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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오패(春秋五霸) 오(吳)나라 24대 국군 6대 왕 오왕 합려 吳王 闔閭 | |||
성 | 희(姬) | ||
씨 | 고발(姑發) | ||
휘 | 광(光)[1] / 합려(闔閭, 闔廬)[2] | ||
아버지 | 오왕 여매(吳王 餘昧)[3] 오왕 제번(吳王 諸樊)[4][5] | ||
종형제 | 오왕 료(吳王 僚)[6]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496년 |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514년 ~ 기원전 496년 (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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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오나라의 제24대 군주이자, 제6대 왕. 고발부차의 아버지다. 오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이었으나 오나라가 전성기에 망하는 바람에 동시에 오나라 쇠퇴에 영향을 준 인물이 되었다.2. 생애
2.1. 오나라의 왕위 계승
훗날 고발합려가 되는 고발광이 왕이 되기 전, 오나라의 왕위 계승에는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고발광의 아버지는 최초로 왕을 칭한 고발수몽의 맏아들 고발제번으로, 고발수몽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넷째 고발계찰이 현인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고발수몽 역시 넷째를 왕위에 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고발계찰은 마땅히 형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양했고, 결국 첫째였던 고발제번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고발제번은 고발계찰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자 자신의 다음 대를 아들이 아닌 동생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리고 둘째였던 고발여제 역시 죽으면서 왕위를 셋째에게 물려주었고, 셋째 고발여매 역시 고발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고발계찰이 이를 또 다시 사양하자 왕위는 첫째였던 고발제번의 아들 고발광이 아닌, 셋째 고발여매의 아들 고발주우에게 물려주게 되니 그가 바로 오왕 료이다. 고발광은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2.2. 즉위 전
오왕 즉위 전에는 공자 광(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고발료가 즉위하고 처음 몇 년 동안 초나라 정벌에 참여했다. 오운이 고발광의 식객이 된 것도 즉위 전 초나라를 공격하던 때였다.오왕 료 9년(기원전 519년), 고발료가 소, 종리 두 소국을 멸했다. 같은 해에 오나라, 초나라 양국의 국경에서 발생한 사소한 문제가 양국의 불화로 이어졌다. 오운은 고발료에게 초나라를 정벌하는 것의 이점을 설명했으나 고발료는 제안을 기각했다. 이때 고발광은 오운의 편을 들어 원수를 갚으려는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오왕 요 14년(기원전 515년), 초평왕의 초상을 틈타서 초나라를 공격하는데 고발광도 동원되나, 초군이 오군의 뒤를 치려고 한다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한편 다른 두 공자 고발촉용(姑發燭庸)과 고발개여(姑發蓋余)는 여전히 초나라를 포위하고 있었다. 고발광은 나머지 두 공자가 모르게 자객 전제(専諸)와 함께 왕을 죽일 것을 의논했다. 왕에게 거짓으로 복종하는 척하며 열린 연회에서 고발광의 사주를 받은 전제는 고발료를 죽였다. 왕을 시해한 고발광은 오왕에 즉위해, 이름을 '고발광'에서 '고발합려'로 개명했다. 고발촉용과 고발개여는 모든 일이 고발광이 꾸민 것임을 짐작하고 초나라에 항복했고, 초소왕은 그들을 서(舒) 땅에 봉했다.
2.3. 즉위 후
오왕 합려 원년(기원전 514년), 오운의 도움으로 오왕으로 즉위하였다. 오운과 나랏일을 함께 보면서, 손무를 등용했다. 초나라가 백주리(伯州犁)를 죽이자, 그의 손자 백비(伯嚭)가 오나라로 망명했다. 고발합려는 백비를 대부로 임명하였다.오왕 합려 3년(기원전 512년), 고발합려는 오운, 백비와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서(舒) 땅을 공격, 초나라로 도망간 고발촉용과 고발개여를 죽였다. 그리고 고발합려가 초나라의 도읍인 영(郢)까지 공격하려고 하자, 손무가 백성들이 지치고 힘들어한다는 이유로 왕을 만류했다.
오왕 합려 4년(기원전 511년), 초나라의 육과 첨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오왕 합려 5년(기원전 510년), 월나라를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오왕 합려 6년(기원전 509년), 초나라의 영윤 낭와(囊瓦)가 오나라를 침략하자, 고발합려는 이에 대응하여 예장(豫章) 땅에서 초나라 군을 물리치면서 초나라의 거소를 취했다.
오왕 합려 7년(기원전 508년), 고발합려가 오운과 손무에게 초나라 도읍 영성을 공격할 수 있나고 묻자, 두 사람은 초나라의 낭와가 욕심이 많은 인물이라 당나라와 채나라가 원망을 많이 한다고 하면서, 초나라를 공격하려면 이들 나라의 협력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고발합려는 군대를 크게 일으켜서 당과 채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한수(漢水)에 이르렀다.(초나라 수도 영은 삼국지에 나오는 강릉성으로 한수변에 위치했기에 영을 공격하기 위해선 한수를 건너야 했다.) 초나라는 오군을 막기 위해 한수에서 진을 쳤다. 고발합려의 동생 고발부개(姑發夫槪)가 형에게 이 전투에 나서겠다고 하자, 고발합려는 고발부개의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고발부개는 자신에게 군의 통솔을 맡겼고, 전세가 유리한 상황인데 무엇을 기다리냐고 말하면서 5,000명의 병사로 초군을 기습하여 대파하였다. 이에 고발합려는 군대를 풀어서 초군을 쫓았고, 영성에 이를 때까지 초군을 다섯번 격파하였다. 이 때문에 초소왕은 운(鄖) 땅으로 도망갔다. 오나라 군대가 영성에 도착했고, 오운은 초평왕의 무덤을 찾아서 그 시신에 채찍질을 하여 굴묘편시라는 일화를 남겼다.
오왕 합려 10년(기원전 505년) 봄, 월나라가 오군이 초나라의 도읍인 영성에 있어서 오나라 땅에 군사가 없는 것을 알고는 오나라로 쳐들어왔다. 고발합려는 월나라 토벌군을 보냈다. 한편 초나라의 사신 신포서가 진(秦)나라로 가서 초나라가 위급한 것을 알리자, 진애공은 군대를 초나라로 보내 오나라 군을 격퇴하였다. 진나라와 월나라가 동시에 오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에서 물러나게 되는 상황을 본 동생 고발부개는 오나라로 돌아와서 스스로 왕이 되었다. 고발합려는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군대를 돌려 고발부개를 공격하였고 패배한 고발부개는 초나라로 도망갔다.
같은 해 9월, 초소왕이 영성으로 돌아왔고, 고발부개가 초나라로 망명한 것을 알고는 그를 당계(堂谿)의 제후로 봉하였고, 고발부개는 씨를 당계씨(堂谿氏)로 바꾸어서 이름이 '당계부개'가 되었다.
오왕 합려 11년(기원전 504년), 고발합려는 태자 부차(夫差)에게 초나라를 공격하라고 명하였고, 고발부차는 초나라 번(番) 땅을 빼앗았다. 초소왕은 오나라의 공격으로 도읍을 영성에서 약(鄀)으로 천도하였다.
오왕 합려 19년(기원전 496년) 여름, 오나라가 월나라를 공격하였다. 월왕 구천(句踐)은 취리(檇李)라는 땅에서 오나라 군을 맞이하여 싸웠다. 미구천의 월나라 군이 오나라 군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월의 대부 영고부(靈姑浮)가 창을 찔러 고발합려의 발가락에 상처를 입혔다. 오나라 군대는 후퇴하였다. 고발합려는 상처가 도져서 죽었다.
3. 평가
오나라를 강대국으로 성장시켰다. 게다가 아들 고발부차 대에는 중원에까지 패권을 휘두르고, 천자 지위까지 노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성품이 잔인하고 여색과 재물을 밝혔으며, 백비나 부차급은 아니어도 오나라 국력 쇠퇴에 영향을 주었다.춘추오패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지만, 위에서 말한 치부 때문에 춘추오패로 꼽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도 아들 고발부차랑 같이 명백한 준패자로는 인정받고 있다. 하긴 초나라를 그렇게나 털어먹었는데 준패자도 못된다면 말도 안되는 얘기.[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