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12-12 17:36:11

이극돈


李克墩
(1435년 ~ 1503년)
1. 개요2. 생애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

2. 생애

광주 이씨로, 세조의 변덕으로 4일간 우의정을 지낸 것으로 유명한 이인손의 넷째 아들. 이극돈의 할아버지는 청백리이자 참의를 지냈던 탄천 이지직, 이극돈의 증조 할아버지는 광주 이씨의 중흥조라 할 수 있는 둔촌 이집이다. 그의 집안은 위로 이집까지 3대, 아래로 5대를 내리 문과에 합격한 명가. 나머지 형제 넷도 고관 대작이 되었고, 이극돈의 조카와[1] 사촌 형제들도 모두 참판과 참의를 지냈다. 그의 광주 이씨 가문은 조선 전기 때 "팔극"이라 불렸을 정도로 상당한 이름을 날렸다.[2]

좌찬성의 자리에서 연산군을 충동질해 무오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본질을 놓고 보면 상당히 억울한 인물. 심지어는 사화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간신이라는 억울한 이미지까지 덧씌워져 있다.[3]

전례에 밝고 사장(=문장)에 능한 훈구파의 거물로서 사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었다 한다. 또한 관리의 행정을 환하게 습득했으며 옛일을 익숙하게 알고 모든 일을 자세히 생각해, 이르는 곳마다 업적이 있어 한 때 추앙되었다 한다. 정밀함이 월등하여 연산 1년에 죽은 형 이극배도 난처한 일을 만나면 이극돈에게 물었다고 한다. 성종 실록의 사관들은 그가 판서(숭정대부 겸 경상도 관찰사)의 자리에 오르자 이극돈 정도의 인물이 그제야 이 자리에 오르다니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라고 출중한 능력에 비해 출세하지 못한다는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4]

김일손은 검증도 안된 비난성 카더라를 너무 많이 실었던 엉터리 사관으로, 그의 기록은 신빙성이 꽤 떨어지는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무오사화 항목 참조. 김일손 등의 '정창손에 의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다, 그 출세한 전라도 관찰사 자리에서 정희왕후의 상중에 장흥군 기생과 놀아났다.' 등의 비아냥거리는 기록이 남았는데, 이에 얼굴을 붉히고 수정을 요청했다고 한다. 유자광이 사태를 키운 무오 사화에서도 "임금이 사초를 보게 되면 후세에 직필이 어려워진다"면서 세조를 까는 부분만 절취하여 올렸다.[5] 이걸 올린 것도 잘못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김일손의 스캔들성 사초에 대한 소문은 퍼질대로 퍼져있었고, 연산군은 분노해서 사초를 모두 가져오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김일손이 죄를 면할 방법은 전혀 없었으며, 이극돈은 실록청 당상으로서 그나마 희생자 수를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조의제문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무오 사화 이후로 그는 늦게 고한 죄로 삭탈 관직되었다. 이후 복권되어 광원군에 봉해졌으나, 정승은 지내지 못하고 연산 7년에 병조 판서만 지냈다. 연산 8년에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반려당했고 다음해 사직했다가 직후 절묘하게 죽었다. 연산군은 이때부터 광주 이씨 집안을 경계하게 되어 이후 갑자 사화 때 트집잡아 집안 자체를 멸문된 것과 다름없게 만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조카인 이세좌가 바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인물이니 집안이 무사하면 그게 신기한 거다. 만약 1년만 더 살았어도 "무오 사화의 수괴(?)가 갑자 사화에서 목이 날아갔다"는 아이러니한 결말을 받았을 것이다(...) 근데 실제로 갑자사화에서 부관참시되었고 그 이후 중종반정으로 회복한 후에 고신 뺏긴 거라...

이 영향은 중종반정까지 미쳐 5대손인 이이첨까지 두고두고 까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이이첨은 흑화. 이렇게 양쪽에서 공격받았고 중종반정 이후엔 더욱 지탄받은 불운한 인물. 알고보면 무오 사화의 최대 피해자 중 한 사람인데도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해버리고 만 케이스다.[6]

조사관으로 부임했을때 "백성들이 흉년이어도 쌀밥만 찾고 곡식은 풍년일때 다 먹어치운다" 면서 개탄한 적이 있다. 그때 그때 즐기며 살기보단 지금 좀 덜 행복하더라도 미래를 생각하며 살자는 뜻이다.[7] 키레네 학파가 이 글을 싫어합니다.

남곤의 경우처럼 그의 서자들이 잡과에 응시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의외로 성종 ~ 중종 조에는 잡과에 대한 대우가 박하지 않았다"라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8] 물론 어디까지나 서자가 문과를 볼 수 없기에 그리 한 것이겠지만. 실제로 당시 서얼의 문과응시는 전면 금지되어 있었고, 잡과는 천민 출신도 볼수 있었다.

[1] 대표적인 것이 예조 판서를 지낸 이세좌인데 공교롭게도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배달한 장본인이다.[2] 광해군 시대의 주요 인물이었던 이이첨은 그의 고손자(5대손)이며, 이덕형이극균의 오대손이다. 이극균은 이인손의 막내 아들이다. 작은 형인 이극감의 집안에서는 아들 이세좌의 손자로 이준경, 이윤경 형제가 나왔다. 이들은 아이 때 갑자 사화로 죽지는 않고 귀양을 갔다. 훗날 이준경은 명종 말 ~ 선조 초 때에서 대표적인 원로 신하가 된다.[3] 조선 왕조 실록 중종 2년부터 이극돈을 대대적으로 처벌해야한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결국 고신을 뺏기고 만다.[4] 성종 말에 이극돈은 가선대부(종2품)에 있었는데, 조카인 이세좌의 가정대부와 급이 같았다(정확히는 가정대부가 조금 더 높다! 즉 조카보다도 더 낮은 지위에 있던 것이다.). 후에 정승을 내리 지내다 갑자 사화에 죽는 이극균은 네 단계 높은 숭정대부(종1품)였다.[5] 사실 그가 찾아낸 사초에는 조의제문은 없었다. 여기서 나오는 "카더라"들만 하더라도 대다수 신빙성이 없는 것들로, 단종의 시체를 한 동자가 찾아냈다는 설화를 그대로 올린 것도 그렇다. 후에 유자광이 찾아낸 것이다.[6] 아 물론 김종직의 제자란 이유로 유배된 이들보다는 나은 편이다. 게다가 아들이 김종직의 제자란 이유로 국문받은 사람도 있었다.[7] 당대 조선인들의 식사량은 동북아 3국 중에서 제일 많았다.[8] 실제로 성종은 무신이나 잡과 출신자들에게 문관직들을 꽤나 제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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