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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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여왕(厲王) |
성 | 희(姬) |
휘 | 호(胡) |
생몰 기간 | 기원전 890년 ~ 기원전 828년 |
재위 기간 | 기원전 871년 ~ 기원전 841년 |
1. 개요
주나라의 제10대 왕. 이왕의 아들이자 선왕의 아버지. 폭정과 실정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1] 특히 국인들의 자금원인 산림천택을 국유화 하겠다고 결정한 것이 큰 원인이 되어 국인 폭동이 일어나 왕위에서 내쫓기고 왕이 없는 공화(共和) 시대가 열렸다.[2] 그리고 아들인 희정(姬靜)이 장성하자, 그 뒤를 이어 왕(주 선왕)이 되어 주나라는 안정을 찾게 되었다.이 주나라 왕을 호칭할 때에 두음 법칙을 무시하고 려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여왕(女王)과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된 듯 하다. 비슷한 예로 초여왕이 있다.
2. 재위 기간
여왕은 왕이 되자마자, 간신배인 영이공(榮夷公)[3]을 중용하며[4] 폭정을 자행했다. 그 구체적인 폭정의 내용이 무엇이냐면 국부를 전부 왕실에만 축적해놓는 것으로 때문에 대부 예양부(芮良夫)[5]가 그것을 지적했다.[6] 그러나 여왕이 그것을 들을 위인이 아닌지라 그것을 무시하고 영이공을 경사에 봉하며 중용했다.당연히 그렇게 되니 왕의 평판이 떨어져 국인[7]들 사이에서 뒷담화가 나돌았는데, 바로 여왕에 대한 나쁜 소문이었다. 그런 자들일수록 뒷담화를 미워하여 소주(小周)의 제후 소목공(召穆公)을 불러 물으니 소목공이 말했다.
"국인들이 그런 통치를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위(衛)나라의 무당을 불러들여 뒷담화하는 자들을 감시하게 하니 뒷담화는 줄었으나 제후들이 조회를 하지 않았다.[8] 제후들의 반항을 본 여왕은 오히려 기뻐했다.여왕(厲王)은 기뻐하며 소공(召公)에게 말했다.
"내가 비방하는 것을 그치게 할 수 있으니 이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구나."
소공이 말했다. "이는 백성들의 입을 막은것으로 백성의 입을 막는 일은 물을 막는 것보다 폐해가 심합니다. 물이 막혔다가 터지면 필시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처럼 백성들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치수를 하는 자는 물을 잘 흐르게 터서 소통시키고,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드러내 놓고 말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방하는 것을 그치게 할 수 있으니 이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구나."
소공이 말했다. "이는 백성들의 입을 막은것으로 백성의 입을 막는 일은 물을 막는 것보다 폐해가 심합니다. 물이 막혔다가 터지면 필시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처럼 백성들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치수를 하는 자는 물을 잘 흐르게 터서 소통시키고,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드러내 놓고 말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국어에 따르면 소목공은 국인들이 먹고 살기 힘들다며 언로를 널리 개방하여, 위로는 공경대부에서 아래로 백공서인(百工庶人)들까지, 모든 사람들이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고 간언하였으나 여왕은 이 의견을 거부했고, 이에 백성들은 감히 말하려는 자가 없었다.
3년 뒤인 여왕 31년(기원전 841년), 결국 국인들은 그 횡포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도성 주변 사방(四郊)의 국인들이 나무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 일시에 모여, 모든 방향에서 궁성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반란군의 고함소리를 들은 여왕은 사병(士兵)들에게 진압을 명했지만, 아무도 그 명령을 듣지 않았다. 한 신하가 "우리 주는 농민을 병사로 징병하고, 모든 병사는 태어나기를 농민으로 태어납니다. 이제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니, 누구를 동원해 막으시렵니까?"라고 했다. 여왕은 서둘러 왕족들만 데리고 도성을 탈출해 위수를 따라 북쪽으로 밤낮으로 내달려 체(彘) 땅으로 달아나 버렸고 태자(희정, 훗날의 주선왕)는 소목공의 집으로 도망쳐 숨었다. 이 반란을 후세엔 국인폭동(國人暴動), 또는 체의 난(彘之亂)[9]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주정공(周定公)과 소목공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것을 공화(共和)시기라 한다. 이 말이 근현대에 와서 republic의 번역어인 공화국의 어원이 되었다.
참고로 위는 사기의 기록이고 죽서기년에 전해지는 내용은 조금 다른데, 제후 공백(共伯) 화(和)가 국인들을 지휘해 주여왕을 내쫓아 천자를 대행했으며 그의 이름에서 공화시기가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4년 뒤 공백 화는 정권을 주선왕에게 넘기고 자신은 공산(共山)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사마천은 훗날 사기를 집필하면서 공화 시대를 연표의 첫머리에 '공화 원년(기원전 841년)'으로 두고 이를 기점으로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의 연대를 기록했는데, 공화 이전의 기록들은 저마다 사건의 연대가 확실하지 않지만 공화 이후부터는 연대가 기록이 제각기 일치해서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라고. 고로 공화 원년인 기원전 841년은 중국 역사에서 문헌을 통한 구체적인 연대 확인이 가능한 최초의 시점으로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포사 전설에 따르면 우연하게 하나라 시대부터 800년간 봉안된 용의 침을 보았다 한다
[1] 여기서 중구난방이 유래한다.[2] 이 사건이 군주가 다스리지 않는 국가인 공화국의 어원이 되었다.[3] 영(榮)나라의 이공.[4] 영이공 또한 비슷한 작자라 궁합이 잘 맞았다.[5] 예나라의 군주. 희성이며 양부는 자(字)이다.[6] 즉 백성들을 쥐어짜고 혼자서 국부를 독점했다는 이야기다.[7] 공원국 교수의 춘추전국 이야기에 의하면 병역과 납세의 임무를 담당한 자들이라 한다. 나라의 통제를 받지 않는 이들이 당시에는 많았는데, 그들은 야인이라 했다.[8] 다만 이런 징조는 목왕 이후부터 슬슬 보이다 이 일을 계기로 더 노골화된 점이 있다.[9] 《국어·주어(周語) 상》에서는 체의 난이라고 한다. 국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체의 난(彘之亂)이 일어났을 때, 선왕(宣王)은 소공(邵公)의 궁에 있었고, 국인들이 그곳을 포위했다. 소공이 말하길: '예전에 내가 자주 임금께 간언했으나, 임금께선 따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이러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만약 왕자가 죽는다면, 임금께서 나를 원수로 여겨 분노하지 않겠는가! 대저 군주를 섬기는 자는 위태로워도 원망하지 않고, 원망해도 분노하지 않나니, 하물며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랴?' 그리하여 자신의 아들로 선왕을 대신하여 죽게 하였고, 선왕이 장성하자 그를 왕위에 올렸다."(彘之亂,宣王在邵公之宮,國人圍之,邵公曰:「昔吾驟諫王,王不從,是以及此難。今殺王子,王其以我為懟而怒乎! 夫事君者險而不懟, 怨而不怒, 況事王乎?" 乃以其子代宣王, 宣王長而立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