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20:51:25

진문후

진(晉)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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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0> 진(晉)나라 11대 국군
문후
文侯
희(姬)
진(晉)
구(仇)
아버지 진목후(晉穆侯) 비왕(費王)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805년 ~ 기원전 746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780년 ~ 기원전 746년

1. 개요2. 생애3. 사후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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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11대 국군. 진문후는 정나라정환공과 함께 서주(西周)가 견융족에게 망한 뒤 동주(東周)로 중흥하는 데 공로를 세운 진나라 군주다.

2. 생애

진문후는 원래 진목후의 태자다. 그런데 진 목후가 죽자마자 목후의 동생인 가보가 구를 쫓아내고 찬탈하니 그가 진 상숙이다. 그러나 구는 쫓겨난 동안 힘을 길러서 진상숙 4년(기원전 780년), 상숙을 기습해 죽이고 진후(晉侯)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진문후이다.

세월이 흘러 진문후 10년(기원전 770년), 유왕이 죽고 평왕이 즉위했다. 진문후가 병사를 이끌고 구원에 나서 정무공, 진양공(秦襄公)과 함께 평왕의 동천을 돕는 공로를 세웠다. 그런데, 이 틈을 타서 다른 왕족인 희여신(姬余臣)이 왕을 자칭하니 그가 휴왕이다. 그리하여 주나라는 이분되었다.

진문후 21년(기원전 761년), 청화간(清華簡)[1]의 기록에 의하면 휴왕은 이 해에 진문후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같은 사건을 《죽서기년》에서는 진문후가 휴왕을 죽였다고만 나온다. 그리고 주 왕실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문후근왕(文侯勤王), 즉 '진문후가 왕을 도와 공을 세운 사건'이라고 말한다.

같은 해에 진문후는 낙양 동천을 도왔을 뿐만이 아니라 평왕의 지위를 공고하게 한 공로를 세웠다. 진문후가 이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평왕은 진문후에게 거창[2]과 규찬[3]을 내렸는데, 거기에 '진후지명'(晉侯之命)이라는 문구를 새겼다.[4] 그후 진문후는 분수 유역으로 세력을 떨쳐 진나라의 영토를 넓혔다. 물론 이것은 평왕에게 승인을 받고서 한 일이었다.

진문후 25년(기원전 757년) 문후는 한(韓)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5]

진문후 35년(기원전 746년), 문후가 사망하자 아들 백이 뒤를 이으니 그가 진소후이다.

3. 사후

진문후가 죽은 뒤 진나라는 2개로 갈라지게 되었다. 아들인 진소후가 숙부인 성사[6]를 곡옥의 백작에 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나라는 이때부터 수십년 동안 펼쳐질 내전에 돌입하는 바람에 천하의 대세에 간여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일컬어 곡옥대진(曲沃代晉)이라 한다.

진 소후는 그 신하인 반보에게 살해되었고, 그 다음 군주인 진 효후도 곡옥 환숙의 아들인 곡옥장백에게 살해되었다. 효후의 동생인 진 악후는 곡옥으로 쳐들어가 그곳의 곡식을 불살라 없앴는데, 진 악후 때 만큼은 곡옥에게 밀리지 않았으나, 6년만에 죽어버렸고, 곡옥 장백은 그 틈을 타서 진나라의 수도 익을 쳤으나 서괵 공의 공격을 받아 물러나게 되었다. [7]

아무튼 그 일로 곡옥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곡옥 장백이 죽고 곡옥무공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여,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진애후에게 화평을 요청했고, 진 애후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후 곡옥 무공은 진 애후를 사로잡았고, 익에서 소자후를 즉위시키자 무공은 기원전 708년, 소자후를 평화협정을 하자는 구실로 불러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진후 민이 즉위했다. 기원전 679년, 곡옥 무공은 익을 쳐서 진후 민을 몰아냈다. 일설에 진후 민은 무공에게 죽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곡옥에게 병탄되었고, 곡옥 무공은 주 희왕에게 뇌물을 바쳐 진후로 인정받으니 그가 진무공이다.

4. 평가

진문후의 등장은 초기 진나라에 걸출한 군주가 등장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군주 자리를 빼앗은 숙부인 상숙을 죽인 뒤 그 자리를 되찾아 나라를 안정시키고[8] 국력을 키워 견융족으로부터 평왕을 보호하며, 그 뿐만 아니라 가짜 왕인 휴왕을 제거해 동주 왕실의 권위가 더 실추되지 않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韓)나라를 포함한 분수 유역의 소국을 합병하는 등 세력을 키워 훗날 문공이 패업을 이룰 기반을 마련했다.


[1] 칭화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죽간이라는 뜻으로, 도굴로 나온 것을 칭화대학 동문이 구매 후 기증했다.[2] 왕실의 제사에 쓰는 술.[3] 왕실의 제사에 쓰는 옥으로 만든 술잔류.[4] 참고로 이것들이 구석을 이루는 것들이 맞다.[5] 전국시대의 한(韓)나라와는 다르다. 이때 멸망한 한나라는 무왕의 아들이 봉해진 나라고 전국시대의 한나라는 곡옥환숙의 아들이자 곡옥장백의 동생인 한만이 앞서 언급된 한 땅에 봉해져서 한을 씨로 사용하게 되고 후대에 제후로 자립하여 세워진 나라이다.[6] 참고로 진 목후가 진문후의 이름을 구(仇)라 짓고, 곡옥 환숙인 성사의 이름에 성(成)이 들어갔으니 진 문후의 후손이 곡옥 환숙의 후손에게 먹힐 것이라는 말이 있었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진다.[7] 이것은 《사기》의 기록이고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하면 곡옥 장백은 주나라의 지원을 받아 진나라을 쳐서 악후를 몰아냈고, 장백이 주나라를 배반하자 주나라는 곡옥을 치면서 진애후를 즉위시킨다. 한편 쫓겨난 진후는 이미 애후가 주나라의 승인을 받고 제후가 되었기에 수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악 땅에 거주했으며 거기서 죽어서 진 악후가 되었다고 한다.[8]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서 추측의 영역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