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승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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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속명 | 김기인(金基寅) |
이명 | 김연일(金蓮日)·김기길(金基吉) |
본관 | 김해 김씨 |
출생 | 1871년 1월 17일 |
경상도 연일현 부산면 도구리 (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리)[1]# | |
사망 | 1940년 5월 10일 (향년 69세) |
경상북도 영일군 | |
묘소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 의열사 위패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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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승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전라남도 제주도 좌면 도순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 법정사(法井寺)의 주지로 법정사 항일운동을 총지휘하였다.
2. 생애
김연일은 1871년 1월 17일 경상도 연일현 부산면 도구리(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리)에서 아버지 김대근(金大根)과 어머니 안일화(安一化)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슬하에 아들 김정수가 있으며, 조카 김인수(金仁秀)도 법정사항일운동에 함께 참여하였다.일찍이 고향을 떠나 경주부 동해면 호암리(현 경주시 문무대왕면 호암리) 함월산의 기림사(祇林寺)에서 승려로 지내다 스승 박만하로 이어지는 제자들과의 인연으로 방동화·정구용 등과 함께 1913년에 전라남도 제주군에 도착하였다. 그는 1914년경부터 법정사에 거주하였다. [2]
한편, 1918년 7월 29일 소위 소요 혐의로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이송된 기록이 있으나, 날짜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다.
1918년 9월 19일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 우란분회(盂蘭盆會)에 전라남도 제주도 법정사에 교도 30여 명을 모아 일제 세력들과 무장투쟁 할 것을 연설하자, 이때 그 또한 국권회복을 내걸고 함께 모의하였다.[3][4][5][6][7]
1918년 10월 5일과 6일에 김연일은 법정사 정기 예불을 통하여 거사 목적을 밝히고 신도들과 주민들을 설득하였고, 10월 7일의 출정식에서 김연일은 '제주도 내에서 일본 관리들을 쫓아내 원래의 한국시대로 회복하려 한다'는 거사의 목적을 강조하였다. 김연일(金蓮日)은 스스로 '불무황제(佛務皇帝)'라 칭하며 교도 및 제주도민과 보천교인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일제에 투쟁하였다. 700여 명의 시위대는 1918년 10월 7일 일본인을 제주에서 몰아내기 위해 곤봉과 화승총 등으로 무장하여, 도순리 법정사에서 출발하여 중문리까지 진출하였다. 시위대는 전선과 전신주를 잘라 통신을 끊고, 경찰관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일본인을 집단 구타하는 등 일제에 조직적으로 저항하였다.[8]
김연일은 거사 당일 법정사에 머물러 있었고 체포되지 않은 채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궐석으로 판결을 받아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는 1년 6개월여를 제주도 내에서 도피하다 1920년 3월 경찰에 체포되었다.[9] 김연일의 최종형량은 감형 등으로 징역 4년 1개월로 조정되었으며, 가출옥 등으로 실제 복역한 기간은 3년 2개월로 목포감옥 제주지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 경상북도 영일군 죽남면(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에 관음사를 창건하여 승려 생활을 하였고 이후에도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한편, 김연일이 제주도민, 보천교도인과 일으킨 법정사항일운동은 전국적으로 보천교(선도교)인 검거로 이어졌다. 제주도 선도교의 검거는 제주에서 목포까지 확산되었으며, 이때 고판례와 차경석의 동생 차윤칠 등 보천교 교인이 체포되었다. 1918년 11월 제주 보천교인들의 성금 10만 원을 면화 포대 속에 감추어 나오던 보천교인 문인택(文仁宅), 강대거(姜大擧)가 전라남도 목포항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일부 교인들이 고문에 못 이겨 보천교의 24방주의 실체가 드러났다.[10]
법정사항일운동의 주모자 31명(재판기록은 34명) 가운데 김연일과 정구룡(鄭龜龍), 강민수가 승려이고 박명수만이 보천교 수령으로 되어 있어 불교계 일각에서는 불교인들이 주동이 된 항일투쟁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전 보조사상연구원이었던 안후상은 보천교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이 크게 작용했거나 세월이 흘러 불교로의 전향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제주 보훈지청의 이대수가 제주 법정사 항일 무장봉기는 관련자의 후손 상당수가 보천교 본소가 있던 정읍에 그 본적을 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11]
3. 사후
김연일은 제주 법정사 항일 운동 참여에 대한 공훈으로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고향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리에 안장되었으나, 2004년 12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에 있는 무오 법정사 항일 운동 발상지(戊午法井寺抗日運動發祥址)에 의열사가 건립되어 이곳에 영정이 모셔져 독립운동의 뜻이 지금까지도 기려지고 있다.4. 관련 문서
[1] 인근의 약전리·석리·임곡리·입암리·마산리·발산리·흥환리와 함께 김해 김씨 집성촌이다.[2] 윤소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훔치교, 선도교와 제주 법정사항일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50쪽[3] 윤소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훔치교, 선도교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31쪽[4] 일본방위연구소, 『조선사건』 「훔치교, 태을교, 선도교의 유래」(1919-1920)[5] 『매일신보』 1921년 5월 6일 자[6] 『조선일보』 1921년 4월 26일 자[7] 『조광』 (1938. 10) 185쪽[8]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2016년, 75쪽~79쪽,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417쪽~421쪽)[9] 『매일신보』 1924. 4. 12 자는 김연일이 법정사 항일운동 이후 제주도 내에 1년 6개월여를 은신하고 있었음을 밝혔다.[10] 『범증산교사』 67쪽[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