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12:46:35

송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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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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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나라 초대 왕
강왕
康王
자(子)
대(戴)[1]
언(偃)
아버지 송후환공(宋後桓公) 자벽병(子辟兵)[2]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286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328년 ~ 기원전 286년

1. 개요2. 생애
2.1. 군위 찬탈2.2. 칭왕을 하다2.3. 송 강왕의 악행2.4. 송나라 멸망, 송 강왕 사망
3.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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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송나라의 마지막 군주. 송나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왕. 시호는 강(康) 또는 헌(獻)이라고 해서 송 헌왕이라고 한다.[3] 사기에서는 송왕 언이라고 한다. 형[4]척성군 희를 몰아내고 송나라의 공작이 되었다. 왕위를 찬탈했지만 어차피 시대가 시대인지라 왕위찬탈이 일어나도 그냥 그려러니 하던 시절이었다. 여하튼 재위초기에는 전국칠웅과 겨룰 만큼 국력을 키운 명군이었지만, 재위 중반기를 지나자 폭군으로 타락했고 그 틈을 탄 제나라, 위나라, 초나라의 연합 공격 다굴 에 패해 나라가 망하고 그 자신은 죽었다.

2. 생애

2.1. 군위 찬탈

전설에 따르면 송강왕의 어머니가 자고 있을 때 꿈속에 서언왕이 나타나서 송강왕의 어머니를 통해 환생하려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뒤 열달 뒤에 태어난 아기가 송강왕인데 서언왕의 환생이라 여겨 이름을 언(偃)이라 지었다. 언(偃)은 날때부터 빼어난 용모와 우람한 체구를 자랑했는데 송 척성군 28년(기원전 329년), 대언(戴偃)[5]은 척성군을 무력으로 몰아낸 뒤 스스로 송나라 공작에 올랐다. 척성군은 제나라로 달아났다.

2.2. 칭왕을 하다

어느 날, 송나라에서 참새새매를 낳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는데, 송 강왕이 사관에게 점을 쳐보게 하니, "작은 것이 큰 것을 낳았으니 이는 길조입니다."라는 점괘를 냈고 송 강왕은 이에 크게 고무되어 자신만이 쇠락해가는 송나라를 일으킬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각성한 송강왕은 10만에 달하는 대군을 모집하고 친히 훈련시켜 강군으로 육성시킨 다음 주변국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송 강왕 11년(기원전 318년), 그는 왕을 자칭했고, 같은 해에 제나라를 쳐서 이겨 5개의 성을 얻고, 남하해서 초나라를 쳐서 이겨서 송양공 때의 굴욕을 설욕하고 300리의 땅을 얻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위나라를 쳐서 2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한나라 역시 공략하였으며 소국인 등나라는 아예 멸망시켰다. 이때 당시에 제나라가 한창 강성했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업적이었다. 송강왕은 외교 방면에서도 활약했는데 제나라와 초나라의 복수를 대비하여 서쪽의 초강대국이었던 진나라와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이처럼 재위 초기의 강왕은 송나라를 전국칠웅과 동급의 강국으로 성장시킨 명군이었다.[6]

2.3. 송 강왕의 악행

위의 전략을 꾸준히 이어가면서 점령지에 선정을 베푸는 방식으로 행동하였다면 역사에서 전국시대는 송나라를 포함한 전국 8웅으로 기록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송 강왕은 송나라가 강성해지자 서서히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교만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폭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장대에 가죽 주머니에 소의 피를 넣고 그 가죽 주머니를 명중시켜 피를 낸 뒤 하늘을 이겼다는 소문 개소리 을 내게 했다. 또한 땅에다 매질을 하고 사직의 신주를 잘라서 불태우는 당시로서는 컬쳐쇼크급의 만행을 저지른다. 또 언젠가 주연을 열면서 자신은 꿀물을 마시고, 신하들에게는 그냥 술을 제공했는데, 송 강왕이 꿀물을 먹어서 취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데, 내막을 모르는 신하들은 송 강왕의 주량을 이겨보고자 덤볐지만 필름만 끊기고 말았다. 물론 나중에는 사실을 안 사람이 있었지만, 간신배들은 앞다투어 송 강왕에게 아첨했다. 그리고는 송 강왕이 기고만장해져서는 백성들에게까지 폭정을 자행하고, 신하들의 아내 중 예쁜 자는 자기가 차지하는 막장 짓거리를 저질렀다. 간신배가 있으면 간하는 충신들도 있는 법이지만 송 강왕은 충신들을 멀리할 뿐만 아니라 간하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목을 베었다. 그리하여 송나라 국내외의 사람들은 송나라의 걸왕이라 하여, 송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7]

여씨춘추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송 강왕이 재상 당앙(唐鞅)에게 "과인은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도 신하들이 여전히 과인을 무서워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오?"라고 묻자, 당앙은 "나쁜놈만 죽이시느라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쁜놈만 죽이시는데 어떻게 착한 사람이 겁내겠습니까. 그냥 마구잡이로 다 죽이세요."라고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라고 여긴 송 강왕은 얼마 안 있어 당앙을 죽였다(...)

2.4. 송나라 멸망, 송 강왕 사망

송 강왕 42년(기원전 286년), 강왕의 이러한 행패가 계속되자 중원의 모든 왕들이 송나라 땅에 하나라의 폭군 걸왕이 돌아왔다고 여겨 강왕을 걸송(桀宋)이라고 불렀다.[8] 제민왕은 그 폭정을 구실로 소진의 동생 소대를 초나라, 위나라에 보내서 제 · 초 · 위 3국이 연합해 송나라를 점령한 후 영토를 분할한다는 조건으로 송나라를 쳤다. 송 강왕은 정복한 점령지의 민심을 이미 잃어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정복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연합군에 협조했다. 송나라 본토는 그나마 저항했지만 연합군의 엄청난 군세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강왕과 친하게 지내던 진나라소양왕이 소식을 듣고 극대노하여 송나라를 구원하기 위한 대군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제민왕은 크게 두려워하여 소대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형 소진과 함께 제나라를 멸망시킬 계획이었던 소대는 솔직하게 제민왕이 매우 욕심이 많으니 전쟁이 끝난 후에 송나라를 독차지하여 강왕처럼 몰매를 맞아 몰락할것임을 소양왕에게 일러주었다.[9] 소양왕은 소대의 솔직한 설득에 솔깃했으나 송나라를 도울 군사를 물리는데에는 여전히 망설였다.[10] 그러자 소대는 강왕이 만인의 지탄을 받는 희대의 폭군임을 상기시키고 그를 계속 붙잡고 있으면 진나라의 평판도 같이 나락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이 설득에 넘어간 소양왕은 마침내 송나라에 군사를 파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결국 송 강왕은 패배 끝에 수도 수양성에서 농성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하지만 수양성은 공략하기 어려운 요새이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강왕을 꾸짖는 도발로 송나라의 주력을 성밖으로 유인해 괴멸시키는데에 성공했다.[11] 완전히 몰락한 강왕은 예후의 관사로 피하려 하다가 제나라 병사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고 정복한 송나라의 강역은 위나라, 초나라, 제나라가 서로 나눠 가졌다.[12] 역사상 최초로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 상나라와 그 피를 이어받은 송나라때까지 1,400여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상족의 왕조 국가는 결국 이렇게 멸망했다.

3. 미디어 믹스

달인전이라는 만화에서는 염왕이라 나오며 제나라와의 전쟁 도중에 궁궐로 들어가다 진나라의 자객들에게 붙잡혀 참수당한다.


[1] 그 이유는 죽서기년에 의하면 형인 척성군은 송후환공의 자식이 아니라 자성 대씨 가문의 일원으로 송대공의 자손이라 한다.[2] 사기의 기록.[3] 시호인 강왕 혹은 헌왕은 나라가 망한 후에 신하가 올린 사시(私諡)이다.[4] 동진(東晉)의 학자 서광(徐廣)은 척성군을 송 강왕의 형이 아닌 아버지로 추정했다.[5] 씨를 적용하면 이름이 대언이 된다.[6] 송나라는 본디 춘추시대 초기만 해도 그런대로 강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주변국인 제나라, 진나라, 초나라의 성장을 따라잡지 못한데다 송양공의 삽질로 쇠락해버린 국가였다. 반면 당시 송강왕이 이긴 나라들의 사정을 보면 당시 제나라는 제민왕 시기로 서쪽의 진나라가 흔해빠진 왕 말고 동제, 서제라는 칭호를 만들어 나누어 쓰자고 제의할 정도로 잘 나갔고 초나라는 초회왕 시기로 이 해에 초회왕은 합종군의 우두머리가 되기도 했을 정도로 잘나갔고 위나라는 그나마 쇠락기를 타던 양왕 시기로 그렇다고 쳐도 아직까지는 힘이 남아있어서 한나라, 제나라와 함께 힘을 합쳐 진나라를 이기기도 했다. 현대로 치면 약소국이 강대국 3개랑 싸워 이기고 같은 약소국 하나는 먹어버린 셈 만약에 송강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그 이후에도 송나라가 초기의 송강왕만한 왕이 나왔다면 전국칠웅은 전국팔웅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제,초,위에 끼여있는게 함정이지만 그래도 이 때에는 노나라 같이 털어버릴 소국이 남아있기도 해서 성장의 여지는 있었다.[7] 석산화 전설에서는 그의 잔학함이 끝을 달리는데 충신 한빙에게 미녀인 아내가 있단 소식을 듣자 그 아내를 취하기 위해 한빙을 귀양보내고 한빙이 자살하자 그 아내를 겁탈하려 했지만 아내가 남편의 뒤를 따라 자살하니 충신의 아내가 죽기 전 자신과 남편을 같이 묻어달라 했음에도 오히려 둘의 시신을 각각 다른곳에 묻어버렸다.[8] 강왕을 비판할 의도였으면 가까운 조상인데다가 걸왕 저리가라 할정도로 악명이 높았다고 알려진 주왕에 비유하는게 훨씬 효과적이었을 터인데,[13] 그러지 않고 굳이 옛적의 걸왕에 빗댄 것은 춘추전국시기에 주왕의 악명에 대해 주나라의 프로파간다적 의혹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것은 주왕 문서의 재평가 참고.[9] 여기다가 소대는 제민왕이 송강왕 못지않은 폭군이라고 신랄하게 깠다. 실제로 그 제민왕도 처음에는 명군이었지만 나중에는 국력을 믿고 오만해져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점에서 송강왕과 비슷한 면모를 보였다. 당대에 멸망당하지는 않았고 아들과 전단이 겨우겨우 수습해주었지만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10] 당시 진나라는 매우 급속도로 확장해 당대 열강 중에 우호적인 나라가 송나라 밖에 없었다. 그런 실정이니 송나라를 버리는것에 대해 망설일수 밖에 없었다.[11] 이는 훗날 제나라가 송 강왕과 매우 비슷한 상황에 처했지만 침착하고 기민하게 대응하여 결국 나라를 지켜낸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다만 이때는 제나라 몰락의 원흉 제민왕이 살해당해서 전단의 계책을 방해할 인물이 없었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였다.[12] 그러나 이렇게 얻은 땅을 두고 제나라가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 5국 연합국의 침공을 부르고야 만다.



[13] 다만 송나라 군주들은 주왕의 직계 후손은 아니다. 송나라는 주나라에 의해 주왕의 이복형 미자 계에게 봉해졌고, 미자계의 동생이자 주왕의 이복형인 미중 연이 송나라를 이어받아 그의 후손들이 송나라를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