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姜齊) 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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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齊)나라 24대 국군''' | |||
성 | 강(姜) | ||
씨 | 여(呂) | ||
휘 | 환(環) | ||
아버지 | 제경공(齊頃公) 강무야(姜無野) | ||
어머니 | 성맹자(聲孟子)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554년 |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581년 ~ 기원전 554년 |
1. 개요
제나라의 제24대 군주. 제경공(齊頃公)의 아들. 제장공의 아버지.[1] 이때 내나라가 멸망했다고 한다.[2]2. 치세
제영공 원년(기원전 581년), 진(晉)나라의 군주 진여공(晉厲公)은 제영공, 송공공, 노성공, 위정공, 조선공과 회담하고 그들과 연합해 정나라를 쳤다.제영공 2년(기원전 580년), 노나라의 숙손교여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방문했다.
제영공 4년(기원전 578년), 진 여공은 제영공, 송공공, 위정공, 정성공, 조선공[3], 주나라(邾) 대부[4], 등나라(滕) 대부[5]와 회담하고 이들과 연합해 진(秦)나라를 쳤다.
제영공 5년(기원전 577년), 노나라의 숙손교여가 제나라로 가서 노성공의 부인이 될 여자, 강씨를 맞이하였다. 원래 예법상 임금이 직접 자신의 부인을 맞이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종묘에 이를 알려야 했으나 노성공은 대부를 보내 부인을 맞이하게 하여 당시 일부 학자들의 빈축을 샀다.
제영공 6년(기원전 576년), 제영공은 국좌를 보내 진 여공과 척땅에서 회맹했다. 위나라, 정나라, 조나라 임금과 송나라 세자 성, 주나라(邾) 대부도 함께 참여했는데, 이 자리에서 진여공이 조나라 임금을 체포해 경사(京師)로 보내는 만행을 저지른다. 조나라는 평소에도 진나라를 잘 섬겼음에도 이런 취급을 당했으니 당연히 이 사건은 회맹에 참여한 다른 제후국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결국 이는 당시 초나라에게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던 정나라가 진나라를 버리고 초나라에 붙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 같은 해 겨울, 대부 고무구(高無咎)[6]를 보내 진(晉)나라의 대부 사섭, 노나라 대부 숙손교여, 송나라 대부 화원(華元), 위(衛)나라 대부 손임보, 정나라 공자 추, 주(邾)나라 대부와 함께 오(吳)나라 종리 땅에서 회맹했다.
제영공 7년(기원전 575년) 가을, 제영공은 진 여공, 노성공, 위헌공, 송나라 대부 화원, 주(邾)나라 대부와 사수 땅에서 회맹했는데, 그 결과 국좌에게 진 여공과 함께 회담에 참여한 제후국 연합군을 지휘하여 정나라를 쳤다. 같은 해 10월, 노나라의 권신 숙손교여가 다른 권세가인 계손씨와 맹손씨 양가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역공당해 제나라로 망명했다.
제영공 8년(기원전 574년), 제영공은 진 여공과 함께 정나라를 치고 진나라는 가릉 땅에서 제후들과 회맹하였다. 고무구의 고씨 가문과 포견(鮑牽)의 포씨 가문은 제영공이 회맹을 나간 사이 수도를 지키고 있었는데, 회맹을 마친 영공이 수도에 들어오려하자 성문을 굳게 닫고 적국의 간첩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이를 전해 들은 제영공의 생모(生母) 성맹자(聲孟子)는 평소 포견에게 앙심이 있었기에[7] 영공을 찾아가 고씨와 포씨가 공자 각을 옹립하려 하고 국좌는 이를 알고도 묵인한다며 참소한다. 모친의 말만 믿고 대노한 영공은 뒤늦게서야 성문을 열어준 포견과 고무구를 추궁하여 포견은 월형에 처하고 고무구는 추방한다.
추방당한 고무구는 거(莒)나라로 도주, 고약(高弱)은 고씨 가문을 이끌고 노(盧)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국좌는 함께 정나라를 포위하던 다른 제후들에게 본국에 내란이 일어났다며 양해를 구하고, 군사를 이끌고 귀국한다. 그러나 국좌 역시 참소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이대로 귀국하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는지, 고씨 가문의 반란을 진압하기는 커녕 반란 진압을 위해 노를 포위 중이던 경극을 참살하고 곡(穀)으로 가 반란을 일으킨다. 이처럼 사태가 종잡을 수 없게 되자 영공은 결국 서관(徐關)에서 국좌와 맹약하고 그를 복직시켰다. 그러자 노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고씨 가문이 항복했고, 포씨 가문은 노나라 시효숙(施孝叔)의 가신으로 있던 포국(鮑國)이 귀국하면서 두 가문 또한 원상복귀 되었다. 같은 해 겨울 제영공은 또 사람을 보내 진 여공과 함께 정나라를 쳤다.
제영공 9년(기원전 573년), 제영공은 국좌를 살해하고 국씨 세력을 멸하기로 마음을 먹고 사관인 화면(華免)에게 이를 시행하라 명했다. 화면은 먼저 국좌를 내궁 옆 당으로 불러 창으로 찔러 죽였다. 주군의 명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귀국해 경극을 죽인 다음 내란을 일으킨 죄를 물어 죽인 것이다. 또, 청(淸)땅의 사람들에게 국좌의 아들 국승(國勝)을 죽이게 하니, 국약(國弱)은 노나라로 도망가고 국씨를 섬기던 왕추(王湫) 내(萊)나라로 도망갔다. 훗날 영공이 국약을 다시 제나라로 불러들여 국씨 명맥을 잇게 하였으나 이전과 같은 권세는 누리지 못한다. 그리고 국좌에게 죽은 경극의 아들 경봉(慶封)을 대부로 임명하고 경좌(慶佐)를 사구(司寇)에 임명하면서 제나라 경씨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진나라 대부 난서(欒書)가 진여공을 시해하고 공손 주(周)를 올리니 그가 바로 진도공(晉悼公)이다. 이때 제영공은 최저(崔杼)와 함게 허정 땅에서 회맹했다.
제영공 10년(기원전 572년), 진 도공이 송나라의 팽성을 칠 때 제나라가 오지 않자 진 도공이 제나라를 치니 제영공은 태자 광을 인질로 보냈다.
제영공 11년(기원전 571년) 봄, 제영공이 내(萊)나라를 쳤다. 내나라 사람들은 정여자(正輿子)를 보내 영공이 총애하던 환관 숙사위(夙沙衛)에게 좋은 말과 소 100두 씩 뇌물로 바치니 제나라 군대가 물러났다. 그해 가을, 진나라 대부 순앵(荀罌)[8]이 제후들과 척(戚)땅에서 회맹했는데, 제나라, 등(滕)나라, 설나라, 소주(小邾)가 참여하지 못했다. 다시 회맹해 정나라를 칠 때 노나라 대부 중손멸이 순앵에게 정나라 땅 호뢰에서 성을 쌓자고 건의해 순앵이 거기에 따랐다.
제영공 12년(기원전 570년), 진 도공은 정나라를 복속시키고, 여러 제후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대부 사개(士匃)를 제나라로 보내 제영공과 화친을 맺고자 했다. 제영공은 속으로 내키지 않았으나 강대국인 진나라와 사이가 벌어지는 건 원치 않아 결국 진나라와 맹약하기로 한다. 진도공은 제후들과 계택(鷄澤)에서 회맹하고 오(吳)나라와 화친하기를 원해 순회(荀會)를 보내 회수(淮水)가에서 맞이하려 했으나 오나라는 회맹에 오지 않았다.[9]
제영공 15년(기원전 567년), 제나라의 안약(晏弱)이 동양(東陽)에 성벽을 둘러쌓아 내나라를 완전히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진무우, 남곽언 등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니 왕추와 정여자는 군을 모아 맞서싸웠지만 크게 패하였고, 결국 내나라 수도까지 뚫리고 만다. 내공공은 수도를 버리고 당(堂)땅까지 도망갔지만 안약의 추격을 받아 그 곳에서 사망하고, 왕추와 정여자는 거나라로 망명했다. 그러나 제나라의 보복이 두려웠던 거나라 사람들은 그 둘을 죽였다. 내나라 완전 복속에 전공이 제일 컸던 안약은 이유(夷維) 땅을 하사받는다.
제영공 16년(기원전 566년), 태자 광과 진 도공은 척땅에서 회맹해 진(陳)나라를 구했다.
제영공 17년(기원전 565년), 대부 고후는 노나라 대부 계손숙, 송나라 대부 향술, 위나라 대부 영식, 주(邾)나라 대부와 함께 진 도공과 형구(邢丘)에서 회맹했다.
제영공 18년(기원전 564년) 겨울, 제영공은 최저에게 군사를 주어 노나라의 계무자, 송나라의 황운과 함께 진나라의 순앵과 사개가 지휘하는 중군을 따라 정나라를 공격했다. 연합군의 군세가 드세자 정나라는 항복하고 진나라와 맹약했다. 이후 태자 광이 진 도공과 희땅에서 회맹했다.
제영공 19년(기원전 563년) 3월, 제나라 대부 고후는 태자 광의 고문이 되어 종리(鍾離)에서의 회합에 참여했는데 무례한 일이 발생하여 진나라의 사장자(士莊子)에게 비난을 받았다. 결국 4월에 다시 사(柤)땅에서 회합을 진행하였는데 굳이 사에서 회합을 한 이유는 오왕 수몽도 함께 참여시키기 위함이었다. 같은 해 가을, 제나라 대부 최저와 태자 광이 진 도공과 함께 정나라를 쳤다.
제영공 22년(기원전 560년), 태자 광이 진나라를 도와 정나라를 쳤다. 송나라 향술과 제나라의 태자 광이 먼저 정나라에 당도하여 정나라 수도 동문을 공략하기 시작했고, 진나라의 순앵은 정나라 서쪽 변경을 돌아 옛 허나라 영토를 통해 동쪽으로 공격했고, 위나라의 손임보는 북쪽으로 압박을 가했다. 연합군은 북림(北林)에 결집해 군을 재정비하고 수도를 포위하니 정나라는 두려워 박(亳)땅에서 강화를 한다.
제영공 23년(기원전 559년), 주영왕이 왕후를 제나라로부터 맞이하려 했다. 제영공은 주영왕의 요청을 수락하고 대부 음리(陰里)를 제나라로 보내 그녀를 맞이하게 했다. 이후 영공이 진(晉)나라에 조회하자 대부 사방(士魴)이 그에게 사례를 했다.
3. 노나라와의 치열한 전쟁
제 영공 24년(기원전 558년) 여름, 노나라의 북비 땅을 쳤다.제 영공 25년(기원전 557년) 봄, 다시 노나라의 북비 땅을 쳤다. 가을에도 마찬가지.
제 영공 26년(기원전 556년) 가을, 제나라는 그 길로 노나라의 도 땅을 쳤다. 고후는 노나라의 방 땅을 포위하고 같은 해 겨울 주(邾)나라와 함께 노나라를 쳤다.
제 영공 27년(기원전 555년) 가을, 또 노나라의 북비 땅을 쳤다.[10] 그러자 진(晉)나라는 그 꼴을 그냥 놔두지 않고 노나라를 돕기 위해 송나라, 위나라, 정나라, 조나라, 거나라, 주나라, 등나라, 설나라, 기(杞)나라 소주 등과 함께 제나라를 치니 제나라는 평음 땅에서 막았다. 그러자 한 사람이 간했는데, 제영공은 듣지 않았고, 결국 패해 임치로 달아났다. 안영이 그 일을 두고 또 간했으나 듣지 않아 임치성은 지켰으나 성이 불에 타는 것은 막지 못했다.
4. 제영공의 죽음
제영공 28년(기원전 554년), 노나라 여자 안의희의 잉첩 성희에게서 태자 광을 낳았는데, 중희가 아를 낳자 융희를 총애한 그는 아를 그녀에게 맡겼다. 그리고 융희는 아를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중희가 반대했고, 제영공이 반대했다. 그러다가 제영공이 병나자 최저가 태자 광을 세우니 그가 바로 제장공이다.[1] 그는 달리 제 후장공이라고도 한다.[2] 즉 산동 반도 지역을 완전 장악했다는 말이다.[3] 이 전쟁을 치르다 진중에서 죽는다. 전사나 부상 악화에 의한 사망은 아니고 자연사[4] 이름 불명[5] 이름 불명[6] 제나라의 유력 가문 고씨 출신으로 제혜공과 제경공을 섬겼던 고고(高固)의 아들이다.[7] 제나라 경(慶)씨 가문의 경극과 불륜 관계였지만 이 사실을 우연히 포견에게 들켰다. 포견은 바로 국좌에게 보고했고, 국좌는 경극을 불러 꾸짖자 풀이 죽은 경극은 성맹자와의 밀회를 줄였다. 어느 날, 성맹자가 경극에게 발길이 뜸해진 이유를 물으니 경극은 국좌와 포견 때문이라 고백했고 이를 들은 성맹자는 국좌와 포견을 미워하게 된다.[8] 씨를 지씨로 해서 지앵이라고도 불린다. 지백의 조상이다.[9] 회맹 이후 2년 뒤에 오나라는 대부 수월(壽越)을 진나라 사신으로 보내 불참한 이유를 설명하고 척(戚)땅에서 진나라와 오나라가 따로 회합한다.[10] 여태껏 북비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