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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상상화 | |
출생 | 1462년(세조 8) |
한성부 회현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 |
사망 | 1539년 1월 5일[1] (향년 76 ~ 77세)[2] (음력 1538년, 중종 33년 12월 6일) |
묘소 |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 3-1 |
재임기간 | 제55대 영의정 |
1516년 5월 20일[3] ~ 1520년 1월 17일[4] (음력 중종 11년 4월 9일 ~ 1519년, 중종 14년 12월 17일) | |
제58대 영의정 | |
1527년 11월 24일[5] ~ 1533년 4월 2일[6] (음력 중종 22년 10월 21일 ~ 중종 28년 2월 28일) | |
시호 | 문익(文翼) |
본관 | 동래 정씨[7] |
자 | 사훈(士勛) |
호 | 수부(守夫) |
부모 | 부친 - 정난종(鄭蘭宗, 1433 ~ 1489) 모친 - 전주 이씨 이지지(李知止)의 딸 |
부인 | 은진 송씨 - 송순년(宋順年)[8]의 딸 |
자녀 | 슬하 4남 장남 - 정노겸(鄭勞謙) 차남 - 정휘겸(鄭撝謙) 3남 - 정익겸(鄭益謙) 4남 - 정복겸(鄭福謙)[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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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문신이자 중종 재위기의 최장수 정승. 정승 기간이 14년이며 영의정만 2번에 걸쳐 9년을 했다.이 사람의 직계 후손이 철종을 옹립한 정원용이다.
2. 생애
아버지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은 세조 시절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이시애의 난 당시 황해도 관찰사였고 난을 평정한 공으로 호조참판이 된 인물로 신공신 세력 중 하나였다. 1469년 <세조실록>의 편찬에 관여하고 이후 <예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는 등 고위 관료였다.정광필 본인은 149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부제학,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03년 연산군에게 밤늦게 사냥하는 것이 몸에 좋지 않다고 간언했다가 '일하기 싫어서 하는 핑계'로 본 연산군에게 밉보였고,[10] 1년 후 1504년 갑자사화 때에 그때의 간언을 이유로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부제학에 복직해 이조참판, 예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한 뒤[11]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12] 조광조 등장 전 남곤은 차세대 정승감으로 떠올랐는데 이때 정광필도 '미래의 정승감으로는 남곤이 1순위'라고 했다.
조광조의 득세를 가장 많이 막았지만[13] 일부 의견이 맞는 부분에 관해서는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거나[14] 적절한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다.[15]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파직되었다. 이때 정광필은 조광조의 죄를 적어놓은 문안에(이건 중종의 명령으로 남곤이 썼다.) 딴지도 걸고[16] "조광조의 죄는 파직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붕당은 큰 죄인데 함부로 할 수 없고 조광조를 앉힌 건 전하잖아요."하며 눈물을 흘리며 빌어도 봤지만 실패했다. 조광조 축출에 참여한 남곤에겐 회의 도중 매섭게 쳐다 보는데 남곤은 이를 매우 무안하게 여겼다고 실록에 나와 있다.
1527년 다시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나[17] 작서의 변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로 훗날 경빈 박씨에 이어 복성군이 사사되자 "진성군을 죽일 때는 조정이 안정되지 않아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안 그래도 됩니다."라고 했다가 명예직인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1537년 총호사로서 장경왕후의 희릉을 잘못 쓰게 하였다는 김안로의 무고로 김해에 유배되었으나[18] 1538년 김안로의 사사로 풀려났다. 이 때 영의정 윤은보, 좌의정 홍언필 등이 영의정에 추천했으나 과거 영의정 때의 실정을 이유로 중종이 거절하였다.[19] 중추부영사로 1539년 77세 나이로 사망했고 중종의 묘정, 회덕의 숭현서원, 용궁의 완담향사에 배향되었다. 중종의 배향공신으로 오른 4명 중 1명인데 나머지 3명은 다름아닌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이므로 정광필을 당대에도 높아 평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묘소는 경기도 군포시에 있으며 문집 《정문익공유고》가 남아 있다.
3. 여담
- 중종 시절 몇 없던 강직하고[20] 융통성 있는 신하. 목이 달아날 만한 충언을 몇 번이고 아끼지 않았고 이로 인해 좌천되기도 했다.[21] 사상적으로도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조광조와 그 개혁파들과 달리 현실적인 시각이 있었다. 현량과에 적극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이 예시. 이후로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많은 학자들이 경연에서 정광필을 높이 평가한다.[22] 백성들도 그를 존경했는데 1527년 다시 좌의정 직에 복귀할때 백성들이 길가에 모여 "우리 정 정승께서 돌아오신다!"며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다.
- 회현동의 은행나무길에 있는 500년 가까이 묵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순조 시대 때 간행된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실린 전설에 따르면 그 나무는 정광필의 집 앞에 심어졌던 것으로, 신인(神人)이 정광필의 꿈에 나타나 정승이나 쓸 수 있는 물소의 뿔로 만든 서대(犀帶)[23]가 12개 걸릴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이는 정승 12명이 배출된다는 얘기인데 <한경식략> 시절에 이미 정승 10명이 채워졌고 이후 고종과 순종 시절에 1명씩 더 배출되어 딱 12명[24]을 채웠다고 한다.[출처]
- 진주목사까지 지낸 할아버지 정사(鄭賜)의 묘자리가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에 있다. 풍수학자들은 지보리의 지형이 여자가 다리를 벌린 형국이며 그 중심이 되는 여근에 정사의 묘가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이에 우리나라 8대 명당 자리에 속한다고 하며 옥녀단좌형(玉女端座形 - 옥녀가 남자와 관계를 위해 단정히 앉아 자세를 취한 모습)의 명당이라고 한다. 해당 자리에는 이미 다른 가문에서 묘자리를 쓰려고 했던 곳인데 묘자리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오자 포기하자 정사의 가문에서는 주변에 우물을 파 물길을 그 쪽으로 돌리고는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정광필의 집터와 마찬가지로 후손들이 관직에서 두각을 드러내니 이런저런 전설들이 전한다.
- 신숙주의 후손이자 당시 정승이었던 신용개와도 우정이 돈독했다고 한다.
4. 대중매체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격서 혁파 등에 찬성한 걸로 보아 유학자로서 기본은 갖추되 야인을 습격하자는 일이나 현량과 실시 반대, 향약 반대로 보아 현실적인 유연함도 갖추고 있고 강직하다고 호평했다.
[1] 율리우스력 1538년 12월 26일[2] 율리우스력 기준 향년 75 ~ 76세[3] 율리우스력 5월 10일[4] 율리우스력 1월 7일[5] 율리우스력 11월 14일[6] 율리우스력 3월 23일[7] 첨사공파(詹事公派)-문익공파(文翼公派) 파조[8] 숙종 때 노론의 수장인 우암 송시열의 직계 조상[9] 좌의정 정유길의 아버지.[10] 국문에 처하려고 했는데 이극균이 반대했다. 연산 9년 10월 9일 기사에 나와 있다.[11] 이 사이에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되는데 사관은 그가 백성을 위한 대책을 많이 내세울 것 같다고 생각해 임명했지만, 정작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고 평가했다.[12] 정승에 오르기 전에 성희안이 "이 사람만 한 정승감이 없습니다."라며 추천했다.[13] 현량과 실시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 이가 남곤과 정광필이다.[14] 폐비 신씨의 복위와 관련된 논쟁에서 정광필은 조광조의 가장 큰 지지자였다.[15] 정작 조광조는 정광필을 자신을 지지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소인 취급하며 정광필이 제시하는 타협안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정광필은 조광조의 아버지뻘 나이였으며 관직에 몸담은 경력 및 직급 모두 조광조보다 월등히 높았다.[16] 가장 크게 딴지를 건게 조광조의 죄안은 대신들이 죄를 알고 써놓은 냥 했는데 이에 정광필은 "우리는 부른 뒤에 알았는데요?"라고 했다. 정광필 덕에 죄안의 일부가 고쳐지기도 했으며 기묘사화 가담자들도 처벌의 수위를 낮췄고 조광조의 목숨도 조금 연장되었으며 처벌 대상자들의 처벌도 낮춰졌다. 그러나 그중 일부는 얼마 안 가 죽었다.[17] 이때는 심정, 이행, 이항 등이 영의정에는 명망가를 앉힘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앉게 되었다.[18] 이에 백성들은 다들 슬퍼했다고 한다.[19] 근데 실권이 없었기에 실정이랄 것도 없다.[20] 확실히 대단히 강직하긴 했던지 김안로 집권기는 그의 나이 70대 무렵의 일인데 그런데도 끊임없이 김안로와 다른 의견을 내어 그의 미움을 샀는데 끝내는 김안로의 무고로 벌을 받게 되었을 때 김안로는 사람을 시켜 정광필에게 나라에서 큰 화를 내릴건데 자진함이 어떻겠냐고 묻게 했지만 정광필은 사람 죽고사는건 하늘이 내리니 죽으라면 죽고 다만 명령을 기다릴 뿐이라고 답하였다. 이미 정광필이 김안로에게 보복을 당했을 때는 심정, 이항, 이행 등 수많은 이들이 김안로에게 보복당해 죽거나 유배당했음에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은 것이다.[21] 기묘사화 때는 중종에게 밉보여서 정승에서 물러나야 했고 김안로가 권신이던 시절에는 김안로에게 밉보여서 정승에서 물러나야 했다.[22] 당시는 사림이 득세하던 시절이라 조광조 축출에 앞장선 남곤 등은 비판을 들었지만 울면서 간한 정광필은(하도 상황이 뭣하다 보니 파직만으로 끝나면 안되겠냐고 했지만) 높이 평가했다. 정작 남곤이 조광조 축출에도 마지못해서 방관적 찬성하다가 정광필 못지않게 조광조를 살리려고 애를 쓰고, 조광조가 초반에 사사당할 뻔한 것을 막은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점, 또한 조광조의 죽음에 정광필과 함께 가장 슬퍼했다는 점은 싸그리 무시했다. 남곤의 경우, 죄를 뒤집어쓰지 않는다면 조광조는 천거해준 은인이자 자신을 계속 후원해준 후원자를 시와 문장을 잘한다는 이유로 배신하고 소인으로 몰아서 공격한데다가 그런 공격을 당했음에도 자신을 살리려고 애를 쓰며 슬퍼해주는 선배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선배가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는 오해나 하는 편협한 인간이 되기 때문에 무시된 것으로 보인다.[23] 관복 같은 옷에 두르던 띠[24] 정유길(鄭惟吉), 정지연(鄭芝衍), 정창연(鄭昌衍), 정태화(鄭太和), 정치화(鄭致和), 정지화(鄭知和), 정재숭(鄭載嵩), 정석오(鄭錫五), 정홍순(鄭弘淳), 정존겸(鄭存謙), 정원용(鄭元容), 정범조(鄭範朝). 하지만 정광필 자신까지 넣으면 13명이 되어 예언이 틀리게 된다.[출처] 지명이 품은 한국사 4 서울·경기도 편, 이은식 저, 타오름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