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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 고제의 4대조 | |
<colbgcolor=#00C499><colcolor=#ece5b6> 소량 무제의 5대조 소정 | 蕭整 | |
본관 | 난릉 소씨 |
휘 | 정(整) |
부친 | 태중부군 |
자녀 | |
시호 | 회음부군(淮陰府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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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는 공제(公濟)였으며, 동해군(東海郡) 난릉현(蘭陵縣) 중도리(中都里) 출신으로, 소예의 아들이며 남제를 건국한 고제 소도성의 고조부, 소량을 건국한 양무제 소연의 천조부였다.2. 생애
서진 말기 회음현령(淮陰縣令)을 역임했다. 영가의 난 당시 강을 건너 아들 소할과 함께 진릉군(晉陵郡) 무진현(武進縣) 동성리(東城里)로 이주했으며, 이후 북방인이 강의 왼쪽, 이주인이 본토에 정착한 뒤 남난릉군(南蘭陵郡)이라 했다. 이후 소정의 자손들은 남난릉군의 관료 직위를 역임했다.후에 증손인 소도성이 남제를 건국하자 '회음부군'(淮陰府君)으로 추존되어 남제의 칠묘에 위패가 안치되었고, 현손인 소연이 소량을 건국하자 '회음부군'(淮陰府君)으로 재추존되어 양나라의 칠묘에도 위패가 안치되었다.
3. 가족
그의 조부는 소표로 생전 서진의 광릉군승(廣陵郡丞)을 역임했고, 남제가 건국되자 '광릉부군'(廣陵府君)으로 추존되어 남제의 칠묘에 배향되었다.소정에겐 세 아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각각 이름은 소준, 소할, 소열(蕭烈)로, 소준은 동진의 즉구현령(即丘縣令)를 지냈고, 남제가 건국되자 '즉구부군'(卽丘府君)으로 추존되어 남제의 칠묘에 봉안되었다.
소할은 동진 시기 남난릉군(南蘭陵郡)의 제음군태수(濟陰郡太守)를 지냈으며 소량이 건국되자 '제음부군'(濟陰府君)으로 추존되어 양나라의 칠묘에 봉안되었다. 소열(蕭烈)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