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6 22:21:45

제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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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姜齊)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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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齊)나라 18대 국군'''
강(姜)
여(呂)
소(昭)
아버지 제환공(齊桓公) 강소백(姜小白)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33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642년 ~ 기원전 633년

1. 개요2. 치세에 일어난 일

1. 개요

제나라의 제18대 군주.

패자 제환공의 아들로 이름은 소(昭)였다. 공자 무휴의 이복동생이자 제소공, 제의공의 이복형으로, 어머니는 정희(鄭姬)였다.[1] 제환공이 그를 송양공(宋襄公)에게 맡겼고, 그 결과는 신의 한수여서 역아와 수초가 무휴를 군주로 올리고 전횡을 일삼자 제환공의 부탁을 받은 송양공조(曹)나라, 위(衛)나라, 주(邾)나라와 함께 강소를 데리고 제나라를 침공해 수초와 무휴까지 죽이고 공위에 옹립하니 그가 바로 제효공이었다.

2. 치세에 일어난 일

제효공 원년(기원전 642년) 5월, 송양공의 도움으로 즉위를 공식 선언했다.[2]

제효공 2년(기원전 641년) 가을, 진목공(陳穆公)이[3] 제후들과 회맹했는데, 그것은 제환공이 덕을 잊지 않은 덕택이었다. 겨울에 노나라, 진(陳)나라, 채나라, 초나라, 정나라가 제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제효공 3년(기원전 640년) 가을, 제나라는 적족과 함께 형나라에서 회맹하니 형나라는 스스로를 지키기 어렵다고 여겼다.[4]

제효공 4년(기원전 639년) 봄, 적족이 위나라를 칠 때, 송나라, 제나라, 초나라가 송나라 땅인 수지에서 회맹했다. 가을에는 송양공, 초성왕(楚成王), 채장후(蔡莊侯), 정문공(鄭文公), 허희공(許僖公), 조공공(曹共公)이 분 땅에서 회맹했다. 이때 초나라의 성왕이 무례한 언사를 했다는 이유로 송양공을 가두었다.[5] 12월 계축일 노나라가 박 땅에서 회맹에 참여했고, 이때 송양공이 풀려났다.

제효공 6년(기원전 637년), 효공은 송나라를 쳐서 민읍을 포위했다. 여름에 진(晉)나라의 공자였던 희중이(姬重耳)가 호모와 제강의 계략으로 제나라를 떠났다. 이때 송양공이 1년 전에 벌어졌던 홍수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터져 죽었다.

제효공 9년(기원전 634년), 효공이 북성을 치자 위나라가 제나라를 쳤다. 결국 조에서 회맹했다.

제효공 10년(기원전 633년), 효공이 여름 6월 경인일에 죽었다. 그러자 아우인 강반(姜潘)이 개방과 함께 모의하여 효공의 아들, 즉 조카를 죽이고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제소공(齊昭公)이다.


[1] 정나라 여자라는 뜻이다.[2] 송양공의 도움으로 제나라의 정국이 안정되었다.[3] 두 번째 패자였던 진문공(晉文公)을 도운 진목공(秦穆公)이 아니다.[4] 왜냐하면 형나라는 적족에게 망했는데, 제환공이 중흥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국력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5] 정확히는 패자 자리를 다투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