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0 22:31:16

세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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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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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7대 국왕
世祖
세조
파일:external/cafefiles.naver.net/8109C.png
세조 어진 복원본[1]
묘호 신종(神宗)[2]세조(世祖)
시호 조선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
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
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혜장(惠莊)
존호 승천체도열문영무대왕
(承天體道烈文英武大王)[3]
본관 전주(全州)
유(瑈)
수지(粹之)
출생 한성 본궁
사망 한성 수강궁 정침
능묘 태릉(泰陵)[4]광릉(光陵)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
부왕 조선 세종
모후 소헌왕후(昭憲王后)
생몰 기간 음력 1417년 9월 24일[5] ~ 1468년 9월 8일
양력 1417년 11월 2일 ~ 1468년 9월 23일
(50년 10개월 21일, 1만 8589일.)
재위 기간 음력 1455년6월 11일 ~ 1468년 9월 7일
양력 1455년 6월 25일 ~ 1468년 9월 22일
(13년 2개월 27일, 4838일.)
상왕 음력 1468년 9월 7일 ~ 1468년 9월 8일
양력 1468년 9월 22일 ~ 1468년 9월 23일
(1일.)
재임 기간 영의정:
1453년 10월 11일 ~ 1455년 6월 11일
종교 불교
친필 서명 파일:세조 수결.jpg[6]

1. 개요2. 상세3. 대군 시절4. 인물5. 치세6. 세조의 능7. 어진8. 어필9. 사극10. 기타11. 기타 관련 문서12. 둘러보기(계보)

1. 개요

조선의 제7대 임금으로 세종의 차남.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휘는 유(瑈), 자는 수지(粹之).

2. 상세

왕이 되기 전 군호는 수양대군(首陽大君)[7]으로, 일반 대중들에겐 지금도 이 명칭이 더 익숙한 감이 없잖아 있다.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를 비롯한 반대파들을 학살한 후 조카 단종에게서 사실상 권력을 빼앗고, 이후 '양위'(사실상 찬탈[8])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도 모자라 단종 복위를 노리던 사육신과 친동생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을 사사하고, 마지막엔 조카 단종마저 제거한 냉혈한 군주로 알려져있다. 1468년 지병으로 앓던 악성 피부병으로 병사했다. 당연히 조카의 저주란 말이 나돌기도 했다. 향년 52세.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어쨌든 조선 왕조의 기반을 마무리한 군주. 평이 여러모로 엇갈리는 군주로 어떤 관점에 볼것이냐 에 따라, 폭군, 패륜아에서 왕권 강화에 노력한 노련한 군주라는 평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평을 받고 있다. 다만 폭군 꼬리표를 떼려면 치세나 업적이 저런 행적을 무마할 정도로 출중해야 하는데 세조의 치세는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훌륭했다고 보기도 애매해서 재평가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특히 조선 시대 통들어 가장 정통성이 부족한 군주였다는 점도 그의 평가를 낮추는데 일조하고 있다.[9] 실제 집권 과정의 정통성 혹은 정당성은 후대의 평가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이 정통성의 문제는 세조 본인에게도 문제였겠지만, 이후의 국왕들에게 두고두고 발목을 잡으면서 조선의 왕권을 취약하게 만들어 신권이 왕을 견제하다못해 그냥 제대로 폭주하게 만들면서 조선을 쇠퇴시키고 끝내는 멸망으로 이끈 가장 큰 원인들 중 하나였다. 심지어 성종이나 선조 때도 왕권의 버팀목이 돼줘야 할 사람들 스스로가 왕권 제어가 극심하였다.

이런 점이 꽤 두드러지는게 현대의 평가로, 재미있는 점은 정권이나 정파에 따라서 세조를 보는 관점도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를 보면 세조와 비슷한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 사례라고 볼 수 있는 5.16 군사정변, 12.12 군사반란 등으로 집권한 정권이 있던 시절엔 잔혹한 숙청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권신들로부터 조선의 왕실을 지켜낸 필요악적인 존재라는 평가를 장기간 받기도 했다.[10] 허나 제대로 된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선 1990년대 이후부턴 반대로 평가가 꽤 박해지기 시작했는데,[11] 조금씩 그의 정변에 명분 없다는 인식이 많이 퍼지기 시작하며 정변 관련 "구국의 결단"과 같은 이미지는 많이 사라진 편이고 더욱이 2010년대 들어서는 정변 뿐만 아니라 왕으로써 능력적인 부분에서도 잘못된 부분이 많았다는 평가가 대중들에게 많이 퍼졌다. 특히 젊은층을 중심으로 아예 '군사 정권에 의해 거품만 잔뜩 낀, 정통성 없고 업적, 인간성도 제로인 암군' 정도로 급격히 격하되는 악평을 듣기도 한다. 군사정권시절 고평가의 반발로 과도하게 까이는 감도 있지만 그래도 이전에는 "잔혹한 숙청과 그에 대한 정당성" 정도의 인식에 사람들이 머물렀던 반면 현재는 좀 더 복합적으로 변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역사는 어디까지나 사실의 근거하여 판단해야 한다. 세조 치적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왕권 강화에 기반을 다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흔히 세조를 태종에 비교 하는데, 세조와 태종는 명분과 그 행동 사이즈가 차이가 컸다. 특히 태종시절에 경우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앉히는 실수[12]를 저질렀기 때문에 사실상 명분도 태종에게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태종은 이 명분을 치밀하고 착실하게 만들었다. 태종과는 다르게 세조가 단순히 배신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이유는 여기있다. 명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단종의 정치 기반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조정에 충신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종과 문종때 워낙 잘 길을 닦아 놔서 적정수준의 간신과 충신이 섞여 있었다. 단종이 단명했기 때문에 그 치적을 알 수 없으나, 원래대로 단종이 계속 이어 나갔다면, 앞서 언급한 정통성에 문제 또한 해결이 되고, 단종 본인만 조심하면 문종 때까지 이어졌던 강화된 왕권이 흔들릴 이유도 없기 때문에 지지 기반을 보나 환경을 보더라도 더 나았을 것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유일한 단점은 단종이 너무 어렸다는 것인데, 그당시가 조선이 개국하고 고작 5대째였다는 것을 감안해 보자. 성인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적은 나이라고만 보기도 어려웠다. 물론 국정 수행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것이기에 좋은 스승이 있고, 후원자가 있었어야 겠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김종서는 깨끗한 후원자라고는 할수 없지만, 나쁜 후원자라 평할수 없다.

3. 대군 시절

조선의 25대 영의정
전임 황보인
후임 정인지
신상정보
성명 이유(李瑈)
관직 1428년 대군 봉작
1445년 최종 개봉(수양 대군)
1453년 정권 장악
영의정 취임
1455년 왕위 등극
당파 -
종교 유교(성리학)
배우자 윤씨(尹氏)
국적 조선
생몰년도 1417년 ~ 1468년
재임 기간 1453년 ~ 1455년

4. 인물

5. 치세

6. 세조의 능



세조의 묘인 광릉우리나라 최초의 회곽묘로 한국 묘제사 및 고고학사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세조의 능제 형식은 이후 민간으로 퍼지면서 안정나씨 묘 출토 편지, 진주하씨 묘 출토유물, 청주 출토 순천김씨 의복 및 간찰, 이응태 묘 출토 편지 등 다양한 한국의 부장 문화재가 땅 밑에서 썩지 않고 보존되는 계기가 되었다.[13] 자세한 내용은 광릉 문서 참조.

7. 어진

세조의 어진은 운이 좋게도 전쟁의 참화에서 세 번이나 피해갔다. 한 번은 임진왜란이이첨이 구해내었고, 두 번째는 병자호란 때 숭의전에서 분실했으나 성밖에서 극적으로 찾았으며 한국전쟁 때도 원본은 잿더미가 되었으나 초본이 남아 있어 오늘날에 세조의 용안을 보게 되었다.
파일:attachment/sejourjin1.png
이 사진은 1935년 창덕궁 신선원전에서 이당 김은호 화백이 당시 궁에 보존되어 오던 세조의 어진을 이왕직의 주문으로 새로 이모해 그려내는 광경을 담은 것이다. 출처. 하지만 사진 자체가 원래 원본과 모사본 자체를 찍으려고 촬영한 게 아니라 모사본을 만드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것이라 어진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1969년 5월 14일경향신문에 의하면 1928년 원종과 세조의 어진을 모사했던 김은호가 영릉 세종대왕기념관 내에 새로 건립된 김경승 作 세종대왕 동상의 고증에 대해 지적하면서 '1928년 당시 작업했었던 세조의 어진에 거의 수염이 없었다', '아들인 세조의 얼굴과 역시 수염이 성근 편인 태조의 얼굴처럼 세종의 얼굴도 그닥 수염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파일:f0041956_5107da7ef285a.png
또한, 이 신문에는 세조 어진의 초본이라고 하는 사진도 실려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둥근 얼굴형에 광대뼈가 드러나고 수염이 거의 없는 모습이었다.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092758625_1._%25BC%25BC%25C1%25B6%25BE%25EE%25C1%25F8_%25BE%25C6%25C1%25D6%25B0%25ED%25C8%25AD%25C1%25FA-%25B1%25D9%25C1%25A2.jpg 파일:external/s13.postimg.org/a7a_Nd7_OMHr_1478763410.jpg
그러다 2016년 11월 16일, 난데없이 옥션블루(링크)에 그동안 종적이 묘연했던 세조 어진의 초본이 출품되었다.# 다만 기사나 상술된 사진을 봐도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조선시대가 아닌 일제강점기 시절 김은호 화백이 원본을 모사한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어진들이 소실된 현실을 감안하면 모사품이라도 귀한 건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세조 어진 초본의 발견으로 아버지인 세종, 형인 문종, 아들인 예종의 얼굴도 유추해볼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 작품은 세조의 얼굴이 기존에 대중들에게 박힌 인상과는 180도 다른 너무나 순박한 상이어서 상당수 네티즌들에게 충격을 선사하기도 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낙찰받았으며 곧 복원 작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다만 의상의 문양이 세세하게 그려진 것에 비하면 얼굴 부분의 표현이 너무 단순하게 처리되었다며 얼굴 자체도 미완성일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EB%AC%B4%EC%A0%9C-1.jpg 파일:external/cafefiles.naver.net/8109C.png
비공식 복원본[14]
파일:세조 초본 복제품.jpg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세조 전시회를 맞아 복제한 초본
파일:external/dimg.donga.com/6864288.1.jpg 파일:6XzEsap.jpg
합천 해인사 존상도(1458년). 좌측 그림의 민간 모사도.
둥그런 얼굴형, 숱이 적은 수염 등이 왕실 공식 어진과 비슷하여 상상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파일:picsAf0.jpg 파일:NTFFxZv.png
선원보감에 실린 세조의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세조 초상화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 실린 세조의 초상화이다. 둥그런 얼굴을 가진 세조의 얼굴을 하관이 넓게 그리고 수염을 풍성하게 그렸다. 그리고 관상학에서는 하관이 넓은 것을 좋은 관상으로 여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진이나 초상화가 남아 있으면 그것대로 캐릭터를 그려내곤 했는데, 어쩐 일인지 세조에 대해서는 하관도 비범하고 수염도 파워풀한 이런 개성 있는 생김새를 고증하지 않았다. 도리어 조금 왜소하고 광대뼈가 드러나는 얇은 수염의 소유자로 그렸다. 아마도 박시백 화백이 세조 어진 초본이 발견되기 전에 그린 것이라서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것 같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EC%84%B8%EC%A1%B0%EC%A1%B4%EC%98%81%EB%8F%84_2.jpg
1970년대까지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 복개당에 모셔져 동제를 받았던 전(傳)세조 존영도. 신수동 복개당은 세조를 마을신으로 모셨던 사당으로 노인정 공사로 철거되었고 전 세조존영도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일본인이 그의 어진을 그린 적도 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어진 문서 내의 조선 세조 문단 참고.

어진을 구입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018년 10월 22일부터 2019년 1월 13일까지 테마전 '세조'를 열었다.#, # 임금 단독으로 테마전이 개최된 것은 최초로, 세조 어진 외에도 진법, 세조 태항아리, 열성어필, 선종영가집언해, 경국대전, 영정모사등록, 광릉 제기 등 세조와 관련된 유물 30여점도 함께 전시되었다.

8. 어필

파일:조선 세조 어필.jpg 파일:자치통감강목 세조 글씨.png
조선 세조의 친필 글씨(열성어필) 1436년 진양대군(19세) 시절 쓴 글
파일:세조어필 영산전 편액.jpg
1460년대 전후에 김시습을 만나러 마곡사에 행차해 쓴 영산전(靈山殿)의 편액(扁額). 좌측에 세조대왕어필(世祖大王御筆)이라 써져 있다.
파일:상원사 중창권선문 내 세조어첩.jpg
1464년에 상원사를 중창하며 직접 친필로 써서 전한 상원사 어첩(御牒). 세조의 친필 한문, 한글 편지글 외에도 세자빈, 왕세자의 수결과 도장도 함께 찍혀있다. 여기에 수록된 세조와 신미의 한글 문장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손글씨이다.문화재청
파일:세조의 친필 한글과 옥새 일부분.jpg
파일:자치통감강목(병진자).jpg 파일:금강경 언해본(정축자).jpg
당대에 명필로 유명했던 세조의 글씨는 조선 정부에 의해 두 차례에 걸쳐 활자화되었다. 왼쪽은 세종대왕이 10대 때의 세조가 쓴 글씨를 자본으로 삼아 만든 병진자로 찍어낸 자치통감강목, 오른쪽은 40대의 세조가 쓴 글씨를 정문으로 삼아 만든 정축자로 찍어낸 금강경 언해본

9. 사극

계유정난과 관련된 사극이 워낙 많아서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역사 속 인물 중 한 명이다. 이 시대를 다룬 사극이 대부분이 그렇듯 누구를 주인공으로 보느냐에 따라 캐릭터가 극과 극을 달린다. 세조를 주인공으로 하면 '고뇌하는 인간적인 군주', '구국을 위해 오명을 감수한 영웅'으로 그려지지만 단종의 비극이나 사육신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에서는 권력욕에 광분해서 조카(단종)를 몰아내 죽이고 친동생들(안평대군, 금성대군)마저도 죽이는 등의 패륜도 서슴치않는 폭군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래서 평가하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서, 전자가 미화가 지나치다고 하기도 하고, 후자가 육신전식 선악관계에 매몰된 악역으로 평가된다. 결국 어느 쪽이든 보는 사람의 비판적이 시각이 필요하다보니, 그냥 둘 다 그린다는 식의 작품이 고평가 된다. 이 때문에 해당 매체 외에 평가를 읽는데 있어서, 자신의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30대에 병사한 문종 역을 40~50대 이상의 배우들이 맡게 되는 주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세조 역은 문종 사후부터 다루는 시간이 긴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중견 연기자가 맡을 수밖에 없는데 그 형을 동생보다 어려보이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조대왕(1970)에서는 신영균이 세조 역할을 맡았다. 김시습(김진규), 신숙주(허장강), 서거정(김석훈), 단종(송재호), 동궁(이순재) 등과 공동주연이다.

조선왕조오백년: 설중매에서는 남성우가 맡아, 사극 역사상 이름 높은 정진의 한명회를 턱짓으로 부려먹는 포스를 보여주었다.

한명회에서는 서인석이 맡았다.[15] 한명회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답게 세조에 대해서도 상당히 긍정적인 시각으로 그려낸 편. 계유정난 전후에는 반인륜적인 행위에 대한 고뇌 때문에, 즉위 이후로는 질병 때문에 신경질적이고 변덕스러운 면모를 보이다가도, 뭔가 결단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면 강한 카리스마로 좌중을 휘어잡는 이중적인 모습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특히 드라마 초반, 한명회의 자질을 알아보고 단번에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장면이 압권.



왕과 비에서는 임동진이 세조를 맡았다.[16] 여기서는 형인 문종과의 약속을 두고 단종을 몰아내고도 그 처우에 대해 고뇌하는 인간으로 그려졌으며, 말년에는 죄의식으로 고뇌하고 고통받는 군주로 그려진다. 말년에 그가 묻힌 무덤 앞에서 단종의 혼령이 춥다고 꺼내달라고 하는 장면에서 "홍위야! 내가 꺼내주마! 조금만 기다리거라!"하며 울면서 무덤을 파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명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는데 해석은 연출자와 작가의 몫인만큼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보는 것은 시청자의 몫으로 남는다.

파천무에서는 왕 역할을 주로맡는 유동근이 수양대군 시절부터 세조의 즉위 후 얼마간의 치세까지 연기했는데, 다른 사극에서와 달리 왕위찬탈과정과 유지에서 심적으로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섬세한 지식인의 모습을 연출했다. 정적에게는 잔인할 정도로 차가운, 수하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남자다운 캐릭터로 그려냈다.

퓨전 사극이 아닌 의외로 한명회(서인석)나 왕과 비(임동진)같은 정통 사극들에서 인간적이고 영웅적인 인물로 등장하곤 하는데 사실 이는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을 따른 해석이다. 재미있게도 이순재파천무에 이어 공주의 남자에서도 김종서 역을 맡아 세조에게 참살을 당한다. 군사정권 시절에 쿠데타를 미화하려고 했다는 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당장 2010년대만 해도 세조미화물인 인수대비 같은 드라마가 나오는걸로 봐선 그냥 작가가 실록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이런 작품들이 나온다고 봐야 한다. 당장 박정희 때만 해도 이예춘이 인간쓰레기 수양대군으로 나온 단종애사가 인기를 끌 정도였다고 하니...

파일:공주의 남자 세조.jpg




퓨전사극인 공주의 남자에서는 김영철이 세조 역할을 맡았다. 공교롭게도 파천무에서 세조 역이었던 유동근씨는 용의 눈물에서 태종 역을 맡았고, 김영철 씨는 대왕 세종에서 태종 역을 맡았다. 김영철의 세조는 엄청난 아우라를 뿜어내는데 6회에서 김종서를 생각하며 가만히 "이 손으로 죽여 드리리다."라고 말할 때는 소름이 끼칠 정도. 권력에 대한 욕구가 넘치며 정적에겐 피도 눈물도 없는 것. 특히나 정적이나 친족에 대해 고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역대 사극들의 세조와 가장 다른 점이다.[17] 심지어 딸이 김종서의 아들을 좋아한다는 것마저도 이용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다. 한편 엔딩에서 딸 세령이가 자결한 줄 알고 크게 상심하는 모습과 세월이 흐른 뒤 그 세령이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 은은한 미소를 날리는 모습에서 인간미 또한 넘쳐난다.

파일:대왕 세종 수양대군.jpg
파일:대왕 세종 수양대군2.jpg

대왕 세종에서는 아역은 최민호, 성인은 서준영[18]이 연기하였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진양대군으로 나온다. 성인으로 첫 등장은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최대의 정적이 되는 김종서와 나란히 나오는 장면. 세종을 도우면서 문자 창제에도 참여하지만, 시체 해부까지 하려는 일에는 반감을 가지고, 반정을 권하는 최만리의 충동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마지막회에서 세종이 모든 걸 알고도 "한 때 그런 마음을 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하진 마라."라고 다독이자 결국 뜻을 접고 수양대군이란 군호를 받는다.

파일:인수대비 세조.jpg

인수대비(드라마)에서는 김영호가 연기를 펼쳤으나 앞서 김영철의 연기가 너무 후덜덜했을 뿐더러, 인상이나 성품이 순하게 나와서 야인시대 이정재 시절 만큼의 위엄이 나오지 않았다. 비중이 정희왕후(김미숙 분)나 인수대비(채시라 분)에 밀린 것도 한몫했다.# 결국 스스로 저지른 업보 탓인지 문종, 단종에 대한 악몽에 떨다가 절규하며 퇴장. 왕과 나김병세도 비교적 선이 가늘게 나온 세조로 꼽힌다.

북한에서 남한의 장비를 빌려 합작제작한 사육신에서는 최봉식이란 배우가 수양대군 역을 맡았다.

파일:관상 수양대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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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개봉영화 관상에서는 이정재가 수양대군 역할을 맡았다.[19] 이정재는 이 작품에서 수양대군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제로 치밀하게 관찰한 것처럼 수양대군의 성격과 강한 권력에 대한 집착을 확실하게 소화해내는데 성공했다. 특히 김내경의 아들을 활로 저격해 죽이고나서 "저 자는 자기 아들 놈이 저렇게 절명할 것을 알고나 있었으려나? 난 몰랐네만..." 이라는 말 한마디로 뻔뻔하면서도 냉혹의 최절정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다. 여담으로 함께 출연한 배우 김혜수가 관상의 시나리오를 읽고 수양대군 역이 탐났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그러면서 수양이 실존인물이 아니었더라면 수양을 남장여자로 설정해 달라고 감독에게 조르고 싶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만큼 악역이지만 영화 속 캐릭터 자체는 매력적으로 뽑혔다는 의미. 영화 제목처럼 관상이 주 소재인 영화다보니 수양의 관상도 표현하는데, 수양의 상은 늑대의 상이다. 물론 여기서도 보고 있노라면 왕이고 뭐고 간에 천하의 개쌍놈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 이정재의 연기와 맞물려 호쾌하면서도 간악하고 잔인한 세조의 면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특히 수양대군의 첫 등장씬인 사냥을 마치고 걸어들어오는 장면은 BGM과 맞물려 엄청난 포스를 뿜어낸다.

2016년 KBS 1TV 드라마 장영실에서는 뮤지컬 배우 고영빈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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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 - 사랑을 그리다에서는 주상욱이 역을 맡았다. 영화 관상 때와 마찬가지로 극중 히로인을 맡은 배우 진세연성별 문제만 아니라면 진양대군 역이 너무 욕심난다는 의견을 밝혔다.

10. 기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하고, 그러다 보니 낙마도 굉장히 많이 한 왕이란다. # 웃긴 건 낙마할 때마다 바로 벌떡 일어나 아픔을 참고 멀쩡한 척 말을 집어탔다고... 아 X발 쪽![20]

11. 기타 관련 문서

12. 둘러보기(계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
조선의 역대 국왕
6대 단종 이홍위 7대 세조 이유 8대 예종 이황
조선의 역대 영의정
24대 황보인 25대 이유
(1453 ~ 1455)
26대 정인지


[1] 1935년, 이당 김은호 화백이 제작한 세조 어진 초본을 중국인 류첸(영연세자)이 현대에 채색한 비공식 복원본이다.[2] 원래 신종(神宗)으로 하려고 했으나 예종의 반대로 세조(世祖)로 정해졌다. 이때 묘호 후보 중에는 성종(聖宗)예종(睿宗)도 있었다. 여기서 예종(睿宗)이라는 묘호는 결국 아들 예종이 가져갔다. 또 공교롭게도 이때 능호 후보로는 경릉(景陵)·창릉(昌陵)·정릉(靖陵)이 올라왔는데, 이 중 창릉 역시 예종이 가져갔다.[3] 출처.[4] 본래는 아들 예종이 능호를 태릉(泰陵)으로 정하길 원했으나, 신숙주가 태릉은 암군이었던 당 현종의 능호와 같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광릉(光陵)으로 정해진 것. 결국 태릉은 알다시피 훗날 문정왕후의 능호로 정해진다.[5] 실록에 매년 탄일하례 기록을 보면 9월 24일로 되어 있다.[6] 현존하고 있는 조선왕의 친필 수결 7종(태조, 태종, 세조, 정조, 순조, 고종) 중 하나.#, ##[7] '수양'은 황해도 (북한 황해북도) 해주시의 옛 이름이며, 이에 해주의 진산(鎭山) 이름도 '수양산'(높이 899m)이다.[8] 수족들이 하나둘 잘려나가고 이를 버티지 못한 단종이 결국 양위 선언을 하자마자 세조는 하루만에 즉위하는데, 복잡한 의례 절차를 생각하면 이전부터 즉위를 준비하고 있었던 셈. 심지어 (평소에도 자뻑끼가 좀 있던) 수양대군은 예의상 하는 거절도 딱히 안하고 양위를 덥석 받은 걸로 묘사된다.[9] 반대로 그가 쫒아낸 조카 단종은 조선 시대 통틀어 가장 정통성이 충분했던 군주 중 한명이였다. 그런 단종을 딱히 능력을 검증할 틈도 안주고 하늘나라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이런 단종에 대한 아쉬움 역시 세조의 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10] 똑같이 쿠데타로 왕이 됐으며 패륜아로 악명이 높은 인조는 왜 군사정권이 미화하지 않았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는데, 인조의 경우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최악의 흑역사 때문에 군사정권조차도 차마 미화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외세에게 허무하게 굴복한 왕을 롤모델로 삼는 건 합법적으로 집권한 지도자에게든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에게든 똑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아이러니한 건 쿠데타의 명분은 세조보다 인조가 훨씬 충분했다는 거지만...[11] 고우영 화백의 만화에는 아예 세조의 별명을 '쿠데타 리'라고 붙여놓았다.[12] 이걸 병크로 판단할수 밖에 없는 것이, 개국에 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멀쩡히 정실 부인 소생의 장성한 아들들이 여럿 있었고, 설사 장남이 없었다고 해도 차남을 봐야 했었는데 그러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첩의 첫째도 아닌 둘째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했다. 당시 이씨 왕족 사이에서는 이미 정통성 여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어불 상설인 상황이었다. 이는 정도전이 추구하는 신권 주의에는 강한 왕보다는 유하고 현명한 왕이 필요했기 때문이지, 굳이 따지자면, 정실부인의 자식들에게 흠이 있어서 그랬던건 아니었다. 이는 당시의 정도전이 무리하게 사병혁파를 하려고 했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 압박이 있었지 않나 하는 추축도 가능하다. 사실 사병 혁파 같은건 단시일에 시행하기에는 무리수가 너무 컸다. 태종때에 결국 사병혁파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태종이 행한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듯 상당히 많은 피를 봐서야 진행이 되었다. 최소한 그정도의 출혈은 각오해야 단시간에 진행 할 수 있었던 일 이라는 것이다.[13] 최초의 회곽묘인 만큼 세조 또한 수많은 국보급 왕실 부장품 및 서적과 함께 땅 밑에서 온전히 미라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조선 왕릉을 파헤칠 순 없는 노릇이지만...[14] 안태성 교수의 세조 용안 복원본(링크1)을 바탕으로 중국인 류첸(영연세자)이 다시 작업한 어진(링크2). 링크1, 링크2.[15] 이전 문서에서는 바로 위의 조선왕조오백년 항목 마지막 부분에 “이 둘의 구도는 훗날 태조왕건에서 견훤능환의 관계로 다시 재현된다. 견훤 때에도 그랬지만, 주변인들을 위압하는 카리스마 면에서는 아직까지 이 때를 능가한 후속작이 없다”는 구절이 있었다. 조선왕조오백년에서 한명회 역할을 맡았던 정진이 태조왕건에서 능환으로 분한 건 사실이나, 서인석이 세조로 분했던 작품은 조선왕조오백년이 아닌 한명회였는데... 무슨 근거로 이렇게 서술했는지 확인 바람.[16] 공교롭게도 한명회에서는 김종서를 맡았다. 또 임동진은 제4공화국에서는 김영삼을, 제5공화국에서는 김대중을 맡으며 수양대군-김종서에 이어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 연기를 연달아 맡는 기염을 토했다.[17] 공교롭게도 얼마 후에는 야인시대에서 김영철이 맡았던 김두한의 숙적 이정재 역할을 연기했던 김영호가 인수대비에서 세조 역할을 연기했다.[18]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수양대군의 아우인 광평대군 역할을 맡았다.[19] 재밌게도 이정재 본인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22대손으로, 어쩌고 보면 먼 항렬의 조상님을 연기한 셈이다.[20] 말에서 낙마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잘못해서 목이 부러지면 죽을 수도 있고, 운이 좋아 크게 안 다쳐도 삐거나 멍들 각오는 해야 하는 터라 곧바로 벌떡 일어나는 건 여간해서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쪽팔렸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