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17:52:50

행군수지

파일:행군수지.png

1. 개요2. 내용3. 편찬시기 논란4. 무경총요의 영향을 받은 병서?5. 기타6. 외부 링크

1. 개요

行軍須知. 조선 세조시기 혹은 숙종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병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조선시대에 제작된 한국의 병서로, 행군(行軍) 즉, 군사의 이동과 관련된 운용이론을 집략해놓은 진법서이다.

조선의 병법서적 중 가장 널리 보급됐던 책이 병학지남이었다고 한다면, 두번째로 널리 읽힌 책이 행군수지였다. 행군수지는 내용이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다루고 있어 글을 잘 읽지 않던 무관들도 즐겨봤던 책으로, 당시 병가(兵家)의 필독서이자 일선 부대에 널리 보급됐던 병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석주의 서문에는 우리나라 무사들이 임진왜란 이후 중국 명나라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발췌한 ≪병학지남(兵學指南)≫을 학습하는 데 그치는 폐단을 시정하고자 한다며, 본국의 병법의 원리를 이해시키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적고 있다.

3. 편찬시기 논란

행군수지의 최초 편찬시기에 관하여 현재 세조시기라는 주장과 숙종시기라는 주장이 서로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일단 세조 시기라는 주장은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13년 8월 17일 경술 1번째 기사에 세조가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송처관(宋處寬), 홍응(洪應) 등에게 행군수지를 주해하라는 명을 내린 것을 근거로 삼는다.세조실록 43권 : 신숙주에게 《행군수지》의 주를 달게 하다 이는 우리나라 문헌에서 행군수지가 언급된 최초의 것이다.

숙종 시기 제작되었다는 주장은 증보문헌비고에 병조판서 김석주(1634~1684)가 처음으로 간행하였다는 내용과 조선왕조실록에 김석주가 1679년 행군수지의 서문을 국왕 숙종에게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삼는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관찬기록이 아닌 민간의 기록으로 행군수지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영조대에 편찬된 인산진중기(麟山鎭重記)이다. 평안북도 의주군에 있던 조선시대의 군영(軍營)인 인산보(麟山堡)의 병서로, 인산보는 고구려 때는 영제현(靈蹄縣), 고려시대에 인주(麟州)였으나 조선이 들어오면서 주(州)에서 폐지되어 황폐화되었던 것을 조선 세조 때 왕의 명으로 둘레가 8,200여 척에 이르는 성을 쌓아 평북의 대표 군사 요지로 만든 곳이다. 당시 인산보에서 장조정식, 행군수지, 병학지남의 세 종의 군사서적을 병사들에게 배포했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최근에 1591년 평안도 용강에서 발간한 목판본 행군수지가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면서 숙종 시기 제작되었다는 주장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4. 무경총요의 영향을 받은 병서?

현재 학계에서는 중국 송나라의 증공량(曾公亮)이 1044년 출간한 무경총요의 내용을 토대로 조선에서 만든 병서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병서에 대한 연구가 점차 진전되면서 조선판 행군수지에는 화약무기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인데 비하여 행군수지의 토대가 되었다는 중국 무경총요에는 화약무기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문제가 되고 있다. 때문에 무경총요의 영향을 받지 않은 병서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나오곤 한다.

이 때문에 이제는 보수적인 중국학계에서도 송나라 때 처음 간행된 무경총요에다가 훗날 명나라 때 만들어진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화약병서와 함께 부록으로 합쳐 새 판본으로 만든 후 이것을 한국에서 가져간 것이 아닐까 하는 해석을 하고 있지만, 한국 학계에서는 그냥 1044년 무경총요 증공량(曾公亮)본을 발췌한 것으로 서술을 바꾸지 않고 있다.

5. 기타

굳이 '무경총요-행군수지'의 사례만이 아니더라도 보통 화약무기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중국 병서들과는 달리 유독 한국의 병서들은 화약무기에 대한 내용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한국은 같은 시기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무사층이 거의 소멸했기 때문이다.참조 : 조선의 화약 무기와 진법(陣法)

즉, 성리학으로 인해 평화문학, 애민 등이 강조되면서 과거의 무사층이 모조리 문인, 선비로 변모했는데, 무사층이 소멸됐다는 것은 전투에서 선봉에 서서 적을 향해 돌입하는 역할을 맡아줄 집단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평화주의는 정치와 문화의 발전, 그리고 사회안정에는 커다란 공헌을 했지만 군대의 전술적, 군사적 역량에는 상당한 약점을 야기했다.

특히 오랜 평화와 풍족한 애민정책을 누리게 되면서 하급 병사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숭무정신 약화로 인해 군대의 단결력, 조직력이 깨졌다. 이를 보완하고자 조선에서 밀어준 것이 진법(陣法)체계의 발전과 화약무기 개발, 무과 시험제도 였다.

즉, 무과로 지휘관 및 장교들을, 취재로 모든 군대의 말단 병사까지 일일이 신체검사 및 시험을 봐서 선발했고, 전 왕조에서는 해전용으로만 잠깐 사용했던 화약무기를 육전용으로 대규모 개발해 배치했고, 중국의 진법을 그대로 받아쓰던 과거와는 달리 오위진법을 시작으로 조선의 사정에 맞춘 독창적인 진법들을 열정적으로 고안해 사용했다. 물론 기본적인 국력의 차이에다가 당시에는 전세계적으로 화약무기의 기술력이 처참한 상황[1]이었기 때문에 좋은 결과는 못 봤다.

6. 외부 링크



[1] 현대에는 화약무기 하면 무조건 좋을 것 같아서 띄워주곤 있지만 사실 조선 초인 1400~1500년대 당시에는 전 세계적으로 화약 기술력이 낮아 화약의 추진력을 견뎌낼 수 없어 사방팔방으로 휘거나 최대 사정거리가 활만도 못하는 등의 모습이 지구촌에서 흔했다. 특히 조선은 화약과 관련된 자원이 전량 수입품이라 국가 경제가 휘청였던 건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