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10:12:27

진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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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0> 춘추오패(春秋五覇)
진(晉)나라 24대 국군
문공
文公[1]
파일:중이.png
희(姬)
진(晉)
중이(重耳)
아버지 진헌공(晉獻公) 희궤제(姬詭諸)
아내 회영(懷嬴)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671년 ~ 기원전 628년(춘추좌씨전)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28년(사기)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8년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이오의 즉위2.3. 중이의 방랑2.4. 즉위2.5. 패업2.6. 죽음
3. 여담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중국 춘추시대 (晉)나라의 24대 군주. 춘추오패 중의 한 명이고 진나라의 군주 중에서 손꼽히는 명군이다[2][3], 성(姓)은 (姬)[4], 씨(氏)는 진(晉)[5], 이름은 중이(重耳)이다. 생몰년은 《춘추좌씨전》에 의하면 기원전 671년 ~ 기원전 628년, 《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28년이다. 어찌되었건 재위 기간은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8년(8년)이다.

막장으로 유명한 춘추전국시대의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이다. 군주 지위의 계승 다툼으로 인한 내란 때문에 19년의 세월 동안 중원 각지를 방랑하며 온갖 역경을 겪었으나 이를 묵묵히 감내한 끝에 늘그막에 고국에 돌아와 즉위하였을 뿐 아니라 패자의 자리에까지 오른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그렇기에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 등 주변의 역사에서도 방랑 신세인 주군을 격려하는 부하들이 항상 예로 드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진헌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헌공의 아버지인 진 무공은 제환공의 딸과 결혼했는데, 나이 차가 매우 났다.[6] 그래서 무공이 죽자, 헌공은 계모[7][8]를 자신의 비로 삼고 신생(申生)을 낳았다. 이후 제강이 죽자, 진 헌공은 다시 포로로 잡은 적(狄) 여인으로부터 딸 한 명과 아들 두 명, 즉 중이와 이오(夷吾)를 낳았다. 딸은 진목공에게 시집보냈다.

또한 진 헌공은 여융을 공격하여 그들을 멸망시키고 두 공주를 취해 언니 여희에게서 혜제(奚齊)를, 동생 소희에게서 탁자(卓子)[9]를 낳았다. 그러니까 진 헌공은 신생, 중이, 이오, 혜제, 탁자라는 아들을 각각 두게 된다. 여희는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진 헌공에게 앙심을 품고, 겉으로는 충실한 애첩인 척하면서 교묘히 진 헌공과 태자 신생 사이를 이간질했는데,[10] 여기에 넘어간 헌공이 태자에게 자살을 명령했다.

결국 태자는 자살했고, 중이와 이오에게도 불똥이 튀어서 이 둘은 나라를 떠나 방황하게 된다. 여기에 이들을 따르는 진나라의 신하들이 동참하여 중이는 적(翟)나라로, 이오는 양(梁)나라로 망명했다. 이 와중에 중이는 자객 발제의 암살 시도를 받았으나 옷 소맷부리만 잘리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해 탈출했다. 이때부터 중이는 1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방랑을 하게 된다.

2.2. 이오의 즉위

한편 진나라에서는 진 헌공이 여희의 아들인 해제를 태자로 책봉한 뒤 곧 사망했다. 그러나 어린 해제는 곧 암살되었고,[11] 이어 중이는 진(晉)나라 유신들로부터 보위에 오르라는 청을 받지만, 자신을 해하려는 음모라고 생각하여, 아버지의 상중임을 빌미로 군위에 오르는 것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동복 동생인 이오에게 차례가 돌아와 이오는 누님의 남편인 진(秦)목공의 도움을 받아 곧 행동을 취해 진(晉)나라로 되돌아와 군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진 혜공이다.

그런데 진혜공은 군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면 5성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이를 배신하여 진(秦)나라는 이걸 괘씸하게 여겼지만 쳐들어가지는 않았다. 이후 진(晋)나라에 흉년이 들어 진(秦)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진 목공은 이를 수락해 엄청난 원조를 해줬는데, 공교롭게도 다음해에 처지가 반대가 되었다. 목공은 혜공에게 식량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혜공은 이를 기회로 진(秦)나라의 영토를 빼앗으려 군사를 이끌고 침공했다가 한원대전에서 진목공에게 대패를 하여 역관광당해 포로가 되었다.

진 목공은 배은망덕한 혜공을 죽이려고 했으나, 혜공의 누님인 비의 간곡한 청으로 원래 약조한 5성을 할양받고 세자 어를 인질로 받는 조건으로 석방했다.

2.3. 중이의 방랑

그동안 중이는 동생인 진 혜공이 보낸 자객들을 피하며 계속 방랑하고 있었는데, 이때 재미있는 일화들을 많이 남겼다. 중이는 망명한 적나라에서 환대를 받으며 계외(季隗)라는 미녀와 결혼하고 자식까지 얻었다. 그러나 혜공이 자객을 보내 목숨을 노리자 결국 적나라를 떠났는데 이때 계외에게 '뜻하지 않게 먼 길을 떠나야 하는데 25년만 기다려주고 그때가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재가를 하라'고 했다. 그러자 계외는 '내 나이가 25살이라 25년 뒤면 할망구가 될 텐데 어딜 가겠는가. 평생 당신을 기다리겠다'고 답했다.[12] 사실 당시 평균 수명(50살)을 생각할 때 25년이라는 건 그냥 평생 기다려달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이후 가신들과 상의 끝에 제나라로 가던 도중 위(衛)의 오록(五鹿) 지방을 지나다 너무나도 허기진 끝에 농부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밥을 구걸했다. 그러자, 농부들은 중이의 밥그릇에 흙을 담아줬다. 격노한 중이가 농부를 채찍으로 때리려 하자, 조최(趙衰)가 '흙을 받는 것은 그 땅을 받는 것. 군께서는 이에 절을 하고 받으십시오.' 라고 진언했다. 모욕이 아니라 영지를 받을 길조로 여기라고 설득한 것이다. 그러자, 중이는 마음을 고쳐먹고 그 흙그릇에 절을 하고 받았다.[13]

그러나 원한은 잊지 않았는지, 진 문공은 즉위한 후에 위에 사신을 보내 조(曹)를 칠테니 길을 빌려달라고(가도어위. 假道於衛) 요청했다. 위에서 자신의 요청을 거부하자, 이를 명분삼아 진 문공은 조를 친 뒤에 곧바로 위를 공격해 오록의 땅을 취했다.

이후 제나라로 가서 당시 패자였던 제환공의 환대를 받고 제나라의 공녀[14]와 결혼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게 5년이 지났는데... 중이가 편안한 삶에 젖어 큰 뜻을 잃을까 걱정한 가신들은 중이에게 다시 방랑길에 오를 것을 재촉했으나 중이는 거부했다. 그래서 가신들은 중이를 어떻게든 빼돌리기 위해 밀담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한 계집종이 엿듣고는 중이의 아내인 제강에게 고자질했다. 그러나 제강은 오히려 계집종을 죽여 입막음을 하고는[15] 중이의 부하들과 짜고선 중이에게 술을 진탕 먹여 정신을 잃게 하고 수레에 실어 강제로 제나라 밖으로 나가게 했다. 고우영 화백의 <만화 십팔사략>에서는 남편을 아내가 "큰 뜻을 잊으셨습니까?"라고 남편을 설득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가신들과 함께 술을 많이 먹여서 잠들게 한다. 그러고 나서 수레에 태워 제나라 밖으로 가게 한 것. 남편과 행복하게 살던 제강으로서는 힘든 생각이었고, 가신들이 진심으로 고맙다고 한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술에서 깬 중이는 진노하여 창을 들고 가신들을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이 일을 주도한 외삼촌 호언(狐偃)[16]이 "저를 죽여서 속이 풀리신다면 그리하십시오."라고 하자, 맥이 풀려버린 중이는 창을 거두고는 "이러고도 뜻을 이루지 못하면 그때야말로 외삼촌의 살을 씹어먹겠소!"라고 탄식하니, 호언은 웃으면서 "그때쯤 되면 저의 살은 오래되고 비리게 되어 먹지도 못할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17]

제나라를 떠난 중이는 조(曹)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조나라 군주 공공(恭公)은 중이를 업신여겨 후히 대접하지 않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중이는 중동(重瞳)[18]에 변협(駢脇) 즉 눈동자가 둘이고 갈비뼈가 통짜로 되어 있는 특이한 상으로 유명했다. 공공은 이것이 정말인지 궁금해서 목욕하는 중이를 훔쳐보는 무례를 저지른다. 이때 조나라 대부 가운데 희부기(僖負羈)란 자가 있었는데, 그 부인이 희부기에게 충고했다. '내가 볼 때 중이는 임금의 기상을 지닌 인물이고 그를 수행하는 인물들도 당대의 영걸이다. 만약 중이가 진나라로 돌아가 패업을 이루면 반드시 지난 날 무례했던 제후들에게 복수할 것인데, 조나라가 가장 먼저 화를 입을 것이다.' 희부기는 이 충고를 옳게 여겨 사람을 시켜 음식 속에 보물을 숨겨 중이에게 보냈다. 중이는 음식은 고맙게 받았으나 보물은 사양했다.

그리고 훗날 중이가 진 문공이 되어 조나라를 침공했을 때, 병사들이 희부기가 사는 구역에는 접근하거나 들어가지 못하도록 명령했고, 이에 희부기네 마을에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여기서 병사들이 진입한 곳에서는 영 좋지 못한 일들이 곧 전쟁범죄가 엄청나게 벌어졌다는 걸 유추할 수 있으며, <열녀전>에도 실린 유명한 이야기다. 근데 문공이 거지로 19년을 방랑할 시절부터 함께했던 신하 중 하나인 전힐이라는 이가 희부기네 집에 불을 질러[19][20] 희부기는 타죽고 말았다고 한다. 전힐도 자기가 지른 불에 휩쓸려 죽었다거나 혹은 희부기네 집에 불을 지른 방화죄로 전후 처형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선 문공을 따르던 신하 중 두수(頭須)라고 하는 자가 있었다. 원래 맡고 있던 일이 궁궐에서 창고를 관리하는 일이었는데 숫자 세기가 빠르고 머리가 꽤 좋은 신하라 문공이 우대한 인물이었다. 그런 두수는 문공이 망명하던 길을 따라나섰으나 도중에 틀렸다고 배신하여 돈과 심지어 먹을 것까지 싸그리 다 챙겨 달아났다. 두수를 믿고 돈과 먹을 것을 맡겼다가 졸지에 거지 꼴도 부족해 굶어죽게 될뻔한 문공 일행은 더더욱 개고생했는데 굶어죽기 직전에 처한 진문공을 보다 못한 신하 개자추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문공에게 먹게 하여 겨우 죽는 위기를 넘길 정도였다. 그랬으니, 문공은 그리도 믿고 돈과 먹을 것을 맡긴 두수에 대한 배신감에 격노해 반드시 그를 찢어죽이겠다고 이를 갈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문공이 돌아와 재위하자 두수가 뻔뻔스럽게 나타났다. 그를 알아본 신하가 죽으려고 왔냐면서 어서 사라지라고 충고했지만, 두수는 주군에게 내가 왔다고 전해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궁궐 밖에 그가 나타난 것을 보고받은 문공은 당연히 분노했으나 꾹 참고 "이제와서 그놈 죽여봐야 뭐하겠느냐, 괜히 나라 분위기 안 좋아진다. 모처럼 관대하게 살려줄 테니 꺼져버리라고 전하거라!"라고, 만나지도 않고 다른 신하를 시켜 명령을 전했다. 헌데, 두수는 이 말에 "이상하네? 주군께선 생각이 없으신가? 내가 나타난 게 그저 아첨하려고 나타난 것인지 아시나? 라고 전해주시오."라는 말을 하며 궁궐 밖에 그대로 기다렸다. 문공은 그 말을 전해듣고 그를 직접 만났는데 두수는 "제가 찢어죽일 잘못을 한 건 아옵니다. 그러나, 주군께서 자신을 버렸던 이들을 용서하겠다고 해도 사람들이 조정으로 안 오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약속과 달리 죽을 것이라든지,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 아니옵니까? 그런데, 저를 관대하게 용서하고 등용하신다면 사람들은 아, 저 자조차도 용서받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도 관대하게 봐주고 등용할 것이다! 라며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궤변을 시전했다(...). 옹치의 선구자.

문공은 참 뻔뻔하지만 그래 네놈 말이 맞다고 그를 용서하고 궁중 창고를 관리하는 자리에 앉혀 제법 중용했다. 두수가 진 문공의 수레를 몰거나 궁궐에 입궐하여 조정 회의도 하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으로 퍼지자, 정말로 문공이 과거에 자신을 버렸다고 하여 벌할까봐 숨어 잠적하던 문, 무관들이 "그런 짓을 한 두수도 용서를 받았으니, 우리도 용서할 것이다."고 여겨 출사하여 문공 치세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우습게도 이런 짓을 저지른 두수는 부귀영화와 천수를 누린 반면에, 자신의 다리 살을 잘라 주군을 살린 개자추는 불타죽고 말았다는 점...

중이는 조나라를 거쳐 송나라에 들어와 군사를 빌려 군위를 되찾으려 했으나, 송양공은 이미 초나라와 싸우다 나라를 거지반 말아먹었고 게다가 중병이라서 그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중이 일행은 다시 송나라를 떠나 정나라를 거쳐 남방의 초강대국이었던 초나라에 도착했다. 초나라 왕인 성왕은 중이를 매우 환대했고, 제후로 대접하였다. 초 성왕은 중이에게 "나중에 귀공이 보위에 오르면 어떤 보답을 해주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중이는 "전하께서는 세상의 모든 보물을 가지고 있으시니, 보물보다는 다른 것으로 보답해드리겠습니다. 만약 훗날 초나라와 우리 진나라가 전쟁터에서 맞붙는다면, 저희는 조건없이 3사(舍)[21]를 물러나겠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저를 물러나지 못하게 하신다면 활을 잡고 전하와 겨뤄보도록 하겠습니다"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초나라의 신하 자옥(성득신)[22]이 초 성왕에게 중이를 죽이자고 청했으나 초 성왕은 오히려 중이의 대담함을 높이 사면서 "중이는 뜻이 원대하고 겸허하며 언사가 올곧고 예모가 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 또한 태도가 중후하면서도 관후하고 사람됨이 충성스러우면서도 능력이 있다. 지금 진 혜공은 인심을 잃어 나라 안팎에서 이미 미움을 사고 있다. 내가 듣기로는 희씨 성을 가진 나라 중 당숙의 후손만이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하니, 이는 곧 중이를 말하는 것이다. 진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는 하늘의 뜻이 중이에게 있거늘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뜻을 어기면 장차 큰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대답하며 중이를 살려주고 나아가 그 일행을 진(秦)나라까지 호송하도록 해주었다.

여전히 많은 초나라 신하들은 특히 성득신 중이가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린다며 비웃었지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23] 그리고 성득신 항목에도 나오는데, 진문공은 후퇴는 해주겠다 했지만 전쟁에 져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2.4. 즉위

진 혜공 14년(기원전 637년), 진 혜공은 병들어 사망하고, 서쪽의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세자 어가 돌아와 군위를 이었다. 그가 바로 진 회공이다. 한편 진(秦) 목공은 어가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귀국한 것에 분노했고, 초나라에 사신을 보내 중이를 끌어들였다.

중이는 초 성왕의 환송을 받으며 진나라로 떠났고, 목공의 도움을 받아 회공을 쳤다. 중이의 조카였던 회공은 도망갔고, 중이가 군위에 오르니 바로 진 문공이다.

진 문공 원년(기원전 632년) 극예와 여이생이 비록 진회공을 버리고 진문공을 따랐으나, 그들은 진문공을 의심하여 따르지 않고 오히려 방화를 해서 진문공을 처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진문공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인 발제가 죽음을 무릅쓰고 진문공에게 그들의 계획을 알려서 진문공은 또 다시 진목공의 도움을 받아 극예와 여이생의 무리를 죽여 없애 군주의 지위를 든든하게 했다.

진 문공은 논공 행상을 하여 자기를 따르던 가신들에게 푸짐한 보상을 하는가 하면, 대사면령을 발표하여 혜공이나 회공을 따르던 이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적극 등용하였다. 게다가 19년간 방황하면서 얻어진 연륜을 가지고 국내 정치를 적극 정비하여 진(晉)나라는 일약 강대국으로 발돋음했다.

다만 진 문공은 망명 생활 중 전심을 다해 자신을 보좌한 개자추라는 신하를 논공 행상에서 잊어버렸다. 원래 진 문공은 논공 행사를 하면서 혹시라도 누락된 사람이 있을까 봐 '포상을 못 받은 사람이 있거든 신고하라'고 꼼꼼하게 포고까지 내렸다. 그런데 개자추는 망명 생활 중 진 문공이 굶주리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여 바쳤다는 '할고봉군'(割股奉君)의 일화를 남긴 인물인데도, 이런 조치를 대단히 비루하게 여겼다. 선군이 남긴 자식들 가운데 가장 명민한 중이가 군위에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정작 그 신하란 작자들이 내 공이 크네 작네 따지는 것은 하늘의 공을 탐하는 짓이라며 도적질보다 못하다고 비루하게 여겼다. 여기서 나온 고사가 바로 '탐천지공'(貪天之功)이다. 결국 개자추는 노모를 모시고 면산(綿山)에 은거했다.

훗날 진 문공이 개자추를 잊은 것을 알고 그를 찾았으나 개자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산에 불을 지르면 산에서 나올 거라 생각하여, 결국 산에 불을 질렀지만 끝내 나오지 않고 노모를 감싸안은 채 산불에 타 죽어버렸다('포목소사'). 진 문공은 산불을 낸 것을 후회하고 개자추가 죽은 날에는 불을 피우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날이 마침 청명이었고, 이것이 바로 '한식'(寒食)[24]의 기원이 된다. 다만, 《사기》의 <진세가>에는 할고봉군의 일화나 한식의 유래에 대한 언급은 없고, 면산 일대의 땅을 개자추에게 하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5. 패업

진 문공 2년(기원전 635년), 문공이 즉위하자마자 모든 제후국들이 종주국으로 모시던 주나라에서 정변이 일어나 주양왕(周襄王)의 동생인 왕자 대(王子帶)[25]가 주 양왕을 몰아냈고, 주 양왕은 정나라로 피신했다. 여기에 진 문공이 개입하여 희대를 토벌하고 주 양왕을 복위시켰다. 주 양왕은 그 공로를 높이 쳐서 하내와 양번 땅을 주었다. 이로써 진 문공은 천자를 보위하여 기세를 떨치게 되었다.

진 문공 4년(기원전 633년), 초성왕이 다스리는 초나라가 진, 채, 정, 허와 같은 소국을 아울러 송나라를 침략했다. 진나라는 이에 초나라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다.

진 문공 5년(기원전 632년), 문공은 초나라 망명 시절 3번을 후퇴하겠다는 초 성왕과 한 약속을 유리한 상황에서 지킨 후에 이어진 성복 전투에서 초나라를 박살냈다.[26] 그리고 진목공진(秦)나라와 힘을 합쳐 정나라를 복속시켰다. 결국 진 문공은 즉위한 지 5년 만에 오랑캐에 맞서 천자를 지키는 "존왕양이"의 패업을 달성하게 되었다.[27] 5월에 초나라의 포로를 주양왕에게 바치니 주양왕은 진문공에게 단술, 큰 전차 1대, 붉은 활 1대, 붉은 화살 100개, 검은 활 10개, 검은 화살 1,000개, 거창과 규찬 및 호위무사 300명을 하사했다. 그리하여 진문공은 공식적으로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28]

진나라는 진문공 이후 춘추시대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전국시대로 넘어갈 무렵 진나라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삼국으로 나눠졌는데, 나라가 삼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나라 모두 전국칠웅에 속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삼분되지 않고 계속되었다면 秦이 천하를 통일하기는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5월 진문공이 조나라위나라를 쳐서 조공공(曹共公)과 위성공(衛成公)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나중에 위성공과 조공공의 지위를 회복시켰다. 겨울에 천토 땅에서 회맹하니, 이것을 천토지맹 즉 천토 땅의 회맹이라고 했다.

진문공 6년(기원전 631년) 여름 문공은 왕자 호, 송나라의 공자 공손고, 제나라의 귀보, 진(陳)나라의 원도도, 진(秦)나라의 소자은과 함께 적천 땅에서 회맹했다.

진문공 7년(기원전 630년) 정나라가 초나라를 섬겼거니와 전에 정문공(鄭文公)이 진문공을 받아들이지 않은 원한도 있어서 진(秦)목공과 함께 정나라를 포위했다. 숙첨이 먼저 진목공을 설득해 진(秦)나라로 회군하게 했다. 당연히 진문공이 그것을 알고 숙첨을 죽이려고 했으나 숙첨이 이치를 따져가며 진문공에게 말하니 진(晉)나라에 인질로 온 정나라 공자 란(蘭)을 세자로 세우라고 했다. 마침 정나라에서 정문공이 반란을 일으킨 아들을 죽여 후계자의 씨가 마른지라 좋든 싫든 따를 수밖에 없었다.

2.6. 죽음

진 문공 8년(기원전 628년), 문공은 패업을 이룬지 4년 만에 훙하였다. 고생에 비하면 재위기간이 짧은 편이었는데, 《사기》의 기록을 기준으로 볼 때에 군주가 되었을 당시에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노인이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사기보다 신뢰도가 높은[29] 춘추좌전의 기록에 의하면 죽을 당시 나이가 만 43세에 불과했다.

진 문공은 비록 재위기간은 길지 못했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내에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다졌다. 덕분에 진(晉)나라는 서쪽의 진(秦), 동쪽의 제나라, 남쪽의 초나라와 함께, 특히 초나라와 함께 100여 년간 춘추시대 초강대국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후 진나라위나라, 한나라, 조나라 셋으로 쪼개졌지만, 그 세 나라가 모두 전국칠웅의 하나로 성장할 만큼 진 문공이 다져놓은 진나라는 강국이었다.[30][31][32]

한편 진 문공은 태자 신생의 죽음으로 진 헌공에게 의심받아 도망가기 전에 핍길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으며, 핍길의 아들이 진 문공의 사후 장남이자 태자로서 진 양공으로 즉위하게 된다. 계외에게서는 아들 둘이 있었으나 다들 어려서 죽은 것 같고 그 외의 후사는 전해지지 않으며, 제나라 공녀 즉 제강에게서 아들 하나, 진 목공의 딸 회영에게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제나라 공녀의 아들은 진(秦)나라로 보내서 벼슬하게 했으며, 회영의 아들이자 진 목공의 외손자는 진(陳)나라로 보내서 벼슬하게 하여 일찌감치 권력 투쟁에서 떼어놓았다.

3. 여담

  • 삼국지》에서 유표의 아들 유기제갈량을 불러 '사다리 치우기'를 통해 향후의 일을 묻자 제갈량이 유기에게 해 준 강하군 수비를 명목으로 유표 곁을 떠나라는 조언이 바로 이 진 문공의 예를 들어 조언한 것이다.[33]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다른 사람의 꾀에 낚이는 흔치 않은 장면인데[34], 이 이야기는 《삼국지연의》뿐 아니라 《정사 삼국지》 <제갈량전>에도 기록된 이야기이다.
  • 중이의 방랑 생활을 보좌한 신하 중에 조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중이가 진문공이 된 뒤 진나라의 권세가가 된다. 이 사람의 손자 때 집안이 멸문했다가 증손자인 조무 때에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조씨고아 항목을 참조.

4. 대중매체에서

2019년 드라마 중이전기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성군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정의롭고 무술과 의술이 출중한 것으로 묘사된다.

[1] 시법에 따르면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림을 문.{經緯天地曰文}이라고 한다.[2] 사실 곡옥 통일 이후 극초기와 진도공 때를 제외하면 진(晉)나라에서 이상하리만치 유능한 군주가 안 나왔던 점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3] 그런데 사실 진나라에서는 신하들의 권세가 강해서 군주가 눌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애시당초 진나라가 3국으로 갈라졌던 것도 신하들이 나라를 세워 떨어져 나갔던 탓으로 이후 진나라는 껍데기만 남아서 오히려 군주가 신하에게 굽신거리는 상황이 되었다.[4] 춘추전국시대의 명목상 종주국이었던 왕실의 성이다.[5]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씨는 대개 나라 이름이다.[6] 진 문공의 아버지인 진 헌공과도 나이차가 나는 편인데, 진 문공의 할아버지인 진 무공과는 오죽하랴.[7] 제강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제강'이란 그냥 '제나라 군주의 딸 또는 공녀'라는 뜻이다. 계모라지만 나이는 헌공보다 훨씬 젊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게 진 헌공 항목에도 있지만 제강은 원래 헌공의 배필로 내정된 여자였다. 그런데 그걸 아버지 무공이 멋대로 뺏은 것. 불행 중 다행으로 이미 늙었던 무공이 얼마 안 가 사망해서 헌공이 다시 데려올 수 있었다.[8] 이런 '며느리 도둑질' 케이스가 나쁘게 꼬여서 결국 망국의 계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 바로 제환공의 아버지 제희공의 맏딸이었고, 제환공 자신에게는 맏누나가 되었던 선강. 선강은 위공자 급자에게 시집 갈 것을, 시아버지가 되었어야 할 위선공에게 가로채이는 바람에 두고두고 위나라 공실의 만악의 근원이 되고 말았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9]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달리 도자(悼子)라고도 한다.[10] 신생이 자신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고 무고하고, 신생이 보낸 음식을 일부러 며칠간 방치해 쉬어버리게 만든 것도 모자라 몰래 독을 탔다. 이를 환관과 개에게 기미를 겸해 먹이자, 이들은 죽었다.[11] 여희는 이에 자살했다.[12] 계외가 진 문공과 혼인한 나이는 13살 때라고 하며, 진 문공이 즉위하면서 진나라로 가서 7년 만에 재회하게 되었다.[13] 호언(狐偃)이 설득했다는 기록도 있다.[14] 위에도 말했지만 이 여자의 이름이 '제강'이라고 쓰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이름이 아니라 '제나라의 공녀'라는 뜻이다.[15] 고우영만화 십팔사략에도 제강의 계집종이 집안일을 하다, 가신들이 하는 밀담을 듣고는 알렸다가, 남편의 앞날을 생각한 제강이 보낸 자객에게 죽임 당하는 일화가 나온다. 제강은 남편을 보면서 "저 분은 앞으로 크게 될 분이신데, 나와의 편안한 삶 때문에 큰 뜻을 품지 못 하시면 안 된다."라고 생각한다. 같은 사례가 조조(曹操)에게 출사하지 않으려는 사마의가 꾀병을 부릴 때, 내리는 비에 책이 젖는 것을 본 그가 황급히 일어나 책을 집자 이를 시녀가 목격했는데, 이에 사마의의 어린 아내인 장춘화가 그 시녀를 죽여 입을 막은 일이다.[16] 자는 구범(咎犯).[17] 즉, 일이 잘못되면, 주군이 책임을 묻기 전에 자결하겠다는 것.[18] 훗날 항우도 이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19] 19년간 진 문공을 따라 개고생을 한 자신은 약간의 논공 행상과 관직을 받은 게 전부인데, 한때 보물을 바치고 조금 대접을 해준 게 전부인 희부기는 진 문공이 상석에 국빈으로 대접하는 것을 보고 시기심이 들끓어 일을 저질렀다.[20] 이는 전힐이 국내의 공신과 국외의 인물들은 같은 선상에서 놓고 볼 수 없다는 점을 망각한 어리석음이다. 진 문공이 희부기를 우대한 것은 과거의 은혜에 대한 보은의 의미도 있겠지만, 이를 통해 조나라의 민심을 수습하고 진 문공에 대한 이미지 개선과 대외 선전을 하기에도 적합했기 때문이다.[21] 사(舍)는 당시 군대의 하루 행군 거리로, 약 12킬로미터이다. 따라서 36킬로미터를 후퇴하겠다는 뜻.[22] 문헌에 성득신의 자인 자옥으로 종종 나오곤 한다. 대표적으로 《춘추좌씨전》이 그러하다.[23] 이유야 어쨌든 간에 당시 공자 중이는 떠돌이 공자에 불과했고, 군주가 될 가능성은 아직 그 동생인 진혜공이 살아있으므로 가능성이 낮아보이니 저렇게 비웃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24] 동지날로부터 105째 되는 날이다. 양력으로 4월 4일 ~ 5일 즈음이 된다.[25] 아우를 뜻하는 '숙'이 붙어서 태숙 대(大叔帶)라고도 하며, '감(甘)' 땅을 봉읍으로 받았고 시호가 '소'라 감소공(甘昭公)이라고도 한다. 부모로부터 형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제 환공 시절에도 한번 군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을 당했으나 어머니가 형에게 사정해서 목숨을 건졌었다.[26] 이것은 선진의 계략이었다.[27] 초나라는 당시 오랑캐 취급을 받았다.[28] 이것이 훗날 '구석'의 원형이 되며, 선대 진나라 군주인 진문후도 그중 일부를 받은 바가 있다. 자세한 사항은 진문후 참조.[29] 춘추좌전은 늦어도 전국시대에 지어졌다. 반면 사기는 전한 무제 시절에 집필되었으니 시기가 이른 좌전의 신뢰도가 훨씬 높다.[30] 춘추시대 중반 이후(첫 대치는 제 환공 시대이나 본격적으로 싸우는 것은 진 문공 시대의 성복 전투가 최초이다.)부터는 사실상 북부로 진출하려던 초나라와 그걸 막으려던 진(晉)나라간의 대립이 주류였고, 진(晉)나라가 삼국으로 쪼개지면서 춘추시대가 끝난 것으로 볼 정도로 진나라의 영향력이 컸다.[31] 참고로 오나라나 월나라를 패자로 놓는 것도 오나라가 진(晉)나라를 대신하여 초나라를 물리쳤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패자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 때문이었다. 물론 이는 진나라에서 오나라를 지원하여 초나라를 물리치도록 한 것도 있긴 하다. 만약 이대로 갔다면 정말로 패자가 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월왕 구천에게 뒤통수를 거하게 맞는 바람에 패자보다는 준패자로 대접받는다.[32] 그리고 그 월나라도 역시나 초나라의 지원을 받아서 오나라를 물리칠 만큼 성장한 것이니 와신상담의 고사는 사실상 춘추시대 진과 초의 대리전이라고 볼 수 있는 셈.[33] 요컨대 시대가 심상찮으니 외지에 나가 숨어서 때를 기다리라는 것.[34] 참고로 이 계략을 알려줬던 사람이 바로 유비였다. 이런 음흉한 양반을 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