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19:56:21

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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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쇠퇴
3. 실제 사례
3.1. 한국사3.2. 중국사3.3. 기타 지역
4. 매체에서5. 유사 개념6. 여담7. 같이보기

1. 개요

순장()은 장례 방식 중의 하나로, 죽은 지도자가 사후에도 그 지위를 누리며 살기를 기원하며 다른 사람을 같이 묻는 악법을 말한다.

같이 묻는 사람은 시종, 궁녀, 노예라든가 무덤의 주인공이 등 높은 사람이면 그 신하나, 심지어 생전의 가족까지 같이 묻기도 한다. 기본적으로는 생매장이기도 하지만 같이 묻을 사람들을 먼저 살해한 다음 시신을 묻는 방식도 있다. 이는 순장된 시체의 깨진 두개골 등 여러 상처를 통해 알 수 있다.

2. 역사

순장은 주로 고대 동아시아권에서 빈번히 자행되었었다. 당대 자원해서 순장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권력 다툼에서 정적들을 합법적이면서 효율적으로 숙청하는 용도로 자주 쓰였다. 주로 권력자가 죽기 전 마음에 안 들었던 부하를 하나 이상 지목하며 "내가 죽을 때 저 충성스런 부하 녀석같이 좀 묻어주면 좋겠구나!" 라거나, 파벌 싸움에서 이긴 쪽이 "저 세상의 고인께서 자네들의 도움을 꼭 필요로 할 거야 그치?" 라는 식이었다.

물론 결초보은의 경우처럼 유언에 의해 순장을 안 하는 경우도 있지만, 죽은 자는 결정권이 없기에 순장 여부는 영향력 있는 후계자들의 의사가 반영되기가 쉬웠다. 결초보은 일화도 최종적으로 그걸 결정한 건 세상을 떠난 이의 아들로, 그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서모를 순장하지 않고 친정으로 돌려보내 개가시켰다.

생전의 지도자에게 호감을 샀던 여자들도 순장의 대상이 되었다. 한 예로 영락제가 죽자 영락제가 생전에 아낀 조선후궁 한씨(인수대비 한씨의 고모)가 순장당했다. 이 영상 참조. 물론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계승자 입장에서 배 다른 자식들과 그 후견인이 될 만한 후처들은 언제나 유력한 라이벌이었으므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숙청했던 것에 가까웠을 것이다.

2.1. 쇠퇴

세월이 흐르면서 가혹한 풍습이라는 인식이 강해지자 나중에는 용(俑)이라는 인형을 묻는 것으로 대체하게 된다. 이 용(俑)이 스케일이 큰 것이 병마용.

한국의 경우 순장이 매우 빨리 사라진 편인데 대부분의 국가는 고대왕국 시기를 벗어난 시점에서 순장을 없앴으며 부장품 조차도 줄여나갔다. 대표적으로 신라왕릉에서 보면 하대가 되면 금관과 같은 화려한 위세품을 넣는 게 아니라 불교의 영향으로 고인을 화장한 뼛가루를 담은 그릇과 작은 흙 인형 정도만 무덤에 넣게 된다.

그리고 이 인형을 묻는 풍습도 시대가 흘러 유교의 보급으로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유학의 시조로 불리우며 당대의 생명경시 풍조를 전방위적으로 비판했던 공자가 순장 풍습을 극심히 혐오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순장은 물론 사실상 인간이 인간을 산채로 묻는 행위를 흉내내기 위해 만든 용 또한 몹시 싫어해서 "이걸 만든 자는 후손이 끊어질 것"이라 발언하기까지 했을 정도. 후손이 자기의 잘못으로 끊어지는 것은 유교 최대의 불효로, 유교에서 불효는 불충과 함께 가장 나쁜 죄 중 하나인 것을 볼때 매우 강도 높은 힐난이었다.

3. 실제 사례

청동기시대부터 세계 각지에 이런 사례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철기 시대 부여,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특히 많이 행해졌다.

3.1. 한국사

일반적으로 순장의 주된 대상은 폐쇄적인 신분제 사회인 고대의 상황에 따라 사망자의 노비가 대부분이었고, 사망자의 사병이나 신하가 순장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 고조선, 부여, 고구려, 가야에도 이런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요동에서 발견된 강상무덤과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순장묘 형식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특히 한국사에서 순장을 가장 활발히 했던 나라가 바로 대가야였다. 옆 동네 신라금관가야, 아라가야도 순장을 하긴 했지만 많아야 1~5명 같이 묻는 정도였는데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대형 고분마다 순장덧널이 수십 개씩 있어서 한국사에서도 독보적으로 순장을 많이 했던 것이 밝혀졌다.[1] 총 22명 18기의 유골이 출토된 44호분과 4명의 유골이 발견된 45호분이 유명하다. 순장곽의 숫자와 크기로 볼 때 44호분은 약 36명, 45호분은 약 12명 정도가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도굴꾼 때문에 사라진 순장곽도 추가로 있을 수 있으므로 순장자가 더 많았을 수도 있다. 연령대는 성인부터 10세 이하 여아까지 다양하며 칼이나 둔기에 의한 사망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런 대가야의 대량 순장 풍습 덕분에 현대까지 가야는 도굴당하지 않고 잘 보존된 고분이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시신과 같이 묻었던 부장품을 노리는 도굴꾼들은 과거 왕이나 고위 귀족이었을 무덤 주인공의 덧널을 가장 먼저 노린다. 그리고 유물의 급이 좀 떨어지는 주변 순장 무덤은 건드리지 않은(혹은 발견 못 한) 경우가 많다. 현대에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대가야 쪽 유물은 순장덧널에서 나온 유물이 많다. 순장이 잔인한 풍습이긴 하지만 가야를 연구하는 데에는 도움을 크게 주고 있는 셈이다.

대가야 외에 김해 금관국의 왕릉급 고분군인 대성동 고분군의 경우 왕급 무덤은 시기에 따라 순장자가 1~5인, 최전성기인 5세기 초가 되면 왕급이 아닌 중형 무덤에도 2명의 순장자가 묻힌다. 다만 대가야와 다르게 원칙이 있었는지, 전성기에도 순장자가 6명을 넘기지 않는다. 함안 아라가야는 가야 다른 지역과 다르게 순장곽을 따로 만들지 않고 큰 석실 하나만 만든 뒤 무덤 주인의 발치에 2~6명을 순장하는 식이었다. 그 외에도 고고학 조사 결과 경주 황남동 98호 남분, 영덕 괴시리 고분, 의성 대리 고분,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11호분과 22호분 등 신라권과 가야권 여러 지역에서 금관가야와 비슷한 방식인 주부곽 소규모 순장이 확인됐다. 그러나 무덤 주인공과 완전히 독립된 순장곽이 여러 개인 다곽 순장묘는 다른 가야에선 없고 오직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만 나온다. 주부곽+순장곽으로 된 중간 형태도 고령 지산동 일부[2]와 고령 근처 지방인 합천 옥전 고분군, 함양 백천리 고분군 정도 범위에서만 조사되는데 전부 대가야의 영향권이다.

고구려는 실제 발굴조사로 순장의 흔적이 나온 적은 없다. 다만 삼국사기 동천왕 22년(248)조에는 왕이 붕어하자 가까운 신하들이 스스로 순장하려고 하여, 사왕(중천왕)이 이는 예가 아니라 하면서 금하게 했으나, 정작 장례일에 이르자 스스로 목숨을 버린 자가 매우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경우에서처럼 사망한 사람을 따라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다 버려 순장되는 '자사순장'의 풍습은 부여에서 보이는 살인 순장과 비교되는 또 다른 형태의 순장 풍습이라 할 수 있다.

신라도 초기에는 순장을 했지만 지증왕 3년(502)부터 공식적으로 이 제도를 금지한다. 그동안 신라에서는 마립간이 사망하면 살아있는 남녀 각각 5명씩 묻었다고 한다. 순장을 마지막 시기까지 유지하던 가야가 신라 진흥왕의 정복(562)으로 멸망하면서 한국 역사에서는 영구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예를 들어 고령군의 지산동 고분군에는 대가야가 멸망하고 신라의 지방이 된 뒤의 무덤도 조사됐는데, 지금의 대가야박물관 부지에서 신라식 묘제인 횡구식 석실, 횡혈식 석실분이 34기가 조사됐는데 순장 흔적은 단 하나도 없었다. 지증왕이 순장을 금지한 신라 법률이 구 가야 영토에서도 적용돼 순장이 한 번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순장을 무덤 주인을 저승에서도 따를 노비 같은 하층민을 묻은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요즘 학계에서는 한국에서의 순장을 일반 하층민보다는 순장자와 비슷한 계급자를 넣는 경우가 많은 데다가 부여, 가야, 신라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아마도 같은 문화권하에 묶여 있었다는 설이 있다. 몇몇 묘에서는 꽤 높은 신분으로 추정되는 순장자나 순장자용 묘가 발견되기도 한다.

3.2. 중국사

중국도 오랫동안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춘추시대 진목공의 경우 무려 177명을 순장으로 살해했다. 엄식, 중항, 겸호(셋 다 명신 자거씨의 아들이다.)등 유능한 신하들까지 대거 순장당해 진나라가 크게 힘을 잃었을 정도. 그래서 진목공이 순장을 너무 심하게 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소동파 등 일각에서는 그 어질고 관대한 진목공이 순장을 그렇게 많이 했겠냐며, 진목공 본인의 뜻이 아니라 진나라 풍습에 따른 것뿐이거나 신하들이 자발성이 있었을 거라며 진목공을 옹호하기도 한다.

사자성어인 결초보은에 대한 이야기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춘추 시대, 진나라 대신 위주(魏犨)[3]에게 총애하는 첩이 있었는데, 위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아들 위과(魏顆)에게 자기가 죽으면 첩을 재가(재혼)시키라고 했다. 그런데 병세가 더 위독해져 정신이 많이 흐려지자 말을 바꾸어 첩을 순장시키라고 한 뒤 죽고 만다.

이에 위과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맑은 정신으로 한 말씀이 진심일 거라 생각해서 서모를 재가시켜 주었다. 이후 위과는 진(秦)나라와의 전쟁에 나갔다 두회라는 맹장을 만나 본인과 군대가 위험에 처했다. 그때 갑자기 두회가 탄 말이 넘어졌고, 위과는 이때를 노려 두회를 사로잡은 후 처단해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날 밤 위과가 꿈을 꾸었는데 어떤 노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자기는 그가 순장하지 않고 재가를 보낸 서모의 아버지로, 풀을 묶어서 두회의 말을 쓰러뜨림으로써 딸을 살려준 보은을 했다고 하였다고 했다.

전국 7웅을 통일한 진시황의 장례식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스케일로 순장을 했다. 진시황의 후궁들과 호해의 형제 자매들, 진시황릉을 축조한 장인과 노예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순장당했다. 이는 주술적인 의미보단 호해가 잠재적으로 정적이 될 수 있는 형제들을 죽여 황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장인과 노예들은 진시황의 무덤 위치를 발설해 도굴이 일어날까 봐 겸사겸사 묻었고(...) 진시황은 사람도 순장하고 거기에 추가로 진시황을 저승에서 모실 병마용까지 떼거지로 만들었다.

가족을 순장하는 전통은 삼국 시대까지 남아서 한때 위왕 조조 무덤으로 '추정되었던' 무덤에서 20대와 40대로 추정되는 여자가 순장된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삼국지덕후들은 이 무덤이 조조의 무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또 정사 오서에서는 진무합비 공방전에서 전사하자 손권은 진무의 애첩을 강제로 자결시켜서 순장 조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남북조시대에서도 산음공주의 장례에 그녀의 남첩 30명이 순장당했다고 한다.

워낙 반인륜적인 풍습이라 지금 관점에서도 엽기적이고 미개한 관습으로 보이는데, 당대라고 시선이 달랐던건 아니었다. 공자를 시작으로 지식인들이 전방위적으로 까댔고, 국가적으로도 정복 전쟁이 활발한 시기에 이런 일로 인력을 없애는 건 국력 손실이라서 후대로 갈수록 금기시되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인구도 적던 시대였다. 한두 명이면 모를까 수백 명씩 묻어대면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

주나라 때부터 용(俑)이라는 제례용 인형으로 순장 피해자를 줄이려는 노력을 시도했고, 진시황릉의 병마용처럼 상당히 일반화되어 순장 피해자들이 줄어들게 된다. 다만 상술했듯 진시황릉에도 순장자는 존재했다.

성인 공자는 인형인 용마저도 "이걸 발명한 사람은 대가 끊어지리라!"라고 비판을 넘어 저주를 퍼부었는데, 유교의 사상을 생각해 보면 죽은 사람의 사후를 위해 사람이든 재산이든 낭비하는 것을 헛짓거리라 생각한 것 같다. 공자와 안회의 이야기 중에는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자기 자식을 팔아야 했던' 사람이 통곡하자, 안회가 울음소리만 듣고 그 내역을 알아맞히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쓸데없는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고, 순장이라면 학을 떼는 유교도 다시 정비되어 가면서 6세기 수나라 때에 와서는 순장 풍습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한국에서 순장이 없어진 시기와 대략 비슷하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북방 민족의 정복 왕조들이 들어서면서 중국은 한동안 없어졌던 순장 문화가 부활한다. 거란족여진족을 비롯한 정복 왕조의 주류 민족들은 순장 문화를 유지하고 있어서 중국에서 다시 순장이 벌어졌다.

일례로 요태조 야율아보기가 붕어하고 제위를 승계한 아들 요태종이 어려서25세가 어려? 선황의 아내 겸 금상의 모후로서 수렴청정한 술율평은 그 과정에서 수렴에 반대하던 신하들을 싸그리 순장시켜 버렸다. 한참 순장이 진행되던 중 조사온이라는 신하가 "그럼 부인인 당신은 왜 순장되지 않느냐"라고 반발하자 자신은 어린 아들이 있으니 대신 팔을 잘라 넣겠다며 자기 팔을 하나 잘라서 같이 묻었다. 조사온은 놀랍게도 살아남았고 939년 사망했다.

그러나 한인 유학자, 관료들의 강력한 비판과 반대로 요, 금 양대 정복 왕조의 순장 문화는 점차 사라졌다가 원나라 때에 다시 순장이 부활, 한인 왕조인 명에까지 영향을 끼쳐 명대까지도 순장 문화가 살아남아 황제가 붕어하면 후궁이나 궁녀들을 순장했다. 명을 받들던 조선의 유학자들조차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순장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반도에선 이미 천여 년 전에 금지된 나쁜 제도를 중국에선 아직도 운용하고 있었으니...

일례로 세종허조영락제 사후의 순장 소식을 듣고, 공자가 말했던 '용(俑) 처음 만든 놈은 자손이 끊기리라!'라는 구절을 언급한다. 맹자가 공자의 발언을 인용하며 주장했던 것을 다시 인용한 것. 원문은 맹자 양혜왕 장구 상(梁惠王 章句 上) 4편.
"허수아비라도 순장하면 후손이 끊어진다는 건 어린애도 아는데 중국의 풍습이라고 해도 본받을 게 못 됩니다."
(세종실록 1425년 10월 9일 기사).
라는 촌평을 남기며 허조는 순장을 비판했다. 이러한 말이 씨가 됐는지 물론 영락제가 순장을 해서 일어난 일은 아니나 명나라 황실 직계는 훗날 청나라의 중원 입관 후에 일어난 명나라 주씨 학살로 단절되었으며,[4] 후술할 내용처럼 마찬가지로 초기에 순장을 했던 청나라의 경우 비록 명나라 황실 직계만큼 비참한 황실 직계 단절이 일어난 건 아니지만 동치제가 자녀 없이 요절하면서 마찬가지로 황실 직계가 단절되었고 그 뒤를 이은 방계 출신 황제인 광서제선통제도 자녀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결과적으로 청나라 황실의 계보도 정통성 측면에서는 사실상 단절된 셈이 되었다.

사극 대왕 세종에서도 허조(김하균 분)가 명나라 예부상서 여진 앞에서 대놓고 명나라의 순장 풍습을 디스하는 장면이 나온다. 명나라에서는 홍무제가 후궁과 궁녀를 순장시킨 이래 영락제는 물론이거니와 '인선의 치'라 일컬어진 명군 홍희제선덕제도 숫자만 적을 뿐 순장 제도를 유지했다.

명사에는 껄끄러운 역사인 관계로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영락제 당시의 순장 기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순장된 30명의 후궁, 비빈 중 두 명이 한씨, 강씨로 불린 조선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강혜장숙여비 한씨는 계보상으로는 성종의 어머니가 되는 인수대비 한씨의 고모가 되는 인물로 훗날 여동생까지 공녀로 보낸 것으로 유명한 한확의 누나였다. 기록을 근거로 했을 때, 명나라 순장은 생매장은 아니고, 먼저 목을 매달아 죽인 다음 같이 묻어주는 형식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황제가 죽은 뒤 자금성 전각에서는 궁녀들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데, 이들은 한날 한시 같은 장소에서 목이 매달려 죽었다. 그러던 중 정통제가 붕어하기 전에 순장을 금지하는 유조를 내려 명나라에서는 이후 순장이 실시되지 않았다.

명나라 이후 순장 문화를 유지하던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또다시 순장이 부활하여 청나라 초기까지 순장이 유지되다가 중단되었다. 건국 군주인 천명제의 사후 그의 대복진이던 오랍나랍 아파해(효열무황후)와 첩 덕인제가 순장된 것. 천명제의 뒤를 이은 숭덕제가 자신의 최대 정적들이었던 이복동생 아제격, 도르곤, 다탁 삼형제를 견제하기 위해 그들의 생모인 계모 대복진을 순장 제도를 이용해 제거했다. 정작 망자인 천명제는 아내를 순장하라는 유언을 남긴 적이 없었다.

그리고 순치제 때 순치제의 후궁이자 동악비의 사촌동생인 정비 동고씨가 순장된 이후 강희제가 순장을 금지했고, 강희제는 청나라에서 두 번째로 장수한 황제이자 중국사 최장 재위기록을 세운 황제[5]였기 때문에 당시의 혼인 연령을 고려하면 거의 3~4세대에 해당하는 62년 동안 금지령이 이어진 덕분에 새삼 다시 시작하기도 애매해졌는지 순장 풍습이 다시 성행하는 일은 없어졌다.

이와 별개로, 대만 동녕 왕국에서는 2대 국왕인 정경(鄭經)의 장남이었던 정극장이 이복동생인 정극상(鄭克塽)의 장인 풍석범(馮錫範)을 위시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고, 그의 아내였던 진(陳) 부인이 임신한 상태로 순장을 당한 일이 있었다. 이는 풍석범의 계략이었는데, 진 부인이 정극장의 조력자로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진영화(陳永華)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해당 사건을 끝으로 중화권에서 순장 풍습은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3.3. 기타 지역

수메르인들의 도시였던 우르의 왕릉에서 남성 6구, 여성 68구에 달하는 순장자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자세로 깔끔하게 배열되어 묻혔고 사치품과 보석과 같은 장신구로 치장되어 있었다. 무기와 휘장이 같이 묻힌 남자는 군인, 여자는 하인 신분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 자발적으로 독약을 먹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둔기로 살해되어 묻혔다는 설이 유력하다. 링크

고대 이집트의 경우도 제1왕조 3대 왕인 제르(Djer)의 무덤에서 587구, 4대 왕인 제트(Djet)의 무덤에서 236구, 5대 왕인 (Den)의 무덤에서 230구에 달하는 순장자가 발견되는 등 순장 풍습이 남아있었으나, 마지막 왕인 카아 때는 26구로 서서히 줄어들더니 제2왕조 1대 왕 헤텝세켐위부터 '우샤브티'라는 나무, 혹은 도자기 인형들로 교체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스키타이족의 경우에도 상당히 잔인한 방법으로 순장을 행하였다. 왕이 죽으면 귀족 청년 수십 명과 그들 숫자에 맞춰 말까지 죽였는데, 말 잔등 위에 청년의 시신을 태우고 뾰족한 나무로 꿴 다음, 왕의 시신 주위에다가 돌아가면서 배치하면서 마치 죽은 왕을 호위하는 것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바이킹의 경우 족장이 사망했을 때 노예 중에 한 명을 자원받아서 함께 장례를 치렀다. 아랍 상인 이븐 파들란이 볼가강 유역에서 만난 바이킹들의 장례를 목격한 바에 따르면 죽은 족장의 재산을 3등분하여 유족에게 남길 유산, 장례를 치를 비용, 그리고 함께 죽을 노예 호강시키는 돈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자원하는 노예는 대개 여자 노예가 되는데, 10일 동안 모든 종류의 장식품으로 머리를 꾸미고 좋은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과 함께 마시고 쾌락에 탐닉한다. 죽음의 천사라고 부르는 늙은 여인이 수의를 만들고 모든 장례 물품을 준비하면서 이 노예를 안락사시킬 사람들을 선별한다. 안락사를 시킬 때는 독한 술로 의식을 흐리게 만든 후, 한 사람은 목을 조르고, 또 한 사람은 단검으로 갈비뼈 사이의 급소를 찌른다고. 이렇게 죽은 노예는 족장의 시신이 실린 배에 함께 태워 물에 띄워 보낸 후 화장시킨다.

북아메리카미시시피 문화권에서도 순장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4. 매체에서

EBS 어린이 드라마 점프에도 이 내용이 나왔으며, 순장 제도가 사라지게 하는 데 주인공이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

부여 노비가 된 주인공이 도망을 치다가 산 속에서 호랑이에게 습격을 당한 태자를 만나게 되고 그 태자를 구해준다. 그리고 태자의 여동생인 공주가 주인공에게 시비를 털다가 말에 밟혀 죽게 되자 그 공주를 따르는 대상자로 주인공을 포함해서 노비 11명이 같이 순장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그 태자가 주인공이 자신의 생명의 은인임을 기억해 냈고 자신의 아버지인 부여 왕에게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리고 충성심을 얻으려면 순장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이에 왕이 따른 것이다. 그리고 태자는 흙으로 빚은 인형을 순장자들의 대용으로 썼다.

이것은 부여 왕과 태자가 대단한 건데 그 전까지 부여는 왕가뿐만 아니라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 귀족들이 죽어도 순장을 했다. 근데 하물며 자기 가족인 공주가 죽었는데 그 공주에서부터 순장 제도를 적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게 태자와 왕이 백성들까지도 얼마나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KBS 사극 대왕 세종에서는 장영실의 연인이자 영락제의 후궁으로 등장하는 '한다연'이라는 인물이 영락제가 죽은 후 순장당해 목을 메는 장면이 나온다. 장영실이 다연을 구하기 위해 시체를 바꿔치기 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MBC 사극 김수로에서는 순장이 한국사에서 가장 활발했던 가야가 배경인 드라마답게 노비들이 둔기로 살해당한 뒤 주인의 묘에 순장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사료가 많지 않기에 귀족이 죽자 그를 모시던 노비들을 죽여 묻는 것으로 설정해 재현했으며, 함께 죽는 노비의 수가 많을 수록 그 귀족의 권세도 높은 것으로 설정되었다.

가야 사람인 우륵의 일대기를 다룬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에서 가실왕의 순장 장면이 나오는데, 담담한 필체로 꼼꼼히 묘사되어 있다.

주윤발이 주연으로 나온 공자 영화에서도 순장을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소녀의 무덤에 소년이 산 채로 순장(생매장)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소년은 무덤에서 빠져나와 도망쳐서 살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결국 머리를 삽으로 얻어맞아 기절하면서 결국 산 채로 생매장당한다. 이 내용은 소설 소나기에서 소녀가 자기가 입던 옷(소년과의 추억이 담긴)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는 내용을 패러디한 것.

중국 사극에서 순장이 형벌이나 정적 제거 또는 선왕 운운하면서 협박용으로 등장한다.

Why? 정치 편에서도[6] 주인공이 홍익인간 이념을 내새워 순장을 없애려는 모습이 나온다.

미국 드라마 V에서 리디아가 외계인 특사 찰스를 질투심에 멀어 독살하려다 독살범으로 우주 순장당할 뻔하다 필립의 도움으로 살아나고 독약을 건네준 약사가 대신 순장으로 희생당한다.

만화 불새의 3부인 야마토 편 자체가 순장을 막으려는 주인공의 비극을 담고 있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에선 뮤 엘리나스의 무덤에 500명의 이교도가 함께 순장당했고 이들의 원혼은 아일렛 로델라인에 의해 성불한다.

5. 유사 개념

  • 사티: 이건 순장은 순장인데 생화장이다. 더군다나 상당히 현재 진행형이다.
  • 순사: 순장의 변형. 일본의 경우, 순장을 대신하여 17세기 무렵 성행했던 적이 있다.

6. 여담

특정 인물이 죽으면서 같이 죽는다는 개념 때문에 특정 인물의 지지층을 비하하는 의미로도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 특정 인물이 죽거나 몰락할 때 평소 그를 추종하던 자들에게 너흰 순장 안 하고 뭐 하냐는 식으로 비꼬는 것. 정치권에서도 간혹 사용하는 말인데, 특히 이런저런 권력형 스캔들이나 초대형 사고로 지지율이 폭락한 정권의 임기 말에 입각하거나 여당 총수를 맡는 경우 순장조라 칭하기도 한다.

칼덕후 커뮤니티에서는 도검 소지 허가증을 발급받은 칼들을 순장템이라 부른다. 해당 문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도소증이 요구되는 도검은 개인간의 거래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기 때문에 원하든 원치 않든 죽을 때까지 소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

7. 같이보기



[1] 다만 한반도 북부의 무덤 양식과 남부의 무덤 양식의 차이는 꽤 크며 북부의 무덤 양식이 도굴이 쉬웠음은 고려해야 한다. 북부는 굴식 돌방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어 도굴하기 쉬운 반면, 남부는 돌무지 덧널 무덤으로 이루어져있었고 무려 지증왕대에서도 이 무덤 양식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고구려의 세력권은 특히 여러 민족들이 오가던 만주였으므로 여러 국가들의 흥망성쇠 속에서 무덤이 훼손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2] 32호분, 34호분[3] 전국 7웅 위나라(魏)의 먼 시조.[4] 원래 왕조교체기에는 전대 왕조를 학살하는 일이 잦가 했다.[5] 건륭제가 생전에 가경제에게 양위한 것도 자신은 감히 성군인 조부보다 오래 재위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만 그랬을 뿐 실제로는 태상황제로서 막후 실세로 군림하여 청나라판 인세이를 만들었다.[6] 여긴 지구가 아닌 폴리랜드라는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