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1:00:04

왕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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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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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왕희지(王羲之)
출생 303년 진나라 서주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1]
사망 361년 동진 양주 단양윤(丹陽尹)[2] 강승현(江乘縣)[3]
일소
담재
1. 개요2. 생애3. 작품세계4. 일화5. 기타6. 《난정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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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동진 시대의 명필.

자는 일소(逸少)로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역임했다고 해서 왕우군으로도 불리며, 왕람의 증손자였다.

사람 많은 중국 역사에서도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는 고금의 으뜸으로 손꼽힌 사람이었고, 후대에도 엄청난 존경을 받았다. 서성(書聖)이라고 불리는데, 대략 시쪽의 굴원, 이태백, 두보와 같은 위치라고 보면 된다.[4]

왕희지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인 왕현지, 왕응지, 왕환지, 왕숙지, 왕휘지, 왕헌지 등도 모두 당시에 명필로 명성이 높았는데, 특히 7남인 왕헌지(王獻之)가 뛰어난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왕희지와 왕헌지 부자를 일컫어 이왕(二王) 또는 부자의 이름 앞글자를 모아 희헌(羲獻)이라고 했다.

2. 생애

왕희지의 본관이자 출생지는 오늘날 산둥성린이시(臨沂市)인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으로, 하내 사마씨의 진나라가 강남(중국)에서 버티는데 큰 공을 세운 왕도의 종질이었고, 아버지는 왕광(王曠)이라는 사람이었다. 처음 글씨를 배우기 시작할 때는 위부인이라는 여류 명필에게 글씨를 배웠다. 그 후에는 특별히 스승을 두지 않고, 한나라조위 시대의 비문을 보고 스스로 배우면서 공부를 계속했다.

나중에는 벼슬길에도 나아가 비서랑(祕書郞)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의 장사(長史)가 되었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내사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나름 정치적인 야망이 있었는지 순선과 함께 권신 은호의 최측근이 되어 북벌을 요청하기도 했고, 재상 사안에게 민간의 정치를 논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사적으로 원한 관계에 있었던 왕술의 정치적인 압박에 못이겨 사직하고, 회계 땅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잡아, 사안, 손작(孫綽), 이충(李充), 허순(許詢), 지둔(支遁) 등과 청담을 나누었다. 도가 쪽에도 관심이 있었는지 도사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하면서도 나름대로 분주하게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왕희지의 업적은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서예를 단순히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왕희지는 예서(隸書)를 잘 썼는데, 아직 성숙되지 못했던 해서 ·행서 ·초서를 예술로 만들었다. 왕희지의 남은 필적들도 모두 이 세 가지 서체이다.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물론 왕희지가 '서성'(書聖)으로 불린다고 해서 정말로 그가 고금의 모든 서예가들 중 최고라는 뜻은 아니다. 예술은 어느 정도의 수준을 넘어가면 서열을 매기기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기 11세기, 북송 사람 미불(米芾)이 살았던 시절에 왕희지의 글씨는 미불의 기준으로 진품이 거의 없었을뿐더러, 현대에는 그마저도 사라져서 오늘날에는 왕희지가 쓴 원본을 보고 따라 쓴 글씨, 따라 쓴 글씨를 보고 또 따라 쓴 글씨가 남아서 전해질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기 4세기경 왕희지의 진품 글씨가 어떠했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당 태종 이세민이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하여 수집하고 강조한 이래로 안진경구양순 같은 (당대 이후) 중국 서예사의 중요한 모범이 된 명필들이 왕희지의 작품을 따라 쓴 법첩을 보고 공부했기 때문에, 중국 서예의 진수를 익히고자 한다면 좋든 싫든 왕희지체를 배우고 임서(따라 쓰기)를 해야 한다. 현대에도 서예가가 자신의 서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왕희지의 글씨를 기반으로 해서 만들기를 시작할 정도로 표준적인 모델이다.

왕희지는 말년에 마약오석산에 중독되어 재료를 캐기 위해 분주하게 다녔으며, 아들인 왕헌지도 오석산에 중독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3. 작품세계

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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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론》(樂毅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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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경》(黃庭經)

행서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50px-LantingXu.jpg

《난정서》(蘭亭序)[5][6]

초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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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칠첩》(十七帖)

등등이 대표작이다. 그외 글씨로《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유목첩》(遊目帖),《이모첩》(姨母帖),《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의 필적이 전해지지만 왕희지의 온전한 필적과는 좀 다르리라 추정된다. 당 태종 이세민이 워낙 왕희지를 좋아해서 죽을 때 천하에 있는 왕희지의 글씨를 수집하여 자신의 무덤에 끌고 가버린 탓에 왕희지의 친필이 많이 사라졌다.

2010년 11월 10일, 사상 처음으로 경매에 나온 왕희지의 《평안첩》(平安帖)이 3억 800만 위안에 낙찰되었다. 이건 한국 돈으로 따지면 약 523억원이었다. 게다가 이건 왕희지의 원본도 아니고, 복제품이었다.

4. 일화

  • 왕희지에 관련된 당 태종 이세민의 도둑질 설화가 있는데, 바로 《난정서》에 관련된 것이다. 《난정서》는 동진 효종 목황제의 영화 9년(353년) 3월 3일, 회계 산음(저장성 소흥)의 난정에서 당시의 명사 41명이 모여 계추를 하고,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유흥을 즐기며 시흥에 젖었을 때, 왕희지가 쓴 시집의 '서'이다. 이후《난정서》는 왕희지의 7대손인 지영에게 전해졌다. 지영은 승려라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100세로 입적하게 되자 죽기 직전 《난정서》의 원본을 제자인 변재에게 물려주었다. 이를 알게 된 당 태종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소장하고 싶어했지만, 당시 승려였던 변재가 "난 그런 거 없음." 하고 오리발을 내미니, 황제 체면에 글씨 하나 얻자고 승려를 잡아 와 패고, 뒤질 수도 없어서 속만 앓았다. 그러자 태종은 신하들에게 이를 의논했는데 그중 방현령이 감찰어사로 있었던 소익(蕭翼)[7]을 추천했다. 이에 태종은 소익을 보내 《난정서》를 가져오게 했다. 소익은 우선 길손으로 위장해서 "지나가는 길인데, 스님이 바둑을 그리 잘 두신다면서요?" 하고 친해져서 계속 바둑을 붙었다. 변재도 바둑을 좋아해서 둘은 맨날 바둑을 두었는데, 소익이 지나가는 말로 왕희지의 이야기를 하자 변재는 《난정서》를 꺼내서 보여주었고, 소익은 "이야, 쩐다." 라고 하며 넘어갔다. 이후 매일 바둑을 둘 때, 《난정서》를 꺼내서 보다가 옆에 두고 하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수년 동안 친교를 다지던 소익은 어느날 종이를 가져와서 바닥에 둔 《난정서》와 바꿔치기를 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에서 달아났다. 변재는 나중에야 속은 걸 알았지만 당나라 황제에게 따질 수는 없었다. 결국 변재는 비록 황제를 속였지만 80을 넘긴 고령이라 《난정서》의 값으로 비단과 쌀을 받았다. 변재는 이것을 3층 보탑의 건립 비용으로 사용했고, 스승인 지영의 유품을 잃은 것에 대해 애통해하다가 1년이 지난 뒤에 숨을 거뒀다. 이것은《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그후《난정서》는 당 태종이 소장하고 있다가 자신의 무덤인 소릉에 배장해서 아예 무덤 속까지 가져갔다. 그러나 훗날 당나라가 멸망한 뒤 군벌인 온도가 소릉을 도굴하여 원본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으나 원체 유명했기 때문에 필사본이 여럿 남아 전해지고 있다.
  • 왕희지는 삼국시대의 사람인 종요위기, 위관 부자와 인연이 있었다. 종요는 종회의 부친으로, 역시 중국 역사에 글씨로 이름을 남긴 인물이었는데, 왕희지의 스승이었던 위부인[8]이 종요의 서풍을 계승했다. 그래서 왕희지도 종요를 존경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왕희지와 종요, 그리고 후한의 서예가인 장지를 고금의 가장 뛰어난 서예가로 꼽기도 한다. 아무튼 이렇게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대단한 평가를 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왕희지 글씨의 진품을 얻으려고 눈이 벌개지다 보니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남았다.
  • 하루는 왕희지가 평복 차림으로 회계 거리를 다니다가, 부채 가게를 지나게 되었다. 부채 가게에는 노파가 혼자 앉아있었는데, 그녀를 본 왕희지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부채에 쓱쓱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노파는 웬 이상한 놈이 낙서를 쓴다고 생각하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부채 값이 얼마입니까."

    "하나에 1문이외다."

    "그럼 이 부채를 문 밖에 거시구려. 하나에 100문을 받을 겁니다."

    그리고 나서 왕희지가 나가자 노파는 황당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귀신같이 다른 사람이 나타나더니 100문을 주고 부채를 사갔다. 뒤에야 그 정체를 깨달은 노파가 다음 날 왕희지에게 하나만 더 써달라고 했지만 그는 그냥 지나갔다고 한다.
  • 당시 기준에서 보면 희한한 애완동물 취향이 있어서 거위를 매우 좋아했다고 하며, 식용이 아니라 관상용 내지 애완용으로 키웠다. 이 때문에 거위와 관련된 일화가 몇 개 있다.
하루는 어느 도사가 좋은 거위를 가지고 있어 왕희지가 팔라고 했지만 도사는 돈 대신 《도덕경》을 1부 필사해줄 것을 요구했고, 왕희지는 기꺼이 《도덕경》1부를 써준 뒤 거위를 데려왔다고 한다.[9]
다른 일화로 어떤 집에서 키우는 거위가 목청이 좋기로 유명하다길래 왕희지가 사람을 보내서 팔라고 했지만 팔지 않자, 구경이라도 하려고 그가 직접 찾아갔다. 그런데 정작 그 집에 도착하니 거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에 왕희지가 집주인에게 거위가 어디갔나고 물으니, 집주인은 유명하고 높은 관리께서 오신다고 사람들이 야단이기에 대접할 것이 변변치 않아서 거위를 잡아 음식으로 만들고 있다며 대답했고, 이를 들은 왕희지가 사색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왕희지를 다룬 그림을 보면 거위와 《도덕경》을 들고 득의의 웃음을 짓고 있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일종의 왕희지의 필수요소 아이템인 셈이다. 먼 훗날 장승업의 그림에도 왕희지는 거위와 함께 있다.

5. 기타

현대 중국의 교육과정에서는 고등학교 때 《난정집서》를 가르친다.

상식과는 달리 왕희지는 천재형이 아닌 노력파였다. 처음 글을 배웠을 때만 해도 그의 서예나 학문 실력은 또래보다 조금 뒤떨어졌다고 한다. 이런 차이를 뛰어넘기 위해 왕희지는 열심히 공부했고,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자신의 집 주변 연못에 벼루와 붓을 하도 씻어서 얼마 안 가 연못이 검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물론 이 일화는 후대에 윤색된 것으로 사실이 아니지만, 그만큼 왕희지의 명성은 피나는 노력으로 이뤄낸 결과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6. 《난정서》 전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50px-LantingXu.jpg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會于會稽山陰之蘭亭,脩稧事也;群賢畢至,少長咸集。
영화 9년 세재 계축(서기 353년) 늦봄 초에 회계산 북쪽 난정에 모여 계사(稧事)를 지냈으니, 군현(群賢)이 모두 이르고 소장(少長)이 다 모였다.

此地有崇山峻領,茂林脩竹,又有淸流激湍,暎帶左右;引以爲流觴曲水,列坐其次;雖無絲竹管弦之盛;一觴一詠,亦足以暢敍幽情。
이 땅은 숭산준령(崇山峻領)과 무림수죽(茂林脩竹)이 있고 또한 맑은 여울이 좌•우로 띠를 이루었는데, 이를 끌어다가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삼고 순서대로 늘어서 앉으니, 비록 사죽관현(絲竹管弦)의 성대함은 없지만,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또한 그윽한 정을 후련히 풀기에는 충분했다.

是日也;天朗氣淸,惠風和暢,仰觀宇宙之大,俯察品類之盛;所以遊目騁懷,足以極視聽之娛,信可樂也。
이날, 천기는 화창하고 바람은 온화하여, 우주의 크기를 우러러 바라보고 사물의 풍성함을 굽어 살피니, 멀리 바라보고 회포를 풀어내서 보고 듣는 즐거움을 족히 다하여 즐길 만했다.

夫人之相與,俯仰一世;或取諸懷抱,悟言一室之內;或因寄所託,放浪形骸之外。
무릇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며 한 세상을 살아감에, 누구는 여러 정회를 가지고 방구석 안에서 말로 깨닫고, 누구는 자연에 몸을 맡기어 육신의 밖으로 방랑을 한다.

雖趣舍萬殊,靜躁不同;當其欣於所遇,暫得於己,怏然自足,不知老之將至;及其所之旣惓,情隨事遷,感慨係之矣。
비록 나아감과 머무름이 모두 다르고 고요함과 분방함이 같지 않으나, 그 즐거움을 만나서는 잠시 스스로를 얻고 우쭐거리며 자족하여 늙음이 다가온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그것이 권태로워지게 되고 나서는 감정이 세상사에 따라 바뀌어 개탄스러운 마음이 이에 매이게 된다.

向之所欣,俛仰之閒,以爲陳迹;猶不能不以之興懷。況脩短隨化,終期於盡!
즐겁게 여기던 것도 잠깐 사이에 흔적만 남으니, 더욱 정회가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수명의 장단이 조화에 따라 종내는 다하게 될 것임에야!

古人云:"死生亦大矣";豈不痛哉!
옛 사람도 "죽고 사는 것은 큰 일이다"라고 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아니한가!

每攬昔人興感之由,若合一契;未甞不臨文嗟悼,不能諭之於懷;固知一死生爲虛誕,齊彭殤爲妄作。
언제나 옛 사람들이 감흥을 일으킨 원천을 살펴보면 약속한 듯 일치하여, 그 문장을 보고 탄식하지 않은 적 없고, 정회를 깨닫게 되지 않은 적 없으니, 생사가 하나라는 말이 허탄(虛誕)하고 장수와 요절이 같다는 말이 망작(妄作)하다는 것을 진실로 알게 된다.

後之視今,亦由今之視昔;悲夫!
먼 훗날 지금을 보는 것이 또한 지금 먼 옛날을 보는 것과 같으리니, 슬프도다!

故列敍時人,錄其所述,雖世殊事異,所以興懷,其致一也;後之攬者,亦將有感於斯文。
그러므로 이때 사람들을 순서대로 적고 그들이 지은 바를 기록해두니, 비록 세상이 달라지더라도 정회가 이는 것은 일치할 것이므로, 후세에 이것을 보는 자는 또한 이 글에서 느끼는 바 있을지로다.


[1] 본관이기도 하다.[2] 본래 군이었지만 진나라가 남천한 후, 장안이 있는 경도윤이나 낙양이 있는 하남윤처럼 되었다.[3] 거기에 낭야군이 교치(僑置)되었다.[4] 이태백은 시선(詩仙)으로, 두보는 시성(詩聖)이라 불린다.[5] 왕희지의 글씨 중에 가장 유명하며, 중국에서 거의 국보 1호급으로 취급받는 무가지보(無價之寶), 즉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다. 도장이 많이 찍혔는데 소장자들이 자신이 소유했다는 기념으로 찍은 것이다. 참고로 원본은 사라졌다. 위 사진 속 《난정서》는 당나라때 사람인 풍승소의 신룡본 임모본(臨模本)으로, 글씨체까지 흉내내려 애써가며 쓴 사본이다. 한편 원본이 사라진 과정에는 이런 일화가 전한다. 당 태종 이세민이 왕희지의 글씨를 너무 아껴서 매일 곁에 두고 보다가 유언으로 자신의 능에 《난정서》를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 이에 구양순 등 당대의 서예가들은 왕희지의 《난정서》 원본을 모서했고, 왕희지의 친필 작품은 당 태종의 소릉에 같이 묻혔다고 한다. 당나라 사람인 풍승소의 신룡본 필사본은 500종이 넘는 임, 모본 중에 가장 유명하다.[6] 중국 현대의 문학자인 곽말약은 《난정서》가 진본이 아니며, 왕희지의 7대손이었던 지영이 쓴 글이라고 주장해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이 논쟁은 모택동까지 끼어들었으나 근거가 취약하여 결론 없이 종결되었다.[7]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군주였던 원제 소역의 증손자였다.[8] 위부인 역시 명필로 유명했던 위기, 위관 부자의 후손이었다.[9] 이 일화는 애초에 도사가 왕희지의 글씨를 너무 좋아했는데, 살 돈이 없어서 의도적으로 거위를 키웠다는 버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