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12:03:10

화교(남진)

진서(陳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abbadb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2권 「무제기(武帝紀)」 3권 「문제기(文帝紀)」 4권 「폐제기(廢帝紀)」
진패선 진천 진백종
5권 「선제기(宣帝紀)」 6권 「후주기(後主紀)」
진욱 진숙보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열전(列傳) ]
7권 「후비전(后妃傳)」
장요아 · 심묘용 · 왕황후 · 유경언 · 심무화 · 장여화
8권 「두승명등전(杜僧明等傳)」 9권 「후진등전(侯瑱等傳)」 10권 「주철호등전(周鐵虎等傳)」
두승명 · 주문육 · 후안도 후진 · 구양위 · 오명철 ,배자열, 주철호 · 정령세
11권 「황법구등전(黃法氍等傳)」 12권 「호영등전(胡穎等傳)」 13권 「서세보등전(徐世譜等傳)」
황법구 · 순우량 · 장소달 호영 · 서도 · 두릉 · 심각 서세보 · 노실달 · 주부 · 순랑 · 주경
14권 「형양헌왕창등전(衡陽獻王昌等傳)」 15권 「종실전(宗室傳)」 16권 「조지례등전(趙知禮等傳)」
진창 · 진담랑 진의 · 진상 · 진혜기 조지례 · 채경력 · 유사지 · 사기
17권 「왕충등전(王沖等傳)」 18권 「심중등전(沈衆等傳)」 19권 「심형등전(沈炯等傳)」
왕충 · 왕통 · 원경 심중 · 원필 · 유중위 · 육산재 · 왕질 · 위재 심형 · 우려 · 마추
20권 「도중거등전(到仲舉等傳)」 21권 「사철등전(謝哲等傳)」
도중거 · 한자고 · 화교 사철 · 소건 · 사하 · 장종 · 왕고 · 공환 · 소윤
22권 「육자륭등전(陸子隆等傳)」 23권 「심군리등전(沈君理等傳)」 24권 「주홍정등전(周弘正等傳)」
육자륭 · 전도집 · 낙아 심군리 · 왕창 · 육선 주홍정 · 원헌
25권 「배기등전(裴忌等傳)」 26권 「서릉전(徐陵傳)」 27권 「강총등전(江總等傳)」
배기 · 손창 서릉 강총 · 요찰
28권 「세조9왕·고종29왕·후주제자전(世祖九王高宗二十九王後主諸子傳)」
진백무 · 진백산 · 진백공 · 진백신 · 진백인 · 진백의 · 진백례 · 진백지 · 진백모 · 진숙영 · 진숙견 · 진숙명 · 진숙경 · 진숙헌 · 진숙제
진숙문 · 진숙달 · 진숙탄 · 진숙표 · 진숙웅 · 진숙중 · 진숙엄 · 진숙신 · 진숙우 · 진숙평 · 진숙오 · 진숙흥 · 진숙선 · 진숙목 · 진숙검
진숙징 · 진숙소 · 진숙광 · 진숙순 · 진숙모 · 진숙현 · 진숙륭 · 진숙영 · 진심 · 진장 · 진윤 · 진억 · 진언 · 진경 · 진건 · 진념 · 진지
진전 · 진번
29권 「종원요등전(宗元饒等傳)」 30권 「소제등전(蕭濟等傳)」 31권 「소마하등전(蕭摩訶等傳)」
종원요 · 사마신 · 모희 · 채징 소제 · 육경 · 고야왕 · 부재 소마하 · 임충 · 번의 · 노광달
32권 「효행전(孝行傳)」
은불해 · 사정 · 사마고 · 장소
33권 「유림전(儒林傳)」
심문아 · 심수 · 척곤 · 정작 장애 육후 심덕위 하덕기 · 전완 · 장기 · 고월 · 심불해 · 왕원규
34권 「문학전(文學傳)」
두지위 · 안황 · 강덕조 · 유지 · 허형 · 저개 · 잠지경 · 육염 · 하지원 · 서백양 · 장정견 · 채응 · 완탁
35권 「웅담랑등전(熊曇朗等傳)」 36권 「시흥왕숙릉등전(始興王叔陵等傳)」
웅담랑 · 주적 · 유이 · 진보응 진숙릉 · 진백고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10275d><tablebgcolor=#10275d>
※ 흠정 24사 관련 틀 둘러보기
||
}}}}}}}}}}}} ||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권 「송본기상(宋本紀上)」 2권 「송본기중(宋本紀中)」 3권 「송본기하(宋本紀下)」
유유(裕) · 유의부 유의륭 · 유준(駿) · 유자업 유욱(彧) · 유욱(昱) · 유준(準)
4권 「제본기상(齊本紀上)」 5권 「제본기하(齊本紀下)」
소도성 · 소색 소소업 · 소소문 · 소란 · 소보권 · 소보융
6·7권 「양본기상·중(梁本紀上·中)」 8권 「양본기하(梁本紀下)」
소연 소강 · 소역 · 소방지
9권 「진본기상(陳本紀上)」 10권 「진본기하(陳本紀下)」
진패선 · 진천 · 진백종 진욱 · 진숙보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1·12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왕헌원 · 은숙의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 진도정 · 유지용 · 배혜소 · 왕보명 · 하정영 · 왕소명 · 유혜단 · 저영거 · 왕순화 · 장상유 · 치휘 · 왕영빈 · 정영광 · 완영영 · 서소패 · 장요아 · 심묘용 · 왕황후 · 유경언 · 심무화 · 장여화
13·14권 「송종실급제왕전(宋宗室及諸王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의경 · 유준고 · 유의진 · 유의강 · 유의공 · 유의선 · 유의계 · 유소 · 유준(濬) · 유삭 · 유굉 · 유탄 · 유위 · 유창 · 유혼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무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범 · 유휴약 ·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15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16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유목지 ·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왕진악 ·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 주수지 · 왕현모
17권 「유경선등전(劉敬宣等傳)」
유경선 · 유회숙 · 유수 · 손처 · 괴은 · 상정 · 유종 · 우구진 · 맹회옥 · 호번 · 유강조
18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19권 「사회등전(謝晦等傳))」
조륜지 · 소사화 · 장도 사회 · 사유 · 사방명 · 사령운
20권 「사홍미전(謝弘微傳)」 21권 「왕홍전(王弘傳)」 22권 「왕담수전(王曇首傳)」
사홍미 왕홍 왕담수 ,왕훈,
23권 「왕탄등전(王誕等傳)」 24권 「왕유지등전(王裕之等傳)」 25권 「왕의등전(王懿等傳)」
왕탄 · 왕화 · 왕혜 · 왕욱 왕유지 · 왕진지 · 왕소지 · 왕열지 · 왕준지 왕의 · 도언지 · 원호지 · 장흥세
26권 「원담전(袁湛傳)」 27권 「공정등전(孔靖等傳)」 28권 「저유지전(褚裕之傳)」
원담 공정 · 공림지 · 은경인 저유지
29권 「채곽전(蔡廓傳)」 30권 「하상지전(何尙之傳)」 31권 「장유전(張裕傳)」
채곽 하상지 장유 ,장승,
32권 「장소전(張邵傳)」 33권 「범태등전(范泰等傳)」 34권 「안연지등전(顔延之等傳)」
장소 범태 · 순백자 · 서광 ·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안연지 · 심회문 · 주랑
35권 「유담등전(劉湛等傳)」 36권 「양흔등전(羊欣等傳)」 37권 「심경지등전(沈慶之等傳)」
유담 · 유열 · 고침 · 고기지 양흔 · 양현보 · 심연지 · 강이 · 강병지 심경지 · 종각
38권 「유원경전(柳元景傳)」 39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40권 「노상등전(魯爽等傳)」
유원경 은효조 · 유면 노상 · 설안도 · 등완 · 종월 · 오희 · 황회
41권 「제종실전(齊宗室傳)」
소도도 · 소도생 · 소요광 · 소요흔 · 소면 · 소경선 · 소적부 · · 소탄 · 소탄지
42·43권 「제고제제자전(齊高帝諸子傳)」
소억 · 소영 · 소황 · 소엽 · 소고 · 소장 · 소삭 · 소감 · 소봉 · 소예 · 소갱 · 소구 · 소현
44권 「제무제제자·제문혜제자·명제제자전(齊高帝諸子·文惠諸子·明帝諸子傳)」
소장무 · 소자량 · 소자경(卿) · 소자향 · 소자경(敬) · 소자무 · 소자륭 · 소자진 · 소자명 · 소자한 · 소자륜 · 소자정 · 소자악 · 소자문
소자준 · 소자림 · 소자건 · 소자하 · 소소수 · 소소찬 · 소보의 · 소보현 · 소보원 · 소보인 · 소보유 · 소보숭 · 소보정
45권 「왕경칙등전(王敬則等傳」 46권 「이안인등전(李安人等傳)」
왕경칙 · 진현달 · 장경아 · 최혜경 이안인 · 대승정 · 환강 · 초도 · 조무 · 여안국 · 주산도 · 주반룡 · 왕광지
47권 「순백옥등전(荀伯玉等傳)」 48권 「육징등전(陸澄等傳)」
순백옥 · 최조사 · 설연 · 우종 · 호해지 · 우완지 · 유휴 · 강석 육징 · 육혜효 · 육궐
49권 「유고지등전(庾杲之等傳)」 50권 「유환등전(劉瓛等傳)」
유고지 · 왕심 · 공규 · 유회진 유환 · 명승소 · 유이 · 유규
51·52권 「양종실전(梁宗室傳)」
소경 ,소매 소발 소앙 소욱, · 소의 · 소부 · 소창 · 소융 · 소굉 ,소정인 소정의 소정덕 소정립, 소수 · 소위 · 소회 · 소담
53권 「양무제자전(梁武帝諸子傳)」
소통 · 소종 · 소적 · 소속 · 소윤 · 소기
54권 「양간문제자·원제제자전(梁簡文帝諸子·元帝諸子傳)」
소대기 · 소대심 · 소대관 · 소대림 · 소대련 · 소대춘 · 소대성 · 소대봉 · 소대아 · 소대장 · 소대균 · 소대위 · 소대훈 · 소대구 · 소대흔 · 소대지 · 소대원 · 소방등 · 소방제 · 소방구 · 소방략
55권 「왕무등전(王茂等傳)」
왕무 · 조경종 · 조의종 · 석천문 · 하후상 · 길사첨 · 채도공 · 양공칙 · 등원기 · 장혜소 · 장징 · 풍도근 · 강현 · 창의지
56권 「장홍책등전(張弘策等傳)」 57권 「심약등전(沈約等傳)」 58권 「위예등전(韋叡等傳)」
장홍책 · 유역 · 정소숙 · 여승진 · 악애 심약 · 범운 위예 · 배수
59권 「강엄등전(江淹等傳)」 60권 「범수등전(范岫等傳)」 61권 「진백지등전(陳伯之等傳)」
강엄 · 임방 · 왕승유 범수 · 부소 · 공휴원 · 강혁 · 서면 · 허무 · 은균 진백지 · 진경지 · 난흠
62권 「하창등전(賀瑒等傳)」 63권 「왕신념등전(王神念等傳)」 64권 「강자일등전( 江子一等傳)」
하창 · 사마경 · 주이 · 고협 · 서리 · 포천 왕신념 · 양간 · 양아인 강자일 · 호승우 · 서문성 · 음자춘 · 두즉 · 왕림 · 장표
65권 「진종실제왕전(陳宗室諸王傳)」
진의 · 진상 · 진혜기 · 진창 · 진담랑 · 진백무 · 진백산 · 진백고 · 진백공 · 진백인 · 진백의 · 진백례 · 진백지 · 진백모
진숙릉 · 진숙영 · 진숙견 · 진숙명 · 진숙경 · 진숙헌 · 진숙제 · 진숙문 · 진숙달 · 진숙탄 · 진숙표 · 진숙웅 · 진숙중 · 진숙엄 · 진숙신 · 진숙우 · 진숙평 · 진숙오 · 진숙흥 · 진숙선 · 진숙목 · 진숙검 · 진숙징 · 진숙소 · 진숙광 · 진숙순 · 진숙모 · 진숙현 · 진숙륭 · 진숙영
진심 · 진장 · 진윤 · 진억 · 진언 · 진경 · 진건 · 진념 · 진지 · 진전 · 진번
66권 「두승명등전(杜僧明等傳)」
두승명 · 주문육 · 후진 · 후안도 · 구양위 · 황법구 · 순우량 · 장소달 · 오명철
67권 「호영등전(胡穎等傳)」
호영 · 서도 · 두릉 · 주철무(1) · 정령세 · 심각 · 육자륭 · 전도집 · 낙문아 · 손창 · 서세보 · 주부 · 순랑 · 주경 · 노실달 · 소마하 · 임충 · 번의
68권 「조지례등전(趙知禮等傳)」
조지례 · 채경력 · 종원요 · 한자고 · 화교 · 유사지 · 사기 · 모희 · 심군리 · 육산재
69권 「심형등전(沈炯等傳)」
심형 · 우려 · 부재 · 고야왕 · 요찰
70권 「순리전(循吏傳)」
길한 · 두기 · 신념 · 두혜도 · 완장지 · 견법숭 · 부염 · 우원 · 왕홍궤 · 심우 · 범술증 · 손겸 · 하원 · 곽조심
71권 「유림전(儒林傳)」
복만용 · 하동지 · 엄식지 · 사마경 · 변화 · 최령은 · 공첨 · 노광 · 심준(峻) · 공자구 · 황간 · 심수 · 척곤 · 정작 · 전완 · 장기 · 고월 · 척곤 · 왕원규
72권 「문학전(文學傳)」
구영국 · 단초 · 변빈 · 구거원 · 왕지심 · 최위조 · 조충지 · 가희경 · 원준 · 유소(昭) · 종영 · 주흥사 · 오균 · 유협 · 하사징 · 임효공 · 안협 · 기소유 · 두지위 · 안황 · 잠지경 · 하지원 · 서백양 · 장정견 · 완탁
73·74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瑜) · 가은 · 곽세통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구걸 · 사각수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인 · 손극 · 하자평 · 최회순 · 왕허지 · 오경지 · 소예명 · 소교처양 · 공손승원 · 오흔지 · 한계백 · 구관선 · 손담 · 화보 · 해숙겸 · 한영민 · 유풍 · 봉연백 · 오달지 · 왕문수 · 악이지 · 손법종 · 유도민 · 등담공 · 도계직 · 심숭소 · 순장 · 길분 · 견염 · 조발호 · 한회명 · 저수 · 장경인 · 도자장 · 성경준 · 이경서 · 사린 · 은불해 · 사마고 · 장소
75·76권 「은일전(隐逸傳)」
도잠 · 종소문 · 심도건 · 공순지 · 주속지 · 대옹 · 적법사 · 뇌차종 · 곽희림 · 유응지 · 공기 · 주백년 · 관강지 · 어부 · 저백옥 · 고환 · 두경산 · 장영서 · 오포 · 서백진 · 심인사 · 완효서 · 등욱 · 도홍경 · 제갈거 · 유혜비 · 범원엽 · 유선 · 장효수 · 유승선
77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서원 · 완전부 · 기승진 · 유계종 · 여법량 · 여문현 · 여법진 · 주석진 · 육험 · 사마신 · 시문경 · 심객경 · 공범
78·79권 「이맥전(夷貊傳)」
임읍 · 부남 · 중천축국 · 사자국 · 고구려 · 백제국 · 신라 · · 부상국· 하남왕국 · 탕창 등지 · 무흥국 · 형옹주·예주만 · 고창 · 쿠처 · 우전국 · 파사국 ·연연
80권 「적신전(賊臣傳)」
후경 ,왕위, · 웅담랑 · 주적 · 유이 · 진보응
(1) 본명이 주철호(周鐵虎)로 당태조로 추존된 이호(李虎)를 피휘하여 무(武)로 개칭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 ||

1. 개요2. 생애
2.1. 소량 시기2.2. 문제, 폐제 즉위기2.3. 화교의 난2.4. 반란 이후

1. 개요

華皎

남북조시대의 인물로 진릉군(晉陵郡) 기양현(暨陽縣) 출신.

2. 생애

2.1. 소량 시기

화교의 집안은 대대로 아전을 지냈으며, 화교는 양나라 때 상서비부영사(尙書比部令史)를 지냈다. 548년부터 후경의 난이 발발하여 양나라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화교는 후경의 부하 왕위를 섬겼다. 진패선이 남하하자, 후경은 진패선의 조카 진천을 유폐했는데, 화교는 진천을 매우 후대하였다.

552년, 후경이 평정되고 진천이 오흥(吳興) 태수로 부임한 뒤 화교는 도록사(都錄事)로 임명되어 부서의 의식을 대부분 담당하게 되었다. 화교는 총명했고 부지런히 문서를 작성하였다.

556년, 진천이 두감을 토벌할 때 화교는 군사와 무기를 준비하며 도록사를 맡았다. 화교는 상벌이 분명했고 상황을 안정시키는데 능했다. 후경의 난과 여러 전쟁을 거치면서 백성들이 기근에 빠지자, 화교는 백성들의 구휼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공평하게 옷과 음식을 나눠주었다. 화교는 뒤에 기양현(暨陽縣)과 산음현(山陰縣)의 현령을 역이하였다.

2.2. 문제, 폐제 즉위기

559년, 무제 진패선이 붕어하고 진천이 즉위하니 이가 제2대 황제인 문제였다. 화교는 문제가 즉위한 뒤 개원장군(開遠將軍), 좌군장군(左軍將軍)에 제수되었다.

560년, 회인현백(懷仁縣伯)에 봉해지고 식읍 400호를 받았다. 한편 이전에 진패선에게 반기를 들었던 왕림이 다시 남진을 침공하자, 화교는 후진과 함께 왕림을 막고자 출병하였다. 왕림이 평정된 뒤 화교는 분성(湓城)에 진수했고 강주(江州)의 사무를 맡았다. 당시 남쪽 주의 지방관 대부분은 토호였는데, 이들이 조정의 법도를 따르지 않자 문제는 화교에게 이들을 법으로 다스리도록 명했다. 왕림이 달아났을 때 장병들의 대부분은 화교를 따랐다.

562년, 가절(假節),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 인무장군(仁武將軍), 신주(新州) 자사로 제수되고 강주의 감호를 맡았다. 뒤에 화교는 독심양태원고당남북신채5군제군사(督尋陽太原高唐南北新蔡五郡諸軍事), 심양 태수가 더해졌다.

주적이 반란을 꾀할 때 주적은 군사들을 배에 숨기고 자신의 조카를 상인으로 위장시켜서 화교를 습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화교는 주적의 움직임을 사전에 눈치챘고 사람을 보내 그들을 습격하고 그들의 배와 병기를 모두 노획하였다. 이후 화교는 도독 오명철을 따라 주적을 정벌할 때 종군했으며, 주적이 평정된 뒤 산기상시(散騎常侍), 평남장군(平南將軍), 임천(臨川) 태수에 제수되고 작위가 후로 올라갔다. 그리고 직위를 받기도 전에 화교는 입조하여 사지절(使持節), 도독상파등4주제군사(都督湘巴等四州諸軍事), 상주 자사가 되었다.

화교는 하급 관리에서 출발하여 산업을 잘 경영했다. 당시 상천(湘川)에는 여러 특산물이 나와서 조정으로 들어갔는데, 화교는 양식과 나무, 대나무 등을 많이 운송하였고 유밀(油蜜)이나 포육, 야채도 취급하였다. 또한 천동(川洞)을 정벌하여 여기서 얻은 전리품들을 건강으로 보내기도 했다.

566년, 문제가 붕어하고 문제의 태자인 진백종이 즉위하였다. 진백종이 즉위한 뒤 화교는 안남장군(安南將軍)으로 임명되고 중안현후(重安縣侯)에 봉해졌다. 이때 문제는 상주에서 삼나무로 배를 생산하면서 화교에게 대함(大艦)과 금시(金翅) 등을 비롯한 함선 200여 척과 수전을 위한 도구를 만들도록 명했고 한천(漢川)과 삼협(三峽)을 손에 넣을 구상을 하고 있었다.

2.3. 화교의 난

567년, 한자고가 주벌된 뒤, 화교는 속으로 불안해져서 병기를 수선하고 병사들을 모으거나 태수나 현령을 우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안성왕(安成王) 진욱은 함선을 보내라는 명을 화교에게 내렸으나, 화교는 이를 미루었다. 화교는 몰래 자신을 광주(廣州)로 전출시켜달라는 요구를 조정에 전달하여 진백종의 의중을 살피려고 했다. 진욱은 이를 몰래 허락했고 조서를 내리지 않았다.

화교는 사신을 보내 북주의 군대를 끌어들이고 후량소규에게 칭신하였다. 남진에서는 오명철을 상주 자사로 삼아 화교를 토벌하도록 명했다. 한편 화교가 먼저 출병할 것을 염려하여 화교에게 3만의 군사를 주고 대함금시에 올라 영주(郢州)로 향하도록 명했고,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순우량에게 5만의 군사를 주고 대함에 올라 오명철을 따르도록 명했다. 또한 가절 관군장군(冠武將軍) 양문통(楊文通)에게는 별도로 안성(安成)을 따라 보도를 통해 다릉(茶陵)으로 출병하도록 명했고, 파산(巴山) 태수 황법혜(黃法慧)에게 의양(宜陽)을 따라 예릉(澧陵)으로 출병하고 강주 자사 장소달, 영주 자사 정령세 등과 함께 화교의 토벌을 명했다.

한편 후량에서는 수군을 원군으로 파견했고 화교를 사공(司空)으로 제수하였다. 북주의 무제 우문헌 또한 자신의 아우인 위국공(衛國公) 우문직(宇文直)에게 노산(魯山)에 군대를 주둔시키도록 명하고, 주국(柱國) 장호공(長胡公) 탁발정(拓跋定)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영주를 공격하도록 명했다. 또한 파주 자사 대승삭(戴僧朔), 형양(衡陽) 내사 임충, 파릉(巴陵) 내사 반지건(潘智虔), 파양(岳陽) 태수 장소유(章昭裕), 계양(桂陽) 태수 조선(曹宣), 상동(湘東) 태수 전명(錢明)이 모두 화교에게 소속되었고, 장사(長沙) 태수 조경(曹慶) 등이 화교의 지시를 따랐다.

남진에서는 사공 서도와 양문통 등에게 안성에서 상동(湘東)으로 출병하여 화교의 배후를 습격하도록 명했다. 당시 파주의 백라(白螺)에 진을 치고 있던 화교는 함선을 늘어놓고 남진의 관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는데, 서도가 상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어 파주, 영주에서 출병하여 전투를 벌였다. 순우량과 오명철 등은 함선을 모아 화교의 함선에 맞섰다. 관군과 화교군의 격돌로 화교의 함선들은 모두 부서졌고, 화교는 다시 대함에 섶을 싣고 바람을 이용해서 화공을 시도했으나 갑자기 풍향이 바뀌면서 화교의 배로 불이 붙어서 대패하였다. 결국 화교는 대승삭과 함께 단기로 달아났는데, 파릉으로 입성하지 않고 강릉(江陵)으로 달아났다. 탁발정 등은 함선이 없어지자 파릉으로 걸어갔으나 파릉성은 이미 관군에 점령되어서 결국 상주(湘州)로 향했지만 수구(水口)에 이르러 식량이 다해서 결국 항복하였다.

2.4. 반란 이후

반란 이후 만여 명이 포로로 잡혔고 4천에 달하는 군마가 노획되었다. 화교의 부하인 조경, 전명, 반지건, 노한(魯閑), 석혜략(席慧略) 등 40여 명이 반란죄로 처벌되었으나, 장소유는 장소달의 아우였고 유광업(劉廣業)은 유광덕의 아우였고 조선은 무제의 구신이었고 임충은 일찍이 조정에 몰래 상주를 올렸던 공이 있어서 용서를 받았다.

화교와 대승삭은 반란에 실패한 뒤 휘하의 병사 수백 명과 함께 후량에 귀순하였다. 후량에서는 화교를 사공으로 삼고 강하군공(江夏郡公)에 봉하였으며, 대승삭을 거기장군(車騎將軍), 오흥현후(吳興縣侯)에 봉하였다. 화교는 571년 북주에 입조했다. 양양(襄陽)에 이르러 화교는 위국공 우문직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나라가 이미 강남을 상실한 뒤 백성은 적어졌고 나라는 가난해졌습니다. 조정의 흥망이 이어졌지만 마땅히 양나라를 공양해야 하니, 제나라환공위나라(衛)를 구원하고 초나라장왕진나라(陳)를 수복한 것과 같습니다. 몇 개의 주를 빌려서 양나라에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문직은 화교의 건의를 받아들여 무제에게 사람을 보내 보고를 올렸다. 무제는 이를 허락하여 기주(基州), 평주(平州), 약주(鄀州)를 후량에 할양하였다. 화교의 마지막 기록은 전술한 내용이 전부로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