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0 09:20:05

인상여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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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대기
2.1. 식객시절2.2. 화씨지벽2.3. 민지회맹2.4. 문경지교
3. 평가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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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藺相如
(?~?)

전국시대조(趙)나라의 명신.

같은 시대 평원군, 염파, 조사 등과 함께 조나라를 지탱하던 인물이며,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치킨 게임을 걸어 당대 최강국 진나라의 횡포를 막아낸 희대의 능신이자 명재상, 충신이었다. 합종연횡으로 유명한 소진장의 이후의 최고의 외교관이자 삼국지연의제갈량 뺨치는 설전의 대가. 조나라를 위해 활약하면서 숱한 업적을 남겼으며, 희대의 정복군주였던 (秦)나라의 소양왕을 몇 번이나 농락한 일과 염파와의 문경지교[1]의 일화가 특히 유명하다.

'옥의 티'를 뜻하는 하자(瑕疵)라는 단어와 반댓말인 완벽(完璧)모두 인상여의 화씨지벽 고사에서 나왔다.

2. 일대기

2.1. 식객시절

인상여는 조나라의 내시였던 무현(繆賢)의 식객이었다. 어느 날 무현은 시장에서 골동품 상자를 하나 구입했는데 그 상자 안에는 큰 옥구슬이 있었다. 이 옥구슬은 밤이 되거나 어두운 데에 가면 빛을 내며 수십 보를 환히 비췄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겨 감정가를 불러보니 바로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화씨지벽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이를 소중하게 보관했다. 이 소식을 듣은 조왕은 무현에게 구슬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으나 보여주면 화씨의 벽을 빼앗길 게 뻔해 무현은 화씨의 벽을 도난당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이는 곧 들통이 나고 무현은 조왕의 처벌이 두려워 연나라로 망명하려 했다. 이에 인상여가 무현에게 물었다.
인상여: "공께서는 어떻게 연왕을 알게 되셨습니까?"
무현: "예전 조왕을 따라 연왕과 함께 변경의 모임에 간 적이 있는데, 연왕이 가만히 내 손을 잡고서 벗의 교분을 맺자고 하였소. 그래서 나는 연왕의 마음을 헤아려 연나라로 가려고 하오."
인상여가 대답했다.
"조는 강하고 연은 약합니다. 그리고 연왕이 공과 교제하려 한 것은 공께서 조왕의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공께서 조를 버리고 연으로 가시면 연은 틀림없이 조를 두려워해 공을 머물지 못하게 할 것이고 오히려 공을 포박하여 조로 압송할 것입니다. 대인께서는 구슬이 아까웠을 뿐 큰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공께서 어깨를 드러내고 형틀에 엎드려 죄를 청하는 것이 나을 것인데, 그러면 요행으로 죄를 벗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현이 크게 깨닫고 조왕에게 화씨지벽을 바치며 사죄하자 조왕은 다행히도 무현을 용서했고, 무현은 인상여의 용기와 지모를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2.2. 화씨지벽

파일:17s300048r4o661ss1p6.jpg
인상여의 화씨지벽 사건을 나타낸 동상

인상여를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사건은 화씨지벽을 진나라로부터 온전히 돌려받아온 사건이다. 화씨지벽의 소문은 멀리 국경을 넘어 당시 진나라 소양왕마저 이를 듣게 되었고, 조나라 혜문왕에게 화씨지벽과 진나라 성읍 열 다섯개를 바꾸자고 제안하였다. 문제는 당시 소양왕은 초나라 회왕을 진나라로 초대했다가 억류하여 끝내 객사하는 원인을 제공한 적이 있는 등 약속을 지킨다고 믿기는 어려운 인물이었고, 옥 하나를 대가로 성 15개를 순순히 준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소양왕의 제안을 거절하자니 당시 소양왕이 다스리는 진나라는 중국의 전국 7웅 가운데 최강의 강대국이었기에 함부로 진나라를 거스르면 나라는 나라대로 망하고 화씨벽까지 뺏길 상황이었다.[2] 갈팡질팡하던 조나라 조정은 결국 소양왕과 교섭하기 위해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사신을 파견하기로 했으나 적임자가 없었다. 이에 무현이 예전에 뛰어난 지혜로 자신을 구해주었던 인상여를 천거하자 조왕은 인상여를 불러 물었다.
「진왕이 15개의 성과 과인이 갖고 있는 화씨벽을 바꾸자고 했소. 화씨벽을 보내야 되겠소? 아니면 보내지 말아야 되겠소?」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합니다. 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왕이 우리의 화씨벽만을 취하고 성을 넘겨주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진나라가 성을 준다고 하면서 화씨벽을 달라고 했으니 우리가 주지 않는다면 그 허물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화씨벽을 주었으나 진나라가 성을 주지 않는다면 그 허물은 진나라에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계책을 저울질해 볼 때 마땅히 화씨벽을 주고 그 허물을 진나라에 있게 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사자로 보내야 되겠소?」
「대왕께서 마땅히 보낼 사람을 찾지 못하시겠다면 신이 원컨대 화씨벽을 받들어 사자로 가겠습니다. 성이 조나라에 들어온다면 마땅히 화씨벽을 진나라에 두고 오겠지만, 성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화씨벽을 온전하게 보전해서 조나라에 돌아오게 하겠습니다(臣請完璧歸趙).」
이에 조왕은 인상여를 특사로 삼아 화씨지벽을 맡겼고 바야흐로 인상여의 치킨 게임 전설이 막을 올렸다.

진나라로 간 인상여는 소양왕을 알현하여 화씨벽을 바쳤다. 그런데 화씨벽을 받은 소양왕은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좋아할 뿐 약속했던 15개 성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인상여는 소양왕이 애초부터 성을 내주지 않고 화씨벽만 꿀꺽할 속셈임을 간파하고, 소양왕에게 "사실 화씨벽에도 작은 흠집이 있습니다(璧有瑕). 제가 그 부분을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 화씨벽을 슬쩍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문득 돌변하여 버럭 화를 내면서 기둥을 향해 화씨벽을 내던지려는 시늉을 하며 "진나라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화씨벽을 깨부순 뒤 나도 기둥에 머리를 박아 죽어버리겠소이다. 엄숙히 경고하건데 3일의 여유를 줄 터이니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생각하시오. 만일 조금이라도 말에 거짓이 있다면 마찬가지로 옥을 박살내고 나 역시 머리를 박고 죽겠소."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부연하자면 당시는 전국시대라서 군신유의 사군이충 개념이 없고 군주에 대한 신하의 목숨 바친 충성 같은 것은 없는게 당연한 시절이었다. 당장 전국칠웅만 해도 주나라 왕실에 대한 하극상으로 세워진 나라니... 그런데 인상여는 "나라의 으뜸가는 보물을 코 앞에서 빼앗기느니 차라리 자살하겠다! 힘으로 빼앗으려면 날 죽여야 할거다! 어디 진나라 왕이 사기치려다 들켜서 외교사절 죽였다고 동네방네 소문 좀 나볼테야?" 라고 협박한 것이다. 특히 신하의 충성심 같은 것을 믿지 않는 법가 국가인 진나라이기에 인상여의 목숨 바친 충성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크게 당황한 소양왕은 속으로는 조바심이 났지만 할수없이 어영부영 사과하며 지도를 가리키면서 성 15개를 주겠다며 인상여를 달랬다. 물론 속셈은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였지만 그건 인상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상여는 "화씨지벽은 천하의 보배인 만큼 진나라로 보낼 때 조나라 왕이 5일간 목욕재계를 했으니, 소양왕도 5일간 목욕재계를 해야 마땅하며 또 받을 때에도 풍악을 울리며 경건히 받으라"고 요구했다. 소양왕은 마지못해 화씨지벽과 인상여를 숙소로 돌려보냈으나 인상여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화씨지벽을 은밀히 조나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5일 후 소양왕에게 가서는 천연덕스럽게 역대로 진왕은 한 번도 제대로 약속을 지킨 적이 없어서 화씨벽은 일단 조나라로 돌려보냈으니 성 열다섯을 먼저 준다면 화씨벽을 내주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저는 대왕을 기만했으니 팽형에 처해달라."는 말까지 했다. 당연히 진나라 신하들은 격분해서 인상여의 소원대로 처형하자고 아우성을 쳤고 5일 동안이나 목욕하며 기다리던 소양왕도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인상여를 죽이려 들었지만, 진나라 재상이었던 범수가 "인상여는 목숨을 걸어 화씨벽을 지켜낸 인걸이니, 그를 죽이면 반드시 제후들의 인심을 잃을 것입니다. 어차피 화씨벽은 조나라로 돌아갔다니 인상여도 대접해 돌려보내고 나중에라도 성과 화씨벽을 바꾸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라며 간곡히 간하여 무마시키고 사흘 밤낮 성대한 잔치를 벌여 인상여를 환송했다. 물론 소양왕이 먼저 성을 주는 일은 없었고, 인상여 역시 이를 예상한 듯이 조나라로 돌아가자마자 입을 싹 씻었으며, 인상여에게 제대로 데여 체면만 구긴 소양왕은 다시는 화씨벽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바로 이 이야기가 완벽(完璧)의 유래로, 화씨벽을 완벽(完璧 완전한 옥) 그대로 가져왔다고 해서 생겼다. 이에 대해 명나라 시기의 명사였던 왕세정은 인상여완벽귀조론(藺相如完璧歸趙論)이라는 논평에서 그의 용감하고 올바른 처사를 칭송하였다.

2.3. 민지회맹

굴욕감을 씹으며 분해하던 소양왕은 얼마 뒤 진나라의 위세를 과시해 조나라의 기를 꺾어놓자는 속셈으로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한 뒤 민지(澠池)라는 곳에서 회맹(정상회담)을 갖자고 제의했다. 조왕은 내심 거부하고 싶어했지만 인상여와 염파의 조언으로 참석을 결정했다. 인상여가 조왕을 수행하는 한편, 나름 대비책으로 염파는 국내에 남아서 세자를 보위하고[3] 조사가 5천 군사를 이끌고 조왕을 뒷받침하기로 했다. 혹은 염파가 국경까지 군대를 이끌고 조왕을 호위했다고도 한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화씨지벽 사건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회담을 한다고 해놓고는 다짜고짜 뒤통수를 치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었다.[4] 특히 그 중에서도 진 소양왕은 20여년전에(BC 299년) 초회왕을 초대했다가 붙잡아 억류시켜 진나라에서 객사시킨 전과가 있는 양반이라 더 경계해야했었다.
  • 특이한 사례로 제환공은 노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 항복문서를 조인하고 있었는데 조말이라는 노나라 장수가 회담장에 난입해 환공을 죽이겠다고 난리치는 바람에 산통을 깬 적이 있었다.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기로 하고 간신히 자리를 모면한 환공은 다시 노나라를 초토화하겠다고 을러댔지만 재상 관중이 "지배자는 협박당해 맺은 약속이라도 지키는 법입니다."라고 조언하자[5] 꾹 참고 노나라와의 휴전협정을 준수했다. 이 일을 계기로 환공의 명성이 천하에 퍼졌고 결국 환공이 첫 번째 춘추패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어쨌건 민지 회담과 뒤이은 주연 도중 소양왕이 조왕에게 "조왕이 그렇게 비파를 잘 탄다고 들었는데, 한번 실력을 보여주시오."하고 말했다. 무례한 행위였지만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고 보복을 두려워한 조왕은 울며 겨자먹기로 금을 탔고, 이를 보고 소양왕은 기뻐하며 동석한 진나라 사관에게 모월 모일 조왕이 진왕의 명을 받들어 비파를 탔다고 적게 하여 조왕을 대놓고 모욕한다.

이에 인상여는 소양왕에게 다가가서 "진왕의 노래와 분부(盆缶=물이 담긴 항아리를 북처럼 두드리는 옛 악기)를 다루는 솜씨가 천하일품이라 하는데, 그 솜씨를 보여주셔서 주연의 흥을 돋워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물론 아쉬울 것 없는 소양왕은 왕 체면에 그런 짓은 못한다면서 인상여와 조왕을 모욕하고 뻗댔으나, 인상여는 술잔을 들고 진왕의 가까이로 다가서더니 갑자기 칼을 빼들며 일갈했다.
지금 저와 대왕의 거리는 다섯 보에 불과합니다. 이 자리에서 제 목을 찌른다면 대왕의 얼굴을 피로 적실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내가 죽더라도 너부터 찔러 죽이겠다는 것. 이에 화들짝 놀란 진나라 신하들과 근위병들이 인상여를 끌어내려 달려들자 인상여는 눈을 부릅뜨고 갈!!![6] 외마디 고함소리로 그들을 물리쳤다. 상술했듯이 법가국가 진나라엔 목숨 건 충성이라는 게 없었고, 만약 인상여에게 접근했다가 인상여가 소양왕을 칼로 그어버리기라도 하면 인상여는 물론 접근한 진나라 신하도 책임을 지고 법대로 처형될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인상여를 저지하지 못했다.[7] 그런 지경이니 당장 목 앞에 들이댄 칼날 앞에 안색이 퍼렇게 질린 소양왕은 할 수 없이 분부를 몇번 두들기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제서야 인상여는 칼을 거두고 자리로 돌아가서 동석한 조나라 쪽 사관에게 모월 모일 진왕이 조왕의 명을 받들어 분부를 두들기고 노래를 하였다라고 쓰게 해서 진왕을 조롱하는 것으로 갚아준다.

이에 소양왕과 진나라 신하들은 화가 났지만 어찌 할 수가 없었고 분노한 진나라 신하들이 조왕한테 조나라의 열다섯 개 성을 바쳐 진나라 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해주십시오라고 을러댔다. 하지만 인상여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고 한술 더 떠 받으면 돌려주는 것이 예의라 했으니, 진나라는 도읍인 함양(咸陽)을 바쳐 조나라 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해주십시오.라며 받아쳤다. 이로써 진나라 신하들은 물론 소양왕까지 데꿀멍시켰다.[8] 이런 분위기에서 회담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 결국 양국 간의 우호를 돈독히 한다는 상징적인 문구 몇 개에만 합의한 채 유야무야되었다. 하지만 조나라의 기를 꺾어 관광보내려던 진나라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고 오히려 망신만 톡톡히 당한 셈이 되었다. 반대로 말솜씨만으로 진나라를 버로우시킨 인상여의 명성은 천하에 널리 퍼졌다.

2.4. 문경지교

파일:문경지교.jpg

또한 인상여는 함께 조나라를 지탱했던 명장 염파와의 문경지교(刎頸之交)로도 유명하다.

민지회담에서 돌아온 조왕은 뛸듯이 기뻐하며 인상여를 최고위 관직이었던 상방에 제수, 그 서열을 염파보다 위에 두었다. 그러나 그동안 조나라를 위해 무수한 전공을 세운 명장 염파는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인상여가 고작 말 몇마디 잘 해서 자신보다 위에 올랐다며 크게 분노했다. 때문에 공사를 가리지 않고 대놓고 인상여를 비방하고 다녔으며 그를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창피를 주겠다고 별렀다.[9] 인상여는 이를 듣고, 수레를 타고 다닐 때 길거리에서 염파를 만나면 피해 다녔고 염파가 조회에 나오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염파는 더욱 기고만장했고 염파가 부리는 몸종들 뿐 아니라 주변인들도 인상여의 가족들까지 우습게 여겼다. 결국 화가 난 인상여의 가족들과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당신이 염파 장군만 보면 바로 달아나시거나 하시는 바람에 염파 진영 몸종 뿐 아니라 주변인들도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면 집을 나가겠습니다."라며 화를 내며 당장 떠나겠다, 그만두겠다고 마구 떼를 쓰자 인상여는 그들을 불러놓고 달래준 후 말했다.
"진정들 하게. 그대들은 진왕과 염파 장군 중 누가 더 무서운가?"

"당연히 진왕이 더 무섭습니다."

"그렇네. 진왕의 강대함은 각국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는 바일세. 그러나 나는 그 진왕을 면전에서 비웃고 그 신하들에게 모욕을 주었어. 그런데 내가 어째서 염파 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진나라는 인상여만 있는 조나라나 염파만 있는 조나라가 아니라 염파와 인상여가 모두 다 있는 조나라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네. 내가 염파 장군과 다투지 않는 이유는 다툴 줄 몰라서가 아니라, 염파 장군과 내가 다투면 적에게 이롭기 때문이야."

이를 들은 인상여 집안 사람들은 큰 깨달음을 얻었고, 나중에 이를 전해들은 염파는 크게 부끄러워하여 웃통을 벗고 가시나무 회초리를 걸머진 채로 인상여를 찾아가 앞마당에 엎드려 벌을 내려달라 청했다. 이것이 고사성어 "부형청죄( : 가시나무를 지고 죄를 청하다)"의 유래이다.
비루한 사람의 천박하고 좁은 소견으로 상방 대인 어른의 넓고 큰 도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렇듯 교만하게 행세했으니, 소인은 죽어도 그 죄를 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고 황급히 뛰어나온 인상여가 염파를 일으키며 "이러지 마십시오. 장군께 미처 얘기를 드리지 않은 소인의 잘못입니다."라고 달래주자 염파는 눈물을 흘리며 "오늘부터 대인과 생사를 같이하는 결의형제를 맺어 비록 목에 칼이 들어와도 결코 변치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의형제의 교분을 맺으니, 이것이 "목이라도 선뜻 내줄 돈독한 우정"이라는 고사성어 문경지교(刎頸之交)의 유래이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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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여 동상

소양왕은 인상여와 얽힌 일화만 보면 호구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무서운 기세로 영토를 확장하여 전성기를 구가한 막강한 패권군주였다. 진시황은 바로 소양왕의 증손자인데, 족보로는 멀어보이지만 실제 다음 왕들이 단명[10]했기 때문에 소양왕 사후 3년 뒤에 진시황이 즉위했다. 사실상 소양왕이 쌓아놓은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훗날 진시황이 전국시대를 끝내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인상여는 그런 소양왕을 상대로 쓴맛을 보여준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 게다가 국력으로도 비교가 안 되는 상황에서 저런다는 건 보통 대담한 성격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얼핏 보면 단순히 뻥카만 센 문관 타입으로 생각되겠지만, 사기에서는 조 혜문왕 28년 (기원전 271년) 인상여가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하여 평읍(平邑)에 이르러 그 성의 북쪽의 구문(九門)에서 행군을 멈추고 큰 성을 쌓았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에 염파조사도 현역이었는데 이들을 모두 제치고 직접 사령관을 맡은 걸로 봐서 군사적인 재능도 그들 못지않게 출중하였던 듯 싶다.

이후 소양왕은 인상여가 있는 한 조나라를 침범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조나라도 결국 장평대전에서 진나라한테 제대로 털렸다. 당시 조사는 죽고 인상여는 병환으로 위독한 상태였으나, 염파의 지구전으로 원정군이었던 진군은 철군까지 고려했을 정도로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갔다. 그러나 진나라 재상 범수의 반간계로 염파는 경질되고 조사의 아들 조괄이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때 병중이었던 인상여는 경험없는 조괄에게 대장을 맡기지 말 것을 요청했다. 심지어 조괄의 어머니조차 조사가 아들에 대해 남긴 유언을 들며 아들의 기용을 만류했으나 조왕은 듣지 않았다.[11]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한 장평대전으로 이어지고 만다.

결론적으로 전국시대에 보기 드문 지략가이자 명재상이며 변설가이자 충신인 인물이다. 낮은 신분임에도 국가의 위기에 목숨을 걸고 대담하게 적을 기만하여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공로로 출세하고 사사로운 다툼으로 국론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을 피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나라에 간언을 하여 국가의 위기를 피하고자 노력했던 조나라 만고의 현신(賢臣).

장의나 소진 같은 변설가들이 이리저리 나라를 옮겨타고 다니거나, 범수와 이사 같은 재상들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후 말기에 그 초심을 잃어버리고, 염파나 악의나 이목 등의 무장들이 (비록 제 잘못은 아니라지만) 왕에게 찍혀서 다른 나라로 망명해 경력에 오점을 찍은 것을 보면 그 시대에 보기 드물게 자신의 처신과 국가의 대계에 중심을 잘 잡고 나라의 안녕을 지켜냈던 인물이다. 아니, 국가에 대한 충심까지 감안한다면 전국시대 최고의 인재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염파에게 여러 차례 모독을 당했으면서도 자신이 속한 나라의 국익을 생각해 이를 참고 분쟁을 피한 인품까지 겸했다. 이후 진솔하게 사과하고 반성하여 가시나무를 짊어지고 와 사죄하는 염파를 손수 일으키고 문경지교로서 의형제까지 맺었다. 국력이 훨씬 약했던 조나라가 진나라의 거침없는 동진을 여러 번 막아낸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

사마천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돌려받고 기둥을 노려볼 때라든지 진나라 왕 주위에 있던 신하들을 꾸짖을 때 그 형세는 기껏해야 죽음뿐이었다. 선비 중에 어떤 이는 겁을 집어먹고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상여가 한 번 용기를 내자 그 위세가 상대편 나라까지 떨쳤고, 물러나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염파에게 겸손히 양보하니 그 이름은 태산처럼 무거워졌다. 인상여는 지혜와 용기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기 열전에 등장하는 사마상여(전한의 문학자)는 인상여의 사람됨을 흠모하여 이름을 '상여'로 바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창작물에서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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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위에 있는 일화과 재능으로 지력과 정치가 90대 초중반의 책사로 등장한다. 그러다가 10편, 11편에서 지력이 80대 중반으로 내려가서 위의 일화를 볼 때 너무 낮다는 평가도 있다. 유저들은 인상여를 포함하여 중국의 여러 고대무장들이 평가절하 당했다고 할 정도였다. 결국 유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순유, 법정의 지력 94으로 상향되었으나 14에 가서 80대 후반으로 또 너프시켰다. 상성은 유비과 가깝다.

삼국지 9 PS2에서는 "린상여"로 쳐야 등장한다. 38/47/92/93에 병법들은 교사, 혼란, 고무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는 33/63/89/94/87 상업, 치안, 고무, 면박를 제외한 설전 특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명사특기가 없는 고증 오류이자, 특급 난이도의 도적에게 일기토로 승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통솔이 33인데, 치안를 가지고 있는 게 개그이다. 내정이나, 후방태수로 일하게 하자.

삼국지 11에는 28/47/85/90/85에 병종적성이 C의 책사으로 등장하며 특기는 논객. 지력은 80대 중반인데 같은 고대무장인 장의보다는 지력이 낮지만 성격이 대담[12]이라 쓸모가 많다. 간손미중 둘이나 불쌍하게 만드는 고대무장.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이 재미있는데, 친애무장은 등지이고 혐오무장은 마속이다. 친애무장이 등지인 것은 용기를 보인 외교사절이라는 점에서 친애무장으로 설정한 듯하고, 마속이 혐오무장인 것은 그가 끝내 중용하지 말라고 했던 조괄과 마속이 비슷한 이미지라는 점에서 설정한 듯.

삼국지 12 PK에서도 등장한다. 화씨벽을 들고 소양왕을 협박하는 포스가 넘치는 일러스트를 들고나왔다. 능력은 통/무/지/정 66/39/94/95 병과는 창병 전법은 허유엄살. 염파와 문경지교의 일화가 있음에도 친애무장관계는 아니지만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이벤트로 구현되었다. 전용 일러스트까지 준비가 되어 있고, 이벤트 후에 염파과 인상여가 상호 친애무장으로 등록된다.

삼국지 13에서도 출연. 능력치는 66/39/94/95로 특별히 나쁜 건 아닌데 중신특성은 화기생재, 병과 적성은 참담한 C/C/C. 그나마 특기는 농업2 / 문화3 / 설파7 / 교섭8 / 언변8 / 위풍5 / 신속3 설파용으로 써먹을 수는 있다. 전법은 귀모계. 전수특성은 교섭.

4.2. 하라 야스히사만화 킹덤

삼대천
구(舊) 삼대천
인상여 조사 염파
신(新) 삼대천
이목 방난 사마상

파일:킹덤-인상여.jpg
공식능력치
시기 무력 지휘력 지력 약점
가이드북3 65 98 99
이목 : 염파와 양어깨를 나란히 했던 위대한 삼대천 인상여는 '지(智)'와 '용(勇)'을 겸비한 대장군이자 뛰어난 전략가였습니다.
하라 야스히사, <킹덤> 50권, 제540화 소모전

작중에서는 과거 조나라의 삼대천의 일원으로 소개되며, 이미 세상을 뜬 고인인 탓에 같은 삼대천이자 의형제인 염파나 부하인 조아룡, 요운의 회상을 통해서만 등장한다.

제일 처음에는 염파의 언급을 통해서만 등장했다. 진나라의 육대장군이 자신의 최대의 적이자 최고의 벗들이라면 문경지교를 맺은 인상여는 자신의 형제였다고. 그러다 드디어 업 공방에서 인상여의 부하였던 조아룡과 요운의 회상으로 과거의 모습이 잠깐이나마 등장하는데, 전날 염파와 짠 작전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등 역사처럼 임기응변에 강한 전술가의 면모였다. 하지만 이런 즉흥적인 전술 때문에 미리 맞춰놓은 작전을 엉망으로 만들어 염파의 사천왕인 개자방이 따지러 오자 "상관없다! 하지만 쫓아내라!"라며 내쫓고, 부하인 조아룡마저 웃으면서 "주군은 곤란한 분입니다." 라고 하자 "하하하, 나는 곤란하지 않으니 상관없다!" 라면서 호탕하게 웃는 등 상당히 유쾌하고 호쾌한 면모를 보여준다.[13][14] 이후에도 조아룡과 요운이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 그들의 회상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이목의 평에 따르면 염파와 어깨를 나란히 한 위대한 대장군이며, 용과 지를 가진 대장군이라고 한다. 하지만 무력은 가지지 못했다는 말이 나오고, 부족한 무를 담당했던게 수하의 인가십걸이라는 우수한 무장들이라고 나온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화룡칠사의 대장군 주제에 신에게 일격에 썰린 영황과 비슷한 유형의 장군인 것으로 보인다.[15]

참고로 이 인가십걸이라는 부하들은 인상여가 죽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마치 자살하듯 전투에 몸을 던져 분사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여덟이 죽고 유이하게 살아남은 부하가 바로 조아룡과 요운이다. 이 둘은 인상여가 병으로 요절할 때 양옆에서 임종을 지켰는데, 인상여는 이들이 붉은 평원에서 싸우는 꿈을 꾸었다면서 이들에게 자신이 죽어도 따라서 분사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게 한다. 그리고 이 둘은 전설의 삼대천 인상여의 군세로서 업 공방에서 진나라를 막기 위해 전장에 나왔다가, 그곳이 바로 인상여가 예언한 주해평원임을 깨닫는다.[16]

그리고 요운은 지금의 진나라가 번성한 것은 자신의 주군인 인상여가 병으로 병사한 행운 덕분이라고 일갈한다. 이에 대한 신의 대답이 걸작인데, 잠꼬대는 자면서 하라며 오래 살아도 왕의 장군에게 죽었을 거라고 하자 당연히 요운은 흥분하지만, 스스로 이 말이 잠꼬대라 말하면서 전장에서 누가 살았으면 어떻게 되었다는 소리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 대답한다. 그런 소리 하러 온 거라면 이런 데 오는 게 아니라 집에서 썩어문드러지라는 말은 덤. 이는 과거에 매몰된 요운과 과거를 기반으로 삼더라도 과거에 구속되지 않은 채 현재를 살고 미래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신의 차이가 드러난 대사이기도 하다. 요운도 그리 될 거라 생각했지만 약속의 땅에 왔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라 일축한다.

작중 언급에 따르면 종종 앞날의 일을 꿈으로 꾸곤 했다고 한다.

과거 왕의와 대면한 적이 있는데 왕의의 군대가 추적하던 도중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실패했다. 이 때 공개된 인상여의 모습을 보면 오래 못 살았다고 하지만 이미 중년이고 죽을 때 모습과 달리 생머리다.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면서 너희 왕[17] 때문인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순수한 무리라고 평했다. 그 순수함 때문에 강하지만 그것만으로 닿을 수 없고,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왕의도 그건 알고 있었는지 표정이 굳었다. 그렇다고 해서 의미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때를 만드는 역할이 있는 것으로 사람은 고통, 슬픔, 기쁨 같은 것들을 이어나가는 생물이라고 말했다. 꽤 오래 전부터 중화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며 왕의에게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을 거라고. 결국 원군이 오자 물러나며, 중화를 통일할 자들을 위해 무운을 빌자고 이야기한다.(597화)

병을 앓고 있던 당시 인상여는 중화는 전쟁에 지겨워져서 하나가 되기를 원해 오래전부터 기반을 다지고 있지만, 그건 절대로 간단한 것이 아니기에 때가 무르익는 순간은 오지만 거기서 실패하면 영원히 하나가 되는 일 없이 수많은 나라들이 싸우는 세상이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가능하면 자기 나라가 이루고 싶었지만 그 검은 자신들이 아닌 다른 자들에게 있는 건지도 모른다면서 자신의 두 가신인 요운과 조아룡에게 두 가지를 전하는데, 한 가지는 그걸 쥔 상대가 있으면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부딪쳐서 깨부수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검이 요운으로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면 '한번 치켜든 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내려쳐라'라는 조언을 남긴다. 즉 어중간하게 몇나라를 멸망시키고 백성들을 죽게 하다가 흐지부지 끝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중화통일의 전쟁을 시작했다면 어떠한 비극과 희생이 있더라도 그것을 이루어내라는 전언. 즉 인상여는 단순한 조나라의 장군이자 전략가가 아닌, 역사의 흐름과 통일과 분열이라는 세상의 이치까지 읽어낼 수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 그의 유언은 요운을 통해 요운을 찌른 왕분과 그를 지원하러 온 신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인상여의 이 요절 기믹은 실제 역사와 상당히 다른 것이, 인상여가 화씨지벽이 일로 소양왕을 물먹인 것은 대략 기원전 283년 정도의 일인데, 이후 인상여는 기원전 260년인 장평대전에서 위독한 와중에도 조괄의 임명을 결사반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인상여는 재상으로서만 최소 23년 이상을 활동했다는 것이고, 죽은 것도 진나라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장군인 백기[18]와 몇년 차이도 나지 않는다. 즉 인상여가 병으로 갑자기 요절해 공을 많이 세우지 못했다는 건 실제 역사와 많이 다른 설정으로,[19] 오히려 이른 나이 실력이 절정에 올랐을 때 갑자기 요절해 버린 것은 바로 같은 조나라의 명장인 조사의 이야기에 가깝다.[20] 아무래도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조사와 인상여의 설정을 하나로 합친듯 보인다. 또한 작품속에서 소양왕이 엄청나게 미화되는 편이라[21] 인상여를 일찍 죽은 컨셉으로 나올 수 밖에 없다는 분석도 있다. 인상여가 살아있다면 소양왕의 패도에 인상여가 두번이나 모욕을 준 일화를 안 넣을 수가 없는데 그것을 넣기 애매하므로 인상여를 미리 죽은사람으로 나오게 하고 오히려 역으로 인상여가 소양왕에 대해 순수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묘사를 넣었다.

4.3. 기타

  • 킹곤타의 달인전 ~ 9만리를 바람에 타고 ~에서는 병으로 죽어가는 충신으로 나온다. 붉은 삼협 일행이 수련을 받으며 1부가 마무리 되어가는 49화에서 첫 등장한다. 동시에 해당권의 표지를 장식하는데, 화씨의 벽을 들고 진왕에게 맞서는 모습이다. 여불위가 인상여를 만난다는 얘기와 함께 붉은 삼협이 인상여의 일화를 듣는 장면에서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화씨의 벽을 지켜낸 완벽, 민지회담을 통해 그의 젊은 시절을 보여주고, 직후 여불위와 만나는 장면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여불위를 압도하는 기세를 보이며 여불위에게 진왕을 상대로 혼자 국가를 지켜낸 위인답게 터무니없게 두렵다는 평가도 받는다. 아직 상인에 불과한 여불위에게 여불위의 욕망의 실체를 물으며 그를 혼란에 빠트리는 모습으로 퇴장. 이후 수년의 시간이 흐르고, 조나라의 조사가 사망한뒤 그의 장례식에서 병든 모습으로 재등장한다. 존재감은 여전해 붉은 삼협을 비롯해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병이 많이 진행되어 겨우겨우 부축을 받으며 등장한다. 이를 보고 달려온 염파의 등에 업혀 들어가는 장면은 본작 최고의 장면중 하나. 염파의 회상에서도 나오는데, 장평에서의 전투가 역사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염파에게 조언을 해주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장평에서의 전투에서 완전히 늙은 모습으로 재등장하는데, 염파가 조괄로 교체될 상황에 이르자 이마를 찧으며 피를 흘리고 토하면서도 절대 불가를 주장했으나 이미 조왕의 마음은 조괄에게 간 상황. 염파가 후방으로 소환되었다는 말을 듣자 조는 이제 진에게 유린 당할것이라며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이후 장평 대전에서 조나라가 참패 후, 장평의 일을 떠올리기 싫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며 면회를 사절한다며 평원군이 여불위에게 얘기하는 것을 끝으로 작중에서 퇴장. 여불위는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이제 조를 떠날때가 되었다고 다짐한다.[22]
  • 미월전에서는 마지막 편인 81화에 등장한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조나라로 빼돌리자 분노한 소양왕이 정말로 그를 삶아죽이려고 하는데, 인상여는 껄껄 웃으며 "오랜만에 뜨거운 목욕을 하게해주신 대왕께 감사드립니다."라며 놀려댔고, 내시들이 막 인상여를 가마에 넣으려던 순간, 미월이 등장하여 형을 멈추게하고 인상여를 "장의와 비견할 만한 훌륭한 인재."라며 극찬했다.
  • 대진제국 3기인 굴기편 16, 17화에서도 등장. 여기서는 화씨벽 사건은 물론이고 민지의 회담까지 재연했다. 소양왕은 화씨벽을 빼돌린 인상여를 용서하고 바로 민지에서 회담을 개최한다. 인상여는 효성왕에게 상대부를 제수받아 회담에 동행했으며, 이를 탐탁지 않게 보는 염파의 모습도 등장. 민지 회담에서는 분부를 들고 소양왕을 치려고 했다. 이때 소양왕의 말이 "저번에는 화씨벽을 기둥에 박겠다고 하더니만, 이번에는 항아리를 박겠다고 하는군. 알겠다. 쳐주지." 그리고 소양왕은 식사하던 젓가락으로 분부를 딱 한 번 가볍게 쳐 주었고, 인상여는 그 사실을 조나라 역사에 기록하게 한다.

[1] 刎頸之交.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목을 자른다 해도 기꺼이 자르라고 할 정도의 우정.[2] 이 때 조나라도 조무령왕에서 조혜문왕으로 이어지는 리즈시절을 구가하고 있었는데도 진나라에 비빌 수가 없었으니, 진나라는 이미 나머지 육국에게 큰 위협이 될 정도로 최강국이었던 셈이다.[3] 이때 이야기가 참 간도 큰 것이, "거리를 재 보건데, 30일 이상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 이상 넘어가면 세자님을 왕으로 모시고 진나라를 막겠습니다."(...) 혹시라도 볼모로 잡히거나 죽을 것까지 염두에 뒀다 할 수 있으며, 그만큼 이 회담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4] 그중 하나가 아이러니하게 대나라 군주를 억류한뒤 멸망시켜버린 조나라의 건국시조 조양자이다.[5] 약속을 깨려면 자기가 공적으로 맺었던 약속을 깨야만 하는 이유를 자기 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때 "저건 협박받아서 맺은 계약이니까 무효임"이라고 솔직하게 밝혀 버리면, 듣는 입장에서는 "왕이라는 작자가 고작 일반인 한 명한테 겁을 먹어서 다 이긴 전쟁을 조진거야...?" 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노왕이 명령을 시켜서 행한 일이었다면 그래도 군주 대 군주의 일이 되어서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6] '일갈'이라고 할 때의 갈 자는 고함을 지른다는 의미를 담는 글자인 동시에 그 자체가 고함소리의 의성어이기도 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발음하면 주로 캇!이라는 외침소리가 된다. 현대 중국어로 읽으면 (4성)! 로 발음된다. 한국어로 치면 ![7] 진소양왕의 형인 진무왕맹분이라는 장사가 주나라의 보물인 구정을 들어올린 것에 자극받아 구정을 들어올리다가 떨어트리는 바람에 사망했다. 맹분은 왕을 해치기는커녕 그럴 의도도 없었지만 벌을 받아 사지가 찢겨 죽었고 일가친척이 멸족당했다. 진나라 신하들이 인상여를 말리다가 소양왕이 다치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같은 벌을 받을 수 있다. 또 타국 초나라는 시신이라도 왕의 옥체에 해를 끼치는 자들은 역모죄로 사형은 물론이고 구족을 멸했다.[8] 조나라에게 함양을 준다 해도 조나라가 함양을 지킬 수 없지만, 함양을 준 이상 진나라는 수도를 잠깐이나마 이전할 수밖에 없다. 함양은 당대 최고의 도읍지로 항우가 함양에서 팽성으로 수도를 옮기려 하자 간의대부 한생은 초인목후이관이라는 극언을 내뱉을 정도로 항우가 어리석다고 평했다. 초나라도 진나라 장수 백기가 수도 영성(강릉성)을 점령하자 진성으로 수도를 이전했는데 한수와 장강이 근접하는 요충지 영성에 비해 진성은 여러모로 수도로서 부적합했다. 결국 거양성으로 수도를 이전했지만 거양성 또한 좋지 않은 곳이라 수춘성으로 또다시 수도를 이전했고 거기서 멸망했다. 잘못된 수도 이전으로 초나라는 많은 자원을 소모했고 항연의 대진 항쟁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즉 함양을 준다는 논의 자체가 나라를 뒤흔들 수 있는 엄청난 사안으로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조나라의 성 열다섯 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손해이다. 애초에 남의 나라 군주의 장수를 축원한다며 자기나라 수도를 바치는 멍청이가 있을 리도 없고.초회왕도 표트르 3세도 그 짓은 안 했다.[9] 염파열전에선 "나는 조나라 장수로 성이나 들을 공격해 싸워 대공을 세웠는데, 인상여는 혓바닥을 놀려 지위가 나보다 위에 있게 되었으며, 또 인상여는 본디 천한 출신이기에 나는 부끄러워서 그 아래에 있는 것을 참을 수 없다."그리고 곧이어 염파가 선언했다."내가 인상여를 보면 반드시 욕보이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10] 소양왕은 55년이나 재위하며 장수했던 반면, 소양왕의 뒤를 이은 효문왕은 3일 만에, 효문왕의 뒤를 이은 장양왕은 3년 만에 죽었다.[11] 인상여에게 큰 도움을 받아서 절대적인 신임을 보일법한 조 혜문왕은 이미 죽고, 위에 언급되었던 태자가 즉위한 상태였기 때문에 인상여의 조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2] 삼국지 11의 설전에는 분노 게이지가 있는데, 성격에 따라 분노시 효과가 달라진다. 대담의 경우는 3턴간 무적. 단 대갈, 무시 이 두 능력에는 막힌다.[13] 위의 문경지교 실화와는 별개로 이 작품 안에서 처음에 염파와 사이가 안 좋았던 이유도 이런 행동 때문에 염파가 고생을 겪어서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14] 하지만 부하들은 이런 인상여를 바라보며 행복하게 미소짓는 등 그들이 이 유쾌한 주군을 얼마나 앙모했는지를 보여준다.[15] 다만 인상여의 지휘력과 지력은 모두 영황보다 높게 책정되었고, 영황은 부족한 무를 담당하기 위해 무력 94의 난미박 하나를 수하로 두었지만 인상여는 무력 94의 요운을 포함하여 조아룡을 비롯한 10명의 인재가 더 있었다. 엄밀히 따질 땐 상위 호환인 셈.[16] 조아룡은 그저 인상여가 자신들의 분사를 막기 위해 한 소리였다고 생각했지만, 요운의 말로 이를 깨닫게 된다.[17] 녹오미는 자기 왕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격분했고 인방은 덤덤하게 인상여와 2번 만났다고 첨언한다.[18] 작중에서도 육대장군의 필두라고 나온다.[19] 그래서 위에 인상여가 등장하는 다른 만화인 달인전에서는 장평대전 당시엔 이미 노인으로 나온다.[20] 작중 이 조사도 염파, 인상여와 함께 조나라 삼대천 중 하나라고 나온다.[21] 주로 업적보다는 인성에 관해서 미화되는 면이 많다.[22] 계산적 면모만 보여준 여불위 조차 인상여 만큼은 특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