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의 아버지에 대한 내용은 왕균(고려) 문서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77449, #2E8B57 20%, #2E8B57 80%, #277449); color: #ece5b6;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할거정권 군주 | 반란 지도자 | |||
전사웅 | 왕소파 | 이순 | 장여 | |
왕균 | 몽간 | 왕칙 | 농전복 | |
농지고 | 조심 | 송강 | 방석 | |
장방창 | 사빈 | 이합륭 | 뇌진 | |
이파비 | 종상 | 양요 | 유예 | |
왕법은 | 이접 | 오희 | 요삼 | |
}}}}}}}}} |
<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대촉 초대 황제 무위원황제 | 武威元皇帝 | |
성씨 | 왕(王) |
휘 | 균(均) |
제호 | 무위원황제(武威元皇帝) |
연호 | 화순(化順, 1000년) |
출생 | 북송 익주 (現 쓰촨성 청두시) |
사망 | 1000년 10월 |
재위기간 | 초대 황제 |
1000년 2월 ~ 1000년 10월 |
[clearfix]
1. 개요
王均(? ~ 1000)
송나라 시기의 반란 지도자.
2. 상세
익주에서 도우후로 동복과 함께 성도에서 군사를 지휘했는데, 아랫 사람들을 풀어놓고 술 마시면서 도박을 해서 군대의 장비를 모두 그 비용에 썼다.999년 12월 15일에 지익주인 우면, 익주검할 부소수가 동교에서 대대적으로 열병할 때 두 군대의 의복이 깨끗해 해진 것이 없는 것을 보고 그의 무리는 부끄럽고 분해 불손한 말을 내뱉었으며, 1000년에 조연순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감 왕택으로부터 휘하의 군사가 반란을 일으켜 위로하라는 질책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추대되어 주군이 되었다.
국호를 대촉이라고 하면서 연호를 화순(化順)이라고 했으며, 1월 3일에 무리를 인솔해 한주를 함락시켰다. 면주를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검문으로 갔다가 지검주 이사형, 검문도감 배진에게 패해 수십 명이 죽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지치자 성도로 돌아갔으며, 18일에 양회충, 최조, 노마호 등의 성도를 공격했고 왕균은 이 당시 성도로 돌아가는 길에 이들과 싸웠다.
왕균은 조연순을 시켜 공주, 촉주 등을 공격하게 했지만, 양회충에게 막혀 군사들이 패배했으며, 2월 19일에는 익주성을 열고서 거짓으로 도망간 척 하자 뇌유종, 상관정, 석보, 이혜 등이 왕균이 도망간 줄 알고 성을 들어오자 관문을 닫고 공격해 송군을 격파하고 이혜를 죽였다.
왕균은 백성, 승려, 도사 중에서 젊고 건장한 사람을 위협해 군사로 만들어 손등에 자상을 입히고 머리를 깎도록 했으며, 얼굴에 뜸을 뜨면서 군장을 지급해 무리들에 섞이게 했다. 4월 9일에는 승선교를 통해 나와서 뇌유종을 공격했지만 1천여 명이 죽으면서 패하자 말을 타고 성으로 달아났다. 8월에 뇌유종이 익주성을 공격하자 이를 막았는데, 왕균은 독약이 묻힌 화살을 만들어 관군에게 쏘았다.
9월에 성도가 함락되자 겨울 10월에 부순감으로 가면서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을 위협해 교량을 끊어 길을 막고 창고에 불을 질렀으며, 양회충의 추격을 받아 곤궁한 상태가 되자 부순감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
호익군교 노빈이 그의 목을 베어 양회충에게 갔으며, 석보가 왕균의 머리를 빼앗아 효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