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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趙[1] | ||
존속기간 |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8년 | |
별칭 | 작(勺) | |
위치 | 허베이, 산시 | |
수도 | 진양, 한단 | |
국성 | 영(嬴)[2] | |
국가원수 | 후작 → 왕[3] | |
주요 군주 | 무령왕 조옹 | |
주요 재상 | 인상여 | |
언어 | 상고 중국어 | |
문자 | 전서 (대전체) | |
종교 | 중국 토속 종교[4] | |
종족 | 화하족 | |
통화 | 도폐 | |
성립 전 | 진(晉)나라 | |
멸망 후 | 진(秦)나라 | |
현재 국가 |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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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국시대에 등장한 나라로 수도는 진양(晉陽) -> 중모(中牟) -> 한단(邯鄲)이었다.조나라 조씨는 진(秦)나라와 같은 영(嬴)성이었다. 비렴(蜚簾)의 장남인 오래의 후예가 진나라였고, 차남 계승의 후예가 조나라의 조상이었다.
2. 역사
영성 조씨는 본래 북방의 강국이었던 진(晉)나라의 신하였지만 진문공 때의 공신인 조쇠의 후손이 한씨, 위씨와 함께 동주(周) 왕실로부터 제후로 공인받으면서 진(晉)나라의 영토를 분할하여 조나라를 세웠다.[5] 전국칠웅 중 하나였으며, 무령왕 조옹(제6대 국군, 초대 왕)의 치세때는 전차 중심이었던 중국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기마전술을 도입했다. 기록상 등자와 안장도 없었던 시기였으니 돌격기병이라기보다는 유목민족 스타일의 궁기병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군복을 호복(유목민 스타일)으로 변경했다. (호복기사) 하지만 무령왕이 갑자기 태자인 조장을 폐하고, 왕위를 후에 혜문왕이 될 막내아들 조하에게 넘겨준 후 자신은 '주보'(主父)라 칭하며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런 이상한 선택을 한 까닭은 무령왕 자신이 진나라와의 전쟁에 힘쓰는 한편, 자신이 총애하는 혜문왕에게는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폐태자 조장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반란을 미리 알고 대비했던 공자 성[6]에게 패배하고, 무령왕에게로 도망쳐 오자 이를 측은하게 여겨 자신의 궁에 숨겨주었다가 공자 성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무령왕이 있었던 궁을 포위하여 조장은 주살되고, 무령왕은 결국 자신의 궁궐에 유폐된 채 굶어 죽었다. (사구정변)혜문왕 조하(제7대 국군, 제2대 왕)의 치세였던 기원전 296년에 중산국을 멸망시키고 임호와 누번 등을 무찔러 크게 강성해지면서 서방의 진(秦)나라마저 압박했다. 그때까지의 전형적인 전술이었던 닥치고 함곡관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조나라의 지형적인 특징을 이용하여 진나라의 북부 지역으로부터 압박하는 혁신적인 전략을 세웠다. 혜문왕이 정치를 잘하면서 국가가 안정되어갔으며, 염파부터 시작해 이목으로 끝나는 조나라의 명장 계보가 발동하여, 지리학적인 위치와 군사력으로, 장평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초강국 진(秦)나라의 실질적인 라이벌이자 방해물로 성장했다. 우스갯소리로 전국시대 후반부는 사실상 진나라와 더불어 사실상 공동 주인공 국가라고 할 수 있다.[7]
이후 세월이 흐르며 명장 조사도 죽고 재상인 인상여는 병으로 오늘 내일하면서, 백전노장이었던 염파가 혼자서 거침없는 진나라를 상대로 고군분투했으나, 염파 역시 조나라 내부의 암투에 휘말려 초나라로 쫓겨나면서 조나라는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효성왕 조단(제8대 국군, 제3대 왕)의 치세때인 기원전 260년에 벌어진 장평대전에서 졸장 조괄의 실책때문에 진나라의 명장인 백기에게 완전히 패배하고 병사 450,000명이 몰살당한 후로는 골골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다가 도양왕 조언(제9대 국군, 제4대 왕)이 새로 들인 창후에게 빠져 태자인 조가를 폐하고, 새 왕비 소생의 어린 아이인 조천을 태자로 책봉하여, 도양왕 사후 이 아이가 유류왕(제10대 국군, 제5대 왕)으로 즉위했다.
이목과 사마상 등 조나라 최후의 명장들이 진나라의 진격에 맞서 용감하게 반격했지만 진나라가 간신들[8]에게 뇌물을 주어 이목을 죽게 하고, 사마상을 유배시키더니 결국 그 기회를 틈 타 공격해 들어가 한(韓)나라의 멸망 다음인 기원전 229년~기원전 228년에 수도 한단을 함락시키고 유류왕 조천을 사로잡아 일단 멸망시켰으나,[9] 앞서 폐해졌던 태자 조가(제11대 국군, 제6대 왕)가 대(代)라는 촌구석에 일종의 망명정부를 세우고 '대왕'(代王)이라 칭했다. 이 저항군은 기원전 222년에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왕전의 공격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했다.
진나라 말에 일어난 진승·오광의 난때 장초 왕 진승의 부장이었던 무신이 자립하여 조왕이 되었다가 부하 이량의 반란으로 살해된 후, 조나라 왕족 출신인 조헐이 장이와 진여에게 옹립되어 조나라가 부활했다. 곧이어 진승의 난을 평정한 진나라의 명장 장한에게 포위되었으나 거록대전에서 위기를 넘기고 항우에게 복속하여 제후국이 되었다가 한나라 대장군 한신과 벌인 정형 전투에서 패배하고 조헐이 도망치다가 한신의 한나라군에 잡혀 죽임을 당함으로써 마침내 완전히 멸망했다.
3. 기타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신하 복은 많지만 왕 복은 무령왕과 그 아들인 혜문왕 정도를 빼고는 영 없는 나라였다.[10][11] 전국사군자 중 한 명인 평원군과 모수를 비롯한 여러 식객들, 전국시대에 가장 뛰어난 4명의 명장들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염파, 강대국 진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한 최강의 패권 군주 소양왕을 엿먹이며 관광태운 인상여, 염파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 진나라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조사, 5국 연합군을 지휘하여 6개월 만에 제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 악의(출신만), 앞서 설명한 전국시대의 명장들 중 한 명이며, 동급으로 평가받는 진나라의 명장 왕전을 상대로 막아선 이목, 위에서 언급한 악의의 침공에 맞서 화우의 진으로 제나라를 구했으나 나중에 망명하게 되는 전단, 이목과 함께 조나라 최후의 방어전을 지휘했던 노장 사마상 등 당시 네임드들이 거의 한 시대에 함께 있었다.진나라군의 포로가 된 뒤 냉실에서 병에 걸려 죽은 유류왕 조천의 후손들은 탁군 조씨(涿郡趙氏)로 불리었고, 그 후손으로는 송나라를 세운 태조 조광윤이 있었다. 조상을 공유하는 진나라 조씨는 호해의 황족 학살과 항우의 신안대학살 이후로 더 이상 역사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후손을 남겼다는 의미로는 이겼을지도?
의외로 한국사의 전개와 관련이 있는 나라였다. 연나라와 고조선은 춘추시대부터 대립했고 전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연나라가 소양왕의 개혁으로 인해 강성해져 고조선이 크게 밀리고 있었는데, 이 중요한 시기에 연나라를 꾸준히 공격하고 큰 타격을 주어 연나라의 동진 및 고조선 침탈을 멈추게 했기 때문이다. 조나라야 연나라가 진나라와 한 편을 먹고 조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몇만 명씩 동원해서 자국을 약탈하고 성읍을 침탈했으니 적개심과 원한이 쌓여 그렇게 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딱히 고조선을 도와주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건 부인할 수 없다.[12]
고대 한국사와는 간접적인 관계가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진나라의 천하통일과 초한쟁패기의 혼란 속에서 조나라의 유민들도 연나라, 제나라의 유민들처럼 고조선이나 한반도 남부의 삼한까지 피난해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 역대 군주
조(趙) 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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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종주 숙대 | 2대 종주 실전 | 3대 종주 실전 | 4대 종주 실전 | 5대 종주 조숙 | |
6대 종주 성자 | 7대 종주 선자 | 8대 종주 조괄 | 9대 종주 문자 | 10대 종주 경자 | |
11대 종주 간자 | 12대 종주 양자 | 13대 종주 환자 | 14대 종주 헌자 | ||
삼진 분립 후 | |||||
초대 국군 열후 | 2대 국군 무후 | 3대 국군 경후 | 4대 국군 성후 | 5대 국군 숙후 | |
초대 왕 무령왕 | 2대 왕 혜문왕 | 3대 왕 효성왕 | 4대 왕 도양왕 | 5대 왕 유류왕 | |
대나라(代) | |||||
대왕 가 | |||||
초한쟁패기 | |||||
<colcolor=#373a3c> 대왕 조헐 | 상산왕 장이 | 조왕 장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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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삼진 분립 이전(희진의 신하)
- 조씨종주(趙氏宗主)
대수 |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6 | 성자(成子) | 최(衰) |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22년 |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였던 진문공의 공신이었다. |
7 | 선자(宣子) | 돈(盾) | 기원전 621년 ~ 기원전 607년 | 성자의 아들 |
8 | - | 괄(括)[13] | 기원전 607년 ~ 기원전 583년 | 성자의 아들, 선자의 동생 |
9 | 문자(文子) | 무(武) | 기원전 583년 ~ 기원전 541년 | 선자의 손자 |
10 | 경자(景子) | 성(成) | 기원전 540년 ~ 기원전 518년 | 문자의 아들 |
11 | 간자(簡子) | 앙(鞅) | 기원전 517년 ~ 기원전 476년 | 경자의 아들 |
12 | 양자(襄子) | 무휼(毋恤) | 기원전 475년 ~ 기원전 443년 | 간자의 아들[14] |
13 | 환자(桓子) | 가(嘉) | 기원전 442년 ~ 기원전 424년 | 양자의 아들[15] |
14 | 헌자(獻子) | 완(浣) | 기원전 423년 ~ 기원전 409년 | 양자의 이복형인 백로의 손자 |
4.2. 삼진 분립 이후
대수 |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1 | 열후(列侯) | 적(籍) | 기원전 408년 ~ 기원전 400년 | 헌자의 아들. 기원전 403년 제후가 됨 |
2 | 무후(武侯) | ? | 기원전 399년 ~ 기원전 387년 | 열후의 동생 |
3 | 경후(敬侯) | 장(章) |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75년 | 열후의 아들, 무후의 조카 |
4 | 성후(成侯) | 종(種) |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50년 | 경후의 아들 |
5 | 숙후(肅侯) | 어(語) | 기원전 349년 ~ 기원전 326년 | 성후의 아들 |
6 | 무령왕(武靈王) | 옹(雍) | 기원전 325년 ~ 기원전 299년 | 숙후의 아들 호복을 채택하고 기마 전술을 도입한 중흥 군주 |
7 | 혜문왕(惠文王) | 하(何) |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66년 | 무령왕의 아들 무령왕 대의 전성기를 이어갔다. |
8 | 효성왕(孝成王) | 단(丹) | 기원전 265년 ~ 기원전 245년 | 혜문왕의 아들 장평대전에서의 참패로 국력이 기울었으며 진양을 상실하였다. |
9 | 도양왕(悼襄王) | 언(偃) | 기원전 244년 ~ 기원전 236년 | 효성왕의 아들 업을 상실하였다.[16] |
10 | 유류왕(幽謬王) | 천(遷) | 기원전 235년 ~ 기원전 228년 | 도양왕의 아들 기원전 228년 진나라의 장수 왕전이 조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한단을 함락시켰다. |
11 | 대왕(代王)[17] | 가(嘉) | 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2년 | 도양왕의 적장자, 유류왕의 이복형 대(代) 땅으로 망명하여 왕으로 있었으나 기원전 222년에 정벌되어 멸망함. |
4.3. 초한쟁패기
무신(武臣):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8년조헐(趙歇): 기원전 208년 ~ 기원전 205년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drewʔ. 현대 발음은 zhào. 趙는 현대의 한자이며, 진나라 시대의 전서 소전체 표기는 이렇다. 참조[2] 춘추전국시대에는 성과 씨를 구별했는데 조나라의 영성은 조씨(趙氏)였다. 영성 조씨라는데서 알 수 있겠지만 진나라와 성씨가 같았다.[3] 기원전 325년부터.[4]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5] 그래서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는 전국시대 내내 '삼진'(三晉)으로 불렸다.[6] 무령왕의 숙부.[7] 국력만으로는 초나라가 진나라에 버금갔고, 이 둘을 제외하면 전통의 강국이었던 제나라가 두 나라에 겨루어볼 만했다. 하지만 초나라는 넓이에 비해 개발이 덜 된 지역이 많았고, 진나라가 천하를 호령할 때 회왕 같은 암군도 나오면서 진나라의 세력 확장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 제나라는 민왕 시절 연소양왕 휘하의 명장인 악의가 지휘하는 연·조·초·위·한 5개국 연합군을 맞이하여 참패한 후 전단 때문에 간신히 살아나 비실댄 반면, 조나라는 군사력이 삼진(三晉) 중 진나라에 가장 맞설만 했으며, 위치도 중원이었던 터라 진나라가 천하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위나라, 한나라와 함께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존재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장들이 줄줄이 나오며 진나라를 바르니 《사기》에서도 가장 빛나는 드라마가 나타나게 되었다.[8] 대표적으로는 곽개. 곽개는 말 그대로 간신 중의 간신이었는데, 명장 염파를 추방하고, 후에도 염파의 재등용을 방해했다. 조나라 최후의 명장 이목을 죽인 것도 모두 곽개가 한 짓이었다.[9] 이때 조나라는 진나라에 맞설 힘이 부족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나라 정복에 앞서서 진나라는 무려 네 차례에 걸쳐 조나라를 공격했는데 장평대전의 참패와 간신 곽개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이목은 그 네 차례의 침공을 다 막아내는 저력을 보였다. 하지만 그 진나라를 상대로 네 번이나 총력전을 치렀는데 무사할 수는 없었고, 결국 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10] 이 두 왕의 재위 시기, 조나라는 진나라와 더불어 전국칠웅중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 가장 강력한 적인 진나라가 바로 옆에 있어 이들을 방어하는데 그 국력을 소진했다는 점이다.[11] 이 왕들 중에 가장 막장은 도양왕으로 재위 말엽에 갑자기 원래 적자에다가 태자이던 조가를 쫓아내고 창후 소생의 서자인 조천을 후계자로 삼았다. 결국 이 결정이 조나라의 멸망을 불렀다.[12] 전통적으로 연나라를 꾸준히 발목 잡아 주었던 제나라는 악의의 정벌 이래로 제 앞가림하느라 한동안 바빠져, 그 이후로는 연나라에 대한 공세에 제대로 나서지 못했다. 연나라가 고조선에 대해 대대적인 정복 사업이 가능해졌던 것 또한, 악의를 통해 남쪽의 제나라를 일시적으로 굴복시켰기 때문이었다.[13] 노선공 2년 조돈에게서 종주의 직위를 물려받았다.[14] 이 시기에 위•한•조 삼진이 사실상 독립했다.[15] 아들이 아니라 형제라는 설도 있다.[16] 업은 당시 수도인 한단의 코앞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17] 대왕의 시호는 아니고, 왕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