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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2f7b> 춘추오패(春秋五覇) 제(齊)나라 16대 국군 환공 桓公 | ||
성 | 강(姜) | |
씨 | 여(呂) | |
휘 | 소백(小白) | |
아버지 | 제희공(齊僖公) 녹보(祿甫)[1]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643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3년 (4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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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 제나라의 16대 군주이자,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이다.춘추오패 중 최초의 패자(覇者)다.[2]
2. 생애
2.1. 권좌에 오르다
제나라의 13대 군주 희공(僖公)의 셋째 아들로, 포숙아를 스승으로 모셨다. 희공이 죽고 형인 제양공이 즉위 했는데 연칭과 관지보에게 살해당한 후 양공의 사촌형제 공손무지(公孫無知)가 즉위했고, 공손무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당해 제나라의 군주가 없게 되었다.이때 형인 규(糾)는 노나라에, 소백(제환공)은 거(莒)나라에 있었는데 거나라가 제나라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소백이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규의 스승인 관중은 규를 제위에 앉히기 위해 지름길로 가서 소백의 진영에 도착하여 화살을 쐈고 화살은 소백에게 명중했다. 그래서 규와 관중은 소백이 죽은줄 알고 천천히 제나라로 갔지만 사실 관중의 화살은 소백의 허리띠의 쇠고리를 맞춰 튕겨 나갔지만, 소백은 관중의 짓임을 알고 일부러 죽은 척 하여 관중 일행을 방심시켰던 것. 이렇게 소백은 규보다 먼저 제나라에 도착해 즉위하여 환공이 되었고, 규의 편을 들고 쳐들어온 노나라의 군대를 포숙아를 시켜 무찔렀다. 그리고 노나라에 압력을 넣어 규와 그 일당을 죽이도록 했다. 관중도 처치하려고 했지만, 관중의 절친 포숙아가 말리며 말하기를 "제나라 하나만을 다스리려면 이 포숙아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천하를 다스리려면 관중이 필요합니다." 환공은 관중을 용서하고 재상으로 임명했다. 이후 환공은 관중의 추천으로 습붕, 영척, 빈서무, 동곽아, 공자 성보를 등용하여 각각 맡은 분야를 책임지게 하였다.
2.2. 최초의 패자가 되다
환공은 관중의 말이라면 그대로 따랐고, 관중의 정치에 의해 제나라는 강성해졌다. 환공 5년에 노나라를 쳐서 노나라의 수 땅을 빼앗았다. 이에 노나라 군주 장공은 화친을 청했다. 환공이 노 장공과 회장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데, 조말(曹沫)이라는 노나라 신하가 갑자기 회장으로 올라와서 환공의 목에 칼을 겨누고 "빼앗은 노나라 땅을 돌려주시오!"라며 협박했다. 환공은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크게 화를 내며 조말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관중이 그를 말리며 이렇게 말했다. "주공께서 수 땅의 주인이 되시려면 지금 조말을 죽이십시오. 하지만 천하의 주인이 되시려면 약속한 대로 수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환공은 빼앗은 땅을 모두 노나라에 돌려주었고, 이로써 제후들에게 패자로 추대되었다.23년에 연나라가 산융족의 침략을 받자 환공은 연나라를 구원하러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물리쳤다.[3] 연나라 군주 연 장공이 환공을 배웅하려고 같이 가다가 그만 제나라 국경을 넘고 말았는데, 환공은 "연나라 군주는 연나라 국경선까지만 배웅해야 한다."며 연 장공이 밟은 제나라 땅을 모두 연나라에 주었다.
이와 같이 제가 대가 끊어질 위기의 나라를 구해 준 것은 연뿐이 아닌데, 노에서 계승 분쟁이 발생하자 노 희공을 세워 안정시켰으며[4] 위(衛)가 북적에게 수도 조가를 잃고 나라가 망하자 초구로 수도를 옮겨 정착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5] 이는 혼란스러웠던 당시에 파격적인 행보였고 이를 제안한 관중이나, 욕심을 갖지 않고 그에 따른 제 환공이나 대단한 위인들이다. 제 환공이 춘추오패 중 으뜸으로 꼽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29년에는 부인인 채희(蔡姬)[6]와 함께 뱃놀이를 했는데 채희가 장난으로 배를 잡고 흔들었고, 겁이 난 환공이 그만하라고 했는데도 계속 흔들자 이에 빡친 환공은 채희를 채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채나라 군주가 화가 나서 채희를 다른 나라로 시집 보냈고 환공은 진노하여 채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때 관중은 채나라 공격이 사적인 감정으로 발발한 거라 명분이 부족하다며 옆의 초나라도 치라고 하였고, 환공은 "초나라가 주나라에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핑계로 초나라로 쳐들어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나라로 돌아갔다. 사실 제가 초로 쳐들어 간 계기는 물론 채희의 일도 있겠지만 정(鄭)으로 세 번에 걸쳐 쳐들어온 초(楚)에 대한 견제가 근본적인 원인이였고, 채를 거쳐 공격하자는 계책 또한 관중으로부터 나온 계책이다. 즉 중원 진출을 노리고 있던 초를 잠재움으로써 패자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 했던 의도였지, 사적인 감정에 의한 침략이라고는 보기 힘들다.[7] 또한 위의 내용과 같이 허장성세의 식으로 쳐들어간 것이 아닌, 실제 각 나라의 군대를 모아 쳐들어갔으며 주 왕조에 대한 공물을 약속 받은 것은 아직 주 왕조의 권위가 남아 있던 당시로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8]
그러나 이 일은 매우 가치있는 일로써 수년, 수대째 주 왕조에 공물을 바치지 않던 초를 군사적 마찰 없이 공물을 바치게 했다. 단순히 황하 지역에만 영향력을 끼친 것이 아닌, 이남 지역 또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은 패공으로써 위치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제가 초를 제압 아닌 제압을 하자 언제나 제를 떠받들던 주 왕조는 제를 견제하기 시작한다.[9]
사실 환공이 패자가 된 것은 환공 본인의 능력보다는 관중의 힘이 매우 컸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그런 관중을 큰 자리에 기용한 제 환공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음은 확실하다.[10]
환공은 대인군자다운 포부로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관중을 용서해 줌으로써 패자가 되려면 군주의 그릇이 커야 함을 보여 준 인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도 총애했던 역아나 수초가 옆에서 관중을 모함할 때도 관중을 계속 믿고 신뢰했던 것은 환공의 성군으로서 자질을 가감없이 보여 준다. 실제로 뛰어난 수하가 있었지만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 하거나 주위의 말에 현혹되어 패망의 길로 접어든 군주가 한둘이 아니다.
이렇게 잘나가는 제환공의 머리를 아프게 만든 존재들이 있었으니 바로 누이들인 선강, 문강, 애강 3자매로 이들은 막장 행보를 자랑하는 사람들로 동생인 제환공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는데 첫째인 선강은 위나라의 왕위 구도를 개판으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위나라 자체가 망하기 직전이라 공자 무휴를 시켜 위나라를 원조했고 둘째인 문강의 경우 남편인 노 환공을 죽이자 누나인 문강을 친정인 제나라에 오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특히나 오빠인 제 양공과 그렇고 그런 관계라 동생인 제환공은 문강을 미워했으며 막내 누나인 애강마저 노나라에서 시동생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고 후계 구조를 개판으로 만들자 더이상 참지 못하고 누나인 애강을 친정인 제나라로 압송해 참수형을 집행, 시신을 노나라에 돌려보내 누나의 목을 효수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을 정도로 누이들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2.3. 관중의 사후에 일어난 일
그러나 이후 환공은 점점 자만심에 빠져 봉선제[11]를 거행하려 했고, 관중이 극구 말렸다. 게다가 이때부터 환공은 국정에도 소홀하기 시작해 재상인 관중에게만 정사를 맡기고 향락에 빠져드는 일이 잦아 관중이 이를 우려할 정도였다. 41년에 관중이 병으로 쓰러지자 환공은 병문안을 와서 후임을 물어봤다. 환공은 역아[12], 수초[13], 개방[14]을 추천했지만 관중은 모두 안 된다고 하며 오히려 이들을 멀리하라고 간언한 후 세상을 떠났다.[15] 처음 제환공은 관중의 유언에 따라 이들을 멀리했지만 관중이 죽고 시간이 지나자 노망이 났는지 세 사람을 재상으로 임명했다.[16] 관중의 예측대로 환공이 병들어 쓰러졌을때 세 사람은 권력 다툼을 하며 환공을 밀실에 감금해 버렸다. 가뜩이나 중병에 걸린 환공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 치료도 못받으며 굶어 죽었다. 그 후 67일 동안 권력 다툼이 계속되었다가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공위에 오른 환공의 아들 제효공이 환공의 시신을 수습할 때는 구더기가 들끓었다고 한다. 최초의 패자로서 실로 비참한 최후였다.[17]여자를 좋아해서 부인이 세 명, 첩이 여섯 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적자는 없고, 어머니가 전부 다른 서자 여섯 명, 즉 공자 무궤, 원(제 혜공), 소(제 효공), 반(제 소공), 상인(제 의공), 옹을 두어 세자를 두지 못했다. 관중의 생전에 훗날 효공이 되는 공자 소를 세자로 세웠으나, 관중이 죽은 후 역아와 가까운 사이인 무궤를 세자로 세울 것을 역아 일당에게 약속했다. 결국 환공 사후 여섯 명의 서자들이 서로 권력 다툼을 하여, 다섯 명의 서자가 돌아가면서 군주를 해먹었고, 이런 극심한 혼란기 때문에 제나라는 패자의 지위를 놓치고 말았다.[18]
이러다보니, 온갖 매체에서 그 최후는 당연히 비참하게 그려진다.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굶어죽어가며 "내 어찌 관중을 저 세상에서 무슨 낯으로 볼것인가...." 라고 후회막심한다. 《고우영 열국지》에선 환공이 죽어 썩으면서 나온 구더기들이 환공을 디스한다.
1990년대 후반에 1권짜리 중국 만화 《십팔사략》(한국에서 정발)에서는 환관 1명이 그나마 방에 들어가게 할 수 있었지만, 먹을 걸 숨겨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온 몸을 다 벗겨가지고 들여보내는 통에 도움도 되지 못했다. 드러누운 채로 쇠약해진 환공은 공자들이 날 구하러 오고 있느냐는 마지막 희망으로 질문하지만, 환관이 말하길 "공자들은 서로 공위를 두고 싸우느라 도저히 도울 낌새가 없사옵니다." 라고 말하고, 환공은 울부짖으며 "관중이여! 미안하오! 내가 어리석어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구려! 다 내가 잘못한 일인데 어찌 저 세상에서 그대를 만나면 무슨 낯으로 만나야 할까!" 라고 절규하면서 굶어죽기 전에 분통이 터져 쓰러져 죽고 만다. 환관은 마지막으로 공왕의 장례라도 치르게 해달라고 울며 애원하지만 수초가 그 환관을 베어죽이고 이 일을 감춘다. 이후 공위가 결정나서 장례를 치를 때 환공이 구더기 투성이의 시체로 슬쩍 나와 패자이던 이가 충신의 간언을 어긴 결과라면서 생전에 잘나가던 그의 얼굴과 썩은 얼굴을 같이 그리면서 환공의 비참한 몰락을 견줘 이야기했다.
제효공 원년(기원전 642년) 가을 8월에서야 제환공을 우수산(牛首山)에 장사지냈다. 혹 후세 사람이 도굴할까 염려해 무덤을 세 개나 만들고, 무려 수백 명을 순장(殉葬)했으나, 950여 년이 지난 서진 말기 영가(永嘉) 연간 말년에 촌민들에 의해 도굴당했다. 당시 무덤 입구에는 수은의 못이 둘러져 있었고 한기가 풍겨 며칠이 지난 후에야 진입했는데, 장사지낼 때 제나라 부고에 있었던 황금으로 만든 가마솥, 옥으로 만든 술잔, 은으로 만든 술잔 및 술병, 구슬로 만든 의복 같은 보물이 나왔고, 금잠(金蠶)[19]이 수십 말(斛)이었으며 비단, 군기(軍器), 옥갑(玉匣)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무덤 안에 널린 순장당한 사람들의 무수한 해골로 걸어다니기 불편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로 제환공 시기에 진(陳)나라에서 완(完)이라는 이름의 공자가 위협을 느끼고 제나라로 왔는데 제환공은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느끼고 경(卿)의 작위를 주려고 했지만 사양하여 대신 공정(工正)의 벼슬을 주었으며[20] 일을 잘 했기에 전(田) 땅을 영지로 하사했다. 이에 공정 진완은 스스로를 전씨라 일컫게 되었는데 바로 이 전완이라는 이가 훗날 제환공의 강씨 제나라를 무너뜨리고, 전씨 제나라를 세운 제태공의 선조였다.
3. 재위 기간의 사건
위의 내용이 일화로 되어 있어 그것을 정리하기 위한 역사 기록이다.- 제 환공 2년(기원전 684년), 제 환공이 노나라를 쳤으나 장작에서 조말이 이끄는 노나라 군대에 패했다. 겨울, 제 환공은 담(譚)나라[21]로 달아난 적이 있었는데, 담나라에서 무례하게 굴었으므로, 제 환공은 그것을 잊지 않고 담나라를 쳐서 멸했다. 담나라 군주는 거(莒)나라로 달아났다.[22]
- 제 환공 3년(기원전 683년), 주나라의 왕녀가 제 환공에게 시집왔다.
- 제 환공 5년(기원전 681년), 제, 송나라, 진(陳)나라, 채나라, 주나라(邾) 5개국 군주와 제나라의 북행 땅에서 회맹하니 이것을 북행의 회맹이라고 한다. 이 회맹이 열린 이유는 송나라 내부에서 일어난 변란을 바로잡고 회맹에 참가하지 않은 수(遂)나라를 치기 위함도 있다. 제 환공은 수나라를 멸하고, 노나라를 쳐서 노나라를 이겼다. 이에 노장공은 제나라에 회맹을 요청하니 노나라의 가 땅에서 회맹하니 이 회맹을 가지(柯地)회맹이라고 한다. 회맹 중에 노 장공의 신하인 조말(曹沫)이 보검을 빼 들어 제 환공을 위협했다. 그리고 제나라가 노나라로부터 빼앗은 문양 땅을 돌려달라고 했다. 제 환공은 협박에 못 이겨 결국 그러마고 했다. 그러나 돌아오자 조말이 괘씸해 조말을 불러 죽여 버리려 했다. 그러나 관중이 간했다.
"비록 협박에 굴해 마지못해 문양 땅을 주겠다고 하셨어도 그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제 환공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문양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천하 제후들이 제나라를 따르게 되었다.
- 제 환공 6년(기원전 680년), 북행 회맹에 참여한 송나라가 회맹을 배신하는 사건이 터졌다.[23] 제 환공은 진(陳)나라, 채나라에게 송나라를 치게 했다. 그리고 제 환공이 사람을 보내 주 천자에게 공물을 바쳤다. 그러면서 송나라가 천자를 존중하지 않아 군주를 폐해 그 죄를 묻겠다고 했다. 주나라 천자 또한 제 환공의 위세를 빌어 천자의 위엄을 키우려 했으므로 제 환공의 요구를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대부 선백에게 병력을 주어 따르게 했다. 제나라, 진(陳)나라, 채나라 3개국이 송나라를 쳤다. 이것을 안 송나라는 제나라가 천자를 등에 업어 명분상 불리하고, 실력 또한 제나라에게 미치지 못 했으므로, 제후들 앞에서 그 일을 사죄했다.
- 제 환공 7년(기원전 679년), 송나라의 견 땅에서 위(衛)나라, 정나라, 송나라와 회맹하니 이것을 견 땅의 회맹이라 한다. 여기서 제 환공이 맹주가 되어 패자로서의 지위를 다졌다.
- 제 환공 8년(기원전 678년), 제나라는 다시 노나라, 송나라, 진(陳)나라, 위나라, 정나라, 허나라, 활나라, 등(滕)나라와 유 땅에서 회맹했다. 당연히 여기서도 제 환공이 맹주가 되어 제 환공은 명실상부한 패자가 되었다.
- 제 환공 11년(기원전 675년), 노나라 공자 결이 진(陳)나라로 시집가는 공녀를 호송하던 중 견 땅에서 열린 제나라와 송나라의 회맹에 억지로 참가했다. 이 때문에 겨울에 제나라, 송나라, 진나라가 노나라를 쳤다.
- 제 환공 12년(기원전 674년), 제나라가 융족을 쳤다.
- 제 환공 14년(기원전 672년), 진(陳)나라 선공이 태자 어구를 죽이니 공자 완이 두려워 제나라로 망명했다. 제환공이 공자 완을 경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공자 완이 사양하자 기술자를 관장하는 공정 벼슬에 임명했다.[24]
- 제 환공 15년(기원전 671년), 제나라가 노나라와 두 차례 회맹했다.
- 제 환공 19년(기원전 667년), 제나라가 노나라와 성복 땅에서 회맹했다.[25]
- 제 환공 22년(기원전 664년), 제나라가 장(鄣)나라를 쳐서 굴복시켰다.
- 제 환공 23년(기원전 663년), 산융족이 연(燕)나라를 침입하자 연나라가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제 환공은 산융을 쳐서 연나라를 구해 주었다. 그리고 고죽국에 이르러 회군했다. 연장공은 그것에 고마워해 제 환공을 배웅하다가 국경을 넘고 말았다.[26] 그러자 제 환공이 쿨하게 말했다.
"국경을 넘은 만큼 그 땅을 연나라에 주어 연나라가 무례한 나라가 되지 않게 하겠소."
그리고 그 땅을 연나라에 진짜 내주었다. 그 땅을 연류(燕留)라 한다. 그리하여 제나라의 신망이 더욱 두터워져 제후들이 제나라를 우러르게 되었다.
- 제 환공 27년(기원전 659년) 봄, 제나라, 송나라, 조(曹)나라, 3개국은 병력을 거느리고 형나라를 구하려 했으나 이미 북적에게 멸망당한 뒤였다. 북적은 곧 위나라로 쳐들어가 위나라도 멸망시켜 버렸다. 이에 제 환공은 형나라와 위나라를 재건시켰다.[27]
- 제 환공 29년(기원전 657년), 제 환공과 채희가 뱃놀이를 하다가 물장구를 치자 제 환공이 제지했으나 채희가 듣지 않았다. 제 환공은 채희를 내쳤다. 채나라에서 그 일로 제 환공을 원망해 채희를 새로 시집 보내자 제 환공이 크게 노해 채나라를 치려 했다. 가을에 정나라가 초나라의 공격을 받자 제 환공은 제후들을 소집해 정나라를 구하려 하니 이것을 양곡 회맹이라고 한다.
- 제 환공 30년(기원전 656년) 봄, 제 환공은 제나라, 노나라, 진(陳)나라, 위나라, 정나라, 조나라와 초나라에 빌붙은 채나라를 치기로 했다. 당연히 국력이 약한 채나라를 쳐부순 뒤 초나라로 가자 초나라가 굴완을 보내 주 왕실에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바로 소릉의 회맹이라고 한다.
- 제 환공 31년(기원전 655년), 주 왕실에서 세자를 교체하려고 했다. 바로 태자 정 대신 왕자 대로 바꾸려 한 것이다. 주혜왕이 죽자 제 환공은 노나라, 송나라, 허나라, 조나라, 진(陳)나라와 도에서 회맹했다. 그리고 태자 정을 주나라의 천자로 세우니 그가 바로 주양왕이다.
- 제 환공 33년(기원전 653년), 제 환공이 정나라를 치고 노나라, 송나라, 진(陳)나라, 정나라와 영모 땅에서 회맹했다. 이때 관중의 조언에 따라 환공이 제후들을 예우하니 제후들이 제나라를 더욱 공경하여 공물을 바쳤다.
- 제 환공 35년(기원전 651년), 제 환공은 각 제후국과 규구에서 주 양왕을 모시고 회맹했다. 이것을 규구의 회맹이라 한다. 주 양왕이 제 환공의 패자 지위를 승인했다.[28] 이 해 진헌공이 죽고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제환공이 진나라로 가 진(秦)목공과 함께 진혜공을 옹립했다.
- 제 환공 38년(기원전 648년), 주나라 왕자 대가 왕이 될려고 융족을 끌어들여 주나라를 쳤다가 패하자 주양왕이 왕자 대를 추방하니 왕자 대가 제나라로 달아났다. 이에 제환공이 관중을 보내 주양왕과 왕자 대를 중재했다.
- 제 환공 41년(기원전 645년), 관중이 중병에 들자 제 환공이 그를 문병하면서 물었다."여러 신하 중 누가 경을 이을 만하오?"관중이 대답했다."신하는 군주가 잘 아는 법입니다."제 환공이 대답했다."역아는 어떠하오?"관중이 대답했다.(* 이하 대화로만 표기)"역아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군주를 따랐으니[29], 인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자입니다.""개방은 어떠하오?""자기 나라를 버리고 군주를 따랐으니 역시 사람답지 못 합니다.""수초는 어떠하오?""자신을 거세해 군주를 따르는데, 이것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니 이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관중이 죽자 제 환공은 관중의 유언대로 습붕에게 뒤를 잇게 했으나 그 습붕이 금방 죽고 포숙아가 뒤를 이었다. 제 환공은 얼마 동안은 관중과의 약속을 지키려 노력하나 삼인방이 없으니 너무 심심해 역아, 수초, 개방을 모두 다시 불러 중용했다. 포숙아가 제 환공에게 간언하나 무시하자 포숙아는 홧병이 나서 죽는다.
- 제 환공 42년(기원전 644년), 융족이 주나라를 치니 제나라의 병력이 주나라를 구했다.
- 제 환공 43년(기원전 643년), 제 환공이 병이 들어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5명의 공자가 다투었다. 겨울 10월 7일 제 환공이 죽자 5명의 공자가 다투어 제나라가 혼란에 빠졌고, 제 환공의 시신이 67일 간 방치되었다. 그리하여 제 환공의 시신에 구더기가 들끓었다. 12월 14일 공자 무휴가 제 환공의 장례를 치렀다.
[1] '父'또는 '部'를 쓰기도 한다.[2] 춘추오패의 구성원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제 환공과 진 문공은 논란의 여지가 없이, 확실한 패자로 평가받는다.[3] 사마천의 사기에는 "제(劑)는 북으로 산융(山戎)을 정벌하고 고죽국(孤竹國) 지역까지 갔다가 융숙(戎菽)을 얻어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융숙'이라는 것이 바로 콩(대두)을 의미한다.[4] 이를 계절(繼絶)이라 한다.[5] 다만 여기엔 숨겨진 뒷이야기가 있는데 원래 제환공은 수도를 잃기 전에 도와주려고 했는데 관중이 위나라가 더 혼란스러워졌을 때 도와주는 것이 득이 더 많을 것이라며 지원을 늦췄고 결국 위의공이 북적과 전투에서 전사하고 위대공도 금방 사망한 뒤 수도를 잃자 제환공이 위문공을 지원해 나라를 다시 세워줌으로 단순한 군사지원을 넘어서 나라를 다시 세워주는 공을 세우게 된다.[6] 고대 중국에서는 여성에게 따로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보통 (출신국가 or 맹, 숙, 계처럼 순서를 의미하는 한자)+(성)이런 식으로 불렀다. 제강, 문강, 애강, 회영, 숙외, 계외 등이 예. 이 경우엔 채나라 출신 희성이므로 채나라 제후의 딸이라는 걸 알 수 있다.[7] 실제로 채를 쑥대밭으로 만들지도 못 했다. 채에 대한 거짓 공격으로 수초가 나서지만 뇌물 한 방에 공격도 하지 않고 초를 공격하기로 한 군사 기밀도 불어 버린다.[8] 다만 중원 연합군이 초나라를 실제로 정벌할 수 있던 상황은 아니다. 과거 주 소왕 대에 초나라를 정벌하려다가 천자가 한수에 빠져 죽은 적도 있으며 초나라의 본진인 한수와 장강 사이의 땅은 중원과 달리 전차가 활약하기 어려운 지형이다. 초나라의 본거지를 직접 정벌하는 사건은 춘추시대 말기 오나라가 전차가 아닌 다수의 보병 위주 전술로 바꾼 뒤에야 일어난다.[9] 정 문공에게 밀사를 보내 초와 함께 제를 견제하기를 지시했다. 이는 제나라가 주나라와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제 환공이 세자를 감싼 것에 의한 것이지만, 제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가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10] 인재를 알아보고 중용하는 것 역시 사람의 능력이며, 특히 지도자한테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11] 봉선은 천자(중국의 황제)들이 천하를 얻게된 후, 이 사실을 하늘과 땅에 고하기 위해 하늘에 지내는 제사인 봉(封)과 땅에 지내는 제사인 선(禪)을 합쳐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당시 천자국였던 주나라 왕만 시행할 수 있는 제사로, 제후 신분인 환공은 지낼 수 없었다.[12] 환공의 요리사. 요리 실력이 뛰어나서 환공의 총애를 받았는데, 어느 날 환공이 장난으로 "다른 고기는 다 먹어 봤지만 인육만 못 먹어봤다."라고 말하자 자기의 어린 아들을 죽여 고깃국을 만들어 환공에게 바쳤다. 또 미각이 뛰어나서 서로 만나 섞이는 치수(淄水)와 민수(澠水)를 물맛을 보고 어느 곳인지 알아 맞혔다. 이후 제환공이 병상에 눕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제환공의 사후 일이 발각되어 망명하였다. 말년에는 초나라까지 가서 제환공의 아들 중 왕위를 노리지 않고 망명한 공자 옹을 보좌하였다.[13] 환공이 총애하던 미소년으로 환공에게 붙어 있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고 내시가 되었다. 수초는 나중에 역아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인과응보로 잡혀 산 채로 몸이 찢겨져 처형당했다. 개방은 결국 자기가 지지하던 공자가 왕위에 올라 공신이 되는데 성공했고, 역아는 달아나 초나라에 망명한 제나라 공자를 보필하며 그럭저럭 살아갔으나 본인은 그대로 사형당하며 간신 3인방 중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14] 위(衛) 의공(懿公)의 아들로 환공에게 가서 출세하기 위해 부모님을 버렸다. 하지만 역아나 수초와 달리 무궤가 아닌 다른 공자를 공왕으로 추천하여 목숨을 구했으며, 이후 대신으로 여러 공로를 세워 용서받게 되었다.[15] 수초는 제 몸도 아끼지 않는데 어찌 주군을 아끼겠으며, 역아는 자기 자식도 사랑하지 않는데 어찌 주군을 사랑할 것이고, 개방은 부모에게 효를 다하지 않았는데 어찌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겠느냐며 이들을 내쫒을 것을 관중은 간언했다. 특히 3인의 간신들은 관중을 시기하여 그를 내치라고 환공에게 모함했다. 물론 관중에 대한 신임이 깊은 환공은 역으로 그들에게 화를 내며, 더는 관중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아 실패했다.[16] 초기에는 습붕과 포숙아를 등용하면서 그래도 관중의 유언에 따라 행동했지만, 습붕이 얼마 안 되어 병사하고, 포숙아는 제환공이 이 세 사람을 다시 가까이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분통이 터져 죽었다.[17] 《초한지》에서 항우가 서초의 패왕을 칭하려 할 때, '패'의 부정적인 의미와 위의 사례를 들며 범증이 말리자 초장왕의 예를 들며 애써 무시했다는 사례도 있다. 물론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항우는 제환공 못지 않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18] 특히 제환공 사후의 제나라는 매우 혼란해졌는데 군주들 역시도 재위기간이 길지 못해 제환공 사후 제영공 이전까지 60여 년 동안 7명의 군주가 존재했다.[19] 누에의 유충을 본뜬, 청동으로 도금한 소품(小品)[20] 그런데 사실 이 공정도 보통 자리가 아닌데, 비록 자리는 낮을지언정 경제권과 관련된 자리인지라 힘은 대단히 있었다.[21] 담(郯)나라와는 다른 나라다.[22] 재밌는 사실은 상술한 글에서도 나오지만 제 환공이 거나라에 머무른 적이 있기 때문이다.[23] 아마 공작국인 송나라가 후작국인 제나라에게 굽히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듯하다. 물론 이건 명목상이고, 실제로는 제나라가 더 강했다.[24] 공자 완의 후손이 바로 뒷날 제나라를 찬탈하는 전씨 가문이다.[25] 후일 성복대전이 일어나는 그곳 맞다.[26] 당시에 국경을 넘는 것은 제후국 간의 예의를 져 버린 행위였다.[27] 물론 똑같이 재건된 나라라고 해도 국력은 형나라가 훨씬 약했으므로 금방 위나라에게 멸망하고 만다.[28] 재밌는 것은, 진헌공이 규구회맹에 참여하려 했으나 끝내 회맹에 참여하지 못 했다는 떡밥이 있다. 다만 사기(史記)에만 들어 있다는 점을 들어 이 설을 부정하는 사람도 많다. 아무튼 사기에서는 이 회맹에 참여하지 못 한 게 한이 되어 그것이 병으로 이어져 죽었다고 전해진다. 또는 주나라에서 제나라가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진헌공이 회맹에 참석하지 않게 했다고도 한다.[29] 인육 진상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