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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나라 초대 국군 미자 계 微子 啓 | |||
성 | 자(子) | ||
씨 | 송(宋) | ||
휘 | 계(啓) | ||
아버지 | 제을(帝乙) 자선(子羡)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
1. 개요
송나라의 초대 국군. 원래는 상나라의 왕자로 상나라 제28대 왕 제을의 아들이며, 마지막 왕 제신의 이복형이다. 현명하고 올바른 사람이었으나, 정실 소생이 아니라서 상왕이 되지는 못했다고 한다.미(微)는 영지의 이름이고 자(子)는 작위 이름(자작)이고 계(啓)가 이름이므로 미자계는 '미 지역의 자작인 계'라는 뜻이다.
2. 행적
상나라 주왕 제신이 달기를 끼고 폭정을 행하자 주왕의 숙부인 기자는 간언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미친 척하며 다니다 투옥되고, 마찬가지로 주왕의 숙부인 비간은 처형되었다.이에 미자 계는 "신하된 자가 세 번을 충고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그 의리상 군주를 떠나도 괜찮다.”고 하며 상나라에 천명이 떠난 것을 알고 주 무왕의 편을 든다. 사기에 따르면 주 무왕이 상 주왕을 토벌하자 미자 계는 상의 종묘에 들어가서 왕실의 제기(祭器)를 가지고 나와 본인은 죄인처럼 웃통을 벗고 등 뒤로 손을 묶은 다음 무왕에게 바쳤는데, 한마디로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일일이 제사를 지내고 점을 쳐서 결정하던 제정일치 사회였던 상나라의 상징적 제사 도구들까지 바친 셈이었다. 이에 무왕은 그를 풀어주고 지위를 회복시켜줬다.
천하가 평정되자 무왕에게 상나라의 사직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무왕은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이 상나라를 계속 이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물론 혹 일어날지 모르는 반란을 대비해서,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管叔) 선(鮮), 채숙(蔡叔) 도(度), 곽숙(霍叔) 처(處)[1] 세 사람을 무경 주변에 봉건해 무경을 감시하도록 했다. 이들을 세 명의 감시자라 하여 삼감(三監)이라고 부른다.
주 무왕이 죽고 어린 아들 성왕이 즉위하자 무왕의 동생인 주공단이 섭정했다. 무경은 이 틈을 노려 상나라 부활을 시도했고, 마침 삼감 역시 주공의 섭정에 불만을 품고 있어 무경에 협력하니 이를 '삼감의 난'이라고 한다. 여기서도 미자계는 주공단의 편을 들어서 진압에 공을 세웠다. 결국 패한 무경·관숙은 처형, 채숙·곽숙은 추방되었고, 미자계는 무경에게 할당했던 땅 등을 인계받아 제후국을 세우는데 이것이 송(宋)이다.
이후 미자계의 후사가 없어 송 땅은 그의 동생 미중 연이 이어받았고, 이후 송나라의 국군은 모두 연의 후손이 된다.
3. 여담
- 사기는 그의 이름을 개(開)라고 적어놨는데 한경제의 이름이 똑같이 '계(啓)'였기 때문이다.
- 한국·중국을 통틀어 송(宋)씨들의 정신적 시조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