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20:48:42

신미(승려)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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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불교계의 문제점

1. 개요

信眉

조선 초 15세기에 활동한 승려. 본관은 영동(永同). 속명은 김수성(金守省).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 김수온(金守溫)의 형이다.

2. 상세

신미의 정확한 생몰년은 모른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세종 28년(1446)부터 기록이 나온다. 또한 성종 22년(1491)에 신미가 이미 세상을 떴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동생 김수온의 생몰년(1410~1481)을 감안하면 대략 1400년대(태종 재위기)에 출생하여 1470년대(성종 재위기)쯤에 사망한 듯하다. 90대에 세상을 떠난 효령대군이나 황희만큼은 아니더라도 70대 후반까지 산 것은 확실하니 당시로서는 꽤 장수한 셈이다.

언어학에 능통했다고 하는데, 수양대군안평대군이 신미를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세종대왕의 눈에도 들었다. 그 덕택에 말년의 세종대왕에게 총애를 받으며 한글 보급 업무를 맡았고, 문종과 세조도 신미를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그 결과로 조선 초기 수많은 한글서적들이 신미의 손을 거쳐갔는데, 현존하는 주요 저서로는 능엄경언해, 목우자수심결언해,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불설수생경, 사법어언해, 석보상절, 선종영가집언해, 원각경언해, 법화경언해,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창원 금룡사 입능가경 등이 있다.

다만 위 책 대부분을 신미 혼자 저술하진 않았다. 수양대군이 주도적으로 책을 저술했고 효령대군, 신미, 학조 등은 교정 또는 주해작업 정도를 했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저평가될 일은 아니기에, 초기 한글 보급에 큰 도움을 준 승려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종이 말년에 유언을 남겨 문종이 즉위년(1452) 7월 6일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칭호를 내렸다. 신하들은 아무리 선왕(세종)의 뜻이라 하나 중에게 이런 칭호를 내림을 부당하다고 문종에게 상소했다. 특히 사대부들은 특히 우국이세(祐國利世)란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박팽년이 같은 달 15일에 올린 상소에서# '우국이세(祐國利世)는 설령 조정의 장상(將相)이나 대신에게 주려고 하더라도 조정에서 논의를 해야 마땅한데, 이런 대단한 호칭을 늙은 중에게 주다니 당치도 않다.'고 주장한 데서도 조정의 여론을 알 수 있다. 우국이세(祐國利世)가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인데, 유교국가에서 줄 수 있는 칭호로선 극찬이다. 다른 칭호는 모두 '불교적으로 대단하다.'는 뜻인데, 우국이세는 심지어 '유교적으로도 대단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더욱 조정의 대신들이 민감하게 반응한 듯하다.

문종은 그해 8월 신미의 칭호에서 '우국이세'를 삭제하되 다른 글자를 덧붙여서 '대조계(大曹溪)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總攝) 밀전정법(密傳正法) 승양조도(承揚祖道) 체용일여(體用一如) 비지쌍운(悲智雙運) 도생이물(度生利物)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종사(惠覺宗師)'라고 하였다. 문종 나름대로 조정의 여론과 타협한 것이다.

제자 관리를 잘 못 했는지, 학열에게 토지경작을 맡겼다가 관리를 엉망으로 하는 통에 곡식을 마음대로 늘려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다는 기록이 있다.

2.1. 불교계의 문제점

2002년 신미대사가 쓰고 훈민정음보다 8년전 기록을 써진 원각선종석보라는 서적이 불교신분에 알려져 소수나마 신미 한글창제설이 주장되었고[1] 몇몇 작가들이 이 같은 원각선종석보를 토대로 소설을 만들고 승유억불이라는 당시 시대상에 사실 신미가 한글을 만들었으나 숭유억불이라 유교인들이 한글창제의 공을 빼앗은 것이라는 주장을 마치 진실인 마냥 2012년까지 불교언론을 통해 주장해왔다. 하지만 2013년 위작 설이 불거지더니 2016년에 종이의 연대가 현대, 그리고 어법 제본식도 현대식이라 명백한 위서 판정을 받았다 이후 원각선종석보를 근거로 주장을 거의 안하지만 이후로는 다른 설들을 궤변처럼 주장하더니 신미 창제설을 근간한 영화 나랏말싸미가 나오며 대중들에게 대대적으로 알려지자 비판을 받았다.

이 같은 논란은 영화 나랏말싸미 단체 관람을 주도한 불교계가 부추긴 부분이 크다. 당장 신미대사로 검색을 해 보면, 이 영화를 옹호하면서 신미대사를 띄우는 기사들은 모두 불교 언론에서 나왔다.

불교계는 학술적 견해를 근거로 한 비판도 기독교계의 음모, 나랏말싸미가 흥행하지 못한 것도 기독교계의 수작이라고 주장했다. #

하지만, 영화에 대한 비판이 종교적인 이유에서 나왔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세종대왕 친제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관객도, 영화의 설정이 억지스럽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한신대학교[2] 강진갑 외래교수는 기사를 통해, 세종대왕 친제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친제협찬설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보지만, "실제 세종대왕 치세에는 임금과 신하가 협력하여 국력을 융성하게 만들었는데, 영화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대립을 너무 극단적으로 묘사해 관객에게 당혹감을 주었다." 비판했다.
또 이 영화는 세종과 신하의 관계를 대립을 넘어 서로 무시하는 것으로 설정하였고, 이를 영화 갈등 구조의 중심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세종 시대는 한글 창제를 제외하고 왕과 신하가 협력하여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국력을 가장 융성하게 만든 시대이다.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언어학자와 종교학자 등 전문가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고 하였으나 세종시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영화의 많은 부분에서 당시 시대상과 맞지 않는 장면이 계속 나오게 되었다.[3][4] 이러한 점들이 관객들의 영화 몰입에 방해가 되었다. 이 영화는 감독의 의도가 관객에게 정반대로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감독의 상상력과 연출의 한계로 초래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진갑 교수
따라서 이를 무조건 기독교계의 음모라느니, 주장을 하는 사람이 기독교 재단 소속 교수라서 그랬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원천봉쇄의 오류일 뿐이다.

불교계가 지나친 비약과 정황증거로 신미 창제설을 주장하여, 이는 신미의 명성에 큰 흠집으로 남았다.


[1] 원각선종석보가 알려지기 전에도 신미가 한글창제에 조력설 정도로 그쳤는데. 원각선종석보가 알려지자 진위여부를 확인하지 않은채 신미가 한글창제의 주역이고 세종은 기여도가 없거나 신미의 공을 빼앗았다는 주장까지 나왔다.[2] 한신대학교는 기독교(개신교) 재단 대학으로서는 드물게 타 종교에 대해 매우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는 곳이다.[3] 대표적인게 신미를 띄우기 위해서 세종을 가뭄 때문에 너무 나약한 모습으로 묘사시켰다.(당연히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실로는 세종은 그저 나약하지 않았고 가뭄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조선의 농법을 과학적으로 발전시켰다. 그 대표인게 측우기와 개량한 혼천의) 당시 태종의 피의 숙청으로 이룬 왕권으로 세종때에는 왕권이 미쳐 날뛰는 시기였는데 대중적으로 인자한 이미지인 세종이라고 쳐도 일개 중 따위인 신미가 대놓고 세종대왕에게 "부처 떨거지한테 애원이나 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임금 노릇 똑바로 하시오" 하고 임금에게 호통을 친다. 정상적인 관객이라면 이 장면을 보았을때 신미의 목이 뎅겅 안잘리는게 이상하게 보이는게 당연하다.[4] 또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으로 잘 알려져 있듯 세종은 장남이 아니다! 원래 왕위가 될 순번이 아니었으나 태종이 세자인 양녕대군 폐세자로 만들고 다음 순번인 효령을 제외하고 충녕(세종)을 세자로 삼았다. 당연히 세종이 왕위를 이어받기 위해 부처에게 불공을 드렸다는 역사적 기록은 전혀 없으며 세종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성군으로 이런 왕에게 어떤 점이 부족한지 거론도 안하고 왕 노릇 똑바로 하시오하며 하대를 한 것이다. 신미 뿐만 아니라 신하들도 왕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세종대왕 시절이 아니라 무슨 세도정치 시절을 보는 수준인데, 사실은 세도정치 시절에도 이딴 식으로 나왔다간 역모죄로 죽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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