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陳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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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심(沈) |
이름 | 중(衆) |
자 | 중사(仲師) |
생몰 | 503년 ~ 558년 |
출신 | 오흥군(吳興郡) 무강현(武康縣) |
부친 | 심선(沈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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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조시대 소량, 남진의 인물로 자는 중사(仲師).2. 생애
오흥군(吳興郡) 무강현(武康縣) 출신으로, 심약의 손자였고 심선(沈旋)의 아들이었다. 심중은 학문을 좋아했으며, 글을 잘 지었고 문재가 있었다.처음 양나라에서 남평왕(南平王) 소위의 법조참군(法曹參軍), 태자사인(太子舍人)으로 기용되었다. 무제가 천자시(千字詩)를 지을 때 심중은 천자시에 주해를 달기도 했다. 뒤에 사경(謝景)과 문덕전(文德殿)에서 무제를 소견할 때 무제가 심중에게 죽부(竹賦)를 짓게 했고, 심중의 죽부가 완성되자 무제는 죽부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의 문장은 풍격이 아름다우니 가히 그대의 조부에게 부끄럽지 않다고 할만하다.
卿文體翩翩 可謂無忝爾祖.
卿文體翩翩 可謂無忝爾祖.
심중은 뒤에 당양공(當陽公) 소대심이 영주(郢州) 자사로 부임할 때 심중을 기실참군(記室參軍)으로 삼았다. 그리고 다시 상동왕(湘東王) 소역의 기실참군으로 제수되었으며,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으로 옮기고 산기상시(散騎常侍)를 겸임하였다. 서위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뒤 여릉왕(廬陵王) 소속의 자의참군(諮議參軍)으로 옮겼고 태자중사인은 예전과 같이 받았다.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자, 심중은 무제에게 자신의 집안 대대로 거느린 군대가 오흥에 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서 군대를 모은 뒤 후경을 토벌하겠다고 주청했고 무제는 심중의 진언을 따랐다. 심경은 5천의 군대를 이끌고 수도인 건강으로 입성하여 소항(小航)에 주둔하며 후경이 동부(東府)에 설치한 진영과 대치하여 후경이 심중을 매우 꺼렸다. 심중은 태자우위솔(太子右衛率)로 제수되었다가 건강성이 함락되면서 후경에게 항복했다.
후경의 반란이 토벌된 뒤, 심중은 형주(荊州)에서 효원제로부터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형주 대중정(大中正)으로 임명되었고 사도좌장사(司徒左長史)로 전임되었다. 강릉이 함락된 뒤 심중은 서위에 사로잡혔다가 단신으로 달아났으며, 경제에 의해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제수되었다. 555년, 시중(侍中)으로 제수되고 좌민상서(左民尙書)로 옮겼다.
557년, 진패선이 경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니 이가 초대 황제인 무제였다. 심중은 이때 중서령(中書令)으로 승진했다. 558년, 기부상서(起部尙書)를 겸임하였고 태극전의 준공을 감독하였다.
무제는 심중이 고향에서 널리 이름을 알렸기에 심경을 매우 공경하고 존중하였으며, 당대의 선비들보다 후한 상을 내렸다. 그러나 심중은 성품이 인색했고 재산을 억에 가깝게 불렸으며, 그 재산을 조금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매우 검소하게 봉양해서 조회가 있을 때마다 누더기가 된 옷을 입었고 어떨 때는 갓과 신을 들고 다녔다. 또한 옷차림은 남루했고 삼노끈을 맸으며, 건어물과 채소밥을 가지고 와서 혼자서 먹었기에 대신들은 심중을 비난했다. 심중은 성품이 좁고 성급하여 이에 분하고 한스러워했으며, 결국 공경과 조정을 비방하였다.
무제는 여기에 대해 분노했지만 심중이 좋은 평판이 있었기에 그를 공개적으로 처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심중이 휴가로 고향에 돌아갈 때 심중을 사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