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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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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오패(春秋五覇)
오(吳)나라 제7대 왕
오왕 부차
吳王 夫差
파일:부차.jpg
희(姬)
고발(姑發)
부차(夫差)
아버지 오왕 합려(吳王 闔閭, 闔廬)[1]
아내 서시(西施) 시이광(施夷光)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473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495년 ~ 기원전 473년 (23년)

1. 개요2. 생애
2.1. 부차의 복수2.2. 원수를 풀어주다2.3. 오자서와의 갈등2.4. 구천의 복수
3. 가족 관계4. 여담
4.1. 성격4.2. 창작물4.3.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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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 오(吳)나라의 제7대 군주이자 마지막 왕.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와신상담의 고사 중 와신 끝에 아버지의 원한을 보복하는 데 성공한 복수귀였으나 하필이면 상대가 자신을 능가하는 복수귀이자 근성가이인 바람에 마지막에는 역전패당했다.

재위 중반기까지만 해도 숙적 월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며 아버지 합려의 뒤를 이어 오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군이었으나, 재위 12년(기원전 485년)에 접어들어서는 교만에 빠져 암군, 폭군으로 전락하여 오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2. 생애

2.1. 부차의 복수

오왕 합려 19년(기원전 496년), 아버지 합려가 월나라(越)와의 취리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숨을 거두었다. 태자였던 파(波)는 처를 잃고 요절해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오나라의 최고 실력자였던 오자서의 지지로 부차가 옹립되었다.

오왕 부차 원년(기원전 495년), 대부 백비(伯嚭)를 태재(太宰)로 삼았다. 오나라 군인들에게 훈련과 활쏘기를 익히게 하면서, 부차는 가시가 많은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방 앞에 사람을 세워 두고 출입할 때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하고 외치게 하였다. 부차는 매일밤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원한을 되새겼다. 늘 월나라에 복수하겠다는 의지를 다짐하였다.

2.2. 원수를 풀어주다

오왕 부차 2년(기원전 494년), 부차는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 정예병들을 모아 월나라로 쳐들어갔다. 부차는 오자서의 도움으로 부초(夫椒) 전투에서 월나라 왕 구천의 군대를 물리치고 월나라의 도읍을 포위했다. 싸움에서 크게 패한 월왕 구천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에서 농성을 하였다. 그러다가 오나라의 공격을 못견디고, 대부 문종(文種)을 보내 오나라의 태재 백비를 만나게 하고 그를 통해서 오왕 부차에게 화친을 요청하였다. 구천은 월나라를 오나라에게 넘겨주고, 오나라의 신하노비가 되겠다고 하였다. 오왕 부차가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자, 오자서가 지금 월나라를 멸해야 후환이 없어진다고 만류하였지만,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무시했다. 왕은 태재 백비를 통해서 월나라와의 화친을 받아들이고, 오나라 군대는 월나라에서 철수하였다.

포로가 되어서 오나라에 잡혀온 구천이 부차의 똥을 핥으며 건강을 살펴주고 미녀 서시, 정단(鄭旦)을 바치는 등 아첨하며 뇌물을 주자, 부차는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내는 최악의 실수를 저지른다.

2.3. 오자서와의 갈등

오왕 부차 7년(기원전 489년), 제나라에서 제경공이 죽고, 대신들이 서로 싸우며, 뒤를 이은 안유자가 어리석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부차는 군대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했는데, 오자서가 제나라 정벌에 대해서 간하였다. 오자서는 월왕 구천이 음식의 맛은 안보고, 옷의 아름다움에 신경을 안 쓰며, 죽은 자를 조문하고, 병든 자를 위문하며 이를 이용한다고 했다. 그래서 구천을 죽이지 않으면 오나라의 근심거리가 된다고 간하였지만,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무시하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애릉(艾陵) 전투에서 제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증(繒) 땅에 이르렀을 때 노나라의 군주 애공에게 제사용 가축을 무리하게 요구하였다. 그러자 노나라의 계강자(季康子)가 자공을 사신으로 삼아 오나라로 보냈고, 자공은 태재 백비를 만나서 주나라의 예법을 설명하면서, 이를 그만 둘 것을 설득해 오나라 조정은 이를 그만 두었다.

오왕 부차 9년(기원전 487년), 오왕 부차는 노나라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노나라와 화친을 하였다.

오왕 부차 10년(기원전 486년), 오왕 부차는 오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제나라를 공격했다.

오왕 부차 11년(기원전 485년), 월왕 구천이 무리를 이끌어서 뇌물을 바치고 조회했다. 부차는 이를 기뻐했지만, 오자서는 오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면서 월나라는 오나라의 근심거리라고 간하였지만, 오왕 부차는 듣지 않고, 오자서를 사신으로 삼아 제(齊)나라로 보냈다. 오자서는 아들을 제나라의 대부 포씨(鮑氏)에게 의탁시켰고 제나라는 오자서를 융숭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이 사실을 안 부차는 결국 오자서에게 명검 촉루(屬鏤)를 내려 자결을 명하고는 그 시체를 장강에 던져버렸다.

2.4. 구천의 복수

오왕 부차 13년(기원전 483년), 부차는 노나라와 위(衛)나라의 군주를 불러서 탁고(橐皐) 땅에서 회맹하였다.

오왕 부차 14년(기원전 482년) 봄, 부차는 3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황지(黃池) 땅에서 제후들을 불러서 회맹하였다. 6월,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기습하여 태자 우(友)를 포로로 잡았다. 어느 오나라 사람이 부차에게 패배한 사실을 알렸는데, 부차는 월나라에게 패배한 일이 천하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했다. 어떤 이가 이를 발설하자, 부차는 이 일에 노하여 7명을 죽였다. 7월, 진(晉)나라의 군주 정공(定公)과 회맹했는데, 맹주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 이때 궁지에 몰린 오나라가 30,000명의 대군으로 대놓고 압박하자 진나라의 상정 조앙(趙鞅)이 오왕(吳王)의 칭호를 버리고 오공(吳公)이 된다면 패주로 인정해주겠다고 제안하자 부차가 승낙했다. 이때부터 오나라는 월나라의 피로 전술에 휘말려서 국력이 쇠락하게 된다.

오왕 부차 18년(기원전 478년),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공격하여 입택(笠澤) 전투에서 오나라 군을 물리쳤다.

오왕 부차 20년(기원전 476년), 월왕 구천이 다시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오왕 부차 21년(기원전 475년), 월나라 군이 오나라의 도읍을 포위하였다.

오왕 부차 23년(기원전 473년) 11월 정묘일,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오왕 부차가 구천에게 전에 살려준 예를 들어 항복했다. 마음이 약해진 구천이 순간 망설였을 때 범려가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하던 일을 잊으셨습니까!"라며 진언하여 사실상 결정을 내렸으나, 전에 자신을 살려준 것도 있고 해서 명분상 직접 죽으라고 할수는 없었기에 100호의 장[2]으로 봉하겠다고 제안했다.[3]부차는 자신이 늙어 군왕을 섬길 수 없다며 그 제안을 거절하고(사실 거절이라기보다는 달리 방법이 없었겠지만) 저승에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며 고소산에서 얼굴을 가린 채 자결했다. 그 뒤 오나라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3. 가족 관계

  • 자녀
    • 태자 우(友): 구천과의 전투에 출전하려는 지와 미용에게 "싸우면 이기지 못하니 장차 나라가 망한다. 부탁컨대 기다려달라"라고 말리나 미용이 거절하고 지가 미용에게 동조한다. 미용과 지는 적을 사로잡고, 지는 방어해 진군을 막았다. 그러나 이듬해의 전투에서 오군은 대패하고 태자 우, 왕손 미용과 수가 사로잡히고, 구천은 오나라에 입성한다. 부차는 (원정 중) 패배를 전해듣고 회피하며 이를 들으려 하지 않았고, 막하 7명의 목을 베어버렸다.[4]
    • 왕자 지(地)
    • 공녀 자옥
  • 손자녀
    • 왕손 미용(彌庸): 구천이 오나라의 수도에 치고 들어올 때 아버지의 깃발(아마 이전 오월전쟁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임)이 월나라군 사이에 보이자 눈이 뒤집혀서(제번-합려-부차의 눈이 쉽게 돌아가고 성질급한 그 유전자를 제대로 물려받은 듯) 군권을 가진 태자가 말리든 말든 자기 직속수하 5,000명을 이끌고 닥돌해서 처음은 어찌어찌 이기나 추후 대패해서 수도가 털림.
    • 왕손 수(壽)
    • 오누양(吳縷羊): 부차의 손자로 중국 오씨의 시조. 주나라 왕실로부터 오(吳)씨를 하사받는다. 두음법칙을 무시하고 '루양'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춘추시대 특성상 가문 하나를 멸족하는 식은 아니었기 때문에 살아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4. 여담

4.1. 성격

성문 열렸다고 닥돌해서 저격당해서 사망한 할아버지 제번, 현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실천은 잘 하나 본질은 폭급한 아버지 합려의 성격을 더 강하게 물려받아서 주변의 조언을 무시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이다가 죽었다. 그 성격은 손자 미용에게까지 이어진다.

4.2. 창작물

태평광기》에서는 월나라에서 바쳤다는 여인이 이광(夷光), 수명(修明)으로 나와 부차가 그녀들이 마치 옅은 안개 속에서 샇인 한 쌍의 난새처럼 보였으며, 지수의 물가에 떠 있는 연꽃처럼 보였다면서 두 명의 아름다움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했다. 또한 월나라가 오나라를 침공하자 부차는 두 미녀를 품에 안고 화원으로 달아났는데, 월나라 군인들이 두 미녀를 보고 선녀가 하강했다고 하면서 쳐다보기만 하고 함부로 범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에서 유비 역을 맡았던 배우 우용은 손자대전에서는 합려를[5], 월왕구천에서는 부차를 연기하여 부자를 모두 연기해보게 되었다.

4.3. 유물

1983년, 강릉 마산 호북성 초나라 무덤에서 '오왕부차모(吳王夫差矛)'가 발굴되었다. 오왕부차모의 기부(基部)에 두 줄로 8자의 금착 명문이 있으며, 오왕 부차가 자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월왕구천검도 함께 출토되었다.
[1] 태자 시절 이름을 따서 희광(姬光)이라 하기도 한다[2] 호는 가구를 세는 기본 단위로, 100호는 100 가구. 즉 왕에서 동네 이장으로의 대강등이며, 한때 왕이었던 사람으로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3] 일국의 왕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은 사실 그냥 곱게 알아서 죽어달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짜 살려줄 생각이었으면 최소한 제후에 준하는 지위는 보장해주어야 한다.[4]춘추좌씨전[5] 적벽대전에서 조조역을 맡았던 배우 장풍의는 이 작품에서 손무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