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02 04:09:25

목왕(주)


주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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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목왕(穆王)
(姬)
만(滿)
생몰 기간 기원전 992년 ~ 기원전 922년
재위 기간 기원전 976년 ~ 기원전 922년

1. 개요2. 견융 정벌과 서나라 정벌3. 만년까지4. 여담

1. 개요

주나라의 제5대 이자, 천자. 재위 기간은 55년.[1] 소왕의 아들이며, 주 공왕의 아버지이다. 《죽서기년》(竹書紀年)과 함께 출토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소설 《목천자전》(穆天子傳)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2. 견융 정벌과 서나라 정벌

목왕은 부왕인 소왕의 원정으로 국력이 쇠락했기 때문에 그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인재 등용에 힘썼다. 백경(伯臩)을 태복에 임명했고, <경명>(冏命)을 반포해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했다.[2] 그리고 어느 정도 국력이 다시 강성해지자 주 목왕은 서쪽의 견융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공인 모보(謀父)가 내실을 다지자고 간했으나 목왕은 듣지 않았다.

목왕 12년 봄, 견융족 토벌에 나섰으나 이득을 얻지 못했다.

재위 당시 제후들이 화목하지 못했는데, 죄 중에서 사안이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벌금을 부과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를 보후가 제안했다고 해서 '보형'이라고 했다.[3]

서(徐)나라[4]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목왕은 그들을 토벌했다. 이때 서나라는 타격을 입긴 했으나 바로 멸망하지는 않고 나름 오랫동안 존속했다.

참고로 이때 목왕은 서쪽으로 떠나 있다가 너무 즐거워서 돌아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쪽의 서나라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보라는 이가 목왕의 수레를 끌어 하루에 1,000리를 달려 목왕을 도왔고, 이에 목왕이 보답으로 조성을 분봉해주어 조보는 조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 훗날 주 효왕으로부터 영성까지 받고 진(秦)읍을 영지로 받으니 이것이 바로 최초의 통일제국이 될 진나라의 시작이었다. 조보의 또 다른 후손인 조숙대는 춘추 5패 중의 하나가 될 진(晉)나라로 가서 대부가 되었고, 그 후손이 기원전 403년 주나라로부터 제후로 인정받으니 이 나라가 전국 7웅 중의 하나인 조(趙)나라였다.

3. 만년까지

목왕 14년, 기련산 아래 흑수 유역의 서역 마술사들이 여러 기예를 보이자 목왕은 그들을 거두어 손님으로 대우했다. 이들이 외모가 많이 다르고 옥[5]을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보면 아마도 토하라인이나 사카인인 듯 하다.

목왕 19년, 9사[6]를 거느리고 남쪽의 초나라를 쳤다.

목왕 39년, 도산에서 회맹했다.[7]

목왕 40년 봄, 목왕은 남정으로 들어가 여후를 사구에 봉했다.[8]

목왕 51년, 여후에게 형벌을 만들게 하니 이것을 '여형'이라고 불렀다.

목왕 55년, 그가 붕어하고 태자인 희예호가 즉위하니 그가 공왕이다.

4. 여담

전설에 따르면 그는 목왕 8준이라는 8마리의 명마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업적이 얼마나 유명한지 서왕모와도 연애를 하였다는 전설이 나돌 정도였다.

[1] 다만 나무위키 주나라 문서와 재위 기간이 다른 현상이 종종 발생하는데, 이것은 공화(共和) 시기 이전의 사료가 당시 시기의 혼란으로 인해 사료가 유실되어 일어난 현상이다. 최초의 기전체 사서인 《사기》에는 연대 고증을 할 수 없어서, 사마천이 포기를 하고, 연도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니.....[2] 이 대목은 《사기》 <주 본기>의 주 목왕 대목을 참조해 만들었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당시 사회 모순에 대해 대처해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3] 《사기》에 나타난 최초의 벌금 기록이다.[4] 서나라는 후한시대의 서주 지역에 있었던 나라였다.[5] 주로 호탄에서 생산된다.[6] 는 군대 단위로 여기서 사단이라는 부대 단위가 나왔다.[7] 이 행사는 매우 중요했는데, 이 회맹은 제후들의 단결을 다지는 의식이었다. 훗날 천자가 힘이 약해져 패자가 대신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천자의 권력은 강한 편이어서 천자 주도로 회맹이 가능했다.[8] 사구는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과 대법원장을 겸한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