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0:07:55

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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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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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문경공(文敬公)
허조
許稠
<nopad> 파일:허조_선생_영정.jpg상상화
출생 1369년 5월 25일[1]
(음력 공민왕 18년 4월 11일)
사망 1440년 2월 10일[2] (향년 70세)
(음력 1439년, 세종 21년 12월 28일)
시호 문경(文敬)
본관 하양 허씨
중통(仲通)
경암(敬菴)
부모 부친 - 허귀룡(許貴龍)
모친 - 흥양 이씨(興陽李氏) 이길(李吉)의 딸

1. 개요2. 생애3. 깐깐한 재상4. 청백리5. 별명6. 죽음7. 집안 내력8.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초기의 문관 관료.

고려성리학을 고려에 들여온 학자 문성공 안향의 사위 허수(許綏)의 증손자. 즉, 안향의 외고손자이다.

2. 생애

1369년 4월 11일 판도판서를 지낸 아버지 허귀룡(許貴龍)과 어머니 흥양 이씨 이길(李吉)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조선 태조의 중신이었던 권근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는 1385년(고려 우왕 11)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이어 1388년(창왕 즉위년) 생원시에도 입격했다. 그리고 1390년(공양왕 2) 문과 경오방(庚午榜)에 병과 2위로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관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년 뒤 조선이 개국하면서 그대로 조선 개국에 동참해 좌보궐과 봉상시승을 거쳐 태조 6년에는 공자에 대한 제례인 석전제례를 개정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고, 예조참의였을 때에는 전국에 학당을 건립해 유교 보급에 힘썼고, 고려불교식 제례를 일소하고 유교식 제례를 백성들에게 보급하는 데 노력했다.

세종 시기에는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중직을 거쳐 좌의정까지 직위가 올랐다. 이조판서였을 때는 종묘의 춘향대제에 찬작관[3]을 맡았는데 세종에게 잔을 주고 물러나다 계단에서 넘어지는 일이 생겼다. 국가의 큰 제사를 망쳤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세종은 "이조판서가 상하지나 않았느냐."고 묻고 계단을 넓히도록 했다. 세종이 허조를 아낀 정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속육전>이라는 법전을 만드는데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세종 시대의 재상들 중 황희맹사성에 비하면 대중적 인지도는 낮은 편이지만, 사실 세종 치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3. 깐깐한 재상

허조는 꼬장꼬장하고 깐깐하기로 악명이 매우 높은 인물이었다. 시시비비를 칼같이 따지며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게 없는 깐깐함ㆍ완벽함과 임금 앞에서도 할 말 다하고 사는 직설적인 성격을 갖춘 지라, 정종을 거쳐 태종이 즉위한 뒤에도 직언을 아끼지 않아서, 태종은 처음에는 허조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황희가 '전하께 직언할 강직한 신하도 있어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라고 허조를 두둔해서 태종이 인정해 이후 이조정랑과 예조참의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태종이 선위를 하면서 세종대왕에게 '허조는 내 주춧돌이다.'이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태종도 결국 그런 점을 높이 사서 세종에게도 신하로 쓰라고 말했다고 볼 수 있다. 태종도 평범한 지도자는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 물론 세종 시절에 중용될 때에도 세종에게 껄끄럽게 나오는 건 여전했다.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정벌하는 파저강 정벌 때 이조판서를 역임하던 허조는 끝까지 반대했는데 반대의 이유는 물론 있었고 동조하는 여론도 있었다.
"파저강 올량합이 올적합과 더불어 합심하여 도둑질한 것은 의심할 나위 없사오니, 죄악이 심히 중하여 당연히 가서 쳐야 할 것이오나, 그윽이 듣건대, 저들의 땅이 산수(山水)가 험조(險阻)하고, 수목(樹木)이 무성하고 빽빽하여, 본디 성곽(城廓)이 없고 산골에 흩어져 산다고 하오니, 만약 군사를 일으켰다는 말을 들으면 문득 깊은 곳으로 도망갈 것이오니 쫓기 어려울 듯하며, 또, 이 무리들이 스스로 지은 죄를 헤아리고 토벌함이 있을까 염려되어 흉흉(洶洶)하여 불안해 할 것인데, 이때에 가서 치는 것이 성공하기 어려울까 두렵습니다. 양계(兩界)의 장수들이 사태를 살펴서 계달하기를 기다려 뒤에 헌의(獻議)하게 하옵소서."
세종 15년

한마디로 작전 지역의 지리적 상황도 파악이 안된 상태에서 실패하면 일이 더 어려워질테니 현지에서 병력들이 상황 파악을 한 후 결정하는게 바람직하다는 논지였다. 이처럼 허조도 세종이 지나치게 앞서나가는 정책에 황희 이상으로 브레이크를 걸며 반대했던 신하였다. 그럼에도 세종은 그런 허조를 불쾌하게 여기거나 멀리하지 않고 태종처럼 되려 더 중용했다.

심지어 상국인 명나라와 관련된 문제가 발생해도 할 말을 다 하고 살았다. 세종이 즉위하고 얼마 안 지나 영락제조선 1만 필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는데, 이를 들은 허조가 "기병 1만을 양성할 군마를 그렇게 명나라에 뺏기면 국방이 위태로워집니다." 라며 반대했고[4], 영락제가 죽을 때 그가 사랑하던 한씨도[5] 순장당했는데, 이때 "허수아비로라도 순장하면 후손이 끊어진다는건 어린 아이들도 다 아는데[6], 명나라에서 황제의 장례식 치를 때 궁녀 15명을 순장한다니 대국 것이라도 배울 게 전혀 못 됩니다." 하고 극한의 디스를 날렸다. 어디까지나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스스로의 소신이 자기 모가지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럴 수 있었겠다.[7] 허조의 이러한 명나라 비판에 왕인 세종은 물론이고, 다른 신하들은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특별한 반론이나, 제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종과 신하들도, 명나라가 저지르는 조선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매우 아니꼽게 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결국 명나라에서 순장 관련 문제가 터지자, 참았던 불만이 폭발한듯이 허조의 명나라 비판에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는 식으로 명나라에게 일종의 항의를 한 셈이다.

세종이 세자빈을 새로 간택할 때 "외모를 보고 뽑으라"고 하자, 허조는 "덕을 보고 뽑아야지, 외모만 보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세종은 "그 짧은 시간에 인물의 덕을 어떻게 알겠느냐? 외모를 보고 뽑아라."라고 주장한다. 전임 세자빈이었던 휘빈 김씨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다가 세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해괴한 주술을 썼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는데, 세종은 김씨가 너무 키가 크고 박색이었던 것도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키가 작고 예쁜 순빈 봉씨를 새 세자빈으로 간택했으나, 봉씨 또한 세자와 사이가 좋지 못하다가 더 해괴한 짓들을 하여 폐위되고 만다. 결과적으로는 허조가 옳았던 셈이지만 세종대왕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당장 덕만 보고 뽑았던 문종의 첫번째 아내였던 휘빈 김씨부터가 기행을 벌이다가 퇴출당했으니 세종 입장에선 외모만 보고 뽑더라도 그 내면이 첫번째 보단 낫겠거니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세종대왕이 막 통치를 시작하였을 때 부민고소금지법을 줄기차게 주장하였으나 다른 신하들의 이견이 많아 윤허를 받지 못하자 상왕이던 태종에게까지 가서 지지를 받아내어 결국 통과시키기도 하였다. 그 뒤 수령이 눈치를 보지 않고 부패하는 폐단이 있어서 세종은 수령의 판결에 대한 책임은 면책시키되 억울한 판결은 상고할 수 있게 하려고 하였는데 허조는 작은 여지라도 내줘선 안된다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세종은 억울한 백성은 말도 못하게 하는게 세상에 어딨냐고 기각하였고 허조가 나가자 허조는 고집불통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또한 훗날 조선의 공학에 크게 이바지한 위인으로 평가받는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로 임명하는 건에 대하여 조말생, 유정현, 황희 등이 찬성하는걸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며 혼자 반대하기도 하였다.# 물론 당시 가치관으론 충분히 가능한 주장이므로 이를 비판할 순 없겠지만 그의 꼬장꼬장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4. 청백리

허조는 자기관리가 매우 철저한 관료였고 뇌물, 축재, 여색 등 부정부패와는 정말 완전히 담을 쌓은 신료였다. 자타공인 청백리인 맹사성조차 황희와 짜고 살인사건을 은폐할 목적으로 상주문을 조작한 흑역사가 있었는데 반해서, 허조는 정말 탈탈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오던 인물이었다.

여색도 멀리한 나머지, 세간에는 허조를 "부부관계도 모를 것"이라고 놀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자 허조는 "내가 부부관계를 모르면 내 아들들[8]은 하늘에서 뚝 떨어졌겠냐"라고 웃으면서 반박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철저한 청백리 기질 때문에 다른 신료들의 부정부패 사건에 엄격한 원리원칙을 강조할 수 있었다. 조말생이 거액의 뇌물로 치부한 사건이 드러났을때 세종이 파직하는 걸로 사건을 덮으려 들자 가장 강력하게 맞서서 조말생의 처형을 주창했다.

5. 별명

실록에는 언급이 없으나, 서거정의 <필원잡기>에는 허조가 곱추, 다시말해 척추가 굽은 장애인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기에다 식사도 허기를 면할 정도로만 먹은 탓에 늘 깡마른 체격을 유지해서 '말라깽이 재상'이나 수응재상(瘦鷹宰相, 송골매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매일경제 기사

송골매 재상의 별명 어원에는 허조가 깡마른 송골매처럼 날카로운 외형이었다는 것에서 땄다는 설과, 젊은 관료들을 사정없이 갈구는 게 마치 매가 사냥감을 공격하는 듯해서 붙었다는 설이 있으며, 둘 다일 수도 있다. 장애로 인해 구부정한 자세로 손아랫사람을 폭풍갈굼하며 째려보는 것이 매를 연상시켰을 수도 있다.

그 외 '주공(周公)'이라는 별명도 있었는데, 예학의 전문가였던만큼 공식 석상이나 사석에서 말할 때마다 주례를 자주 들먹여서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붙은 별명이었다고 한다.

6. 죽음

음력 1439년 12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에 유언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태평한 시대에 나서[9]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가 미칠 바가 아니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며 성상의 은총을 만나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요약하면 "태평성대에 살다 죽으니 정말 행복하다. 살 만큼 살았고, 재상까지 올라도 봤고, 말 하는거 잘 들어주는 임금 모셨으니 여한이 없다." 정도의 의미다. 세종과 언쟁을 많이 벌이기는 했지만 세종에 대한 충성은 변함없었던 모양. 이 시대에는 열심히 간언을 하는 것이 충성의 상징이었고 지금도 무관하지 않다.[10]

허조가 죽던 날 허조의 형 허주가 허조의 방에 들어가 보니 허조는 혼자 웃고 있었고, 이어 허조의 부인이 들어가자 허조는 여전히 빙그레 웃고만 있었으며 아들 허후가 옆에 앉아 보고 있어도 웃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하게 여긴 가족들이 허조를 자세히 살피니 허조는 웃음을 띤 채로 숨을 거둔 뒤였다고 전해진다. 유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며 운명한 듯하다.

고려가 망한 후 건국된 조선에서 직언이 필요한 왕들을 만나 소신을 분명히 하며 살아간 충신. 허조 이후 성삼문, 김상헌, 최명길 등등 날카로운 눈으로 대처법을 간언하며 임금을 바로잡고 나라를 바로 세우려 한 충신들이 많이 나왔지만 시류에 부딪혀 무릎꿇거나 적절히 뜻을 굽히거나 숙청되거나 심지어 처형된걸 보면, 자기 뜻을 관철하며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아간 충신은 허조 뿐이라봐도 무방하다.[11]

그의 묘역은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리에 있으며 현재 파주시 향토문화유산 제29호로 지정되어있다. 이 무덤의 역사도 참 기구한데, 허조 사후 그의 후손들이 계유정난에 휩쓸리면서 멸문에 가까운 화를 당하여 사실상 실전 상태에 있었다. 물론 주변 거주민들에 의해 정조 14년(1790) 신원복관 전까지도 한미하게 유지되긴 했으나 후손들은 산소의 위치조차 몰랐었고 한국전쟁 때 후손이 묘표를 보고 발견하면서 재단장되었다. 무덤 주변이 최신식으로 정리된 것도 이 때문이다.

7. 집안 내력

허조는 그 자신도 깔끔한 처신과 강직함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다른 가족 구성원도 허조 본인 못지 않았다.

허조의 형인 허주(許周)는 허조보다 더 깐깐한 사람이었다. 허조가 형 대신 제사를 지내면서 제사 방식을 조금 바꿨는데, 허주가 이걸 듣고 "이렇게 멋대로 제사 방식을 바꾸는 건 집안 어른들과 조상님들을 무시하는 행동이다!"라고 화를 내고는 문을 걸어 잠그고 허조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 천하의 허조가 형의 집 문밖에서 며칠을 빌고 나서야 겨우 동생을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허주는 집안 예법뿐만 아니라 국사에서도 보기 드물게 엄정한 일처리를 선보였고, 기억력이 아주 좋았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던 고려 말기부터 벼슬을 하면서 권세가들의 아부를 물리쳤고,[12] 태조 때는 노비변정도감의 도청사가 되어 개국 후 노비 문제 송사를 맡아보았으며 재판이 매우 공정했다. 전라도 관찰사 때는 들은 일을 잊어버리는 법이 없어서 '일기 관찰사'란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명민하기까지. 동생 허조처럼 깐깐할 때는 깐깐하고 유교적 원리에 따라 인자해야 할 때는 인자한 사람이라서, 간음 및 살인죄와 같은 중범죄자가 아니라면 부녀자들을 옥에 가두지 말 것을 태종에게 건의한 적도 있다.

아주 실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13] 청빈함과 유능함을 겸비한 관료였던 셈인데, 통풍 질환이 심한 탓에 말년에는 16년 동안 커리어가 비어 있었으므로 세종 대의 조정에서는 별로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원로 인사였다. 이 때문인지 허조는 늦게나마 정승 반열에 올랐으나 허주는 판한성부사[14]를 끝으로 중직을 맡지 못했다. 동생 허조보다 1년 늦게 82세로 죽었다. 풍을 앓지 않았다면 정승이 되어 세종 시기 또 하나의 명신으로 알려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허주의 아들로 허조에게는 조카가 되는 허성(許誠) 역시 뛰어난 인물이었고 집안 사람들을 닮아 매우 엄격했다. 예문관 대제학,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태종과 세종에게 큰 신임을 받았다. 태종 때인 1411년 사헌 지평에 임명된 이래 태종이 그의 강직함을 마음에 들어하여, 1421년 태상왕 태종이 연회 자리에서 허성에게 춤을 추게 하고는 세종에게 "이 사람은 나의 어진 지평이다." 라고 소개했을 만큼 아꼈다. 주로 간관직을 역임하며 활약했는데, 세종의 대신들 가운데엔 구설수에 오를 만한 비위행위를 저지른 이들이 많고 사소한 실수를 한 이들은 셀 수도 없지만, 허성은 도덕적 흠결이라 할 것이 전혀 없음은 물론 심지어 일을 잘못해 물의를 일으킨 기사조차도 없어 이상할 정도.

허성은 오랫동안 간언을 잘했기에 여러 논의를 한 것이 많은데, 그 중 재미있는 것이 세종 시대 재상들의 고충을 암시하는 다음과 같은 기사.(세종 9년 11월 12일) 경연 때 기복(起復)[15]에 관한 대목이 나오자 "근자에 기복한 신하가 한둘이 아닌데, 이러면 일부러 상을 짧게 하는 것이 유행이 될 수 있으니 신중하게 하셔야 합니다." 하고 간언하는 장면이 있다. 이런 말이 나왔을 정도로 세종 시대 노신들의 고충이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16]

허후와 허눌은 허조의 두 아들이다. 허후는 세종 재위 말기에 예조참판, 예조판서를 지내는 등 아버지와 비슷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문종김종서, 정인지 등과 함께 고려사를 수찬하고, 세자이던 단종의 빈객을 맡는 등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과 함께 보좌한다. 그 자신이 고명대신으로서 문종의 유지를 이은데다가 이들 원로대신들과 친분이 있었음에도 불과하고 계유정난이 일어날 때 당시에는 살아남았으나,[17] 정난 때 살해당한 중신들의 목을 효수하는 일 등에 대해 세조에게 반대 의사를 표하다 결국 황보인 등과 같은 당으로 몰려 교형을 당했지만, 역사에 그는 충신으로 남았다. 허눌은 공신인 허조의 아들이라 조정에 입조하기는 했으나, 능력이나 인성 면에서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은 인물이라 별로 출세하지 못했다.

즉, 허조의 가문에서는 허조 본인도 그렇거니와 깐깐하고 위엄이 있는 청백리들이 많이 배출된 것이다.

그의 후손으로는 독립운동가 허석, 그의 내손인 유도 국가대표 허미미가 있다.

8. 대중매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실제 역사처럼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묘사되며, 기록을 참고했는지 깡마르고 꼬장꼬장한 인상을 하고 있다. 박시백은 이 사람의 얼굴을 국회의원 조순형을 모델로 그렸다고 한다.

허조에 대한 만화

조선왕조실톡에는 별명처럼 송골매로 나온다. 프로필에는 1439년에 죽었다고 나오지만 그건 음력을 그대로 집어넣은 것이고, 양력으로는 1440년에 죽었다.

8.1. 대왕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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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5월 17일[2] 율리우스력 2월 1일[3] 제를 주관하는 왕의 곁에서 잔을 들고 있는 관리[4] 당시 전차전투기에 준하는 전략자원이었으니 일리가 있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결국 세종이 말 1만 필을 명나라에 바쳤다.[5] 이 사람이 바로 인수대비의 고모다.[6] 맹자 양혜왕 상편 4장에 나오는 공자"순장용 인형을 발명한 사람은 반드시 그 자손이 끊길 것이다"란 말을 인용한 것이다. 즉 공자는 실제로 사람을 묻는 순장을 넘어, 토용 같은 순장을 대체할 인형을 묻는 것 조차도 싫어할 정도로 순장을 혐오하였다.[7] 이러한 깐깐함은 위아래를 가리지 않았는데, 하급 관원들을 볼 때마다 "자네는 인사도 안 하나?", "복장이 그게 뭔가?" 등 별 사소한 것을 가지고 갈구기도 해서 하급관원들은 대개 허조를 싫어했다고 한다.[8] 아래의 집안 내력 문단에도 하술되어 있듯, 허조에게는 장남 허후(許詡)와 차남 허눌(許訥)이 있었다.[9] "났다" 라는 말을 태어났다는 의미로 보면, 어린 시절인 우왕 재위기는 왜구 때문에 나라가 개판이 되고 있었으니 사실이 아니다. 다만 입신양명을 했을 때가 기준이라면 대략 세종 치세였으므로 틀린 말이 아니다.[10] 특히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신하가 임금에게 충언을 올리는 것은 필수이며 설사 왕이 충언을 들어주지 않고 벌하더라도 굴하지 않아야 했다. 특히 왕이 너무 엇나가면 갈아엎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도 있었다.[11] 아무래도 임금복도 좋았던게 섬겼던 임금들이 조선 최고의 명군으로 알려진 세종과 태종이다. 태종 같은 경우는 왕권과 관련된 것만 아니면 신하들에게 꽤나 너그러운 사람이었는데, 허조는 깐깐하긴 해도 그런 도전이 없었으니 태종에게 큰 미움을 살 일은 없었다.[12] 이인임, 염흥방, 도길부, 임견미 등 여말의 세가들이 가진 초법적 권력을 감안하면, 이는 보통 배짱을 가진 원칙주의자가 아니고서야 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장에 저 염흥방도 원래는 신진사대부였다.[13] 태종 2년에 경상도 안렴사로 있다가, 새로 개간한 땅을 측량하고 보고하지 않은 죄로 다른 안렴사들과 탄핵을 당한 뒤 귀양을 가는 실책을 범한 바가 있다. 그렇지만 이는 커다란 결격사유는 아니었고, 실제로도 3년 뒤에 방면되어 복직한다.[14] 오늘날로 치면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직책. 1469년 명칭이 판윤으로 고쳐진다.[15] 상을 치르느라 휴직 중인 신하가 상중에도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16] 같은 날에도 이미 황희는 기복 좀 그만 하면 안 되겠냐고(…) 세종에게 청했다.[17] 허후가 이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전날 세조에게 진언했던 일로 죽음을 피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 단종실록에 기록된 일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단종 즉위년에 수양대군이 환관 전균과 술을 마셨는데, 허후가 들어오더니 취한 채로 "안평대군을 치소서.", "형제가 화목하소서." 등의 발언을 했다. 단종 즉위년 윤9월 19일 이 일화만 놓고 본다면 '실은 허후 역시도 수양의 편에 서고 싶어했으며, 그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기야 하다. 그러나 다른 기록들에서 허후는 명백히 고명대신들의 편에 서 있는 인물인데다 후술하듯 실제로 나중에 세조에게 교형을 당하므로, 이 술자리 일화는 모순되는 바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대군과 환관이 술자리를 갖는 상황에서 사관이 입시해 있었을 리는 없다. 세 당사자인 허후, 세조, 환관 전균 중 세조는 말할 것도 없으며, 허후는 실록을 집필할 때쯤에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 말이 없다. 남은 전균은 성종 때까지 권세를 누린 친수양대군파 인사. 그렇다면 이 기사는 단종실록의 많은 부분이 그러하듯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좀 더 높다는 해석이 더 일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