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9-13 16:06:41

전경법

1. 개요2. 내용

1. 개요

轉經法. 조선의 7대 왕 세조가 직접 만든 한국의 고유 불교 의식. 이전 왕조인 신라고려의 옛 풍습을 참고하여 1465년에 왕이 직접 창안하였다고 하며, 이후 현대까지 사용하고 있다.

2. 내용

전경법회(轉經法會)라고도 부른다.

조선 세조가 1465년에 원각사를 창건하며 신라고려의 옛 풍습을 토대로 직접 창안한 불교 행사이다. 용재총화연려실기술 등에 자세한 집회 방식이 기록되어 있으며, 현대의 불교의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오래 전 신라의 풍속에 따르면 중춘(仲春)에 초파일부터 보름까지 사녀(士女)들이 행렬단을 이루어 절에 몰려와 전탑(殿塔)을 도는 풍습이 있었다. 고대 신라의 여성들은 이 복회(福會)에서 남자와 눈이 맞아 로맨스를 이루곤 했다. 이러한 한국 교유의 불교 풍습은 그 후 고려시대에도 통습화(通習化)되었는데 특히 불심이 컸던 고려 정종(靖宗)은 12년 3월에 이 복회를 국가 단위로 키워 대규모 행렬단이 성 안을 돌게 하는 경행 습속(經行習浴)을 시작하였다. 정종이 시중(侍中) 최제안(崔齋顔)에게 명하여 시작하게 한 이 경행은 도읍의 거리를 세 길로 나누어 각각 색색 가마에 반야경(般若經)을 담아 메고 앞세우고, 중들이 법복을 입고 경을 외우며 앞서 가면 뒤에 고관 관원들이 합장하며 따르고, 시민들이 이 뒤에 열지어 따랐다. 이같이 세 갈래로 성 안을 돌며 백성들을 위해 복을 빌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의 고유 행렬의식은 조선 태종문종 시기에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태종은 엄격한 숭유억불 정책을 실시하여 한양도성 및 전국 지방도시 내의 불교 전각 및 사원들을 모두 불태워 무너뜨렸고, 이전 왕조 때 만들어진 수많은 불경 및 고문적들을 보이는 대로 수집하여 눈 앞에서 소각하게 하였으며, 기타 불교와 관련된 모든 행사, 의식기구들을 파매했다. 이렇게 태종 때에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근근히 유지되던 향토의식은 문종 원년에 왕이 길거리의 불교 의식에 격분해 불교와 관련된 이들을 모조리 물색하여 변방으로 귀양보내버리라는 국법을 만들면서 사라진다.
"불가(佛家)의 법은 윤리를 배척한다. 우리 장헌왕(莊獻王 세종)이 학문이 고명하시고, 내가 세자로 있을 때에 매양 교훈과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모든 귀신에 관한 일에는 단연 의혹되지 않으셨다. 근래에 마을 백성들이 함부로 국법을 범하여 연소배들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자가 많으니, 군사들의 수가 날마다 줄어든다. 만일 거듭 금하지 않으면 그 폐단을 구원(救援)할 수 없게 될 것이니, 금령을 범하는 자는 변방으로 옮기게 하라.다만 변방으로 옮기는 법을 갑자기 행하면 소요(騷搖)가 반드시 많을 것이며, 또 만 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을 하루 아침에 모두 몰아 먼 변경으로 보낸다면 정리상 차마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마 원망을 초래하여 화기(和氣)를 상하게 될 것이다. 우선은 기한을 두어, 그들이 자수하여 환속(還俗)하도록 하고, 형벌을 가하지 말며 혹은 정전(丁錢)을 받고, 이내 도첩(度牒)을 주게 하되 금년으로 기한을 하고, 기한이 지나도록 자수하지 않거나 이후에도 금령을 범하는 자는 엄중히 금단(禁斷)을 행하게 하라. 대개 도(道)가 행하지 않는 것은 관리가 그것을 근실하게 받들어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곧 금단하지 않는 관리는 처벌하여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문종 원년 정교전고(政敎典故)

이후 7대왕 세조는 즉위한 후 고대 신라와 고려 때 있었던 경행 풍습을 참고하여 직접 길거리 행렬의식인 전경법(轉經法)을 만들었다. 황금의 작은 부처를 태운 소연(小輦)을 앞세우고 그 뒤에 예악대(禮樂隊) 수백명이 뒤따르며, 중 뒤에 예조(禮曹)의 관원이 따른다. 이같이 궁궐을 출발하면 임금은 광화문(光化門)의 문루(門樓)에 올라 직접 불자와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전송을 하였다. 거리에 나간 이 경행의 뒤에는 선남선녀가 뒤따르며 독경을 하였고 온 장안을 한 바퀴 돌며 만도(滿都)를 독경속의 축제기분으로 들뜨게 한다. 이 행렬은 지금 파고다 공원인 원각사(圓覺寺)로 들어가 탑돌이를 시작하고, 장안 사녀들의 탑돌이는 밤새워 계속되곤 하였다.
세조조에 전경법(轉經法)을 행하였는데, 이것은 고려조의 옛 풍속이다. 그 법은 깃발 있는 일산으로 앞을 인도하며 누런 덮개로 된 수레에 작은 황금부처를 모시고 앞뒤에는 악사(樂士)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두 종(선종과 교종)의 중 수백 명이 좌우로 나뉘어 따라가며, 각기 향(香)을 받들고 경을 외우면서 작은 중이 수레를 타고 북을 친다.경 읽는 것이 그치면 음악을 연주하고, 음악이 그치면 경을 읽는다. 부처를 받들고 궁궐에서 나오면 임금이 광화문에 나와서 전송하는데 종일토록 시가를 순행하며 혹은 모화관(慕華館)ㆍ태평관(太平館)에서 낮 불공을 베풀었다. 각 관청의 관리들이 허리를 굽히고 빨리 달려와서 물건을 드리며, 육법공양(六法供養)을 베푸는데, 퉁소ㆍ북ㆍ범패(梵唄) 소리가 하늘에 진동하며, 남녀가 물결처럼 밀려나와 모여 서서 구경하였다. 예조 좌랑 김구영(金九英)이 늙고 비대한 몸으로 비틀거리면서 걸어가는데, 땀이 물 흐르듯 하고 먼지가 날아 얼굴에 가득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용재총화 2.24 전경법

전경법 자체는 세조 사후 유학자들의 반대로 곧 폐지되었지만 의식의 일부분이 남아 토속화되었는데, 세조 이후 아무 데나 흩어진 불상·돌미륵·탑을 세 번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사람들이 합장하고 우로 세번·좌로 세 번씩 도는 풍습이 전국적으로 토착화했다. 또한 이의 영향으로 봄날 서울 성벽을 따라 세 번만 돌면 1년 내내 병에 걸리지 않는다 하여, 진달래 꽃필 무렵 남녀가 삼삼오오 짝지어 도심 내에서 행렬을 이루어 성돌이를 하는 풍습이 생겼다. 현대에도 사십구일재(四十九日齋), 백일재(百日齋)등 각종 불사(佛寺)의 재일에 고인의 영정과 신주를 들고 전탑을 도는 것도 이 복회 습속이 오늘까지 남아 있는 모습이다.

참고자료: 한국인의 性과 迷信(이규태 저, 기린원, 서1985.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