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의 제6대 군주 송양공(宋煬公)에 대한 내용은 송양공(6대)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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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오패(春秋五覇) 송(宋)나라 20대 국군 양공 襄公 | |||
성 | 자(子) | ||
씨 | 송(宋) | ||
휘 | 자보(茲父[1] 혹은 玆甫) | ||
아버지 | 송환공(宋桓公) 자어열(子御說)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637년 |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651년 ~ 기원전 637년 |
1. 소개
중국 춘추시대 송(宋)나라의 제20대 군주이다. 춘추오패의 하나이자, 쓸데없이 베푸는 어리석은 인정을 뜻하는 고사 송양지인의 주인공.2. 생애
송 환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송나라는 송 환공의 즉위 전부터 남궁만(南宮萬)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켜서 송 민공은 죽고, 남궁만에 의해서 민공의 동생 유(游)가 송나라의 군주가 되었으나, 그로 인해서 송나라가 혼란한 상태였다. 송 환공도 원래 왕위 계승 서열에서는 매우 순위가 낮았지만, 후에 형인 송 민공을 시해한 남궁만과 송군유를 죽여서 송나라의 정국을 수습하고, 송나라 군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송나라 군위에 오른 송 환공은 아들 자보를 태자로 삼았다.2.1. 치세
송 환공 31년(기원전 652년) 봄, 송 환공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송나라 군주가 되었다. 이복형 목이(目夷)를 재상으로 삼았다. 송 양공이 송환공의 장례가 끝나기 전에 제 환공이 규구(葵丘) 땅에서 제후들과 회맹을 한다고 하자, 그곳에 가서 회맹에 참가하였다.송 양공 7년(기원전 646년), 하늘에서 유성이 비처럼 내렸는데, 동시에 큰 비도 내렸다. 그리고 익조(鷁鳥) 6마리가 세차고 빠른 바람으로 인해서 뒤로 날아가는 일이 있었다.
송 양공 8년(기원전 645년), 송 양공은 제환공에 이어 패자가 되려는 꿈을 키웠는데, 문제는 송나라가 당시 4대 강국인 초(楚)나라, 진(晉)나라, 진(秦)나라, 제(齊)나라보다는 훨씬 국력이 처지는 2류 국가였던 것이다. 한편 춘추 시대의 첫 번째 패자였던 제 환공이 사망하면서 제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제나라 공자들은 옥좌 계승을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패한 제나라 공자 소는 송나라로 망명하여 도움을 청했다. 송 양공은 소를 도와 공위에 앉히니 그가 바로 제 효공이다. 그렇게 해서 송양공은 패자국이었던 제나라의 정변에 개입하여 보위를 결정하는 데 한몫하자 스스로 패자가 되었다고 자부하고, 회맹을 자주 소집했다.
송 양공 12년(기원전 641년) 봄, 송 양공은 녹상(鹿上) 땅에서 회맹하고자 초나라한테 제후들을 소집해달라고 요구하니, 초나라는 이에 응하였다. 공자 목이가 작은 나라가 회맹을 다투면 화를 불러온다고 간하였지만, 송 양공은 목이의 말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훨씬 약소국인 증나라 군주가 여기에 늦게 오자, 송 양공은 증공을 삶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송 양공은 이때문에 신망을 잃었고, 조(曹)나라 공공은 송 양공을 비난하며 그냥 가버렸다.(혹은 말도 없이 달아났다고 하지만 당시 조나라의 군사력은 송과 차이가 없었다) 이에 송 양공은 군대를 동원해 조나라를 치지만, 조나라도 송나라에 못지 않은 군사력을 가진지라 6달 동안 여러 작은 전투를 벌이면서 정벌하려고 했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한채 철군해야 했다.
같은 해 가을, 강대국인 초나라, 제나라와 여러 제후들과 우(盂)나라에서 회맹을 열었고, 회맹의 장이 되어 패자로 등극하려고 했지만, 공자 목이는 송 양공의 욕심이 너무 지나처서, 화가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래서 초나라 사람은 믿을 수 없으니 군사를 이끌고 가라며 조언했지만, 송양공은 자신이 먼저 군사를 대동하지 않을 것을 제안했으니 약속을 어길 수 없다며 군사를 거느리지 않았다. 목이의 걱정처럼, 군사를 이끌고 온 초나라 성왕은 이에 딴지를 걸었다.[2] 송 양공은 초성왕을 모욕했으나, 도리어 초성왕을 빡돌게 하여 초나라 군에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송나라에서는 신하 목이가 공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겨울, 초 성왕은 송나라의 내분을 조장하기 위해서, 박(亳)나라에서 회맹을 열어, 여러 제후의 의견을 듣고서 송 양공을 풀어줬다. 풀려난 송 양공은 씩씩거리며 분노를 가득쌓아서 돌아왔으나[3], 공자 목이는 다시 송 양공에게 송나라 군위를 순순히 넘겨주었다. 사실 목이가 왕위에 오른 척을 한 것은 송 양공을 석방시키기 위한 계책이었다.[4]
2.2. 홍수 전투
송 양공 13년(기원전 638년) 여름, 송 양공은 초나라에 한을 품었으나, 강대국 초나라를 건드릴 수 없고, 다만 초나라의 동맹국이었던 소국 정나라(鄭)를 치게 된다. 초나라는 동맹국을 구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이에 홍수(泓水)에서 초나라와 대치하게 된다.초군은 강을 건너서 송군을 치려고 했고, 송군은 이를 유리하게 이용하여 공격할 수 있었으나, 송 양공은 스스로 패업을 이룬 패자(覇者)이며, 패자는 인의로써 정정당당히 싸워야한다고 고집하며, 재상인 목이와 군사들과 장수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초군의 도강을 구경만 했다.
초군이 모두 강을 건너고 제대로 군을 추슬러 확실히 싸울 준비가 다 된 다음에야 송 양공은 돌격 명령을 내렸으나, 강력한 초나라 군대에 송나라 군은 대패했고, 자신도 크게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하여 송나라 사람들에게 비난을 듣자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하고 '군자는 부상입은 자를 거듭 공격하지 않고 반백이 된 노인을 사로잡지 않는다. 옛 군대는 험준한 지형에 의탁하여 적과 싸우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망한 나라(은나라)의 후예라지만 대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적을 공격하겠느냐'라고 말했다가 목이에게 전쟁은 그런 예의랑 다르다면서 '적에게 그런 예의를 차리려면 차라리 항복을 미리 할것이지!'라는 비난을 듣고 송나라 각지에서도 애꿎은 병사들을 무더기로 죽여놓고 이따위 망발로 자기 합리화하는데 소중한 가족을 잃은 백성들에게도 뭐라고 할것이냐며 매섭게 비난을 당해야 했다. 이런 명분론을 후세 사람들은 송양지인이라고 하며 매우 비판했다.
이 일화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있는데, 바로 '쓸데없이 베푸는 인정', 특히 적에게 베푸는 인정을 뜻하는 송양지인(宋襄之仁)이다.[5]
2.3. 이후
홍수 전투에서 송나라가 패한 이후에 진(晉)나라의 공자 중이가 송나라에 방문했는데, 당시 유랑하던 공자 중이가 오자, 말 20필을 선물하고 후한 예우로서 중이를 환대하며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런 환대가 무색하게 중이는 송나라의 사정을 깨닫고 바로 송나라를 떠났다. 그래도 송양공의 정성이 고맙긴 했는지, 훗날에 송나라가 초나라의 침공을 받자 중이는 송나라를 돕기도 했다. 송양공이 그나마 잘한 일.송 양공 14년(기원전 637년) 여름, 홍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뒤에 악화가 되어서 송 양공은 사망하였다. 그 뒤를 아들 왕신이 이어서 송나라 군주로 즉위하였다.
3. 평가
이렇게 인의를 내세운 명분론 때문에 공자를[6] 비롯한 후세 유학자들의 동정을 받아서인지 춘추오패에 낀 경우도 있었다. 사실은 송 양공은 다른 패자들과는 달리 진정한 패업을 이룬 바 없고, 그저 회맹을 주최하고 잠시 맹주를 맡았을 뿐이었지, 송나라는 제환공이나 진문공·진목공과 같은 업적을 이룬 바 없었다. 그저 유학자들, 명분론자들에게만 동정을 받을 뿐이지 중국의 많은 기록에서도 천하의 둘도 없는 얼간이라는 투로 패자는커녕 암군이라고 신나게 까였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군주의 자질이 없다며 차라리 재상 목이가 패자가 될 인재라고 평가했을 정도이다.[7]인덕 과잉으로 유명해졌지만, 한편으로는 삼국지의 유우처럼 순수하게 어질었냐 하면 그렇게 보기도 힘들다. 보통 어질다고 하는 군주들은 야심 같은 것도 별로 없었지만[8] 송양공은 야심이 대단했다.[9] 게다가 약소국의 제후를 삶아서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고…무엇보다 야심에 걸맞은 재능이 전혀 없었다.
사실 야심을 떠나서 군대를 일으킨 이유만 봐도 유우와 비교하긴 무리다. 유우는 공손찬의 폭정에서 백성들을 구해내기 위해 그를 진압하러 군대를 일으킨 것이고, 양공은 결국엔 지가 초나라에 빡쳐서 초나라도 아닌 정나라를 쳤다가, 정나라의 동맹인 초나라와 싸우게 된 것이다. 포악한 군벌로부터 죄없는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타당한 군사적 행동을 했고 자기 백성들에 대한 너그러움 때문에 전쟁에서 불리해진 유우와, 군주 개인의 목적 때문에 군사 활동을 했고 적군에 대한 너그러움 때문에 불리해진 양공은 동일선상에서 비교될 수 없다.
비슷하게 인의를 내세웠던 동시대의 진목공과 비교하면 차이가 확실히 드러나는데, 송양공이 내세운 인의는 쓸데없이 적군에게 페어플레이를 하려 한 것이지만 진목공은 대부분 자신의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인의를 베풀었다. 딱 한 번 적국에 인의를 내세운 적도 있긴 한데, 이것도 군주는 괘씸하지만 백성들은 죄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외에도 송양공은 인격자라기에는 너무 큰 결격사유가 있다. 바로 증나라 군주를 삶아죽인 일이다. 아무리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추락했어도 증나라도 어디까지나 주나라를 섬기는 나라인데 그럼 표면적으로 작위야 어떻든 서로가 서로를 무시할 수 없는 처지다. 그런데 회맹에 늦었다고 군주를 삶아죽인 사례는 송양공 외엔 없다.[10][11] 차라리 전국시대였다면 주나라 왕실의 권위따윈 알 바 아니었으니 "꼬우면 덤벼보든가" 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춘추시대는 아니다. 심지어 송양공은 패자이기까지 했으니 더 조심해야 했었는데 저 짓거리를 했으니…게다가 이런 짓을 했더라도 남들이 뭐라 할 수 없는 국력을 가졌다든가 넘어가줄만한 패업을 이루었다든가 하면 또 모르겠는데 송양공은 그런 것도 없다. 하다못해 수백 년 후, 소양왕이 초회왕을 억류한 일조차 아무리 진나라가 강대국이라고 해도 일국의 왕을 억류했다는 것만으로도 욕을 먹었는데 그다지 강한 나라도 아니면서 남의 나라 군주를 멋대로 죽여버리면 주변에서 뭐라 할 지는…
종합하자면 송양공은 정말 어진 군주였던게 아니라 겉멋만 잔뜩 든 허세꾼이었다. 위의 '인덕'을 베푼 것도 정말 본인이 진심으로 인의의 도를 따라 내린 결정이라기보다는, 겉멋을 위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4. 다른 춘추오패와의 비교
비록 송양공 자신은 패업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 공자가 높이 평가하고 사마천도 호평하여 춘추오패로 넣어준 덕분에 패자들 중에서도 탑클래스라 할 수 있는 춘추오패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송양공은 다른 춘추오패들과 비교하여 부족한 점이 많았다. 춘추오패 중 언제나 꼽히는 두 사람과 비교하면 이렇다.- 제환공
제환공은 그나마 송양공과 비슷한 면이 있다. 먼저 제환공 자신은 혼자서 패업을 얻을 그릇은 조금 부족했다. 예시로 노나라와 전쟁을 치른 후 노나라의 화평 요청에 응해 화평을 맺던 와중 노나라 장군 조말이 환공의 목에 칼을 겨누고 빼앗은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환공은 돌려주겠다고 응했지만 막상 위기에서 벗어나자 돌려주지 않으며 조말을 죽이려고 했지만 관중이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 제후들의 신임을 얻는다고 말했고 제환공은 관중의 의견대로 약속을 지켜 노나라에 땅을 돌려줬고 그 대가로 제후들에 의해 패자로 추대되었다. 만일 관중이 없었다면 제후들의 신임을 못 얻어 패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환공이 그렇다고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 비록 말년에 간신인 역아·수초·개방을 중용해 비참한 최후를 맞기는 했어도 공자 규와 공위를 두고 다툼을 벌이던 때 주군인 규를 위해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관중을 죽여버린 뒤 젓갈로 담가버리겠다고 했었지만 포숙아의 천거 한번에 대범하게 용서해준 것은 물론 관중에게 높은 지위와 엄청난 재물 그리고 중보라는 호칭까지 팍팍 줘가며 힘을 실어주었다. 즉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과거의 죄는 용서해주고 그것도 모자라 파격적인 대우까지 할 정도로 통이 컸다.
거기다 통만 큰 것도 아니라서 인재 보는 눈도 상당해서 앞서 보았듯 포숙아의 천거 한번에 관중에게 힘을 실어주었으며 관중이 하는 말은 단 하나[12] 빼고는 다 들었다. 또한 관중과 함께 제나라를 이끌던 명신들도 많았는데 아무리 명신이 많아도 그들의 능력을 잘 펼치게끔 하는데는 군주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제환공이 거저 패자가 된 것은 아니다.
패자로서의 행보도 패자로서의 정도에 가까운데 연나라가 산융족의 침공을 받자 직접 구원해주었고 이후 연나라 군주 연 장공이 환공을 배웅하다 그만 실수로 제나라 국경을 넘자 "연나라 군주는 연나라 국경까지만 넘어야 한다." 라며 넘어온 땅을 연나라에 떼주었고 노나라의 대가 끊기자 노희공을 세우고 위나라가 도성을 잃고 망하기 직전까지 가자 초구에 성을 쌓아주어 안정시켜주었다.물론 위나라를 그 꼴이 되도록 방치한 후에 한건 안 비밀형나라가 적족에게 망한 후에는 다시 형나라를 일으켜 세운건 덤.
뿐만 아니라 주나라는 낙읍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제후국들이 조공을 잘 안 바쳐 궁핍해져 있었는데 제환공에 의해 다시 제후들이 주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업적이 가능했던 것은 제나라가 관중이 힘써 부국강병을 이뤄낸 덕분이며 그 여파로 제나라가 훗날 전국칠웅으로까지 솟아나게 되니 송양공처럼 허세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환공의 업적에 비하면 송양공은 초라하다. 송양공이 기껏해야 패자로서 내세울 업적은 제환공 사후 혼란해진 제나라에 제효공을 세워준 것과[13] 제환공 이후 최초로 자신이 회맹을 연 것이 있는데 제환공이 아홉 번이나 회맹을 연 것과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은 것에 비하면 임펙트는 약하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송양공의 회맹은 자신이 패자라는 것을 자부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회맹을 통해 자신의 관대함 등을 드러냈다면 제후들의 신임이라도 샀을 텐데 회맹에 늦게 왔다며 증공을 죽이는 짓까지 저질렀으니…결국 나중에 초성왕에 의해 갇혀 개망신당했으니 업보를 받은 셈.
군사적으로도 취약해서 송양지인의 원형이 된 홍수 전투는 말할 것도 없으며 그렇다고 다른 이민족과 싸워 이긴 전투도 없다. 그럼 또 주나라를 잘 섬겼냐면 주나라를 무시한 흔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주나라를 잘 섬긴 흔적도 안 보이는게 문제. 하다못해 제환공은 초나라에게 초나라가 주 천자에게 조공을 안 바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걸었는데 송양공은 초나라가 괘씸해서 그러면서도 정작 초나라는 강국이라 직접 못 건드리고 애꿏은 정나라를 공격했다가 그놈의 홍수 전투에서 대차게 말아먹었다. 그나마 있는 인재인 목이를 잘 써먹은 것도 아니고… - 진문공
재위기간은 고작 8년밖에 안 되었지만 그 8년동안 주나라의 주양왕이 왕자 대에 의해 쫓겨나자 대를 토벌하여 주양왕을 복위시켜주고 송나라를 침공한 초성왕을 물리쳐 '존왕양이' 업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송양공은 그런 것도 없다. 게다가 진문공은 사후에도 상당기간동안 진나라가 패권을 쥔 국가로 발전시켰지만 송양공 사후의 송나라는 안 그래도 2류 국가인데 송양공이 대차게 말아먹어 더 급이 떨어진다.
[1] 전 버전에서는 父를 부라고 읽었는데, 사람 이름으로 쓸 때는 父를 보라 읽는다.[2] 초나라의 성왕은 왕을 자칭하고 있었지만, 천자국인 주나라로부터 받은 작위는 공(公)도 아닌 자(子)에 불과했다.[3] 실제로는 양공은 체념하고 타국으로 망명하려 했다.[4] 목이는 양공의 배다른 형제였다. 목이가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는지, 원래 양공은 즉위하기 전에 목이에게 공위를 양보하려 했으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목이는 서장자이고 양공은 적자라서 그런것 같다. 따라서 이 둘간의 신의는 매우 굳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이가 차라리 어리석고 허세만 부리는 양공 대신 송나라 군주가 되었다면 진정한 패자가 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5]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를 비교할 때 춘추시대는 전국 시대에 비해 전쟁에서도 나름 예의가 있었다는 예시로 제시된다. 반면에 전국 시대에는 예의 따위는 버리고 야습과 온갖 야비한(?) 전술이 난무한다.[6] 아이러니하게도 공자도 끼리끼리라고 젊은 시절에 물고기를 잡을 때는 그물을 사용하지 않았다거나 새를 잡을 때는 잠자는 새를 잡지 않았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쓸데없는 인덕을 베풀었다는 점에선 참 유유상종인듯…물론 공자가 진짜 송양공처럼 겉멋만 든 인덕만 내세운 건 아니었지만.[7] 다만 사마천도 그를 춘추오패에 넣어주기는 했다.[8] 물론 야심도 대단하고 어진 정치도 펴는 군주들도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보통 그런 군주의 경우 신하들에게는 가혹한 경우가 많았다.[9] 물론 야심이 있고 없고는 어쩌면 이 시대에는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제환공조차 자기가 봉선을 하려다가 관중의 제지를 받고 그만둔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10] 하다못해 제애공을 죽인 기나라 군주도 주나라 왕에게 참소하여 죽였지 자기가 직접 죽인 것은 아니다.[11] 그리고 늦게 온 대상이 만약에 진나라나 초나라 군주였다면 또 어땠을 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하는데 똑같이 대했다면 진성 미친놈, 대우를 달리 했다면 국력에 따라 심하게 차별대우하는, 어느 쪽이든 패자의 자격이 없는 군주다. 물론 전자일 경우 그냥 군주 자격조차 없는 거지만…[12] 역아·수초·개방을 중용하지 말라는 것[13] 그럼에도 훗날 제효공은 송나라를 공격한다…이 때가 홍수 전투로 인해 송나라가 개망신 당한 직후이기야 했다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