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8 17:23:24

갑자사화

파일:Joseon_little_white_minimal.png 조선의 4대 사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1. 소개2. 배경3. 불길한 징조4. 복수의 시작
4.1. 논란?
5. 무자비한 숙청6. 결과7. 기타8. 미디어에서

1. 소개

甲子士禍

어머니의 복수를 가장한 폭군의 대숙청

연산군의 친어머니 폐비 윤씨와 관련되어 많은 선비가 숙청된 사건이다. 사화라는 명칭처럼 사림의 피해는 당연히 있었고 추가로 윤필상, 이세좌, 이극균, 성준 등 화를 당한 훈구 대신들도 많다. 부관참시를 당한 한명회, 한치형, 정창손, 심회 등도 역시 훈구파로 연산군의 폭력성과 잔인성으로 인해 사림과 훈구가 다같이 쓸려 나갔다고 봐야 한다.

사실 어떻게 본다면 계유정난으로 인해 일어났던 단종의 폐위, 그리고 그의 비참한 죽음에 일조했던 자들이 사후로나마 단죄를 받은, 단종의 입장에서는 복수의 성취였던 셈이다. 단지 이때 연산군이 보인 잔혹하고 폭력적인 반응으로 인해 사화란 의미가 강해보이지만.

아울러 이 시기를 이후로 연산군의 완전한 흑화가 진행됐다. 무오사화 이후부터 갑자사화 이전까지는 연산군이 사치나 방탕함을 그리 크게 내보이진 않았고 그마저도 소극적으로나마 제동이 걸리긴 했는데, 무오사화로 삼사의 왕권 견제 기능이 약화된 상태에서 갑자사화까지 겹치자 연산군에게 제동을 걸어줄 견제 기능이 완전히 개발살이 나면서 연산군의 전제적인 행보를 막을 수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무오사화대간들을 약화시키고, 갑자사화로 남은 대간들을 비롯하여 자신과 함께하던 훈구 대신들까지 모조리 쓸어버린 연산군은 거침없이 사치, 방탕, 독재적인 행보를 이어갔고 이는 결국 중종반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2. 배경

흔히들 이 사건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어머니가 어쩌다 죽게 됐는지 알게 된 연산군이 폭주하여 일으킨 사건으로들 알고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미 재위 초반부터 폐비 윤씨가 어쩌다 죽게 됐는지 알고 있었으며, 이를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설도 있다. 자세한 건 연산군 문서를 참조하자.

하여튼 연산군이 일단 아들로서 어머니의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연산군무오사화로 대간들을 약간 누르기는 했으나 훈구파 대신들의 힘은 여전히 건재했고 성종과는 달리 강력한 왕권을 추구해왔던 연산군으로서는 대간들이 약해져 이제 쓸모가 사라진 훈구 대신들을 슬슬 토사구팽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반면, 무오사화를 통해 '아니 되옵니다'를 앵무새처럼 반복했던 대간들을 억누르는데 성공한 연산군이 독선적인 행보로 일관하며 사치와 방탕 등을 일삼자, 처음에는 연산군과 함께 대간들을 손봐주는 일에 동참했던 훈구 대신들이 '이건 좀 심한데'라며 대간들과 연합 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에 연산군폐비 윤씨가 쫓겨나고 사사된 일을 명분으로 삼아 나머지 대간들과 훈구 대신들을 모두 숙청해버린 일이 바로 이 갑자사화라는 분석도 존재한다.

일단 연산군이 자신의 친모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알게 된 것은 갑자사화 한참 전인 즉위 직후다. 연산군은 명나라에 보내기 위해 아버지 성종의 행장[1]을 짓다가 폐비 윤씨의 아버지인 윤기견의 기록을 보고 "여기에 판봉상시사 윤기견이란 자가 누구냐? 영돈녕 윤호[2]의 이름을 잘못 쓴 것이 아니냐?"라고 물었는데 신하들이 "그 사람은 폐비 윤씨의 아버지입니다."라고 하자 연산군은 자세한 정황을 보고받게 되었고, 실록에서는 그날 연산군이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출처1-1]

임금의 건강을 그 무엇보다도 중시했던 왕조 사회에서 왕이 밥을 안 먹었다는 건 절대 가벼운 일이라 할 수 없다. 현대에도 대통령의 건강은 국가 기밀로 취급될 만큼 중요한데, 그보다도 넘사벽급으로 중요한 왕조 사회의 국왕이 배를 굶는다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아들로서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상세히 듣게 된 연산군 입장에서도 밥이 입에 들어갔겠느냐만은.

이렇게 자기 어머니가 어쩌다 죽게 됐는지 알게 된 연산군은 일단 몇 년 간은 폐비 윤씨와 관련한 시를 지어 바치게 하고 묘지 이장이나 제사등 친아들이 할만한 몇가지 조치들만 취하고 반대자도 크게 책망하지 않고 설득하는 등 복수극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폐비 윤씨의 사약을 들고 간 이세좌를 시켜 폐비 윤씨의 묘 복구를 하게 하는 등 몇몇 조짐을 드러내긴 했다.

하여튼 연산군이 어머니가 죽게 된 경위 등을 듣자마자 폭주해서 급작스럽게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건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다.

2.1. 피 묻은 적삼 야사

연산군일기에서 갑자사화의 배경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피묻은 적삼이다. 보통 연산군이 등장하는 사극을 보면, 연산군이 자신의 외할머니 신씨를 통해 받은 폐비 윤씨의 피 묻은 적삼을 보고 분노해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월탄 박종화의 장편 역사소설 <금삼의 피>에 등장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현재까지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대중 매체에서 그리는 연산군의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형성된 것이다.[4]

사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에 없는 내용으로 민간에 떠돌던 야사다. 좀 더 정확히는 연려실기술에서 기묘록을 인용한 내용으로 더 자세히 서술하면 '폐비 윤씨가 사사되면서 흘린 피가 묻은 적삼을 자신의 어머니인 신씨에게 맡기면서 자신의 원통함을 알려달라고 했고, 인수대비가 죽자 신씨는 궁궐 나인들을 통해서 폐비 윤씨의 죽음과 적삼을 알렸고 자순 대비를 친어머니로 알던 연산군은 슬퍼한 뒤 시정기를 찾아서 대신들과 관련자를 죽였다'고 쓰여져 있다.

여기서 보면 알겠지만 실록과는 모순된 기록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당장 폐비 윤씨의 죽음으로 인하여 일어난 갑자사화 때 인수대비는 살아 있었고, 실록에는 연산군이 즉위한지 몇 달만에 폐비 윤씨의 일을 알았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실제로 갑자사화 이전에도 폐비 윤씨의 제사나 무덤 이장을 여러번 시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산군 일기에는 연산군이 외할머니를 만난 기록이 없다. 임사홍만 만났을 뿐이다. 그리고 이 임사홍 접촉 자체가 신빙성이 부족한게 임사홍은 후술하겠지만 갑자사화때 이극균과의 친분이 걸려서 죽을 뻔한 사람이다.

야사에 불과한 피 묻은 적삼은 이렇듯 신뢰할 수는 없는 이야기지만, 그 극적인 효과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널리 퍼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엇보다도 이 설이 히트를 친 데에는, 박종화의 역사 소설 《금삼의 피》에 등장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묘사가 상당히 임팩트가 있는지, 드라마 《장녹수》, 《왕과 나》 등 현재까지 사극에서 써먹고 있다. 그 외에도 《왕의 남자》 등에서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혹은, 실록이랑 맞지 않는 점이 걸리기 때문에 '폐비 윤씨가 죽은 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피 묻은 적삼과 함께 진상이 훨씬 더 끔찍했음을 알고 폭발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3. 불길한 징조

연산 9년(1503년) 음력 9월 11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양로연이 열렸고, 연산군은 연회에 참석해서 신하들에게 술을 받고 답례 술을 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조판서 이세좌가 연산군의 답례 술을 마시다 실수로 반을 흘려버리고 연산군의 옷을 적셔버리는 일이 있었다.

궁으로 돌아간 연산군은 즉시 승지들을 불러서 이 사실을 말하고는 이세좌를 국문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이세좌는 자신이 실수로 술을 흘렸다고 말했지만 연산군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4일 뒤인 15일에 이세좌를 파직시켜버린다. 이 파직에 윤필상 등 대신들이 그날 이세좌가 "자신은 술을 못하는데 오늘 연산군의 답술은 다 마셨다"고 자랑한 증언을 들어가며 단순한 실수였다고 이세좌를 변호했지만, 연산군은 18일에는 정승들에게, 19일에는 대간들에게 이세좌 건을 질책하더니 다음날인 20일에는 이세좌를 유배(처음에는 전라남도 무안이었다가 이틀 뒤에 함경도 온성으로 보낸다.)를 보낸다. 이에 대신들은 당혹해하며 불안감에 휩싸였는데, 이세좌는 20여년 전 폐비 윤씨가 마실 사약을 들고 갔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달 뒤인 음력 11월 20일에 창경궁에서 인수대비자순대비연산군에게 잔치를 베풀어줬는데, 이 자리에서 연산군이 입던 옷과 신발을 신하들에게 나눠주는 술주정을 부리다가 성준의 외손자이던 참의 한형윤을 이조참판으로 승진시키는 일이 있었다.

다음날 신하들이 감사와 그날 있었던 신하들의 술주정을 사과드리러 왔을 때 연산군은 이세좌의 경우와 달리 그날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폐비 윤씨의 죽음에 연루되었던 대신들의 과실은 덮었고, 반대로 자신이 약속했던 선물과 벼슬은 그대로 내려서 신하들을 달랬다.

그리고 두 달 뒤인 연산 10년(1504년) 음력 1월 11일 이세좌도 풀어주었고 다시 두 달 뒤인 음력 3월 3일 이세좌가 한양으로 올라와서 감사를 표시하자 연산군은 이세좌에게 술을 올려주며 "이것은 네가 전일 기울여 쏟은 것이다."라는 농담까지 건네며 용서해주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대신들은 연산이 단순히 홧김에 심술을 부린 것으로 해석하여 안심했지만......

4. 복수의 시작

연산 10년 음력 3월 11일 간택령이 떨어져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홍귀달에게도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홍귀달은 이를 거부하면서 들여보내지 못하는 이유를 해명하는 글을 올렸는데 이걸 본 연산군이 분노한다. 그런데 연산군은 갑자기 "이것들이 오냐오냐하니까 감히 내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네? 이게 다 그때 이세좌에게 제대로 벌을 안 줬기 때문이야!!"라고 하면서 갑자기 이세좌까지 물고 늘어져서 이세좌를 유배 보내고 그의 아들과 사위들까지 모조리 곤장을 쳐서 유배 보냈다.

그리고 연산 10년 갑자년(1504년) 음력 3월 20일 밤 연산군은 자신의 친어머니 폐비 윤씨를 모함했다는 이유로 아버지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끌고 와서, 창경궁에서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팼다. 이것도 모자라서 귀인 정씨의 아들이며 자신의 이복 남동생인 안양군 이항과 봉안군 이봉을 잡아오게 시키는데, 연산군은 이항과 이봉이 창경궁으로 오자 주변인들을 모조리 내보냈다.

그리고 이항 이봉 형제에게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가리키며 "죄가 매우 큰 여자들이니 몽둥이로 때리라"고 시켰다. 즉 자식들더러 자기 어머니를 때리라 시킨 것이다. 아마도 주변 사람들이 두 형제에게 지금 연산이 때리라고 시킨 여자가 누군지 알려줄까봐 미리 자리를 옮기게 한 듯 하다. 이항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때렸으나 이봉은 상황을 눈치채고 끝내 몽둥이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본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계속 몽둥이질을 하도록 지시해서 결국 두 귀인 모두 그날 죽고 말았다.

사실 이 내용이 상당히 뒤죽박죽인데, 당시 실록 내용을 보면 연산군은 이봉과 이항을 옥에 가두었다가, 다음에는 장 80대를 치고 유배하라고 전교했다가, 다시 둘을 창경궁으로 잡아 오게 했다. 그리고 이봉과 이항은 삼경(밤 11시 ~ 새벽 1시)이 되어서야 궁 밖으로 나온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을 모두 물리쳤다라고 나온다. 그리고 이후에 연산군의 관련 행동이 시간을 무시하고 이어지는데[5] 이것은 실록 편찬 시기에 정리되어서 추가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후술할 연산군의 행적으로 보아, 당시 연산군이 절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고, 때문에 실제로 명령 자체를 감정적으로 명령을 뒤죽박죽 지시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여튼 그렇게 둘을 죽인 연산군은 계모 자순대비의 침소를 찾아가 침소 앞에서 장검을 뽑아들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를 쳤다. 이런 공포 분위기에 시녀들은 모두 도망치고, 자순대비는 겁에 질려 나올 생각을 못했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왕비 신씨가 연산군을 붙잡고 울며 연산군을 말렸고 연산군은 결국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후 연산군은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대왕대비전으로 끌고 간 후 이항을 시켜 할머니 인수대비에게 억지로 술을 올리게 했고, 인수대비는 병중이었는데도 억지로 술을 받았다. 연산군은 다시 술을 마신 인수대비에게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라고 협박하자 인수대비는 창졸간에 베 두 필을 줬다. 이어 연산군은 인수대비에게 "어째서 내 어머니를 죽였냐"는 등의 매우 불경한 언사를 내뱉으며 할머니를 위협했다고 한다.

당시에 인수대비는 장례를 미리 준비할 정도로[6] 위독한 상태였는데, 손자의 폭력적인 행동과 폭언의 충격 때문인지 인수대비는 불과 한 달 후인 음력 4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이때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서 인수대비가 충격을 받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이건 실록 어디에도 없는 야사다. 연려실기술에서 해당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실록에서는 단지 '불손한 말이 많았다'라고만 표현하고 있다.

이 '불손한 말'이 말 그대로 쌍욕을 써 가며 인수대비를 모독한 것인지, 아니면 기본적인 예의 지킨 채 폐비 사건을 언급하며 인수대비를 공격한 것인지는 조금 불분명하다. 그러나 전자는 물론이고 후자라고 해도, 임금이 대왕대비의 침전에 쳐들어가서 깽판을 친 것 자체만으로도 당시 조선 왕실에선 말이 안 되는 짓이었다.

그 뒤에 3경(23시)에 이항과 이봉을 창덕궁에서 내보냈고, 연산군은 내수사(내관)들을 시켜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의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 젓을 담가서 산과 들에 뿌려버리게 하고 일주일 뒤인 3월 27일에 폐서인을 시켜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연산군의 협박에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때린 이항에게 '명령대로' 제 어머니를 잘 때렸다는 이유로 말을 선물한다. 그리고 이날을 시작으로 연산군의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 이항과 이봉은 1주일 뒤인 3월 27일 어머니가 폐서인 될 때 연좌되어서 이항은 제천, 이봉은 이천으로 귀양을 갔고, 1년 뒤인 연산 11년 음력 4월 25일에 외딴 섬으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결국 두 달 만인 연산 11년(1505년) 음력 6월 15일 두 사람은 어머니의 투기한 죄에 연좌해 사사시켰다.[7]

4.1. 논란?

죽었다는 2명은 이후에 다시 서인으로 내려지는 장면이 실록에 등장한다? 연산군 옹호파들은 귀인 정씨귀인 엄씨를 때려죽인 건 야사라고 하거나, 혹은 이런 차이 때문에 "사실 둘은 자살했고 살해된 것은 조작"이라는 설을 주장하는데, 사실 살해 장면도 생생하게 실록에 나온다.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 명예를 박탈하는 건 조선시대에 자주 있는 일이었다.

이 케이스는 사형을 내린 것도 아니고 고문치사에 가까운 일이니까 사망 후 명예 박탈이 일어나는 건 모순은 아닌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영조 때의 조태구, 유봉휘 등은 경종 때 죽은 사람들인데 영조 31년이 되어서야 역적으로 몰려 추죄되었고 이광좌도 죽은 지 20년 가까이 돼서야 직첩이 거둬졌다. 선조 때 죽은 정개청의 사당은 숙종 때까지 허물어졌다가 세워졌다가를 반복했고 윤선도, 윤증고종 시기까지 역적으로 몰렸다가 유현 자격이 박탈되었다 말았다 등을 반복했다.

다만 이런 경우는 정치적 입장의 문제로, 이런 사례의 절대 다수는 죽은 다음에 생전의 평가가 달라지고, 평가하는 세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생긴다. 일주일 정도 차이를 두고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에 논란의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연산군의 의사가 바뀌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서 문제의 두 사람이 죽은 것은 3월 20일이고, 서인으로 직첩이 떨어진 것은 3월 26일이다. 고문치사가 되었건 뭐가 되었건 죽은 것은 죽은 것이고, 이 처리는 반역죄 수준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그 사망한 사람이 후궁 직첩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것은, 그냥 어쩌다가 일주일 정도 늦어진거 아닌가 싶겠지만 조선 왕실의 시스템을 고려하면 택도 없는 소리다.

무엇보다 이 시기 연산군의 행적을 보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이 시기의 연산군은 그야말로 미친듯이 날뛰었다. 이세좌나 홍귀달을 처벌하라고 하지 않은 사람들을 다 잡아오게 했고, 대간들이 이세좌와 홍귀달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치죄했다.[8] 그리고 이봉과 이항은 이미 곤장 맞고 유배를 떠난 뒤였다. 이런 상황에서 후궁의 직첩을 거두라는 이야기는 연산군이 하지 않아도 당시 관료들이 했어야 했다. 연산군이 나중에 이걸 빌미로 "왜 직첩을 거두라 하지 않았느냐"며 죽이려고 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때문이 이 사건에 의문이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5. 무자비한 숙청

폐비 윤씨의 추숭을 시작으로 연산은 당시 윤씨의 폐출에 동의한 신하들을 모두 찾아내라는 하교를 내리고 그들을 모두 사사시켰다. 먼저 사약을 전달한 이세좌에게 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9] 폐비에 동의한 윤필상에게도 자살을 명했다.[10]

심지어는 이미 사망한 남효온,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어세겸, 심회, 이파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지고 한치형은 부관능지당했다. 또한 폐비에게 사약을 들고간 이세좌가 광주 이씨라는 이유로 이극균 등 광주 이씨들도 상당수 쓸리고 말았다.[11]

이 중에서 이극균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사이의 기간에서 영의정을 한 3인방[12] 중 하나로, 역시 폐비론에 힘을 쓰지 못한 것과 영의정을 하면서 자기에게 맞섰다는 이유로 연산군에게 개발살이 났다. 그런데 죽으면서 "신은 젊었을 때부터 변방에서 일했으며, 나라의 크고 작은 일에도 전심전력을 다하여 섬겨왔습니다. 그러기에, 신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죽을 죄는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를 보고받은 연산군이 분노한 건 당연지사. 연산군은 이극균의 8촌 이내와 그를 찾아뵈었던 무사들을 모조리 변방으로 내쳐버렸다.[13]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대신인 성준도 폐비와 관련된 익명서를 바쳤다는 게 발각되어 목이 잘렸고 집안이 박살나고 말았다. 당시 성준의 나이는 68세에다가 병이 있어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기에 대궐까지 업고 왔는데, 이를 보고받은 연산군이 "죄인을 업고 오는 법이 있더냐"라고 분노하는 바람에 결국 형구를 씌운 채로 질질 끌려서 국문장까지 연행되어야 했다.

이후로도 피의 숙청은 계속되어 연산군에게 밉보였던 이들이 모두 별별 이유로 목이 달아나고 사사당했으며, 이미 죽은 대신들의 재산은 전부 몰수당했고 남은 가족들도 대부분 사사당하는 피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더불어 죽은 대신들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도 처벌받아 이장곤 이윤검 등이 처벌받았고 이극균과의 친분이 있다하여 유자광임사홍(?!)'도 참수해야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 둘은 연산군의 명령으로 진짜 귀양을 갈 뻔했지만[14] 연산군이 공이 크다며 명령을 거두고 넘어갔다. # 임사홍이 갑자사화의 시발점이었다는 실록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는 지점이기도 하다.

궁중에서는 계속 국문받는 이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여기에 이세좌 등 이미 벌을 받고 자진하거나 사사된 이들의 무덤도 다시 파헤쳐 능지하거나, 아예 뼛가루로 갈아버렸다고 한다. 특히 연산군이 '갑자 6간신'이라 명한 이세좌, 윤필상, 성준, 이극균, 한치형, 남효온의 집은 모두 철거한 다음 그 자리에 물을 채워 연못으로 만들었다. 죄인이 된 대신의 집을 파괴하고 그 집터를 연못으로 만드는 이 형벌을 '파가저택(破家瀦澤)'이라고 부른다.

6. 결과

'역사저널 그날'과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이라는 책에 따르면 무오사화 때 처벌받은 사람은 약 51명이었고 그 중 6명만 처형됐지만, 갑자사화 때 처벌받은 사람은 무오사화보다 약 4배가 넘는 239명이었으며 이 중에서 122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관참시를 당했다고 한다. 갑자사화 때 처벌받은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죽거나 부관참시를 당한 것이다.

다만 여기서 이야기한 머릿수는 어디까지나 역사상 기록에 남은 사람들을 기준으로 센 숫자이다. 기록에 남지 않은, 말하자면 연좌제에 따라 싸그리 엮여서 처벌을 받은 사람들까지 일일이 기록에 남진 않았기에 그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처벌 받은 사람, 그리고 죽은 사람의 숫자는 아마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 갑자사화 때는 사림보다 오히려 훈구파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죽은 사람의 머릿수로만 따지면 삼사를 주도한 사림파가 더 많긴 한데 질적인 피해로 따지면 훈구파들이 입은 타격이 더 컸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건 말만 사화이지 실질적으로는 훈구 대신들이 주축이 되어서 희생당했고 사림은 덤으로 묻어서 처리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갑자훈화.

갑자사화 후반기에 무오사화의 생존자들을 죄다 죽이라고 해서 사림의 희생이 커졌고 훈구 대신들이 전부 연산군에 의해 사사당하고 가문도 멸문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정말 사육신보다 더 처참했으며 농담이 아니고 8촌까지 싸그리 말살당한 집안도 있다.

이렇게 유례가 없는 피바람에 그동안 줄기차게 '아니 되옵니다'만을 외쳐왔던 삼사는 물론이고 소극적으로나마 연산군에게 자기 절제를 당부했던 훈구 대신들도 연산군에게 완전히 굴복하여 이제 연산군이 무슨 일을 하던 감히 거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냥 앵무새처럼 '지당하옵니다' 이외의 말은 꺼낼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연산군사림파와 훈구파들을 모두 제압하고 전무후무한 절대 권력을 거머쥐게 됐다.

하지만, 연산군은 자신이 가진 권력에 걸맞는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릇이 크거나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은 그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하라는 나랏일은 안 하고 그냥 놀아제끼기 시작하면서 조선은 막장으로 치달았고 연산군 본인도 파멸을 향해 질주하는 처지가 됐다.

7. 기타

갑자사화 후 폐비론에 반대한 임사홍이 중용되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임사홍을 갑자사화의 실질적 주동자라고 여기기도 했으나. 이극균하고 친분으로 처벌위기까치 처하는 등 여러가지 정황을 보았을 때 갑자사화의 주동자는 연산군이며 임사홍은 그다지 존재감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이극균과 연좌되어 죽을뻔한 사람중 하나었다. 여하튼 그는 그렇게 공공의 적으로 낙인이 찍혀 결국 중종반정 때 살해당했다.

이때까지 나름대로 무난한 정치를 펼쳤던 연산군이 이후로 완전 폭군으로 돌변하여 난잡한 정치를 펼쳤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절대 권력을 손에 넣고 비뚤어졌다'는 평이 대세이나 일부 동정론 및 재해석도 잔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산군의 폭정이 절대로 정당화 할수는 없으며, 그런 동정론을 펼치기엔 연산군이 너무 막나간 것도 사실이다.

갑자사화와 이후의 숙청 때 화를 면한 인물 중 허종과 허침 형제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갑자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인 윤씨의 폐비 논의가 있을 때, 두 형제는 누이의 충고를 듣고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서 논의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이후 갑자사화 때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는 야사이다. 다만 실제로는 두 형제는 참석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아예 폐비 자체에 반대했었다. 다만 폐비를 최종 결정할 때는 운좋게(?) 두 형제의 할머니의 장례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다. 청계천에는 두 형제가 말에서 떨어진 장소라는 종침교가 있었다고 한다. 이름은 형제의 이름에서 따온 것.

8. 미디어에서

앞의 무오사화에 비해 규모가 더 크고 출생의 비밀, 고부간의 갈등 등 막장 드라마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연산군 시절을 다루는 드라마에서는 무오사화가 종종 짤리거나 비중이 축소되는 일이 벌어져도 갑자사화는 무조건 중요하고 비중 있게 다룬다. 게다가 갑자사화 이후 연산이 본격적인 폭군이 되기 때문에 연산군 시대 사극에서 가장 중요한 엑기스를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8.1. 한명회

병석에 누워있던 인수대비가 술상을 들고 처들어온 연산군을 진정시키려고 해명하자 연산군의 패드립에 결국 분노해 쉬지 않고 나무라다 연산군의 포효와 동시에 소반 킬 당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8.2. 왕과 비


상당히 잔인하게 나온다. 일단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의 가채를 직접 잡고 고문장으로 끌고 간다. 그 다음 혹독하게 고문을 하는데 주리틀기와 단근질은 기본. 귀인 엄씨는 그래도 무서워서 떨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정씨는 오히려 연산군을 도발하는 바람에 빡친 연산군이 휘두른 갈퀴에 얼굴을 맞아 그 얼굴이 찢겨 살점이 너덜너덜해졌다.

뒤늦게 입궐해서 알게 된 대신들은 '폐비의 망령이 되살아났소이다.'라는 유자광의 말까지 들으며 불안해한다. 보다 못한 임사홍이 '차라리 곱게 죽이시든가, 아니면 그만 침소로 드시고 날이 밝으면 다시 국문을 하십시오.'라고 조언해도 오히려 연산군은 '불쌍합니까?'라고 말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다음 두 귀인들의 얼굴에 자루를 씌워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게 한 다음에 봉안군과 안양군을 불러다가 역적들이라고 때려죽이라고 하자 안양군은 시키는대로 귀인 정씨를 때려죽였고, 봉안군은 상황을 파악한 다음 때리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

그 뒤에 안양군과 봉안군을 끌고 가 대비전에서 역사대로 깽판을 부렸다. 인수대비가 상당히 위엄있게 나와서 앉아서 연산군을 엄하게 나무라고 이에 연산군이 인수대비의 태도를 비꼬면서 거친 말을 퍼부으면서 패륜적인 말을 내뱉던 중 시녀들이 울어대자 시녀들을 죽이겠다고 칼을 뽑았고 이에 인수대비가 일어나서 나부터 죽이라고 외치며 맞장섰다. 그러자 차마 할머니라서 죽이지는 못하고 심하게 손으로 밀쳐 넘어뜨렸다. 그리고 내레이션으로 야사에서는 '발로 차고, 머리로 받은 거로 적혀 있다'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깽판치고 나온 뒤에 아직 숨이 붙어있는 엄씨를 보고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 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을 만든 뒤에 까마귀밥으로 던져줄 겁니다.'라고 외친 뒤 그 자리에서 엄씨를 베었다.

8.3. 왕의 남자

위의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 사건이 약간 각색되어 등장했다. 경극을 공연하는 과정에서 공길이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고 숨지는 황후, 즉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와 매우 비슷한 역을 연기하자, 감정에 북받친 연산군이 분에 못이겨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직접 칼로 살해했으며 인수대비는 그 충격으로 쇼크사했다.

8.4. 왕과 나

두 귀인을 죽일 때의 묘사가 실록과 다르다. 이 작품에서는 엄씨는 자식이 없고, 봉안군과 안양군은 모두 정씨의 아들로 나온다. 먼저 연산군이 익명서를 빌미로 봉안군과 안양군을 고문하였다. 봉안군과 안양군 두 사람은 실제로는 갑자사화 기준으로 20세가 넘은 성인이지만 작품에서는 어린 소년으로 등장한다.

정씨가 연회장에 평복 차림으로 나타나서 차라리 자신을 죽이고 두 왕자를 풀어달라고 하자 정말로 사약을 강제로 먹여서 살해한다. 이후 처소에 있던 엄씨를 쫒아가서 직접 철퇴로 쳐 죽여서 살해한다. 이 일로 화가 단단히 난 인수대비가 장 숙원의 문안 인사를 거절하는 모욕을 주고, 앙심을 품은 장 숙원은 인수대비의 측근 상궁들이 폐비 윤씨와 연관되었다고 말해서 연산군이 직접 상궁들을 잡으러 대비전에 뛰쳐 들어간다.

이를 막는 인수대비를 연산군이 밀쳐내자 그러고도 용상을 오래 지킬 수 있겠냐고 꾸짖고, 연산군은 '소손은 용상을 오래 지킬 것이니 대비 마마께서도 오래 장수하셔야 소손이 원수를 갚는 모습을 보시지요.'라고 악담을 퍼붓는다. 이에 정현왕후가 당장 인수대비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혼내겠다고 말하자 연산군은 화를 내는 대신 눈물을 흘리면서 '왜 진작에 회초리로 때리며 가르치고 아껴주지 않았습니까? 저는 진성대군이 참으로 부럽습니다.'라고 말하고, 정현왕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8.5. JTBC 인수대비

연산군이 이복동생들을 끌고 인수대비의 거처로 와서 행패를 부리자, 대비를 모시던 궁녀들이 차라리 자신들을 먼저 죽여달라며 울부짖는다. 그러자 더 화가 난 연산군은 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이렇게 울긴 했냐며 호위 무사의 칼을 뺏어다가 궁녀들을 죽이려 하고, 이를 인수대비가 나부터 죽이라며 직접 막아 선다. 결국 연산군은 강제로 인수대비를 밀쳐내고, 자리에 있던 월산대군 부인이 정말 불효자가 되려 하냐며 울부짖자 간신히 진정하고, 뛰쳐 나가서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엄씨를 죽인다. 위의 왕과 비의 묘사와 유사하다. [15]

8.6. 간신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킨 뒤부터 중종반정으로 쫓겨나기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로, 첫 도입부에 판소리 형식으로 잠깐 언급을 하고 영화를 시작한다. 폐비 윤씨의 모친인 신씨로부터 임사홍, 임숭재 부자가 폐비 윤씨의 피묻은 적삼을 받은 연산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고 한다.

영화 중반에 한 가지 반전이 드러났는데, 임사홍이 받은 피묻은 적삼은 사실 폐비 윤씨의 것이 아니었다. 폐비 윤씨는 자신이 죽고 난 후, 궁궐에 엄청난 피바람이 일 것을 걱정하여 자신의 모친에게 부탁해 유품들을 모두 소각케 했다.

그리고 폐비 윤씨의 모친도 임사홍에게 폐비 윤씨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임사홍은 자신 때문에 음독 자살한 자신의 아내가 남긴 피묻은 적삼을 폐비 윤씨의 것으로 속여 연산군에게 건네 갑자사화의 불을 당겼고 그 덕에 권력의 중심부로 돌아왔다. 여기서 다시 반전이 드러났는데 연산군은 피묻은 적삼이 모친의 것이 아닌 임사홍의 아내가 남긴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그냥 넘어간 것이다.


[1]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2] 중종의 모친이자 연산군의 계모인 정현왕후의 아버지.[출처1-1] 연산군 일기, 연산 1년 3월 16일.[4] 월탄은 이와 함께 인간백정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증오하는 성인 양녕대군의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등 현대인들의 조선왕조사 인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5] 젓을 만들어서 산야에 뿌렸다는 기사까지가 이 기사 하나에 다 나온다.[6] 연산 10년 1월 14일 기사.[7] 즉 앞서 말을 선물한 것 자체도 연산군의 조롱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8] 오죽하면 이세좌를 비판하지 않았다는 빌미로 잡아들인 관리 중에서 알고보니 병으로 누워 있었던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이 밝혀져서 풀어주는 대목이 있을 정도다.[9] 이세좌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연산군은 그가 평상시처럼 평안한 모습으로 죽었다는 말을 듣고 태도가 건방지다며 분노했다고 한다.[10] 윤필상은 이날을 대비해 비상을 소지하고 다녔으나 정작 자살할 때는 비상이 효력이 없어서 결국 목을 매어야 했다. 안습.[16] 윤필상은 임금의 명을 듣고,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라는 뉘앙스의 말을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개빡쳐서 윤필상을 단순히 죽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는 아래의 글 참조.[11] 실제로 이세좌의 아들들이 모두 사형당한다. 이준경은 그 중 하나인 이수정의 아들. 같은 광주 이씨인 이극돈은 갑자사화가 일어나기 전 해에 사망해서 화를 피할 수 있었으나 중종반정 이후엔 오히려 사화의 주범이라며 시호를 박탈당했다.[12] 나머지 둘은 한치형과 성준.[13] 물론 변방으로 내쳐버린 후에는.... 뭐, 설명하기에는 입만 아프겠다. 왜냐면 연산군 특유의 잔혹한 성정 때문에 후환을 남길 수 없다는 의미로 했을 수도 있다.[14] 갑자사화때 귀양을 간 권신들은 대부분 얼마뒤 귀양지에서 사약을 받았다.[15] 작가도 왕과 비 작가 정하연이고 인수대비 역도 왕과 비와 똑같은 채시라였으니 똑같이 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