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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蒙山和尙法語略綠諺解. 조선 세조 13년, 1467년에 신미 대사가 왕의 명에 따라 원나라 몽산화상(蒙山和尙) 덕이(德異)의 불경인 법어를 한글로 번역한 불경 언해서. 대한민국의 보물 제767호, 769호, 1012호로 지정되어 있다. 768호로 지정되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물 768호는 존재하지 않는다.2. 내용
세조 때 번역되어 간행된 불경으로 원나라 몽산 화상의 법어(法語)를 신미가 번역하였고 권말에는 보제존자(普濟尊者)의 시각오선인법어(示覺悟禪人法語) 1편도 같이 번역되어 있다. 사법어언해와 합철된 중간본(重刊本)도 있을 뿐 아니라, 표기법도 같으므로 같은 연대의 간행으로 보고 있다.세조 13년때 간경도감에서 처음 간행된 후 성종 3년에 김수온의 발문을 붙여 중간되기도 했고 이후 중종 대와 선조 대 등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많은 이본과 후인본이 만들어져 전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1400년대 초기 한글의 특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인데, 특히 ㅸ이 거의 최초로 나타나고 있어 국어사 연구에 매우 소중히 사용되고 있다. 특히 1577년(선조 10년) 순천시 송광사판은 구개음화까지 따로 보여주고 있어 국어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로 취급받고 있다.
이후 전국에서 널리 읽힌 법어의 원본이 되는 책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특히 1521년(중종 16년) 금강산 유점사, 1523년 풍기 석륜암(石輪庵), 1525년 황해도 심원사(深源寺), 1543년 진안 중대사(中臺寺), 1517년 충청도 고운사, 1535년 영변 빙발암(氷鉢庵) 등등에서 만들어진 간본들이 유명하다.
3. 편찬 배경
조선의 7대 왕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불교를 선호하였으며 그 지식 또한 남달라 이를 눈여겨본 세종의 곁에서 불서 편찬과 불경 간행을 도맡아 왔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뒤에는 피로 물들어버린 왕위 찬탈 행위를 속죄하고 용서받고 구원받으려는 마음에서 더욱 불교에 심취하였다. 1457년 묘법연화경을 간행하고, 1458년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꺼내 전국 사찰에 분장하였으며, 1459년에는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 이렇게 어느 정도 불경 간행의 업적을 쌓은 뒤 크게 마음을 먹고 유학자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1461년 설치한 기구가 간경도감이다.간경도감은 한자로 만들어져 있어 백성들이 그동안 마음놓고 읽을 수 없던 불경들을 언문으로 번역하고 간행하는 기관으로 서울의 본사(本司)를 중심으로 안동부, 개성부, 상주부, 진주부, 전주부, 남원부 등 전국에 설치하여 전 백성이 한글과 불경을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게 만들었다. 거의 대부분의 업무를 세조가 관장하였고 성종이 즉위한 후 성리학적 관점에서 폐지될 때까지 11년간 존속하며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선종영가집언해, 사법어언해, 원각경언해, 아미타경언해,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목우자수심결언해,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언해, 금강반야바라밀다경언해 등 수많은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법어 또한 이 시기 언해본이 간경도감에서 만들어져 전국의 사찰과 민간인들이 쉽게 볼 수 있게 하였다.
4. 종류
4.1. 보물 제767-1호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몽산화상법어약록』은 법어(法語), 즉 부처님의 말씀이나 가르침을 적어놓은 것으로 승려들의 수행에 있어 길잡이 구실을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시대에 널리 유통되었다.
몽산화상법어략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綠(諺解)}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세로 30.5㎝, 가로 20.2㎝이며, 세조 13년(1467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펴낸 것으로 보인다. 간경도감은 세조 7년(1461년)에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왕실에서 설치한 기구이다.
원나라의 유명한 승려였던 몽산 화상의 법어 가운데 고려의 보제존자(普濟尊者)가 필요한 대목만 가려 뽑고 토를 달아 놓았다. 이를 혜각존자 신미(信眉)가 한글로 풀어 썼는데, 언제 펴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세조 13년(1467년)에 나온 『목우자수심결』에 신미가 풀이한 법어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조선 전기에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한 불교서적 중의 하나로서, 불교사뿐만 아니라 초기 훈민정음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몽산화상법어략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綠(諺解)}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세로 30.5㎝, 가로 20.2㎝이며, 세조 13년(1467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펴낸 것으로 보인다. 간경도감은 세조 7년(1461년)에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왕실에서 설치한 기구이다.
원나라의 유명한 승려였던 몽산 화상의 법어 가운데 고려의 보제존자(普濟尊者)가 필요한 대목만 가려 뽑고 토를 달아 놓았다. 이를 혜각존자 신미(信眉)가 한글로 풀어 썼는데, 언제 펴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세조 13년(1467년)에 나온 『목우자수심결』에 신미가 풀이한 법어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조선 전기에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한 불교서적 중의 하나로서, 불교사뿐만 아니라 초기 훈민정음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4.2. 보물 제767-2호
『몽산화상법어약록』은 법어(法語), 즉 부처님의 말씀이나 가르침을 적어놓은 것으로 승려들의 수행에 있어 길잡이 구실을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시대에 널리 유통되었다.
원나라의 유명한 승려였던 몽산 화상의 법어 가운데 고려의 보제존자(普濟尊者)가 필요한 대목만 가려 뽑고 자신의 법어 1편을 덧붙여 묶은 책이다.
몽산화상법어략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綠(諺解))은 조선 시대에 신미(信眉)가 토를 달고 한글로 번역하여, 나무판에 새긴 후 닥종이에 찍어낸 것으로 크기는 세로 26.5㎝, 가로 17.1㎝이다.
몽산화상 덕이는 고려의 승려들과 교류가 많았었는데 특히 혜감국사 만항(萬恒), 보감국사 혼구(混丘)와 깊은 교류가 있었다. 그는 고려 말 이후 한국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그가 편집한 『육조단경』과 법어는 중국의 승려가 지은 책 가운데 우리 나라에 가장 많이 유통되었다.
간행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간행연도를 알 수 없으나, 세조 13년(1467년)에 만들어진 『목우자수심결』에 신미가 한글로 번역한 법어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조선 전기에 한글로 풀어 간행한 불교서적 중의 하나로서, 불교사 뿐만 아니라 초기 훈민정음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원나라의 유명한 승려였던 몽산 화상의 법어 가운데 고려의 보제존자(普濟尊者)가 필요한 대목만 가려 뽑고 자신의 법어 1편을 덧붙여 묶은 책이다.
몽산화상법어략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綠(諺解))은 조선 시대에 신미(信眉)가 토를 달고 한글로 번역하여, 나무판에 새긴 후 닥종이에 찍어낸 것으로 크기는 세로 26.5㎝, 가로 17.1㎝이다.
몽산화상 덕이는 고려의 승려들과 교류가 많았었는데 특히 혜감국사 만항(萬恒), 보감국사 혼구(混丘)와 깊은 교류가 있었다. 그는 고려 말 이후 한국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그가 편집한 『육조단경』과 법어는 중국의 승려가 지은 책 가운데 우리 나라에 가장 많이 유통되었다.
간행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간행연도를 알 수 없으나, 세조 13년(1467년)에 만들어진 『목우자수심결』에 신미가 한글로 번역한 법어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조선 전기에 한글로 풀어 간행한 불교서적 중의 하나로서, 불교사 뿐만 아니라 초기 훈민정음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4.3. 보물 제767-3호
『몽산화상법어약록』은 법어(法語), 즉 부처님의 말씀이나 가르침을 적어놓은 것으로 승려들의 수행에 있어 길잡이 구실을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시대에 널리 유통되었다.
원나라의 유명한 승려였던 몽산 화상의 법어 6편과 고려 나옹 화상의 법어 1편을 1책으로 묶은 것이다. 몽산 화상 덕이는 고려의 혜감국사 만항(萬恒), 보감 국사 혼구(混丘)와 깊은 교류가 있던 인물로, 고려 말 이후 한국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조선 혜각 존자 신미(信眉)가 토를 달고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나무판에 새긴 뒤 닥종이에 찍어냈으며, 크기는 세로 30.4㎝, 가로 18.8㎝이다. 세조 13년(1467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 : 세조 7년(1461년)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처음 찍어낸 책에는 맨 앞장의 제목에 ‘혜각존자신미역해(慧覺尊者信眉譯解)’라고 신미의 이름이 있고, 성종 3년(1472년) 인수 대비가 찍어낸 책에는 이름이 빠져 있으며, 책 끝에 김수온이 쓴 글이 실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은 김수온의 글이 없는 것과 번역자의 이름으로 보아 세조 13년(1467년)에 처음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조선 후기의 고승인 초의(艸衣) 의순(1786년 ∼ 1866년)이 사용하던 책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본문의 제4장, 6장, 7장의 뒷면에 ‘청허당보장록(淸虛堂寶藏錄)’을 베껴 쓰고 이어서 이 기록의 분실에 대비하여 오래 전할 수 있도록 옛 책의 뒷면에 베껴 놓은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원나라의 유명한 승려였던 몽산 화상의 법어 6편과 고려 나옹 화상의 법어 1편을 1책으로 묶은 것이다. 몽산 화상 덕이는 고려의 혜감국사 만항(萬恒), 보감 국사 혼구(混丘)와 깊은 교류가 있던 인물로, 고려 말 이후 한국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조선 혜각 존자 신미(信眉)가 토를 달고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나무판에 새긴 뒤 닥종이에 찍어냈으며, 크기는 세로 30.4㎝, 가로 18.8㎝이다. 세조 13년(1467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 : 세조 7년(1461년)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처음 찍어낸 책에는 맨 앞장의 제목에 ‘혜각존자신미역해(慧覺尊者信眉譯解)’라고 신미의 이름이 있고, 성종 3년(1472년) 인수 대비가 찍어낸 책에는 이름이 빠져 있으며, 책 끝에 김수온이 쓴 글이 실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은 김수온의 글이 없는 것과 번역자의 이름으로 보아 세조 13년(1467년)에 처음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조선 후기의 고승인 초의(艸衣) 의순(1786년 ∼ 1866년)이 사용하던 책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본문의 제4장, 6장, 7장의 뒷면에 ‘청허당보장록(淸虛堂寶藏錄)’을 베껴 쓰고 이어서 이 기록의 분실에 대비하여 오래 전할 수 있도록 옛 책의 뒷면에 베껴 놓은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4.4. 보물 제767-4호
《몽산화상법어약록(蒙山和尙法語略錄)》(언해)은 원(元)나라의 몽산 화상(蒙山和尙) 덕이(德異 : 1231년 ~ ?)의 법어를 약록(略錄)한 것을 조선 초기의 승려인 신미(信眉)가 토를 달고 우리 말로 번역한 책이다. 이 판본은 우리 말로 언해한 책이므로 한문본과 구분하여 보통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錄諺解)》라고 부른다. 간경도감에서 세조 13년(1467년)에 간행된 이 판본은 초기 한글의 원형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하게 평가받아 현재 5종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기 지정된 본은 간행 당시 인출한 초인본과 5년 뒤인 성종 3년(1472년)에 인출한 후인본 등으로 나뉜다. 후인본의 구분은 성종 3년(1472년)에 간본인 후인본에는 김수온의 발문이 첨부되어 있어 쉽게 알 수 있다. 기 지정본 중 제767호·제768호·제1172호 등 3종은 세조 13년(1467)년에 인출된 초인본, 김수온의 발문이 있는 제769호·제1012호 등 2종은 성종 3년(1472)년에 인출된 후인본이다. 따라서 발문이 달려있지 않은 조사 대상본은 세조 13년(1467년)에 인출된 초인본임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나서 머지않은 시기에 간행된 도서라는 점에서 국어학 연구와 조선 전기 출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큰 책으로 판단된다.
4.5. 보물 제769호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 소장. 원나라 몽산 화상 덕이(德異)의 법어 6편과 고려 나옹 화상 혜근(慧勤)의 법어 1편을 1책으로 묶은 것이다. 조선 혜각존자 신미가 토를 달고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맨 앞장의 제목에 ‘慧覺尊者信眉譯解(혜각존자신미역해)’라고 그의 이름이 적혀있다. 목판에 새긴 뒤 질이 좀 떨어지는 종이에 찍어낸 것으로, 가로 30.9㎝, 세로 22㎝의 크기이다.
책 끝에 있는 김수온이 쓴 발문(跋文:책의 끝에 내용의 대강과 그에 관련된 일을 간략하게 적은 글)에는 조선 성종 3년(1472년)에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 13년(1467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 : 세조 7년(1461년)에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왕실에서 설치한 기구>에서 찍어낸 책에는 신미의 이름이 있으나 성종 3년(1472년) 인수 대비가 찍어낸 다른 책에는 그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 맨 앞장은 이전에 찍어낸 다른 책에서 떼다 붙였음을 알 수 있다.종이의 질이 조금 떨어지고 찍어낸 시기가 다른 두 판본으로 꾸며진 책이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인쇄가 정교한 귀중본이다.
4.6. 보물 제1012호
자비사(慈悲寺) 소장. 책 끝에 있는 김수온의 발문(跋文 : 책의 끝에 대강의 내용과 그에 관련된 일을 간략하게 적은 글)에 의하면, 인수 대비가 성종 3년(1472년)에 대대적으로 펴낸 불교서적 중에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인수 대비는 선조들의 명복을 빌고 대왕 대비의 무병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29종의 불경을 인쇄하였는데, 이때 이 몽산화상법어약록은 200부를 찍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