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순장(殉葬)은 장례 방식 중의 하나로, 죽은 지도자가 사후에도 그 지위를 누리며 살기를 기원하며 다른 존재를 같이 묻는 장례를 말한다.사람을 같이 묻는 게 가장 유명하지만, 사람이나 인형 외에도 (애완용이나 식용, 원예용) 동물이나 식물을 묻는 케이스도 있었다. 보통 매체에서 표현하는 순장은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이 함께 묻히던 악습을 일컫는 용도로 쓰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거나 함께 묻어 달라고 한 물건을 묻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 죽는 게 아니므로 순장이 아닌 부장품이라 부른다.
순장은 죽은 시기가 다르더라도 한 무덤에 묻는 합장과는 당연히 다르다.
2. 역사
순장은 전 세계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지만, 그 중에서도 고대 동아시아권에서 많이 자행되었다. 방식은 주로 2가지로, 같이 묻을 존재를 먼저 살해한 다음 시신을 묻는 방식과 생매장이 있었다. 이는 순장된 시체의 깨진 두개골 등 여러 상처를 통해 알 수 있다.동아시아의 내세관이 짙게 드러난 장례 방식으로, 사후에도 삶이 이어진다고 믿은 권력자에게 예속된 하민들이 함께 부장되는 경우가 제일 흔했다. 허나 무덤의 주인공이 왕 등 높은 사람이면 신하나 가족 등 생전의 지도자에게 호감을 샀던 지체 높은 남녀들도 순장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드물지만 신망받던 군주가 죽었을 때 베르테르 효과의 사례처럼 슬픔을 못 이겨 자원해서 순장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순사라고 칭하기도 한다. 고구려 동천왕이 대표적인 사례로, 죽은 뒤 중천왕이 그의 유언에 따라 순장을 금했으나 정작 장례일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이 일단 기록상으론 매우 많았다고 한다. 허나 '살인 순장'이 많은 여러 순장 케이스를 볼 때 이런 '자살 순장'은 일반적인 케이스는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점차 복잡한 사회가 되자, 권력 다툼에서 정적들을 합법적이면서 효율적으로 숙청하는 용도로도 종종 쓰였다. 주로 권력자가 죽기 전 마음에 안 들었던 부하를 하나 이상 지목하며 "내가 죽을 때 저 충성스런 부하 녀석(들)도 같이 좀 묻어주면 좋겠구나"라거나, 파벌 싸움에서 이긴 쪽이 진 쪽에게 "저승의 고인께서 자네들의 도움을 꼭 필요로 하실 거야, 안 그런가?"라는 식으로 행해졌다.
물론 결초보은의 경우처럼 유언에 의해 순장을 안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죽은 자는 결정권이 없기에 순장 여부는 영향력 있는 후계자들의 의사가 반영되기가 쉬웠다. 결초보은의 일화에서도 최종적으로 서모의 처우를 결정한 사람은 망자의 장남이었다. 장남은 서모를 순장시키라는 아버지의 나중 유언을 무시하기로 결정하고, 원래의 유언대로 친정으로 돌려보내 개가시켰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비판하는 등 가혹한 풍습이라는 인식이 강해졌거니와 인적 손실이나 재산상 손실도 늘어나자, 나중에는 사람 대신 용(俑)이라는 인형을 대신 묻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용(俑)은 대부분 작은 인형 크기지만 진시황릉의 병마용처럼 실제 크기를 그대로 따라 한 것도 있다. 그러나 순장 자체는 규모가 줄었어도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인형을 묻는 풍습도 시대가 흘러 유교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주류가 되면서 점차 사라졌는데, 유학의 시조이자 당대의 생명경시 풍조를 전방위적으로 비판했던 공자가 순장 풍습을 극히 혐오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순장이야 두말할 나위 없고, 인간이 인간을 산 채로 묻는 행위를 흉내내기 위해 만든 용(俑) 또한 강하게 반대하여 이거 만든 이는 대가 끊기리라고 저주하였다. 또 생명 존중과 자비를 내세운 불교의 전래 역시 순장 폐지에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지역에서는 순장이 부활과 금지를 반복하며 장기간 이어졌다.
3. 실제 사례
청동기 시대부터 세계 각지에 이런 사례가 존재한다. 특히 동아시아 일부 문명권에서 많이 행해졌다.3.1. 한국사
한국사에도 순장 풍습이 있었다. 시기로는 삼국시대인 500년대 초고대국가 시절까지로, 반대로 말하면 고대왕국 시기를 벗어난 시점에서 한반도에선 순장 풍습이 없어졌으며, 부장품조차도 점차 줄여나갔다.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순장을 비교적 빨리 폐지한 축에 속한다.고조선의 경우 의외라면 의외로 기록도 없고 관련 유적도 없다. 강상 유적이 고조선의 유적이며 순장묘라는 주장이 발굴 초기에 제시된 바 있었으나, 1980년대에 이미 반박이 제기되었다. 강상 유적이 순장묘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 고조선과 관련성이 높다고 학계에서 주로 보는 유적은 이쪽보다 십이대영자 유적이다.
한국사에서 순장 풍습이 활발했던 나라는 부여와 가야, 신라 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순장 대상으로 무덤 주인을 저승에서도 따를 노비 같은 하층민 위주였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몇몇 묘에서는 꽤 높은 신분으로 추정되는 순장자나 순장자용 묘가 발견된다. 때문에 학계에서도 연구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를 근거로 들어 부여, 가야, 신라 등이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한국사에서 순장이 가장 활발히 행해졌던 나라는 대가야였다. 신라나 금관가야, 아라가야도 순장을 했지만 대부분 1~5명 수준이었던 반면, 대가야는 발굴조사를 통해 한국사에서 독보적으로 순장을 많이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일례로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는 대형 고분마다 순장덧널이 수십 개씩 출토되었다.
대가야의 순장으로는 총 22명 18기의 유골이 출토된 44호분과 4명의 유골이 발견된 45호분이 유명하다. 순장곽의 숫자와 크기로 볼 때 44호분은 약 36명, 45호분은 약 12명 정도가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도굴꾼 때문에 사라진 순장곽도 추가로 있을 수 있으므로 순장자가 더 많았을 가능성도 있다. 연령대는 성인부터 10세 이하 여아까지 다양하며 칼이나 둔기에 의한 사망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런 대가야의 대량 순장 풍습 덕분에 현대까지 가야는 도굴당하지 않고 잘 보존된 고분이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시신과 같이 묻었던 부장품을 노리는 도굴꾼들은 과거 왕이나 고위 귀족이었을 무덤 주인공의 덧널을 가장 먼저 노린다. 그리고 유물의 급이 떨어지는 주변 순장 무덤은 건드리지 않거나 발견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현대에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대가야 쪽 유물은 순장덧널에서 나온 유물이 많다. 순장이 악습이기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가야사 연구엔 도움을 주는 의외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대가야 외 김해 금관국의 왕릉급 고분군인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경우 왕급 무덤은 시기에 따라 순장자가 1~5인, 최전성기인 5세기 초가 되면 왕급이 아닌 중형 무덤에도 2명의 순장자가 매장되었다. 대가야와 다르게 전성기에도 순장자가 6명을 넘기지 않는다. 함안 아라가야의 경우 가야 다른 지역과 다르게 순장곽을 따로 만들지 않고 큰 석실 하나만 만든 뒤 무덤 주인의 발치에 2~6명을 순장하는 식이었다. 그 외에도 고고학 조사 결과 경주 황남동 98호 남분, 영덕 괴시리 고분, 의성 대리 고분,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11호분과 22호분 등 신라권과 가야권 여러 지역에서 금관가야와 비슷한 방식인 주부곽 소규모 순장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무덤 주인공과 완전히 독립된 순장곽이 여러개인 다곽 순장묘는 다른 가야에선 없고 오직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만 나온다. 주부곽+순장곽으로 된 중간 형태도 고령 지산동 일부32호분, 34호분)와 고령 근처 지방인 합천 옥전 고분군, 함양 백천리 고분군 정도 범위에서만 조사되는데 전부 대가야의 영향권이다.
부여의 경우 현재까지 순장을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고고학적 유물은 확인된 바 없으나, 중국 사서에는 순장 풍습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 따르면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데, 많을 때는 백여 명에 이른다.”(殺人徇葬 多者百數)고 하였고,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조에도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을 순장한다.”(死者以生人殉葬)라는 구절이 남아있다.
고구려는 관련 기록도 없고 여러 고분을 대상으로 발굴 조사도 진행되었으나 순장 흔적이 나온 적은 없다.[1] 그나마 연관된 기록으론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천왕 22년(248) 왕이 붕어하자 가까운 신하들이 스스로 순사하려고 했고 사왕(중천왕)이 이는 예가 아니라 하면서 금했으나, 정작 장례일에 이르자 스스로 목숨을 버린 자가 매우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일반적인 순장과는 거리가 있다.
백제도 고구려와 비슷하게 관련 기록도 없고 고분에서 순장의 흔적이 발견된 적도 없다. 고구려나 백제 지도층이 순장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부여 계승 의식을 표출했던 걸 고려하면 의외라면 의외인 점. 부여 기록 자체가 불명확하거나 좋게 보면 부여 계승 의식을 표방했지만 악습은 따를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경우 초기에는 순장을 했으며, 마립간이 붕어하면 살아있는 남녀 각각 5명씩을 묻었다고 한다. 그러나 6세기 초인 지증왕 3년(502)부터 공식적으로 이 제도를 금지했다. 이 때문인지 신라왕릉도 하대로 내려올수록 금관과 같은 화려한 위세품은 사라지고, 불교의 영향으로 고인을 화장한 뼛가루를 담은 유골함과 작은 토우 정도만 넣는 것으로 바뀐다.
순장을 마지막 시기까지 유지하던 가야가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에 정복되면서 멸망함에 따라 한국사에서 순장 제도는 자취를 감춘다. 일례로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는 대가야가 멸망하고 신라의 일부가 된 이후에 조성된 무덤도 발굴되었다. 지금의 대가야박물관 부지에서 신라식 묘제인 횡구식 석실, 횡혈식 석실분 34기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순장 흔적은 단 하나도 없었다. 순장을 금지한 신라 법률이 신라가 정복한 구 가야 영토에서도 일괄 적용되어 순장이 한 번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2. 중국사
중국도 오랫동안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특히 상나라 시절 순장이 만연했다. 상나라는 순장 외에도 무덤에 동물 희생을 묻기를 좋아했다. 특히 매장자의 허리 부분에 구덩이를 파고 개를 묻었는데, 이 구덩이를 요갱(腰坑)이라 한다.주나라 때부터 순장이 줄어들기 시작하는데, 주나라 문화엔 순장이나 동물 희생을 묻는 풍습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2] 상나라가 멸망한 후 주나라의 문화가 주류 문화로 등극하고 여러 지역에 제후를 파견하면서 순장 풍습을 가지고 있었던 집단들도 서주 문화의 영향으로 순장 같은 풍습을 폐기하기 시작한다.
허나 춘추시대 들어 서주의 힘이 약해지면서 순장 풍습은 부활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진(秦)나라였다. 이들은 산동성 일대에서 상 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았던 영성(嬴姓) 집단의 후예로[3] 주 효왕의 명에 의해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해 영지를 받았음에도 그들의 문화를 상당히 보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춘추시대가 열릴 즈음 제후급으로 성장하고 기원전 7세기 5대 국군인 무공이 죽자 처음으로 순장이 실시되는데, 이때 순장 당한 인원만 무려 66명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후손인 진목공의 경우엔 177명을 순장했는데 이때 명신 자거씨의 세 아들(엄식, 중항, 겸호) 등 유능한 신하들까지 대거 순장시켜 진나라 국력이 한동안 크게 쇠락했다. 그래서 진목공을 비판하는 의견이 많지만, 소동파 등 일각에서는 어질다고 소문났던 진목공이 순장을 그렇게 많이 했을 것 같지는 않다며, 진목공 본인의 뜻이 아닌 사후 진나라 풍습에 따른 것뿐이거나 신하들이 자발적으로 자결했을 것[4]이라고 진목공을 옹호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당대에도 순장이 악습이라는 인식은 있었고, 공자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순장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실제 진나라에서도 이후 이 폐단을 막기 위해 전국시대인 기원전 384년(헌공 1년), 공식적으로 순장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지만 후술되어있듯 후손이 안 지킨 경우도 있는 모양.
사자성어인 결초보은에 대한 이야기도 이와 연관 있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대신 위주(魏犨)[5]에게는 젊은 애첩이 있었는데, 위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장남 위과(魏顆)에게 자기가 죽으면 첩을 친정으로 돌려보내 재가(재혼)시키라고 했다. 그러나 병세가 더 위독해져 정신이 오락가락해지자 말을 바꾸어 첩을 순장시키라고 한 뒤 죽고 만다. 차남(위과의 동생) 위기는 나중 유언을 따르자고 주장했으나 위과는 고민 끝에 그래도 맑은 정신으로 한 말씀이 진심이리라 생각해서 서모를 친정으로 돌려보내 재가까지 주선해 주었다. 이후 위과는 진(秦)나라와의 전쟁에서 맹장으로 유명했던 적장 두회를 만나 본인과 군대가 위험에 처했다. 그때 갑자기 두회가 탄 말이 넘어졌고, 위과는 이때를 노려 두회를 사로잡았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위과의 꿈에 서모의 친정아버지가 나타나 자신이 풀을 묶어서 두회의 말을 쓰러뜨림으로써 딸을 살려준 보은을 했다고 감사를 표했다.
전국시대의 경우 전국 7웅을 통일한 진나라 진시황의 장례식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로 순장이 이뤄졌다. 진시황의 자식을 낳지 못한 궁녀와 후궁들, 2대 황제 호해의 형제 자매들, 진시황릉을 축조에 동원된 장수, 군사, 관리, 장인, 인부, 노예, 죄수까지 도굴을 막기 위해 대거 순장되었다고 한다. 이는 주술적인 의미도 없지 않겠지만, 제위를 이어받은 호해가 잠재적으로 정적이 될 수 있는 형제들을 제거해 황권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듯하다. 그나마 이 시대에는 진시황릉의 병마용처럼 부장용 인형 용(俑)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순장 피해자들이 이전보다는 줄었다.
가족을 순장하는 전통은 삼국시대까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위왕 조조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20대와 40대로 추정되는 여자가 순장된 유골이 발견되었다. # 다만 40대 여성의 경우 당대의 기술력 미비로 연령대를 잘못 측정된 것으로 실제로는 60~70대 여성이며, 조조의 배우자인 무선황후 변씨라는 주장이 있다.
그 외 정사 오서에 따르면 진무가 합비 공방전에서 전사하자 손권이 진무의 애첩을 강제로 자결시켜 순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에도 산음공주의 장례에 그녀의 남총 30명이 순장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생명을 중시하는 교리를 가진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고, 순장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인 유교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6세기 수나라 대에 와서는 순장 풍습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한반도에서 순장이 없어진 시기와 대략 비슷하다. 그러나 북방 정복 왕조들이 들어선 이후 한동안 없어졌던 순장 문화가 부활했다. 거란족과 여진족을 비롯한 중국을 정복했던 이민족들이 순장 문화를 유지하였으므로 중국 대륙에서 다시 순장이 나타난 것이었다.
일례로 요태조 야율아보기가 붕어하고 제위를 승계한 아들 요태종이 어려 선황의 아내 겸 금상의 모후로서 수렴청정한 술율평은 그 과정에서 수렴에 반대하던 신하들을 순장시켜 버렸다. 순장이 진행되던 상황에서 조사온이라는 신하가 "그럼 부인인 당신은 왜 순장되지 않느냐."라고 반발하자 자신은 어린 아들이 있으니 대신 팔을 잘라 넣겠다며 자신의 한 팔을 잘라서 같이 묻었다. 정작 그 발언을 한 조사온은 놀랍게도 처형당하지 않았다. 이를 미뤄본다면 당시 순장이란 풍습이 악습임에도 불구하고 수렴청정을 하던 실권자조차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인 유학자, 관료들의 강력한 비판이 지속되면서 요나라, 금나라 양대 정복 왕조의 순장 문화는 점차 사라졌지만 원나라 때에 다시 부활했다. 결국 한족이 세운 왕조인 명나라 대에까지 순장 문화가 이어졌고, 황제가 붕어하면 후궁이나 궁녀들을 순장했다. 명나라에서는 홍무제가 후궁과 궁녀를 순장시킨 이래 영락제 및 '인선의 치'라 일컬어진 명군 홍희제와 선덕제 시절에도 이전보다는 수가 줄었지만 여전히 순장 제도를 유지했다. 그러다 6대 황제인 정통제가 붕어하기 전에 순장을 금지하는 유조를 내려 명나라에서는 더 이상 순장이 실시되지 않았다.
당시 명을 상국으로 받들던 조선의 유학자들조차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순장 풍습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반도에선 이미 천여 년 전에 금지된 악습을 정작 유교 본국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이 아직도 시행하는 상황이었다. 일례로 세종 때 대신 허조는 영락제 사후의 순장 소식을 듣고, 공자가 말했던 '용(俑)을 처음 만든 놈은 자손이 끊기리라'라는 구절을 언급했다. 맹자가 공자의 발언을 인용하며 주장했던 것을 다시 인용한 것으로 원문은 맹자 양혜왕 장구 상(梁惠王 章句 上) 4편에 수록되었다. 허조가 순장을 비판하며 남긴 촌평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었다. 2000년대 KBS 사극 대왕 세종에서도 허조(김하균 분)가 명나라 예부상서 여진 앞에서 명나라의 순장 풍습을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중국의 예법이 옛적과 합치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장례만 하더라도 '허수아비(용)로라도 순장하면 후손이 끊어진다.'는 옛말은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것인데 (중략) 이와 같은 것은 비록 중국의 일이라도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세종실록 세종 7년(1425) 10월 9일자 8번째 기사에서, 허조가 세종에게 올린 말
세종실록 세종 7년(1425) 10월 9일자 8번째 기사에서, 허조가 세종에게 올린 말
떳떳하지 못한 역사이기 때문에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에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영락제 당시의 순장 기록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자세히 기록된 이유는 순장된 후궁과 비빈 서른 명 중에서 2명이 한씨, 강씨로 불린 조선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강혜장숙여비 한씨는 계보상으로는 성종의 어머니가 되는 인수대비 한씨의 고모가 되는 인물로 훗날 여동생까지 공녀로 보낸 것으로 유명한 한확의 누나였다.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 순장은 생매장은 아니고, 먼저 목을 매달아 죽인 다음 같이 묻어주는 형식임을 알 수 있다. 황제가 숨을 거둔 뒤 자금성 전각에서는 궁녀들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이들은 한날 한시 같은 장소에서 목이 매달렸다고 한다.
명나라 시절 정통제가 금지시킨 이후 중원에서 순장 제도는 다시 한 번 사라졌지만 이후 순장 문화를 유지하던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또다시 부활했다. 건국자인 천명제 누르하치의 사후 그의 대복진이던 오랍나랍 아파해(효열무황후)와 첩 덕인제가 순장되었다. 천명제의 뒤를 이은 숭덕제도 자신의 최대 정적들이었던 이복동생 아제격, 도르곤, 다탁 삼형제를 견제하기 위해 그들의 생모인 계모 대복진을 순장 제도를 명분삼아 제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망자인 천명제는 아내를 순장하라는 유언을 남긴 적이 없다. 3대 순치제 때도 순치제의 후궁이자 동악비의 사촌동생인 정비 동고씨가 순장되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고 친정을 시작한 강희제의 명으로 1673년부터 청에서도 순장이 금지되었다. 순장을 금지한 강희제는 청나라에서 두 번째로 장수한 황제이자 중국사 최장 재위기록(61년)을 세운 황제였다.[6] 때문에, 당시의 혼인 연령상 거의 3세대에 해당하는 50년 동안 금지령이 이어졌다. 강희제의 장기 집권 덕에 순장이라는 개념 자체를 청나라 인민들의 의식 속에서 내쫓을 수 있었고, 몇천 년간 폐지와 부활을 반복하며 끈질기게 이어진 순장 악습은 그 후로 중국 왕조사에서 더이상 재현되지 않았다.
중화권에서의 마지막 순장 사례는 대만 동녕국에서 나타났다. 2대 국왕인 정경(鄭經)의 장남이었던 정극장이 이복동생인 정극상(鄭克塽)의 장인 풍석범(馮錫範)을 위시한 반대 세력에게 암살당하자, 그의 아내 진(陳)씨 부인이 임신한 상태로 순장을 당했다. 이는 풍석범의 계략이었는데, 진 부인이 정극장의 조력자로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진영화(陳永華)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3.3. 기타 지역
수메르인들의 도시였던 우르의 왕릉에서 남성 6구, 여성 68구에 달하는 순장자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자세로 깔끔하게 배열되어 묻혔고 사치품과 보석과 같은 장신구로 치장되어 있었다. 무기와 휘장이 같이 묻힌 남자는 군인, 여자는 하인 신분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 자발적으로 독약을 먹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둔기로 살해되어 묻혔다는 설이 유력하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제1왕조 3대 왕인 제르(Djer)의 무덤에서 587구, 4대 왕인 제트(Djet)의 무덤에서 236구, 5대 왕인 덴(Den)의 무덤에서 230구에 달하는 순장자가 발견되는 등 순장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왕인 카아 때는 26구로 서서히 줄었고, 제2왕조 1대 왕 헤텝세켐위부터 '샤브티'라는 나무나 도자기로 만든 인형으로 교체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상당히 초기에 순장 풍습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매체(특히 기독교 관련)에서는 고대 이집트에서 타 지역에 비해서도 유독 순장이나 인신공양이 성행했던 것으로 곡해된다.
스키타이족은 상당히 잔인한 방법으로 순장을 행하였다. 왕이 죽으면 귀족 청년 수십 명뿐만 아니라 그들의 숫자에 맞춰 말까지 죽였다. 말 잔등 위에 청년의 시신을 태우고 뾰족한 나무로 꿴 다음, 왕의 시신 주위로 돌아가는 식으로 배치하면서 마치 죽은 왕을 호위하는 것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바이킹은 족장이 사망했을 때 노예 중 한 명의 자원을 받아서 함께 장례를 치렀다. 아랍 상인 이븐 파들란이 볼가강 유역에서 만난 바이킹들의 장례를 목격한 바에 따르면 죽은 족장의 재산을 3등분하여 유족에게 남길 유산, 장례를 치를 비용, 그리고 함께 죽을 노예를 호강시킬 돈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자원하는 노예는 대개 여자였는데, 10일 동안 모든 종류의 장식품으로 머리를 꾸미고 좋은 드레스를 입은 채 사람들과 함께 마시고 쾌락에 탐닉한다. 그리고 죽음의 천사라고 불리는 늙은 여인이 수의를 만들고 모든 장례 물품을 준비하면서 이 노예를 안락사시킬 사람들을 선별한다. 안락사를 시킬 때는 독한 술로 의식을 흐리게 만든 다음 한 사람은 목을 조르고, 또 한 사람은 단검으로 갈비뼈 사이의 급소를 찔러 처리한다. 이렇게 죽은 노예는 족장의 시신이 실린 배에 함께 태워 물에 띄워 보낸 후 화장시킨다.
일본의 경우 일본서기에 신화적 기록상 1세기 무렵인 스이닌 천황 시절 순장을 금하고, 대신 노미노스쿠네가 하니와(土輪)라는 흙인형을 묻는 방법을 제안하여 기뻐한 천황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그러나 고고학적 연구는 이 기록을 부정하는데, 하니와의 등장은 신화가 비정하는 1세기보다 훨씬 후대의 일이며, 애당초 초창기 하니와는 무덤의 경계를 나타냈던 원통형 토기였다가 점진적으로 인간형이 되었기 때문에 순장자를 대신하며 매장한 용(俑)이라는 주장이 성립할 수 없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 항목에는 한참후인 3세기 히미코 여왕 시기에도 일본에서 대규모 순장이 이뤄졌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고고학적 유물은 잘 없는 편인데, 히미코 여왕의 무덤으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하시하카 고분은 궁내청이 능묘로 지정했기 때문에 고고학적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북아메리카의 미시시피 문화권에서도 순장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4. 매체에서
EBS 어린이 드라마 점프에서도 묘사되었으며, 순장 제도가 사라지게 하는 데 주인공이 어느 정도 기여했다. 부여 노비가 된 주인공이 도망을 치다가 산 속에서 호랑이에게 습격을 당한 태자를 만나게 되고 그 태자를 구해준다. 그리고 태자의 여동생인 공주가 주인공에게 시비를 털다가 말에 밟혀 죽게 되자 그 공주를 따르는 대상자로 주인공을 포함해서 노비 11명이 같이 순장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그 태자가 주인공이 자신의 생명의 은인임을 기억해 냈고 자신의 아버지인 부여 왕에게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리고 충성심을 얻으려면 순장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이에 왕이 따른 것이다. 그리고 태자는 흙으로 빚은 인형을 순장자들의 대용으로 썼다. 창작 내용이긴 하지만, 실제로도 부여는 왕족뿐 아니라 귀족들도 순장을 했다고 기록에 전해지는 나라였다. 다만 상기했듯 관련 유물은 아직 발굴된 적이 없다.KBS 사극 대왕 세종에서는 장영실의 연인이자 영락제의 후궁으로 등장하는 '한다연'이라는 인물이 영락제가 죽은 후 순장당해 목을 메는 장면이 나온다. 장영실이 다연을 구하기 위해 시체를 바꿔치기 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MBC 사극 김수로에서는 순장이 한국사에서 가장 활발했던 가야가 배경인 드라마답게 노비들이 둔기로 살해당한 뒤 주인의 묘에 순장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사료가 많지 않기에 귀족이 죽자 그를 모시던 노비들을 죽여 묻는 것으로 설정해 재현했으며, 함께 죽는 노비의 수가 많을수록 그 귀족의 권세도 높은 것으로 설정되었다.
가야 사람인 우륵의 일대기를 다룬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에서 가실왕의 순장 장면이 나오는데, 담담한 필체로 꼼꼼히 묘사되어 있다.
주윤발이 주연으로 나온 2010년 영화 '공자 - 춘추전국시대'에서도 영화 초반부 순장을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노나라 실세인 계씨 가문이 선조의 뜻을 받들어 아랫사람들을 순장하려고 하자 그들 중 칠사궁이라는 아이가 도망쳤는데 추격대에게 화살을 맞아 한쪽 팔을 잃기까지 한다. 칠사궁은 공자 일행 중 하나인 자로와 마주치게 되고 사연을 들은 공자가 노나라 조정에서 말빨로 순장을 금지시키고 아이를 살려준다. 이후 칠사궁은 은인인 자로를 죽을 때까지 보조한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소녀의 무덤에 소년이 산 채로 순장(생매장)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소년은 예상치 못한 황당한 상황에 무덤에서 빠져나와 살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마을 인부에게 머리를 삽으로 얻어맞아 기절하면서 결국 산 채로 생매장당한다. 이 내용은 소설 소나기에서 소녀가 자기가 입던 옷(소년과의 추억이 담긴)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는 내용을 코믹하게 패러디한 것.
일부 중국 사극에서 순장이 형벌이나 정적 제거 또는 선왕 운운하면서 협박용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Why? 정치 편에서도[7] 주인공이 홍익인간 이념을 내세워 순장을 없애려는 모습이 나온다.
미국 드라마 V에서 리디아가 평소 사이가 매우 나쁜 다이아나를 죽이려고 다이아나와 찰스의 결혼 첫날밤에 쓸 술에 독약을 섞었는데, 눈치 빠른 다이아나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 술을 찰스에게 건네줘서 찰스가 죽어버린다. 그래서 찰스를 독살한 죄로 찰스의 우주 장례식에 순장당할 뻔했다가 필립의 도움으로 살아나고, 독약을 건네준 약사가 대신 순장으로 희생당한다. 투명한 관에 시신을 넣어 우주 공간으로 내보내는 장례 방법을 쓰는데,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시신과 같이 관에 넣어 순장시킨다. 관이 우주로 나가면 공기가 없어 질식사하거나, 설사 관에 공기가 있더라도 좁은 관속에서 옴짝달짝 못하고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것이다.
만화 불새의 3부인 야마토 편 자체가 순장을 막으려는 주인공의 비극을 담고 있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에선 뮤 엘리나스의 무덤에 500명의 이교도가 함께 순장당했고 이들의 원혼은 아일렛 로델라인에 의해 성불한다.
엘더스크롤 시리즈에 등장하는 드라우그들은 드래곤 전쟁에서 패배한 세력의 인간들이 무덤의 주인과 함께 매장당한 후 언데드로 되살아난 괴물들이다.
Warhammer에서 툼 킹팩션의 경우 과거 네헤카라시절 왕이 죽을 때 왕을 호위하는 정예부대 툼 가드들과 개인 경호원인 툼 헤럴드가 같이 순장되며 왕의 피라미드를 만드는 네크로텍트들은 피라미드가 완공되는 즉시 순장된다. 다만 이들은 자신이 모시는 왕과 함께 묻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네헤카라 멸망 이후 언데드로 부활한 뒤 인간 시절보다 더 강력한 전투능력을 가지게 되어 블랙 오크, 카오스 워리어를 상대로도 어느 정도 호각으로 싸울 수 있다.
네이버 웹툰 정열맨 2부에서 금모귀신 금부두가 서명호와의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죽게 되자 의남매인 김용에게 죽은 남편과 아들, 그리고 살아 있는 제자들을 전부 순장시켜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김용은 유언에 따라 12명의 제자들을 전부 몰살시켰고,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금부두의 아들까지 죽이려 든다.
이현세의 만화 만화 한국사 바로 보기와 만화 세계사 넓게 보기에서 주인공들이 순장당할 뻔한 내용이 나온다.
라스트오리진의 이터니티는 주인을 평생 보필하고 주인이 사망 시 같이 묻히는 용도로 제작되었으며, 그 때문에 항상 관을 지고 다닌다.
5. 유사 개념
- 사티(풍습): 순장의 변형으로 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생화장시키는 풍습이다. 21세기 현재에도 일부 지역에서 간간히 행해져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 순사: 순장의 변형. 일본에서 17세기 무렵 성행했던 적이 있다. 조선에서는 열녀제도를 통해 남편을 따라 죽은 과부가 생기면 국가가 정려(旌閭)[8]하였다.
6. 여담
특정 인물이 죽으면서 같이 죽는다는 개념 때문에 특정 인물의 지지층을 비하하는 의미로도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 특정 인물이 죽거나 몰락할 때 평소 그를 추종하던 자들에게 순장 안 하고 뭐 하냐는 식으로 비꼴 때 쓰인다. 정치권에서도 간혹 사용되며, 특히 권력형 스캔들이나 초대형 사고로 지지율이 폭락한 정권의 임기 말에 입각하거나 여당 총수를 맡는 경우 순장조라 칭하기도 한다. 번외로 사람이 아니더라도 대통령, 지방자치단체장이 교체될 때마다 늘 있는 전임자 지우기에 희생되는 정책이나 상징물 등도 순장당한다 비유하기도 한다.칼덕후 커뮤니티에서는 도검 소지 허가증을 발급받은 칼들을 순장템이라고 부른다. 해당 문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도소증이 요구되는 도검은 개인 간의 거래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기 때문에 원하든 원치 않든 죽을 때까지 안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1] 일각에선 한반도 북부의 굴식 돌방 무덤 양식과 남부의 돌무지 덧널 무덤 양식 차이는 꽤 크며 북부 양식이 상대적으로 도굴이 쉬어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도굴도 보물 위주로 하지 필요도 없이 운반에 무겁기만 한 시신을 전부 다 가져가는 경우는 잘 없다.[2] 다만 상나라 제후국이던 시절엔 상나라 영향을 받아 반강제적으로 인신공양 포로를 잡는 추노 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과거 자신들의 치부와 더불어 특히 주 왕실이 백읍고 사건을 겪으면서 집단 트라우마가 생긴게 순장 등 악습을 없애려 한 주원인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3] 항목에도 있지만, 《사기》에 의하면 진은 상나라 주왕 제신의 시중을 든 간신 악래의 후예라고 한다.[4] 실제 대상에 대한 애정이 너무 강해 동반자살하는 케이스도 없지 않다.[5] 전국 7웅 위나라(魏)의 먼 시조.[6] 손자인 건륭제가 생전에 가경제에게 양위한 것도 자신은 감히 성군 조부보다 더 오래 재위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죽을 때까지 태상황제로서 몇 년 더 막후 실세로 군림했다.[7] 여긴 지구가 아닌 폴리랜드라는 세계다.[8]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풍습.# 참고로 조선 시대 와서 그 수가 상대적으로 많아진 거지 풍습 자체는 신라 시대부터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