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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옥대진

곡옥대진(曲沃代晉)[1]
시기 기원전 745년 ~ 기원전 679년[2]
장소 진(晉)나라의 수도 익(翼)성.
원인 진(晉)나라에서 봉한 곡옥(曲沃)이 강성해져 진(晉)나라를 대신하려 함.
교전국 곡옥[3]
지휘관 진(晉)나라의 군주들†[4] 곡옥(曲沃)의 군주들
병력 불명
피해 불명
결과 곡옥(曲沃)의 승리.
영향 곡옥(曲沃)이 진(晉)나라의 정통 차지.

1. 개요2. 사건 진행
2.1. 요약2.2. 복선2.3. 진소후(晉昭侯) 곡옥을 신설2.4. 진 소후를 시해하다2.5. 곡옥환숙(曲沃桓叔)의 사망2.6. 진 효후(晉孝侯)도 시해되고...2.7. 진 악후(晉鄂侯) 내쫓기다2.8. 곡옥장백(曲沃莊伯)의 사망2.9. 진 애후(晉哀侯)도 시해되다2.10. 소자후(小子侯)를 유인해 시해하다2.11. 곡옥(曲沃) 결국 진(晉)을 병탄하여 진나라를 대신하다
3. 후일담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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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달리 곡옥대익(曲沃代翼)[5], 곡옥극진(曲沃克晉)[6]이라고도 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초창기에 진(晉)나라에서 일어난 약 70여 년 동안의 내전을 일컫는 말이다. 최종적으로 진(晉)나라의 공족인 곡옥무공(曲沃武公)이 진(晉)나라의 수도인 익(翼)성에 쳐들어가 진후민(晉侯緡)을 이겨서 죽이고[7] 진(晉)나라의 정통을 곡옥이 차지해 버린 즉 직계 자손[8] 대신 방계 자손[9]이 찬탈한 최초의 사건이다.[10]

춘추시대 초기 진(晉)나라에서 발생한 수차례의 골육상잔(骨肉相殘)으로 정확히 67년 동안 싸웠다. 그 원인은 곡옥의 백작이자 진(晉)나라의 방계 공족인 곡옥환숙(曲沃桓叔), 곡옥장백(曲沃莊伯), 진무공(晉武公) 등 조부 3대가 직계 공족을 죽이거나 내쫓아 그들을 멸해 그들이 진(晉)나라의 정통이 된 사건이다.

2. 사건 진행

2.1. 요약

기원전 745년, 진 소후(晉昭侯)가 숙부인 희성사(姬成師)를 곡옥 땅에 봉했다. 희성사는 곡옥환숙이 되었고, 곡옥장백, 곡옥무공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705년 겨울,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는 기원전 706년, 당시 곡옥의 세력이 나날이 강성해져서 곡옥무공이 진소자후(晉小子侯)를 유인해 죽였다. 이에 주환왕이 괵중과 함께 곡옥무공을 치는 바람에 다시 곡옥으로 돌아갔다. 주환왕은 진애후(晉哀侯)의 동생인 진후 민을 진(晉)나라의 군주로 세우니 곡옥은 진(晉)나라를 병합시키지 못했다.

기원전 678년, 곡옥무공은 또다시 진후 민을 쳐서 진(晉)나라를 멸했다. 그리고 진(晉)나라에서 약탈한 재물을 주희왕에게 바치니 주희왕은 곡옥무공을 진후에 봉했다. 이로써 곡옥환숙의 자손이 진 문후의 자손에게서 진(晉)나라를 빼앗았다.

2.2. 복선

진(晉)나라의 시조인 당숙우(唐叔虞) 이래로 진(晉)나라는 주왕실의 고굉지신으로 활약했다.

진 목후 7년(기원전 806년), 주선왕을 따라 조융과 문융과 싸워 패배했을 때, 공자 구(仇)[11]를 얻었다. 이름을 '구'로 지은 이유는 융족들에게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진 목후 10년(기원전 802년), 진목후(晉穆侯)는 천무의 융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공자 성사(成師)를 낳았다.[12] 그러자 국인들이 말했다.
"공자 구의 이름이 불길하여 상서롭지 못하고, 반대로 성사의 이름은 길하다. 그러니 성사가 태자 구를 멸할 것이다."
기원전 785년, 진 목후가 죽고, 그 아우인 진상숙(晉殤叔)이 즉위했으나 기원전 780년, 태자 구가 상숙을 죽이고 즉위했다. 그가 바로 진문후(晉文侯)이다.

기원전 745년, 진 문후가 죽고 태자 백(伯)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소후(晉昭侯)다.

2.3. 진소후(晉昭侯) 곡옥을 신설

진 소후 원년(기원전 745년), 진 소후(晉昭侯)는 그 숙부인 희성사를 곡옥에 봉하니 그가 바로 곡옥환숙이다. 진 정후의 서손이자 곡옥환숙의 작은 할아버지였던 난빈(欒賓)의 보좌를 받아 곡옥이 진(晉)나라의 수도인 익보다 더 흥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곡옥환숙은 익을 병탄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당연히 진(晉)나라에서도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닌지라 대부 사복(師服)이 이를 우려했다.

2.4. 진 소후를 시해하다

분봉 당시 곡옥환숙의 나이는 58세로 나이에 걸맞게 정치 경험이 지극히 풍부했다. 그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진(晉)나라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진(晉)나라와 곡옥의 싸움은 날로 날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이유는 곡옥환숙의 세력이 진(晉)나라에 도전할 만큼 강대해졌기 때문이다.

진 소후 7년(기원전 739년), 진(晉)나라의 대신이었던 반보가 진 소후를 시해하고 곡옥환숙을 맞아들였다.(반보의 난) 그러나 진(晉)나라의 국인들이 이에 항거해 합심하여 곡옥환숙을 몰아냈다. 그리하여 곡옥환숙은 진(晉)나라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진(晉)나라의 국인들이 진 소후의 아들인 태자 평(平)을 세우니 그가 바로 진효후(晉孝侯)다. 진 효후는 반역자들인 반보 일당을 주살했다. 이것이 곡옥대진 제1전투다. 여기서 곡옥이 패배하고 진(晉)나라가 이겼다.

2.5. 곡옥환숙(曲沃桓叔)의 사망

진 효후 8년(기원전 731년), 곡옥환숙이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선(鱓)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곡옥장백이다. 곡옥장백은 아버지 환숙 성사의 유지를 이어 진(晉)나라를 곡옥이 대신하게 하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혈연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싸움을 그치지 못했던 것이다.[13]

2.6. 진 효후(晉孝侯)도 시해되고...

진 효후 15년(기원전 724년), 곡옥장백이 자객을 보내 진(晉)나라의 수도인 익에서 진 효후를 살해했다. 그러자 진(晉)나라의 국인들이 순(荀)나라 등 여러 제후국들의 원조를 받아 반격을 가했고, 곡옥장백은 다시 곡옥으로 되쫓겨갔다.[14] 그리고 국인들은 진 효후의 동생인 공자 극(郤)을 세우니 그가 바로 진악후(晉鄂侯)다. 이것이 곡옥대진 제2전투다. 여기서도 곡옥이 패배하고 진(晉)나라가 승리했다.

2.7. 진 악후(晉鄂侯) 내쫓기다

진 악후 6년(기원전 718년) 봄, 곡옥장백이 동주 왕실에 뇌물을 바쳐, 정나라, 형나라와 함께 다시 진(晉)나라를 쳤다. 주환왕은 대부 윤씨와 과씨에게 병사를 주어 이들을 돕도록 했다. 이에 곡옥군의 사기가 매우 드높아졌다. 진 악후가 패배해 수읍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곡옥장백이 환왕에게 배신을 때렸으므로 주환왕이 크게 노했다. 가을 주환왕은 괵공을 파견하여 곡옥장백을 토벌했다. 이에 곡옥장백은 또다시 실패했다. 그러고는 곡옥으로 되돌아갔다. 주환왕은 악후의 아들인 광(光)을 진후(晉侯)로 세우니 그가 바로 진 애후다. 이것이 곡옥대진 제3전투다. 여기서도 곡옥이 패배했고 진(晉)나라가 승리했으며, 곡옥의 힘이 많이 빠졌다.[15]

2.8. 곡옥장백(曲沃莊伯)의 사망

진 애후 2년(기원전 716년), 곡옥장백이 분사했고, 그 아들인 칭(稱)이 이으니 그가 바로 곡옥무공이다.

2.9. 진 애후(晉哀侯)도 시해되다

진 애후 8년(기원전 710년), 진 애후가 형정 땅 남쪽에 침입했다.

진 애후 9년(기원전 709년), 이에 형정과 곡옥무공이 짜고 진(晉)나라를 쳤다. 그리하여 진(晉)나라와 곡옥의 내전이 재점화되었다. 결국 곡옥무공이 분습 땅에서 진 애후를 몰아냈다. 밤중에 곡옥무공이 진 애후를 습격해 사로잡았다. 그러나 난공숙이 진(晉)나라 공실을 받들어 저항을 시도하자 곡옥무공은 진 애후를 시해하고 진(晉)나라를 차지하려고 했다. 이에 진(晉)나라에서 진 애후의 아들을 세우니 그가 바로 진 소자후다. 이것이 곡옥대진 제4전투다.

2.10. 소자후(小子侯)를 유인해 시해하다

기원전 705년, 곡옥무공이 진 소자후를 유인해 시해했다. 이에 주환왕은 괵중을 보내 곡옥무공을 치도록했다. 곡옥무공이 그 기세에 눌려 곡옥으로 쫓겨갔다. 주환왕이 진 애후의 동생인 민을 진후로 세우니 그가 바로 진후 민이다. 이것이 곡옥대진 제5전투다.

2.11. 곡옥(曲沃) 결국 진(晉)을 병탄하여 진나라를 대신하다

진후 민 28년(기원전 678년), 곡옥무공이 진후 민을 쳐서 진(晉)나라를 멸하여 마침내 병탄했다. 이때는 동주 왕실의 개입을 사전에 막았기에 승리가 가능했었던 것이다. 곡옥무공은 약탈한 보물을 주희왕에게 바치니 주희왕은 1군만 두는 조건으로 곡옥무공을 진(晉)나라의 군주에 정식 임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곡옥무공이 아닌 진 무공(晉武公)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일로 곡옥환숙 희성사의 일족이 진 문후의 일족을 멸해 진(晉)나라의 정통을 잇게 되었다. 곡옥무공은 수도를 익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晉)이라 했다. 이것은 곡옥환숙이 분봉을 받은 지 꼭 67년 만의 일이었다.

3. 후일담

곡옥환숙과 곡옥장백 및 진 문후 자손의 세력이 진 무공대가 아닌 진헌공(晉獻公) 대에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진 헌공은 대부 사위(士蔿)를 시켜 이들을 숙청했다. 그리하여 남은 자들이 괵나라로 달아났고, 그들 중 극씨(郤氏)[16][17], 난씨(欒氏), 한씨(韓氏) 등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이 훗날 진(晉)나라의 경이 되었다.[18] 진문공(晉文公) 대에 이들의 도움으로 패업을 이룩했으나 이들이 끝내는 진(晉)나라를 잠식해 삼가분진(三家分晉)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4. 평가

곡옥환숙 희성사가 곡옥을 분봉받은 후 67년 동안 곡옥의 군주들은 진(晉)나라의 군주 5명을 시해하고, 1명의 군주를 축출했으며, 끝내는 천자국인 동주로부터 제후로 인정받았다. 이 일로 진(晉)나라가 팽창해 150년 동안 패업을 유지하게 되었다.


[1] 곡옥이 진(晉)나라를 대신한다는 뜻이다. 해석하기에 따라 곡옥이 진(晉)나라의 대를 이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2] 내내 내전만 벌인 것은 아니고, 휴전기도 있었다.[3] 단 이 나라들 외에 주나라, 괵나라, 정나라, 형나라 등도 개입했다.[4] 설에 따라 오락가락하지만, 2명 내지 1명을 빼고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5] 이것은 국호보다는 도읍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6] 곡옥이 진(晉)나라를 이기다라는 뜻이다.[7] 일설에는 그냥 내쫓겼다고 전해진다.[8] 진문후(晉文侯)의 자손.[9] 곡옥환숙(曲沃桓叔)의 자손.[10] 비슷한 사례로 훗날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송(宋)나라의 군주인 송후환공(宋後桓公)의 송씨(宋氏)를 축출하고, 방계 공족인 척성군의 세력 즉 대씨(戴氏)가 송나라의 공위를 대신한 사건과 비슷하다.[11] 훗날의 진 문후[12]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뜻.[13] 당시 기준으로 진 효후와 곡옥장백이 8촌 이내이므로 가까운 친척이다.[14] 그만큼 곡옥이 강성해졌던 것으로 풀이된다.[15] 아예 천자국인 주나라의 공격을 받아서 쫓겨났고, 오래도록 전쟁에 나서지 못했으니 그럴만도 하다.[16] 상술된 진 문후의 자손, 정확히는 진 악후의 자손이다.[17] 근거는 옛날에 조상의 이름을 따서 씨를 만드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환왕의 휘에서 딴 임(林)씨가 있다.[18] 다만 극씨와 난씨는 춘추시대 중후기에 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