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7-11-20 22:31:42

소역

소량의 역대 황제
3대 예장흥문왕 소동 4대 세조 원황제 소역 5대 숙종 민황제 소연명
후량 초대 효선황제 소찰
묘호 세조(世祖)
시호 효원황제(孝元皇帝)
연호 승성(承聖, 552년 11월 ~ 555년 4월)
성씨 소(蕭)
역(繹)
세성(世誠)
생몰 기간 508년 9월 16일 ~ 555년 1월 27일
재위 기간 552년 12월 13일 ~ 555년 1월 27일

1. 소개2. 생애3. 사후4. 여담

1. 소개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梁)의 제4대 황제.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효원황제(孝元皇帝). 재위 기간 동안 승성(承聖)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자는 세성. 아명은 칠부.

2. 생애

천감 7년(508년) 8월 6일(508년 9월 16일)에 태어났으며 소연과 원영영[1] 사이에서 태어난 7남이다. 7살에 상동왕에 책봉되었다.

태청 원년(547년) 정월, 형주, 옹주 등 9주 군사 도독을 맡고 형주 자사가 되었다.

태청 3년(549년), 하남왕 후경이 난을 일으키고 소연을 유폐시켰다가 소연이 굶어 죽자 소역은 작은 아들을 서위에 볼모로 보내고 북제와 화의를 맺었다. 이에 서위는 볼모를 받지 않고 형제 관계를 맺기 원했고 북제는 소역을 양나라 상국으로 임명했다. 6월, 소역은 후경을 토벌할 작정으로 군대를 모집하고 하동왕, 상동 자사였던 소예[2]에게 3번이나 사람을 보내 식량을 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소예가 모두 거절하자 소역은 무력으로 소예를 공격했다. 이에 소예의 아우였던 악양왕, 옹주 자사 소찰[3]은 소역의 근거지였던 강릉을 공격해서 형 하동왕 소예를 구원하려다가 오히려 패배하고 도망쳤다. 그래서 소찰은 서위에 구원을 보내 번국이 되기를 원했다.

대보 원년(550년) 4월, 평남 장군 왕승변이 장사를 함락시키고 소예를 죽였다.

대보 2년(551년) 6월, 후경은 파릉에서 대패하고 건강으로 도주했으며 소역은 군사를 이끌고 계속 추격했다. 7월, 후경은 소강을 협박하여 예장왕 소동에게 양위하게 하고 소동을 황제로 세웠다가 11월, 소동을 폐하고 스스로 한(漢)나라 황제가 되었다.

대보 3년(552년) 3월, 왕승변과 시흥 태수 진패선의 공격을 받고 후경은 가죽 주머니에 두 아들을 넣어 백여 기를 데리고 동으로 달아났다. 배를 타고 장강을 건너 북으로 도주할 생각이었지만 추격병이 계속 쫒아왔다. 이에 빨리 도주하기 위해 자기 자식들을 강물에 집어 넣고(...), 나름대로 오래 갔지만 지쳐 잠든 사이에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유방은 자식들을 마차에서 떨궈도 마부가 주워줬는데 후경은 사공이 소역에게 매수당했다.

후경의 부하들은 그의 시체를 소금에 절이고, 그의 처자와 함께 건강으로 보냈다. 왕승변은 후경의 머리를 베어 강릉으로 보내고 그의 팔은 북제(北齊)로 보냈다. 이는 후경이 북제의 전신인 동위(東魏)에서 이탈한 장수이므로 북제와의 화평을 위해 그를 죽였다는 증거로 보낸 것이다. 그리고 후경의 시체는 건강 거리에 매달아놓았으며 그의 처자는 모두 참살되었다. 매달아놓은 그의 시체는 백성들이 달려들어 붙어 있는 살을 모두 뜯어먹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왕망보다 더 처참했다. 늦게 도착해 살을 먹지 못한 백성들은 억울해하다가 남은 뼈를 불태워 물에 태워 마실 정도로 후경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했다. 후경의 머리는 강릉에 있던 소역이 받아서 후경에 의해 비참하게 아사한 아버지 소연의 원혼을 달래는 제물로 사용되었다. 그 다음에는 사흘동안 강릉 거리에 매달았다가 삶아서 색칠한 다음 무기 창고에 보관했다. 이것은 후경이 저지른 악업의 크다큰 대가였다.

후경의 난은 평정되었으나, 양나라의 국력은 크게 쇠약해지고 영토의 반 이상이 서위와 북제에 넘어갔다. 파촉 지방, 형주 지방, 장강 이북 지방을 서위와 북제에 상실함으로써 영토는 장강 이남으로 한정되었다.

4월, 황제를 칭했던 무릉왕, 태위, 익주 자사 소기는 소역에게 화해를 구걸했으나, 거절당하고 7월에 토벌을 당한 후에 다음 해(553년)에 피살되었다.

11월, 소역은 강릉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폐허가 된 수도 건강 대신에 자신의 근거지 강릉으로 천도했다. 그는 강릉을 건강을 모델로 그대로 개축했는데 성벽의 표격, 대전, 성문 이름까지 모두 건강과 같았다. 그는 효성이 지극해 아버지가 죽은 정전에서 일을 보지 않고, 용광전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승성 2년(553년) 3월, 서위(西魏)의 사신을 접견했다. 하지만 대우가 북제의 사신보다 못하다는 구실로 서위의 승상이자 권력자였던 우문태는 불만을 품었다. 이를 구실로 소예의 동생이었던 옹주 자사 소찰의 지지와 지원 하에 5만 명을 출병시켜 소역을 공격했다. 소역의 조카뻘이었던 소찰은 강릉과 가까운 요충지 양양을 서위에게 스스로 바치고, 서위군과 함께 형주 강릉을 공격해왔다. 소역은 진양문에서 열병하고 비파문으로 친히 나가 항전하였다.

승성 3년(554년) 11월, 강릉이 포위되고 외성 서문이 열려서 서위군이 들어오자 소역은 절망하며 "만 권의 책을 읽고 오늘 이렇게 일생을 마치는구나. 죽을 바에 책들이 무슨 소용인가? 문무의 도가 오늘 밤에 끝장나는구나."라면서 내성 안 동죽각전에 비치된 고금도서 14만 권을 모두 불살라 없애고[4] 내성으로 퇴각했다. 이것은 진시황분서갱유보다 심하고 항우의 함양 파괴[5]에 비견할 만하다. 결국 12월, 내성마저 함락되면서 사로잡혀 궁중 주의고에 구금되었다가 머지않아 소찰의 지시에 의해 결국 피살되었다{승성 3년(554년) 12월 19일, 555년 1월 27일}. 소찰은 천으로 그의 몸을 감아 부들돗자리에 싸고 흰 띠로 묶어 강릉 진양문 밖에 매장했으며 그가 죽을 때의 나이는 47세였다.

3. 사후

서위는 소찰을 황제로 세우고 강릉성을 두 구역으로 나누어 동쪽에는 소찰이 거주하고 서쪽은 강릉 총관이 지휘하는 서위군이 주둔하면서 서위의 괴뢰 국가인 후량이 탄생했다.[6]

4. 여담

소역은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이미 대여섯 살 때부터 사서오경을 암송하여 소연의 칭찬을 받았다. 장성해서는 많은 책을 읽었고 눈병으로 한쪽 눈을 잃고도 그만두지 않았다. 또 책 수집을 즐겨 많은 책들을 모아 창고에 보관했는데 이것은 그의 만행으로 없어졌다.

서화, 문장에 뛰어나 저작을 남겼으며 조서도 붓만 들면 바로 완성했다. 현재 남아있는 <양직공도>가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단, 소역이 그린 원본은 남아 있지 않고 <역대제왕도권>으로 유명한 나라 화가 엽립본의 모사본도 남아있지 않다. 현재 것은 북송 시대의 모사본이다.[7]

하지만 나약하고 원대한 계획이 없었고 의심이 많고 과단성이 없었다. 황로 사상을 숭상해서 강릉이 서위에게 포위됐을때도 태평스럽게 <노자>를 강의하여 백관들은 갑옷을 입고 그의 강의를 들었다. 또 여색은 즐기지 않았지만 미신을 깊이 믿어 금기하는 것이 많았다. 벽이 무너지거나 집이 기울어져도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리를 미뤘다. 억지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시기심이 많았으며 잔인했다. 강릉이 포위당했을때 감옥에는 수천 여명의 사형범들이 갇혀 있었는데 관원은 그들을 풀어 군사로 충당시키고 무기를 주어 싸우게 하자고 건의했으나 오히려 그들을 모두 몽둥이로 때려 죽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소역이 곧 죽는 바람에 이것은 집행되지 않았다.

소역의 아들들은 소역과 함께 대부분 서위군 또는 후경에게 피살되었거나 아니면 요절했다. 소역의 남자 자손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소역의 장남 소방등의 외아들이었던 손자 소장이다. 소장의 아들이자 소역의 증손자가 훗날 당태종 시절 감찰어사를 지냈던 소익이다. 당 태종은 왕희지 글씨 매니아였는데 그 중 일품이라는 난정서를 얻고 싶어했다. 마침 월주 영흔사 변재 선사가 이를 가지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그를 불러 캐물었으나, 그는 자신의 스승 지영이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른다고 시치미뗐다. 당 태종은 그의 의도를 깨달았지만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돌려보내고 신하들과 의논했다. 이에 방현령은 소익을 추천했다.

사실 난정서는 왕희지 사후 대대로 후손에게 전해져 오다가 7대손이었던 지영에게 귀속되었다. 지영은 영흔사 승려였기 때문에 그가 100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난정서는 그의 제자 변재가 가지게 되었다. 변재는 나름 스승의 가보이자 유품을 지키기 위해 상자에 넣고 영흔사 대들보에 몰래 구덩이를 파서 숨겨두었다. 소익은 영흔사로 가서 변재를 만나 바둑, 거문고, 투호 등 잡기로 그와 금방 친해졌다. 소익은 자주 영흔사에 방문하면서 친분이 어느 정도 쌓이자 자신의 증조 할아버지 소역이 그린 양직공도를 꺼내 서화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소익은 난정서 이야기로 화제를 옮겼고 소익은 계속된 전란으로 난정서가 사라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변재는 도발에 걸려서 스스로 꺼내서 보여주고 말았다.

이에 변재가 잠시 절을 비운 사이에 칙명을 빌미로 난정서를 받아내고 이것을 장안으로 급히 보냈다. 이 공으로 소익을 추천한 방현령은 금채 1000단을 받았고 소익은 원외랑으로 승진하고 많은 상품과 장원, 저택을 받았다. 변재는 황제를 속인 죄가 있었으나, 80이 넘은 고령이었고 난정서를 얻은 기쁨에 겨워있던 당 태종은 용서하고 오히려 비단 3000단과 쌀 3000석을 값으로 쳐주었다. 하지만 변재는 그것을 3층 보탑 건립비로 사용하고 스승의 유품을 잃은 자신을 책망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머지않아 숨을 거두었다. 그 후 난정서는 당 태종의 소릉에 배장되었으나, 훗날 당나라 멸망 후 군벌 온도가 도굴하면서 유실되고 말았다.


[1] 원래는 석씨 성을 가진 궁녀로 무강후 석영보의 딸이었다. 원래 남제 시안왕 소요광의 시첩이었다가 소요광이 죽자 동혼후 소보권의 후궁이 되었다. 그리고 소보권이 죽고 남제가 멸망한 후 소연의 후궁이 되어 아들을 낳자 소연이 무척 기뻐하며 '원'이라는 성과 '영영'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2] 소연의 장남인 소통의 차남.[3] 소통의 삼남[4] 소역이 모두 정성들여 수집한 것으로 이 때 영원히 소실된 책들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5] 의외로 분서갱유의 피해는 심하지 않았다. 책을 수거하거나 불태웠어도 수거한 책은 함양에 학자들 연구 및 열람용으로 보관해주었는데, 문제는 항우가 함양을 통채로 불태운 것이다.[6] 나중에 서위가 멸망하고 북주가 들어섰지만 서위의 역할은 그대로 북주에게 계승되었다. 북주에서 사신을 보내 사소한 일로 소찰을 꾸짖자 소찰은 충격으로 병을 얻어 죽었다. 소찰의 아들 소규가 즉위하자 북주와 관계가 좋아지면서 신뢰를 얻어 서쪽에 있던 강릉 총관과 북주군은 철수했다. 그러나 북주가 멸망하고 수나라가 들어서고 소규의 뒤를 이은 소규의 아들 소종 때 수나라는 다시 강릉 총관과 병력을 주둔시킨다. 결국 수나라는 남조의 진나라를 치기 앞서 군대를 보내 후량을 멸하면서 양나라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 후 수나라 말기 황족 소선 등에 의해서 양나라 부흥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당나라가 세워지면서 모두 진압된다.[7] 비단에 그린 것으로 원래는 25개국 사신을 그렸다고 되어 있지만 현재 확인되는 것은 12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