걱정하여 자신도 여러 성에서 병사를 징발하였으나, 오직 임진(臨晉)의 수천 호만이 후진에 반란을 일으켜 요의에게 호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성도가 군대를 이끌고 포진(蒲津)에서 황하를 건너 임진의 반란 세력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멸하니, 요의 등은 크게 두려워하였다. 심지어 요의의 진호(鎮戶) 가운데 안정(安定) 사람 곽순(郭純), 왕노(王奴) 등이 군사를 일으켜 요의를 포위하였다. 그 사이에 동평공 요소의 군대도 포판(蒲阪)으로 들어가 요의를 붙잡아 가두고 손창 등의 무리를 처형하였다.

이해에 후진의 상서 · 동무후 요창(姚敞)과 그의 동생 진원장군 요승광(姚僧光), 우장군 요정세(姚定世)가 낙양에서 북위로 달아나 항복하였다.

2.3.3. 제공 요회의 난

영화 2년(417년) 정월, 요홍은 전전(前殿)에서 여러 신하의 조회를 받았다. 당시 안팎에서 배반이 잇따르고 동진군도 점차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요홍이 처연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니 여러 신하도 모두 따라 울었다.

당시 요홍의 조카인 정북장군 · 제공 요회는 안정(安定)의 진호(鎮戶) 38,000명을 거느리고 집들을 불태워 버린 뒤, 수레를 이용해 방진을 이룬 채 북옹주(北雍州)에서 장안으로 향하였다. 이때 요회는 스스로 대도독 · 건의대장군이라 칭하고, 각 주와 군에 격문을 돌려 '임금 곁의 악인을 제거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양위장군 강기(姜紀)는 병력을 거느리고 요회에게로 달려가 가담하였고, 건절장군 팽완도(彭完都)는 요회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음밀을 버리고 장안으로 달아났다.

이윽고 요회가 신지(新支)에 이르자 강기가 그에게 권하였다.
"나라의 중요한 장수과 대군은 모두 동쪽에 나가 있어 경사(京師)가 텅 비어 있습니다. 공께서 속히 경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습격하신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회는 따르지 않고 남쪽으로 내려가 미성을 공격하였다. 진서장군 · 박릉공 요심이 요회에게 패하자 요회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졌고, 장안은 크게 동요하였다. 요홍은 급히 사신을 보내 동쪽으로 주둔해 있는 동평공 요소를 불러들이는 한편, 거기장군 요유와 보국장군 호익도(胡翼度)를 풍수(灃水) 서쪽에 주둔시킴으로써 요회에 대비하였다. 이 와중에도 부풍태수(扶風太守) 요준(姚雋), 안이호군 요묵리(姚墨蠡), 건위장군 요아도(姚娥都), 양위장군 팽사(彭虵)는 모두 두려워하여 요회에게 항복하였다.

한편, 동평공 요소는 요회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먼저 경기병만 거느리고 급히 달려와 반란에 대응하였다. 아울러 진군장군 요흡과 관군장군 사마국번에게 보병 30,000명을 거느리고 뒤따라 장안으로 향하게 하였다. 요회는 곡뢰(曲牢)를 거쳐 진군하여 두성(杜城)에 주둔하였는데, 요소는 영대(靈臺)에 주둔하여 요회와 대치하였다. 무군장군 요찬도 요회의 군대가 점점 장안에 가까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녕삭장군 윤아(尹雅)를 홍농태수(弘農太守)로 삼아 동관을 지키게 한 뒤, 자신도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요홍은 요찬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장남인 내가 밝은 덕과 의로움을 높이지 못하고 아랫사람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여, 화가 집안 안에서 일어나고 변란이 친형제 사이에서 생겨나게 하였구려. 위로는 조종(祖宗)을 저버렸고, 또한 여러 숙부를 뵐 면목도 없소. 요의가 처음 반역을 일으켰다가 멸망하였는데, 이제 요회가 다시 병력을 거느리고 안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니 장차 어찌해야 하겠소?"
요찬이 대답하였다.
"요의 등이 감히 군사를 일으켜 안에서 업신여길 수 있었던 것은 신(臣)들이 나약하여 미리 막아 내는 방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크게 울며 말했다.
"신은 대장군(大將軍)과 함께 이 역적을 없애지 못한다면 끝내 다시는 얼굴을 들고 폐하를 뵙지 않겠습니다."
이에 요홍은 장수와 병사들에게 상을 나누어 준 뒤 요찬과 함께 출전시켰다.

무군장군 요찬까지 동평공 요소와 합류하자, 요회의 병사들은 조정의 여러 군대가 모두 집결한 것을 보고 점차 두려움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에 요회의 부장 제황(齊黃) 등은 요회를 버리고 조정의 군대로 가서 항복하였다. 그럼에도 요회가 진군하여 요소를 압박하니, 요찬이 후방으로 이동해 요회의 퇴로를 막아 공격하였다. 요회의 군대는 크게 패하였고, 요회와 그의 세 동생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요홍은 요회의 죽음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통곡하였고, 그를 공(公)의 예로 장사 지냈다.

2.3.4. 동관 방어전

영화 2년(417년) 2월, 동진의 용양장군 왕진악이 군대를 진격시켜 민지(澠池)에 이르렀다. 왕진악은 자신의 사마 모덕조를 보내 이오성(蠡吾城)에 있던 홍농태수 윤아를 공격하게 하였다. 윤아의 군대가 무너지자 모덕조는 기병을 보내 추격하여 윤아를 사로잡았고, 얼마 뒤 그를 죽이니 이오성을 수비하던 병사들은 달아나 동관으로 들어가서 굳게 지켰다.

한편, 낙양을 함락시킨 동진의 관군장군 단도제는 건무장군 심림자와 합류하여 섬(陜) 북쪽에서 황하를 건너 양읍보(襄邑堡)를 함락시켰다. 후진의 건위장군 · 하북태수(河北太守) 설백(薛帛)은 앞서 해현(解縣)을 점거하고 있었는데, 심림자가 해현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달려가 그를 습격하였다. 이에 설백은 군대를 버리고 관중(闗中)으로 달아났다. 이어 심림자는 후진의 정로장군 · 병주자사(幷州刺史) 윤소가 지키는 포판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후 심림자가 장군 구탁(茍卓)을 보내 흉노보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녕동장군 요성도가 구탁을 쳐서 격파하였다. 이때 요홍은 무위장군 요려를 보내 포판을 구원하게 하는 동시에, 보국장군 호익도를 보내 동관을 점거하여 지키게 하였다.

2월 19일[3], 후진의 장수 부홍(傅洪)이 호뢰를 들어 북위에 투항하였다.

요홍은 숙부 요소를 태재 · 대장군 · 대도독 · 도독중외제군사 · 가황월로 승진시키고, 작위를 노공(魯公)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시중(侍中), 사예(司隸), 종정(宗正), 절록(節録) 등의 직임은 모두 종전과 같이 유지하여, 조정의 중요한 정사는 모두 요소에게 가서 상의하여 결정하게 하였다. 요소가 완강히 사양하였으나 요홍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 요찬의 작위를 동평공(東平公)으로 바꾸고, 나머지 장수와 병사들에게도 공에 따라 차등을 두어 봉작과 상을 내렸다.

요홍은 노공 요소에게 무위장군 요란(姚鸞) 등과 함께 보병과 기병 50,000명을 거느리고 동관으로 들어가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무위장군 요려를 보내, 병주자사 윤소와 안팎으로 서로 호응하여 단도제를 협공하게 하였으나, 단도제는 진지를 깊고 견고하게 구축한 채 싸우러 나오지 않았다. 심림자가 단도제에게 말했다.
"포판(蒲阪)은 성이 견고하고 해자도 깊어 하루아침에 함락시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공격하면 병사들이 상하고, 포위한 채 지키면 날짜만 오래 끌게 됩니다. 차라리 이곳을 버리고 먼저 동관(潼闗)을 도모하는 것이 낫습니다. 동관은 천연의 험준한 지형을 갖춘 요충지이며, 더구나 왕진악은 지금 홀로 동떨어진 채로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형세가 위태롭고 병력도 적습니다. 만약 요소의 군대가 동관으로 들어가서 지킨다면 다시 도모하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도착하기 전에 마땅히 왕진악과 병력을 합쳐 동관을 힘껏 다투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동관에서 승리한다면 윤소는 싸우지 않고도 스스로 굴복할 것입니다."
단도제는 그의 계책을 따랐다.

영화 2년(417년) 3월, 단도제가 포판의 포위를 풀고 동관으로 진군하였다. 동평공 요찬은 금군 7,000명을 거느리고 위수(渭水) 북쪽에서 동쪽으로 진군하여 포진(蒲津)을 점거하였다.

3월 8일[4], 동진의 태위 유유가 부풍태수 심전자와 사마 부홍지에게 병사 10,000여 명을 거느리고 상락(上洛)으로 진입하게 하였다. 이들이 지나가는 곳의 성과 진은 대부분 수비를 포기하고 장안으로 달아났다.

한편, 동관에서는 노공 요소가 나와 군대를 방진으로 편성하여 전진하면서 단도제를 먼저 공격하였다. 하지만 단도제는 진지를 굳게 지키며 싸우지 않았다. 요소는 단도제의 서쪽 진영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자, 마침내 많은 군사를 내어 그 진영을 압박하였다. 이때 단도제가 왕경(王敬), 심림자 등을 거느리고 역으로 돌격하여 요소의 군대를 공격하자, 요소의 장수와 병사들이 놀라 흩어졌다. 이에 요소는 군대를 이끌고 정성(定城)으로 물러나 험준한 지형을 점거하고 굳게 지켰다. 또, 무위장군 요란에게 대로(大路)에 병력을 주둔시켜 단도제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당시 유유의 장수 요진(姚珍)은 자오곡(子午谷)으로 들어오고, 두패(竇霸)는 낙곡(洛谷)으로 들어왔는데, 각각 수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장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요홍은 진원장군 요만을 보내 두패를 막게 하고, 진북장군 요강(姚疆)을 보내 요진을 막게 하였다.

요란은 홍농태수 윤아를 보내 단도제의 사마 서염(徐琰)과 동관 남쪽에서 싸우게 하였으나, 윤아는 서염에게 패하여 사로잡힌 뒤 유유에게 압송되었다. 유유는 윤아가 앞서 동진을 배반했던 일을 들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윤아가 말하기를,
"저는 전날 이미 죽었어야 할 몸이었는데 다행히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렀으니, 본래 바라지도 못했던 목숨입니다. 죽는다 해도 진실로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오랑캐와 한족이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는 하나입니다. 명공께서 대의를 내세워 군사를 일으키셨는데, 어찌 진(秦)에 절의를 지키는 신하가 없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라 하니, 유유는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사면하였다.

노공 요소가 여러 장수에게 말하였다.
"단도제 등이 먼 길을 와서 죽음을 자초하고 있는데 병력은 많지 않다. 진지만 굳게 지키는 것은 단지 시간을 오래 끌어 후속 지원군을 기다리려는 것이다. 나는 군대를 나누어 곧장 문향(閿鄉)을 점거하고 그들의 군량 수송로를 끊고자 한다.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단도제의 머리를 우리 군영의 깃발 아래에 매달 수 있을 것이다. 단도제 등이 무너지면 유유의 계획도 저절로 좌절될 것이다."
여러 장수가 모두 그 계책에 찬성하였으나, 보국장군 호익도가 말했다.
"군대의 기세는 마땅히 한곳에 집중해야 하지,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별동대가 패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놀라고 두려워질 텐데, 그렇게 된 뒤 어떻게 싸울 수 있겠습니까?"
요소는 이에 계획을 중지하였다.

요홍은 동진군이 계속해서 압박해오자, 북위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원제가 여러 신하에게 이 일을 의논하게 하니,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동관(潼闗)은 천연의 요새이므로 유유가 수군으로 공격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만약 강기슭에 올라 북쪽으로 침입한다면 형세가 훨씬 쉬워집니다. 유유는 진(秦)을 정벌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의 진짜 뜻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진(秦)은 우리와 혼인으로 인척 관계를 맺은 나라이므로 구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군대를 보내 황하 상류를 차단하여 그들이 서쪽으로 진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라 하였다. 그때 박사좨주 최호만이 반대하며 아뢰었다.
"유유가 진(秦)나라를 도모할 계획을 세운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요흥이 죽은 이래, 그 아들 요홍은 나약하고 능력이 부족하여 나라 안에는 환난이 많습니다. 유유가 그 위기를 틈타 공격하는 것이니, 그의 뜻은 반드시 진(秦)나라를 차지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황하 상류를 막는다면 유유는 분노하여 반드시 강기슭으로 올라와 북쪽을 침범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진(秦)을 대신하여 적을 맞게 됩니다. 지금 유연(柔然)이 변경을 침범하고 백성들의 식량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다시 유유와 적이 되어 군대를 남쪽으로 보내면 북쪽의 적은 더욱 깊이 침입할 것이고, 북쪽을 구원하면 남쪽 주(州)들이 다시 위험해질 것으로, 이는 상책이 아닙니다. 차라리 수로를 빌려 주어 유유가 서쪽으로 진군하도록 내버려 둔 뒤, 군대를 주둔시켜 그 동쪽의 퇴로를 막는 것이 낫습니다. 유유가 승리한다면 우리가 길을 빌려 준 은혜에 감사할 것이고, 패하더라도 우리는 진(秦)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것으로, 이것이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또 남북의 풍속이 서로 다르므로, 가령 우리나라가 항산(恒山) 이남을 버린다 해도 유유가 오(吳)와 월(越)의 병사를 거느리고 우리와 하북(河北)의 땅을 다툴 수는 없을 텐데, 어찌 우리에게 근심거리가 되겠습니까? 나라를 위한 계책에서는 오직 사직에 이로운 것만 생각해야지, 어찌 아녀자 한 명과의 혼인 관계를 돌보겠습니까?"
그러나 논의하던 사람들은 여전히 말했다.
"유유가 서쪽으로 관중(闗中)에 들어가면 우리가 뒤를 끊을 것을 두려워하여 앞뒤에서 적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북쪽으로 올라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요씨(姚氏)는 분명 관문 밖으로 나오면서까지 우리를 도와주려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유유는 겉으로는 서쪽으로 간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북쪽을 노리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에 명원제는 사도 · 남평공 장손숭에게 산동(山東)의 여러 군대를 총괄하게 하였다. 그리고 안평공 을전권(乙旃眷)을 보내 하내(河內)를 점거하게 하고, 유격장군 왕낙생(王洛生)을 하동(河東)에 주둔시켰다. 또, 진위장군 아청과 기주자사(冀州刺史) 아박간(阿薄干)은 보병과 기병 100,000명을 거느리고 하북(河北)에 주둔하여 요홍을 지원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유유가 왕진악 등과 약속하기를,
"낙양(洛陽)을 함락시키더라도 반드시 대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하며, 함부로 먼저 진격해서는 안 된다."
라 하였는데, 왕진악 등은 이미 승세를 타고 경솔하게 동관까지 진격하였다가 요소에게 막혀 오랫동안 대치하였다. 결국 요란이 수송로마저 차단하여 군량이 부족해지면서 병사들의 마음이 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니, 왕진악 등은 군수 물자를 버리고 후방의 대군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려 하였다. 이에 심림자가 칼자루를 잡고 성내며 말했다.
"상공(相公)께서는 황실을 위해 힘써 천하를 깨끗이 평정하려는 뜻을 품고 계십니다. 지금 허창(許昌)과 낙양(洛陽)이 이미 평정되었고 관우(闗右)도 곧 평정될 것입니다. 일의 성공과 실패가 우리 선봉에 달려 있는데, 어찌 승세를 꺾고 거의 이루어진 공을 버리려 하십니까? 게다가 대군은 아직 멀리 있고 적군은 한창 강성하니,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선봉을 맡으라는 명을 받았으므로, 목숨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오늘의 일은 제가 장군들을 위해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계신 여러 분 가운데에는 상공과 함께 어려운 일을 겪은 사람도 있고, 끝없는 은혜를 입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물러나 일을 그르친다면 무슨 낯으로 다시 상공의 깃발과 북 앞에 서겠습니까?"
그러자 왕진악 등은 급히 사신을 보내 유유에게 상황을 알리고 군량과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당시 유유의 군대는 황하에 들어와 있었는데, 북위군이 강기슭에 주둔하고 있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유는 왕진악 등이 보낸 사람을 부르고, 배의 북쪽에서 문을 열어 강 북쪽에 있는 북위군의 진영을 그에게 가리켜 보여 주며 말했다.
"내가 그들에게 함부로 전진하지 말라고 하였거늘, 경솔하게도 깊이 들어가 버렸으니, 강기슭에는 위나라 군사가 이처럼 늘어서 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군사와 군량을 보내 줄 수 있겠는가?"
이를 전달받은 왕진악은 하는 수 없이 직접 홍농으로 가서 백성들로부터 조세를 징수하였다. 백성들은 앞다투어 동진의 군대에 곡식을 바쳤고, 이에 군량 사정이 다시 좋아졌다.

한편, 북위의 장손숭은 기병 수천 기를 보내, 황하를 따라 유유의 군대를 뒤쫓으며 서쪽으로 이동하게 하였다. 동진의 병사들은 남쪽 강안에서 긴 밧줄로 배를 끌고 갔는데, 바람과 물살이 매우 거세어 때때로 병사들이 떠밀려 북쪽 강안으로 건너가는 일이 있었다. 그럴 때면 북위군이 곧바로 그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유유가 군대를 보내 북위군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동진군이 막 강기슭에 올라서면 북위군은 물러났다가 동진군이 돌아가면 다시 나타나곤 하였다.

영화 2년(417년) 4월, 유유는 백직대주(白直隊主) 정오(丁旿)에게 무장한 병사 700명과 수레 100대를 거느리고 황하 북쪽 강안으로 건너가게 하였다. 정오는 강에서 100여 보 떨어진 곳에 각월진(卻月陣)을 설치하였는데, 진의 양쪽 끝이 강을 끌어안듯 닿게 하고, 수레 한 대마다 무장한 병사 7명씩을 배치하였다. 진영을 모두 갖춘 뒤에는 흰 깃발 하나를 세워 신호로 삼게 하였다. 북위군은 수백 명의 병사가 걸어서 수레를 끌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았으나 그 의도를 알지 못하여 모두 움직이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였다. 유유는 이에 앞서 녕삭장군 주초석에게 병사 2,000명을 엄중히 준비시켜 두었다. 이윽고 흰 깃발이 올라가자 주초석은 곧 병력을 거느리고 달려가 합류하였다. 또한 대형 쇠뇌 100장을 가져갔는데, 수레 한 대를 덮개 삼아 20명씩 배치하고 수레의 끌채 위에는 큰 방패를 설치하였다. 북위군은 진영이 이미 완성된 것을 보고서야 진격하여 포위하였고, 남평공 장손숭도 기병 30,000기를 이끌고 와서 지원하였다.

북위군은 사방에서 진영에 바짝 달라붙어 공격하였는데, 너무 가까이 붙어 공격하였으므로 쇠뇌만으로는 이들을 저지하기 어려웠다. 이때 주초석은 별도로 큰 쇠망치와 긴 창 1,000여 자루를 준비해 두었다. 이에 창을 길이 3~4척 정도로 잘라 놓고 쇠망치로 그 끝을 내리쳐 북위군을 공격하니, 창 하나를 내리칠 때마다 북위의 병사 3~4명을 한꺼번에 꿰뚫었다. 북위군은 이를 당해 내지 못하고 일시에 무너져 달아났고, 죽은 자들의 시체가 서로 겹겹이 쌓였으며, 전투 중에 북위의 기주자사 아박간도 참수되었다. 북위군이 패하여 평성(平城) 방면으로 달아나니, 주초석은 녕삭장군 호번, 녕원장군 유영조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다시 북위군을 격파하고 1,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명원제는 그제야 최호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후진의 건위장군 설백이 하곡(河曲)을 점거하고 후진을 배반하여 유유에게 투항하였다.

한편, 동관에서는 노공 요소가 여러 길로 군대를 나누어 배치하여 서로 호응하는 기각지세를 이루게 하였다. 보국장군 호익도에게 동원(東原)을 점거하게 하고, 무위장군 요란은 대로에 진영을 설치하여 동진군과 서로 맞닿게 하였다. 이에 심림자는 자신의 부대 안에서 주원(朱遠) 등 정예병을 선발하고, 이들 입에 나무토막을 물어 소리를 내지 않은 채 밤중에 요란의 진영을 습격하였다. 요란의 군대는 크게 무너졌으며, 요란을 포함해 전사한 자가 9,000여 명에 이르렀다.

동평공 요찬이 황하 가에 주둔하여 수로를 차단하면서 회무장군 요난에게 포판의 곡식을 운반하여 군사들에게 공급하게 하였다. 그러나 요난이 향성(香城)에 이르자 심림자가 공격하여 격파하였고, 요찬은 홀로 말을 타고 정성(定城)으로 달아났다.

요홍은 진서장군 요심을 요류(嶢栁)에 주둔시키고, 급사황문시랑 요화도(姚和都)를 보내 하곡의 설백을 토벌하게 하였다. 도중에 요화도는 동진군이 요난을 가로막았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급히 구원하러 갔으나, 도착하기 전에 요난이 이미 패하였다. 요화도는 이어 하곡에서 유유의 별동대를 격파하고, 마침내 포판에 주둔하였다.

노공 요소는 진군장군 요흡, 안이호군 요묵리, 하동태수 당소방(唐小方) 등에게 기병 3,000기를 거느리고 황하 북쪽의 구원(九原)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들은 황하를 방어선으로 삼아 동진군을 막고, 여러 현에서 단도제 등의 군대에 보내오는 조세와 군량 수송을 끊으려 하였다. 요흡이 출발에 앞서 요소에게 말했다.
"적은 병력으로 병력이 많은 적을 상대로 굳게 버티면 결국 적에게 사로잡히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 병력은 적고 약한데다 황하 바깥 먼 곳에 있습니다. 명공께서 아무리 신묘한 무용을 갖추셨다 하더라도 채찍이 짧으면 미치지 못하듯이 형세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구원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요소는 듣지 않았다. 이후 심림자는 병사 8,000명을 거느리고 황하 가에서 요흡의 군대를 가로막아 공격하고 크게 격파하였다. 이로 인해 요흡, 요묵리, 당소방은 모두 동진군에 의해 참수되었으며, 그 병사들도 거의 모두 죽거나 사로잡혔다. 심림자는 이 승리를 계기로 유유에게 아뢰었다.
"요소는 기세가 관중(闗中)을 뒤덮을 만큼 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밖에서는 군대가 꺾이고 안에서는 나라가 위태로워졌으니, 그의 흉한 운명이 먼저 다하여 우리가 그의 피를 도끼에 바쳐 제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요소는 요흡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으로 병이 났다. 그는 무군장군 요찬에게 뒷일을 맡기고, 회무장군 요난을 관서(闗西)에 주둔시킨 뒤, 피를 토하며 죽었다. 이리하여 요찬이 요소를 대신하여 험준한 요충지를 지키게 되자 군세가 더욱 강해졌다. 요찬은 군대를 이끌고 심림자를 습격하였으나, 심림자가 다시 반격하여 격파하였다.

당시 요홍은 각지의 험준한 곳에 관문을 설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에 유유는 단도제와 왕진악에게 명하여 어떤 곳에서는 산을 점거하여 진영을 세우고, 어떤 곳에서는 평지에 보루를 쌓게 하였다. 이로써 크고 작은 진영이 모두 70곳에 이르렀으며, 황하와 험준한 지형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요홍 역시 산과 구릉, 높은 언덕을 점거하여 각각 진영과 보루를 설치하였다.

2.3.5. 요류 전투

영화 2년(417년) 7월 29일[5], 유유가 섬성(陜城)에 주둔하였다. 한편, 심전자 등이 무관(武闗)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을 지키던 장수들이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심전자 등이 계속 진군하여 청니(青泥)에 주둔하자, 요홍은 급사황문시랑 요화도를 요류에 주둔시켜 이들을 방비하게 하였다. 곧이어 유유가 문향에 이르러, 심림자에게 정예병 10,000여 명을 거느리고 산을 넘어 길을 개척하여 청니의 심전자와 합류하게 하였다.

심림자가 청니에서 심전자 등과 합류해 요류를 노렸다. 이에 요홍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유유의 군대를 막으려 하였으나, 청니의 심전자 등이 자신의 후방을 기습할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심전자의 군대를 격멸한 뒤 전국의 병력을 기울여 동쪽으로 나아가려 하였다. 이에 거기장군 요유에게 보병과 기병 8,000명을 주어 불시에 청니로 진격하게 하였고, 자신도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뒤이어 출발하였다. 당시 심전자는 본래 적을 현혹하기 위한 의병의 역할을 맡고 있었으므로, 청니에 주둔해 있는 겨우 병력 1,000여 명뿐이었다. 그럼에도 요홍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직접 나아가서 공격하려 하니, 부홍지는 병력이 너무 차이가 난다며 만류하였다. 그러나 심전자가 말했다.
"군사에서는 기이한 책략을 쓰는 것이 중요하지, 반드시 병력이 많아야 하는 것은 아니오. 더구나 지금은 적과 우리의 병력 차이가 매우 크므로 형세상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위태로운 상황이오. 저들이 포위망을 완전히 갖추고 나면 우리는 달아날 곳조차 없으니, 차라리 저들이 막 도착하여 진영과 대오를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때 먼저 가까이 달려들어 공격하는 것이 낫소. 그러면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오."
마침내 심전자가 자신이 거느린 병력을 이끌고 먼저 진격하였고, 부홍지가 뒤를 따랐다. 요홍의 군대는 이들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심전자는 병사들을 위로하며 말했다.
"그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먼 곳까지 온 것은 바로 오늘과 같은 싸움을 하기 위해서였다. 삶과 죽음이 이 한 번의 결전에 달려 있고, 제후에 봉해질 공업도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이에 병사들이 모두 용기백배하여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짧은 병기를 들고 분전하니, 요홍의 군대는 크게 패하였다. 동진군은 10,000여 명을 참수하고, 요홍이 타던 황제의 수레와 의복, 각종 어용 물품까지 노획하였다. 요홍은 패하여 파상(灞上)으로 달아났다.

처음에 유유는 심전자 등의 병력이 적은 것을 걱정하여 심림자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진령(秦嶺)을 넘어가 지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심림자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심전자가 요홍의 군대를 격파한 뒤였다. 두 군대는 합류하여 패주하는 요홍을 추격하였다. 이후 관중(闗中)의 여러 군과 현에서는 몰래 심전자에게 귀순의 뜻을 전하는 곳이 많아졌다.

2.3.6. 위수 전투

영화 2년(417년) 8월 2일[6], 유유의 군대가 마침내 동관에 이르렀다. 유유는 녕삭장군 주초석을 하동태수로 삼고, 진무장군 서의지(徐猗之)와 함께 하북의 설백과 합류하여 포판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동평공 요찬은 관서(闗西)에서 유유를 막았고, 요난은 향성에 주둔해 있었는데, 유유는 왕진악과 왕경을 보내 추사(秋社) 서쪽에서 위수(渭水)를 건너 요난의 군대를 압박하게 하였다. 요난은 왕진악의 압박을 받자 향성에서 서쪽으로 퇴각하였다. 하지만 왕진악은 수군과 육군을 함께 진격시켜 요난의 군대를 추격하여 따라잡으니, 요홍이 파상에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석교(石橋)에 주둔하여 요난을 지원하였다. 진북장군 요강 또한 자신의 휘하 병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요난과 합류하여 경수(涇水) 가에 진을 치고 왕진악을 막았다. 이에 왕진악은 모덕조를 보내 진격시켜 요강을 격파하였고, 요강은 끝까지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요난은 장안으로 도망쳤다. 왕진악은 유유에게 사람을 보내 승전보를 올린 후, 장안으로 곧바로 진격하였다.

진동장군 · 평원공 요박(姚璞)과 황문시랑 요화도는 포판에서 서의지의 군대를 공격하였는데, 서의지는 패하여 전사하였고, 주초석은 자신의 병사들을 버린 채 동관으로 달아났다.

요찬은 사마휴지와 사마국번을 보내 지관(軹闗)에서 하내(河內)로 향하게 하여 몰래 북위군을 끌어들여 유유의 후방을 노리게 하였다. 이때 큰비가 계속 내려 위수(渭水)가 범람하였고, 요찬 등은 북쪽으로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요찬은 물러나 정성(鄭城)에 주둔하자, 유유가 마침내 정성(鄭城)으로 진격하여 요찬을 압박하였다.

상서 요백과(姚白瓜)가 네 군(郡)에 속한 여러 잡호(雜戶)를 장안으로 옮겼다.

요홍은 명령을 내려 거기장군 요유와 상서 방통(龎綂)에게 장안의 궁중에 병력을 주둔시킴으로써 왕진악의 공격에 대비하게 하였다. 또, 장수 요비(姚丕)는 위교(渭橋)를 지키게 하고, 보국장군 호익도는 석적(石積)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동평공 요찬은 파동(灞東)으로 옮겨 주둔하게 하고, 요홍 자신은 소요원(逍遙園)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한편, 왕진악은 수군을 거느리고 황하에서 위수(渭水)로 들어가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가 탄 배는 모두 몽충(蒙衝)이라는 작은 전함이었는데, 배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모두 선체 안에 들어가 있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북방에서는 본래 배와 노를 거의 볼 수 없었으므로, 요홍의 군사들은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데도 밖에 배를 움직이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모두 놀라 신령의 조화라고 여겼다.

8월 23일[7], 왕진악이 위교(渭橋)에 도착하였다. 왕진악은 병사들에게 식사를 마치게 한 뒤 모두 무기를 들고 강안으로 올라가게 하면서, 뒤늦게 상륙하는 자는 참수하겠다고 명하였다. 왕진악의 병사들이 모두 상륙하고 나자, 갑자기 위수(渭水)의 물살이 급하게 바뀌더니 배들은 모두 물길을 따라 떠내려갔고, 순식간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갑작스럽게 퇴로가 차단된 마당에, 당시 요홍이 거느린 병력은 여전히 수만 명이었는데, 왕진악이 병사들에게 타일렀다.
"우리의 고향은 본래 강남(江南)에 있다. 이곳은 장안성(長安城)의 북문(北門)으로, 고향과는 만 리나 떨어져 있는데, 배와 의복, 군량도 모두 물에 떠내려가 버렸다. 이제 앞으로 나아가 싸워 이기면 공로와 명예가 함께 드러날 것이고, 이기지 못하면 시신조차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 그대들은 힘써 싸우라."
그러고는 자신이 병사들보다 앞장서 돌격하였다. 병사들도 이에 용기가 솟아 앞다투어 진격하였고, 위교(渭橋)에서 요비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요홍은 군대를 이끌고 이를 구원하러 갔으나, 강가의 지형이 좁은 데다가 패주하는 요비의 군사들에게 짓밟히고 휩쓸려 미처 싸워 보지도 못한 채 군대가 무너졌다. 진서장군 요심, 전군장군 요열(姚烈), 좌위장군 요보안(姚寳安), 산기상시 왕백(王帛), 건무장군 요진(姚進), 양위장군 요호(姚蚝), 상서우승 손현 등이 모두 여기서 전사하였고, 요홍 홀로 말을 타고 궁궐로 돌아갔다.

2.4. 후진의 멸망과 최후

왕진악이 평삭문(平朔門)을 통해 장안성 안으로 진입하니, 요홍은 거기장군 요유 등 수백 명의 기병과 함께 성을 빠져나와 석교(石橋)로 달아났다. 동평공 요찬이 요홍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와 병사들을 불러 모아 이 사실을 알리자, 병사들은 모두 칼로 땅을 치고 소매를 걷어붙이며 크게 울었다. 이와중에 보국장군 호익도는 이전부터 유유와 은밀히 내통하고 있었는데, 이날 자신의 군대를 버리고 유유에게 투항하였다.

동평공 요찬은 밤중에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석교(石橋)의 요홍과 합류하려 하였다. 그러나 동진군이 이미 석교를 견고하게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요찬의 군대는 들어가지 못하였고, 병사들은 모두 놀라 흩어졌다. 요홍은 더 이상 계책이 없자 동진의 군영으로 가서 항복하려 하였다. 이때 요흥의 아들 요불념(姚佛念)은 당시 열두 살이었는데 요홍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지금 진(晉)나라에 항복하신다 하더라도 진(晉)나라 사람들이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므로 끝내 목숨을 온전히 보전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바라건대 스스로 목숨을 끊으십시오."
요홍은 망연한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요불념은 마침내 궁궐의 담장에 올라가 투신하여 죽었다.

8월 24일[8], 요홍은 아내와 자식,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동진의 군문 앞으로 나아가 항복을 청하였다. 왕진악은 요홍을 붙잡아 담당 관리에게 넘기고, 장안성 안에 있던 이민족과 한족 백성 60,000여 호는 모두 나라의 은혜를 베풀어 위로하고 안정시켰다. 군령은 엄숙하게 시행되어 약탈을 막았으며, 덕분에 백성들은 자신의 집에서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다.

영화 2년(417년) 9월, 유유가 장안에 이르자, 왕진악이 파상(灞上)으로 나아가 유유를 영접하였다. 유유가 왕진악을 위로하며 말했다.
"나의 패업을 이루어 준 사람은 참으로 경이오."
왕진악은 두 번 절하고 사양하며 말했다.
"이는 명공의 위엄과 여러 장수의 힘으로 이룬 것입니다. 이 왕진악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유유가 웃으며 말했다.
"경은 풍이(馮異)를 본받으려는 것인가?"

왕진악은 본래 탐욕스러운 성품이었다. 요홍의 창고에는 재물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왕진악이 이를 몰래 훔쳐 가진 것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유유는 그의 공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왕진악은 또 요홍이 사용하던 황제의 수레를 몰래 감추어 두었다. 유유가 사람을 보내 이를 엿보게 하자, 왕진악은 수레에 붙어 있던 금과 은을 떼어 내고 수레 자체는 담장 옆에 버렸다. 이후 유유는 각종 기구와 혼천의, 해시계, 기리고(紀里鼓), 지남차(指南車)와 진시황전국옥새를 거두어 건강(建康)으로 보냈다. 그 밖의 금과 옥, 비단, 진귀한 보물은 모두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후진의 진동장군 · 평원공 요박과 병주자사 윤소가 포판을 들어 유유에게 투항하였다. 무군장군 · 동평공 요찬도 종실의 자제 100여 명을 거느리고 동진의 군문 앞으로 나아가 항복하였다. 유유는 이들을 모두 죽이고, 나머지 요씨 종족은 강남(江南)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동진의 수도 건강에 도착해서는 요홍을 시장에서 처형하였다. 당시 요홍의 나이는 30세였으며, 재위 기간은 2년이었다. 요홍이 처형된 뒤, 건강 주변 100리 안의 풀과 나무가 모두 말라 죽었다고 한다. 이로써 후진은 총 32년 동안 존속하였다.

3. 후일담

마지막 황제인 요홍은 비록 참수되었어도 건강 일대로 압송된 후진의 요씨 황실은 나름대로 꽤 대우받은 것으로 보인다. 훗날 남제를 창건하는 태조 고황제 소도성이 세력을 굳혀갈 때 여러 차례 반소도성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중에 소도성을 위해 군사를 일으키지는 않았으나 반란 세력에게도 일절 협조하지 않은 태수들 중 고조 문환제 요흥의 손자 요도세의 이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소도성이 정권을 굳힌 이후에도 중도파들을 해코지하지 않고 내버려두었기에, 요흥의 후손들은 그럭저럭 남조에서 귀족 대우는 받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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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ce5b6>42권 「왕혼등전(王渾等傳)」43권 「산도등전(山濤等傳)」
왕혼 ,왕제, · 왕준(濬) · 당빈산도 ,산간 산하, · 왕융 ,왕연 왕징 곽서, · 악광
<rowcolor=#ece5b6>44권 「정무등전(鄭袤等傳)」45권 「유의등전(劉毅等傳)」
정무 ,정묵, · 이윤 · 노흠 ,노지(盧志) 노심, · 화표 ,화이 화항 화교, · 석감 · 온선유의 ,유돈, · 화교 · 무해 · 임개 · 최홍 · 곽혁 · 후사광 · 하반
<rowcolor=#ece5b6>46권 「유송등전(劉頌等傳)」47권 「부현전(傅玄傳)」48권 「상웅등전(向雄等傳)」
유송 · 이중부현 · 부함 · 부지상웅 · 단작 · 염찬
<rowcolor=#ece5b6>49권 「완적등전(阮籍等傳)」
완적 · 혜강 · 상수 · 유영 · 사곤 · 호무보지 · 필탁 · 왕니 · 양만 · 광일
<rowcolor=#ece5b6>50권 「조지등전(曹志等傳)」
조지(曹志) · 유준 · 곽상 · 유순 · 진수(秦秀)
<rowcolor=#ece5b6>51권 「황보밀등전(皇甫謐等傳)」52권 「극선등전(郤詵等傳)」53권 「민회태자전(愍懷太子傳)」
황보밀 · 지우 · 속석 · 왕접극선 · 완충 · 화담민회태자
<rowcolor=#ece5b6>54권 「육기등전(陸機等傳)」55권 「하후담등전(夏侯湛等傳)」56권 「강통등전(江統等傳)」
육기 · 육운하후담 · 반악 · 장재강통 · 손초
<rowcolor=#ece5b6>57권 「나헌등전(羅憲等傳)」58권 「주처등전(周處等傳)」
나헌 ,나상, · 등수 · 마륭 · 호분 · 오언 · 장광 · 조유주처 · 주방 ,주무 주초 주효,
59권 「여남왕량등전(汝南王亮等傳)」
사마량 · 사마위(瑋) · 사마륜 · 사마경(冏) · 사마예 · 사마영 · 사마옹(顒) · 사마월
60권 「해계등전(解系等傳)」
해계 · 손기 · 맹관 · 견수 · 무파 · 황보중 · 장보 · 이함 · 장방 · 염정 · 색정 ,색침, · 가필
<rowcolor=#ece5b6>61권 「주준등전(周浚等傳)」62권 「유곤등전(劉琨等傳)」63권 「소속등전(邵續等傳)」
주준 ,주복, · 성공간 · 구희 · 화질 · 유교유곤(劉琨) · 조적소속 · 이구 · 단필제 · 위준 ,위해, · 곽묵
64권 「무십삼왕원사왕간문삼자전(武十三王元四王簡文三子傳)」
사마궤 · 사마간(柬) · 사마경(景) · 사마지 · 사마유(裕) · 사마윤 · 사마연(演) · 사마해 · 사마하 · 사마모(謨) · 사마안 · 사마회 · 사마부(裒) · 사마충(沖) · 사마희 · 사마환 · 사마도생 · 사마욱(郁) · 사마도자
65권 「왕도전(王導傳)」
왕도
<rowcolor=#ece5b6>66권 " 「유홍등전(劉弘等傳)」67권 「온교등전(溫嶠等傳)」68권 「고영등전(顧榮等傳)」
유홍 · 도간온교 · 치감고영 · 기첨 · 하순 · 설겸
<rowcolor=#ece5b6>69권 「유외등전(劉隗等傳)」70권 「응첨등전(應詹等傳)」71권 「손혜등전(孫惠等傳)」
유외 ,유파, · 조협 · 대약사 · 주의응첨 · 감탁 · 변곤 · 유초 · 종아손혜 · 웅원 · 왕감 · 진군 · 고숭
<rowcolor=#ece5b6>72권 「곽박등전(郭璞等傳)」73권 「유량전(庾亮傳)」74권 「환이전(桓彝傳)」
곽박 · 갈홍유량 · 유역 · 유빙 · 유익환이(彝) ,환운 환활 환비 환충,
<rowcolor=#ece5b6>75권 「왕담등전(王湛等傳)」76권 「왕서등전(王舒等傳)」77권 「육엽등전(陸曄等傳)」
왕담(湛) · 순숭 · 범왕 · 유담 · 장빙 · 한백왕서 · 왕이 · 우담 · 고중 · 장개육엽 · 하충 · 저삽 · 채모 · 제갈회 · 은호
<rowcolor=#ece5b6>78권 「공유등전(孔愉等傳)」79권 「사상등전(謝尙等傳)」80권 「왕희지전(王羲之等傳)」
공유 · 정담 · 도회사상 · 사안 ,사염 · 사혼 · 사현 · 사만 · 사랑 · 사석 · 사막,왕희지
81권 「왕손등전(王遜等傳)」
왕손 · 채표 · 양감 · 유윤 · 환선 ,환이(伊), · 주사 · 모보 · 유하 · 등악 · 주서
82권 「진수등전(陳壽等傳)」
진수(陳壽) · 왕장문 · 우부 · 사마표 · 왕은 · 우예(預) · 손성 · 간보 · 등찬 · 사침 · 습착치 · 서광
<rowcolor=#ece5b6>83권 「고화등전(顧和等傳)」84권 「왕공등전(王恭等傳)」85권 「유의등전(劉毅等傳)」
고화 · 원괴 · 강유 · 차윤 · 은의 · 왕아왕공 · 유해 · 유뇌지 · 은중감 · 양전기유의 · 제갈장민 · 하무기 · 단빙지 · 위영지
<rowcolor=#ece5b6>86권 「장궤전(張軌傳)」87권 「양무소왕전(涼武昭王傳)」
장궤양무소왕 · 양후주
88권 「효우전(孝友傳)」
이밀 · 성언 · 하방 · 왕부 · 허자 · 유곤(庾袞) · 손구 · 안함 · 유은 · 왕연 · 왕담(談) · 상우 · 하기 · 오규
89권 「충의전(忠義傳)」
혜소 · 왕표 · 유심 · 국윤 · 초숭 · 가혼 · 왕육 · 위충 · 신면 · 유민원 · 주해 · 환웅 · 한계 · 주기 · 이웅 · 악도융 · 우괴 · 심경 · 길읍 · 왕량 · 송구 · 차제 · 정목 · 신공정 · 나기생 · 장의
90권 「양리전(良吏傳)」
노지(魯芝) · 호위 · 두진 · 두윤 · 왕굉 · 조터 · 반경 · 범귀 · 정소 · 교지명 · 등유 · 오은지
91권 「유림전(儒林傳)」
범평 · 문립 · 진소 · 우희 · 유조 · 범육 · 서묘 · 최유 · 범륭 · 두이 · 동경도 · 속함 · 서막 · 공연 · 범선 · 위소 · 범홍지 · 왕환
92권 「문원전(文苑傳)」
응정 · 성공수 · 좌사 · 조지(趙至) · 추담 · 조거 · 저도 · 왕침(王沉) · 장한 · 유천 · 조비 · 이충 · 원굉 · 복도 · 나함 · 고개지 · 곽징지
93권 「외척전(外戚傳)」
양수 · 왕순 · 양문종 · 양현지 · 우예(豫) · 유침 · 두예(乂) · 저부 · 하준 · 왕몽 · 왕하 · 왕온 · 저상
94권 「은일전(隠逸傳)」
손등 · 동경 · 하통 · 주충 · 범찬 · 노승 · 동양 · 곽원 · 곽기 · 오조 · 노포 · 범등 · 임욱 · 곽문 · 공장 · 맹루 · 한적 · 초수 · 적탕 · 곽번 · 신밀 · 유린지
삭습 · 양가 · 공손봉 · 공손영 · 장충 · 석원 · 송섬 · 곽하 · 곽우 · 기가 · 구형 · 사부 · 대규 · 공현지 · 도담 · 도연명
95권 「예술전(藝術傳)」
진훈 · 대양 · 한우 · 순우지 · 보웅 · 두불건 · 엄경 · 외소 · 복후 · 포정 · 오맹 · 행령 · 불도징 · 마유 · 선도개 · 황홍 · 색담 · 맹흠 · 왕가 · 승섭 · 곽논 · 나습 · 욕곽 · 태산
96권 「열녀전(列女傳)」
신헌영 · 엄헌 · 종염 · 왕혜풍 · 이락수 · 순관 · 사도온 · 용린 · 유아 · 염부인 · 소혜 · 모황후 · 단원비 · 양황후 · 윤태후
97권 「사이전(四夷傳)」
부여 · 숙신 · 마한 · 진한 · · 토욕혼 · 언기국 · 구자국 · 대완국 · 강거국 · 대진국 · 임읍국 · 부남국 · 흉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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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돈 · 환온환현 · 변범지 · 은중문
100권 「왕미등전(王彌等傳)」
왕미 · 장창 · 진민 · 왕여 · 두증 · 두도 · 왕기 · 조약 · 소준 · 손은 · 노순 · 초종
(1) 사마소 부인 왕원희와는 다른 인물로 효회태후로 추존된 사마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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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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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홍과 함께 처형된 황후가 있긴 있었는데, 이름이나 성씨가 전하지 않는다.[2] 병진년 기해월 갑자일. 음력으로는 10월 20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5일이다.[3] 정사년 계묘월 신유일. 음력으로는 2월 19일이고, 양력으로 3월 22일이다.[4] 정사년 갑진월 경진일. 음력으로는 3월 8일이고, 양력으로 4월 10일이다.[5] 정사년 무신월 기해일. 음력으로는 7월 29일이고, 양력으로 8월 27일이다.[6] 정사년 기유월 신축일. 음력으로는 8월 2일이고, 양력으로 8월 30일이다.[7] 정사년 기유월 임술일. 음력으로는 8월 23일이고, 양력으로 9월 19일이다.[8] 정사년 기유월 계해일. 음력으로는 8월 24일이고, 양력으로 9월 20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