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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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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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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孔衍
(268 ~ 320)

동진의 인물. 자는 서원(舒元). 예주 노국 사람. 《한위춘추》의 저자이자, 공자 22대손. 조위 시기 대홍려를 지낸 공문(孔文)의 손자. 정남군사 공육(孔毓)의 아들.

2. 생애

어릴 적부터 공부를 좋아해, 고작 12세에 불과할 때 《시경》과 《상서》에 능통했고,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는 여러 주와 군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공연은 강동으로 도망쳐 낭야왕 사마예의 참군 겸 기실로 배속되었다. 공연은 업무를 처리하는 능력이 뛰어나 문서가 산적해 있어도 직분에 맞게 빠르게 일을 처리하였다.

대흥 원년(318년) 3월, 공연은 유량(庾亮)과 함께 중서랑에 임명되었다가, 태자중서자로 옮겨져 태자 사마소를 보좌하였다. 공연은 경전에 밝고 조정의 의례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아 동진 처음 세워졌을 때, 조정의 법규를 바로 세우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어 원제 사마예와 태자 사마소의 신임을 받았다.

대장군 왕돈이 전횡을 부리기 시작하자, 공연은 태자 사마소에게 나아가 말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조정에 학식 있는 자들과 재야의 준걸을 모아, 이들과 더불어 정책을 상의함으로써 성총(聖聰)을 널리 발휘하소서."
하지만 이 말이 왕돈의 귀에 들어가니, 왕돈은 이를 불쾌히 여기고 조정을 압박해 공연을 광릉군(廣陵郡)으로 전출 보내게 하였다. 당시 광릉군은 서쪽으로 후조와 인접하여 위험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광릉태수에 임명된 공연을 안쓰럽게 여겼으나, 공연은 내색하지 않고 순순히 부임하였다.

공연은 강력한 후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으니, 후조의 군주 석륵은 산양(山陽)까지 나아갔다가 공연의 명성을 듣고 칙령을 내려 부하들에게 광릉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대흥 3년(320년), 재직 중 세상을 떠났다. 향년 53세.

춘추시대부터 5호16국시대까지의 서적들을 연구한 청나라의 문헌학자 엄가균에 따르면 공연의 저서로는 《한위춘추》 외에도 《춘추시국어》 10권, 《춘추후국어》 10권, 《한상서》 10권, 《한춘추》 10권, 《후한상서》 6권, 《후한춘추》 6권, 《후위상서》 9권, 《공양집해》 14권 등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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