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20:31:46

선조(조선)/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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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긍정적 평가
2.1. 전란 전에 인재 등용2.2. 전쟁 대비2.3. 전후 처리
3. 부정적 평가
3.1. 이순신을 향한 의심과 박대3.2. 명나라 도주 계획3.3. 전쟁으로 떨어진 권위3.4. 공신 책봉 문제3.5. 왕자 관리 실패3.6. 말년의 인재 등용 실패3.7. 치세의 핵심 업적이 부족하다는 견해3.8. 강약약강
4. 논란
4.1. 선조의 온전치 못한 정신상태4.2. 선조와 이순신4.3. 방계승통 열등감 낭설

1. 개요

조선의 14대 왕 선조의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긍정적 평가

2.1. 전란 전에 인재 등용

선조는 명종이 죽기 전에 보였던 처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무감각이 좋은 편이었다. 재위 10년 즈음부터는 로 분열된 신하들을 적절히 이용하는 방식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등 꽤나 좋은 정치적 수완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붕당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려 했는데 양당의 상호 견제를 통해 결과적으로는 신권 억제에 성공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선조는 밑바닥인 인간성과 별개로 지능이 낮은 멍청한 왕은 아니었다. 일단 명종 대에 자리잡고 있었던 우수한 인재들 덕분에 선조는 선택권이 많았다. 전시 총리 류성룡, 성리학의 거두 이황이이, 도체찰사 전문 이원익, 오성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이덕형, 이산해, 정철, 윤두수, 정탁, 이순신, 권율, 정인홍, 정문부, 이준경, 기대승, 홍섬, 권철, 이탁, 박순, 노수신, 이양원, 최흥원, 심수경, 심의겸, 심충겸, 성혼, 김명원, 박계현, 송기수, 오탁, 강사상, 한응인, 허욱, 이헌국, 김응남, 정유길, 유홍, 이헌국, 김계휘, 이호민, 유희춘, 신흠, 오윤겸, 박충원, 성영, 이시언, 심희수, 이정암, 배흥립, 서성, 박동량, 홍담, 정창연, 허성, 한효순, 이정구, 윤승훈, 유근, 윤방, 송언신, 노직, 이광, 윤선각, 김수 등이 모두 선조 대에 인물이다. 심지어 어의조차도 그 유명한 허준이다. -한석봉은 쓸모가 없어서 인재로 안쳐준다.

임진왜란 전 이순신의 파격적일 정도의 승진류성룡의 추천이 있었다고는 하나 대간에서 전례 없는 고속 승진을 거세게 반대했던 상황에서 선조가 밀어붙여서 나온 결과이다. 이순신은 이전까지 역임한 최고 관직이 종4품 직위였고[1] 현직으로는 종6품 정읍 현감이라는 낮은 직위에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전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유능한 장수들을 중요 거점에 배치시키는 작업의 일환이었지만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적합한 직책을 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는 하나의 방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순신의 승진 속도 또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선조가 어찌나 밀어붙였는지 대간이 이러한 빠른 승진은 전례가 없다면서 강하게 반발했을 정도였다. 종6품 현감을 정3품 수사인 전라좌수사 자리에 올리는 것은 당시 관점에서 보나 지금 관점에서 보나 대단히 파격적인 행위였다. 현대로 치면 일개 대대장 수준의 이제 조금 일할 것 같다 싶은 중급 장교에게 뜬금없이 을 달아주고 해군 최고위 보직인 함대사령관에 임명하는 말도 안 되는 사건이다. 오죽하면 신하들은 물론이고 이순신을 천거한 류성룡 본인조차도 이 정도로 터무니없는 파격적인 승진에는 반대할 정도였으나 선조는 순차적으로 승진시키면 되지않냐며 단 1개월만에 전라좌수사로 승진시켰다.

또한 40까지 백수로 지내다 뒤늦게 문과에 급제한 권율을 무신으로 전향시켜서 최종적으로는 도원수 자리에까지 올렸다. 물론 권율 자신의 능력도 있었다지만 중요한 것은 이순신이나 권율이나 그러한 인재 승진에 있어 최종 결재권자는 결국 선조 본인이라는 점이다. 다만 권율은 이순신과는 달리 집안의 배경과 인맥이 크기는 했다. 권율의 인품과 능력이 좋기는 했으나 이러한 배경과 인맥이나 특히 무엇보다도 선조의 인선이 없었더라면 결국 권율도 그저 그런 선비로 말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원익과 같이 선조 시절에 중용받은 신하들은 이후에 왕조를 그나마 유지시켜주었던 여러 개혁안에 대해서 탐색했으며 이원익은 결국 광해군[2] 즉위 직후 이후 백년간 개혁의 효시[3]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의 초안을 올림으로써 후대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외에도 허준을 지원하며 《동의보감(東醫寶鑑)》[4]의 편찬을 명했던 사실 역시 그가 제법 안목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물론 유독 선조 치세에 인재가 많아 보이는 것은 6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활약할 인물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능력을 보일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다. 당장 구국지사들만 해도 한 둘이 아니며 사실 이순신도 전쟁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나라를 구한 성웅이 아니라 그냥 '엄격하고 유능한 장수' 정도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전쟁이 없었다면 이순신이나 권율이나 장성급으로 승진했을지도 의문이라서 아예 역사에 존재감이 없는 이들로 남을 수도 있었다고 할 것이다.

2.2. 전쟁 대비

임진왜란 중의 대처는 왕으로서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했기에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책임 자체를 전적으로 선조에게 묻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임진왜란의 원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나 분쟁이 있어서 조선이 빌미를 제공한 전쟁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임진왜란의 성격을 앞에 두고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았어야 했다는 주장은 일본에 대한 내정간섭이나 정복을 시도하라는 이야기밖에는 되지 않는다.[5]

그리고 실제로 선조는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양반들과 백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임진왜란의 규모가 너무 터무니없이 컸기에 크게 도움이 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만큼 큰 전쟁이 터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기에 선조가 아주 놀고만 있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6]

선조가 통신사 파견 이후 대책 논의 과정에서 낙관론을 주장한 김성일을 신뢰했다는 에피소드 때문에 전쟁 대비가 미흡하여 피해를 자초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1591년부터 축성 및 전력 증강 작업을 시작했다는 점이 실록, 징비록, 난중잡록 등 여러 사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거기에다 김성일도 낙관론을 주장할 만한 객관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통신사로 일본에 도착할 당시 토목 공사를 한창 진행하는 등 오랜 전란의 상처를 회복하는데 바빠서 도무지 전쟁을 시작할 여력이 있는 나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곧 조선을 칠 거라 생각하는 것은 교통사고를 당해 겨우 고비를 넘기고 재활을 갓 시작한 격투기 선수가 당신을 샌드백으로 삼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것이나 다름 없이 무리한 가정이었다. 심지어 징비록에는 통신사들이 왔음에도 도요토미가 정벌을 나가 있어 통신사들이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결국 그 때까지의 일본 정치는 불안정했다고 볼 수 밖에는 없다.

오히려 준비를 너무 급하게 해서 작은 읍성 위주로 수용 인원을 늘리는 쪽으로 축성했기에 임진왜란 같은 국가간 전면전 상황에서는 효율이 떨어진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류성룡징비록에서 이 점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1592년 4월 이전까지 10만명 이상 대규모 침공을 예상한 사람이 누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류성룡도 할 말이 없는 것도 맞다. 류성룡 본인부터도 그러한 예상은 못했을 것이니까 말이다. 당시 조선은 이전 역사의 선례, 특히 을묘왜변의 경험을 토대로 약 1만명 단위의 연안 침략을 상정하고 준비했다. 이는 당시 조선 뿐만 아니라 후대의 관점으로 보아도 매우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조선 건국 이래 10만명의 군대가 쳐들어 온 적도 없고 명이 임진년에 5만명을, 정유년에 10만명을 파병하면서 명과 조선이 부담해야 했던 엄청난 인적, 물적 지출을 감안하면 바다 건너 남의 나라에 20만명을 몰아넣는 국가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 분열되어 있었던 나라에서 말이다. 나라를 통일시킨 지 1년~2년 지난 나라가 바다 건너 나라에 대규모 침공을 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7]

오히려 지방 양반들과 일반 백성들이 방위 태세 정비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다.[8] 징비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어떤 관리는 "요 앞에 물길이 있는데 어떻게 왜놈들이 오나요?" 라고 했다는데 이에 류성룡은 바다도 건너는데 작은 물길 하나를 못 건너겠냐고 서술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일단 당시 백성들의 전쟁 대비에 대한 인식 자체가 시궁창이었는데 명종 대에 을묘왜변도 있었고 옆 동네 사정을 뻔히 봤으면서도 전쟁대비에 매우 부정적인 백성들과 유생들은 결국 임진왜란 때 목숨으로 대가를 치렀다.

경상감사 김수는 지역 유생들까지 축성 작업에 동원시키는 등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리다 지역 사족층과 충돌하고 민심을 이반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유생들까지 동원한 것은 의외에 가까웠는데 유생은 양반 계층이라서 원래는 군대 가고 성 쌓는 일에 동원되는 것이 정상이지만 "나라를 위해 공부한다!" 라고 하면 아무도 뭐라 못했었기 때문이다. 전라도에서는 전라감사 이광이 했었던 전쟁 준비 과정에서 쌓인 불만이 전쟁 발발 후 근왕병 모집 과정에서 터져버리며 왜군이 쳐들어온 와중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반란군 진압부터 해야할 정도였다. 선조 역시 과도한 전쟁준비가 민심을 이반케 한 점을 인정하는 교서를 내렸다.
(중략) 내 즉위한 지 25년이 되었으나 비록 인덕이 백성에 미치지 못하고 은택을 베풀지 못하고, 세상 물정에 밝지 못하여 국정에 많은 실수가 있었지만, 본심인 즉 근년에 북방 국경의 많은 변고가 있었음에 비추어 군정이 해이함을 알고 성지를 높이고 호를 깊이 파고 병갑을 굳게 해서 외환外寇을 막는다고 하여, 중외에 명령하여 감독을 엄히 하였더니, 실지로는 성이 높아지니 국세가 날로 약해지고, 성지의 호가 깊어질수록 백성의 원망도 깊어져서 끝내 와해가 되어 이 지경에 이르고, (중략)
<정만록>, 이호응 역주

내가 비록 인애(仁愛)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정치에 실수한 것이 많았다 하더라도 본래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어여삐여기는 것으로 뜻을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8월 1일 무자 7번째기사
게다가 개전 직전 경상좌수영의 진포 이동 현황과 개전 직후 경상도 내 조선군의 움직임을 추적해보면 분명히 왜군의 침입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고, 각 군현의 군사들이 어디로 모이고, 이동하고, 방어 중심은 어디인지 대응 매뉴얼 자체는 이미 세세하게 짜놨었다. 본래 왜구는 섬이 많은 전라도나 경상 우도 지역을 중심으로 들어오며 섬이 거의 없고 해안선이 단조로운 경상 좌도는 방어 중심에서 다소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직전에는 경상좌수영 관할하에 포항, 울산, 경주, 기장, 영덕 등지에 흩어져 있던 진포 7개를 모두 남동해안 주방어선인 부산-동래 인근으로 재배치 시켰으며 경상좌수군은 지상군으로 전환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진지하게 침입을 생각하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조치였다.[9]

전쟁 준비에 골몰했던 시기가 왜관에서 왜인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이후라는 주장이 종종 있는데 위에서도 거론되는 전시를 대비한 인재 채용이나 김수가 전쟁 준비를 심하게 한다고 욕지거리 들어먹은 시점은 보다시피 임란으로부터 단 1년 전이다. 통신사가 일본에서 복귀한 시점을 고려하면 일단 전쟁 준비를 하기는 했다. 다만 그해 11월 김성일이 일본이 안 온다니까 왜 불필요한 일을 해서 소요를 일으키느냐는 논지의 시폐 10조를 상소했고 선조가 이를 받아들여 그 후 축성건은 흐지부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것을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는 점인데 시페 10조에서 문제를 삼은 것 중 하나가 이순신 등의 장수들의 특진 비판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놓고 보면 관점에 따라서 선조가 전쟁 준비를 미흡하게 했다고도 볼 수 있을지언정 치명적이었던 요인은 준비를 했다 또는 준비를 안 했다가 아니라 선조가 했던 그 준비의 시간이 택도 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단 1년 만에 전국이 축성 작업을 하고 알맞은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등의 작업을 했어야 했다는 것인데 이것을 1년 만에 준비하는 것은 현대 국가 수준의 시스템이나 정복 전쟁을 한창 벌이는 제국마냥 만날 전쟁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면 힘들다. 더군다나 조선은 전근대에도 유난히 작은 정부로 버티던 나라였음에도 저렇게 급하게 해서 탈이 났다. 이 전쟁 대비는 비록 급박하고 정신없이 진행했지만 그럼에도 개전 20일만에 한양이 함락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잘 작동했으며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침공했던 15만명의 일본군 중 7만명이 남을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까 아주 쓸모 없는 짓도 아니었다.

2.3. 전후 처리

전후 처리 과정도 후계자인 광해군에 비하면 상당히 괜찮았다는 연구가 있다. 적어도 선조는 광해군처럼 무리하게 수없이 궁궐을 짓는다 수선을 떨지도 않았고 검소하게 살며 기껏해야 승하 1년 전에 창덕궁에 대한 재건 공사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전란 전에 논의되었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전란 중에 처음으로 공포하고[10] 전후 토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신축년(선조 34년)부터[11] 갑진년(선조 37년)까지 계묘양전(癸卯量田)을 실시하여 전결 확보를 시도했으며[12][13][14][15] 납속책을 확대해서 세수증대를 꾀하는 등의 전후 정비를 하였다.

선조가 내걸었던 여민휴식(與民休息)이라는 기조에 대해 설명하자면 1600년 9월에 비변사는 12개조를 선조에게 제출했고 본격적으로 전후 복구 사업을 실시했다. 조정에서도 더이상 민간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고 왕조 재건의 주체는 조선의 민간 사회와 백성이며 이들의 경제적 성장의 안정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을사년(선조 38년)에 공안개정(乙巳貢案)[16]을 통해 농민들의 부세 부담을 3분의 1로 낮춰주는 과감한 감세 정책을 실시했으며[17] 개간장려를 위해 산림과 천택의 전면 개방 등의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18][19]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임진왜란 발발 이후 1년만에 한성으로 돌아오자마자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조총 도입 및 개량을 시도했으며[20] 여진에 대한 견제도 계속 실시해서 노토 부락을 정벌하고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건주 여진이 세력을 확장하는 기세를 보이자 정보를 염탐하며 여진의 상황을 명 조정에 알려 대신 처리하게 하는 모습도 보였다.

3. 부정적 평가

전하께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움은 많으시나 덕을 쓰심이 넓지 못하고 좋은 말 듣기를 매우 좋아하나 많은 의심을 버리지 못하십니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이 힘써 건의하는 것을 지나치지 않은가 의심하고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는 자를 교만스럽거나 과격하다고 의심하십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명예를 얻으면, 그에게 당파가 있지 않은가 의심하고 남의 죄와 허물을 공격하면 편파적으로 모함하지 않은가 의심하십니다. 더욱이 명령을 내리실 때면 말씀하시는 기풍이 곱지 못하고, 좋아하고 싫어함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며칠전 교지(敎旨)에 말씀하시기를 "대언(大言)을 다투어 아뢰고 전에 없던 일을 행하기 좋아하고 있으니, 마땅히 풍속이 순박해지고 정치가 올바로 될 것이다."고 하셨는데, 이 교지가 나오자마나 여러 사람들의 의혹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율곡 이이, 만언봉사(1574년)[21]

"한산을 고수하여 호표(虎豹)가 버티고 있는 듯한 형세를 만들었어야 했는데도 반드시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말해도 소용이 없지만 어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방치한 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은 배만이라도 수습하여 양호(兩湖) 지방을 방수(防守)해야 한다."
선조 실록 90권, 선조 30년 7월 22일 신해 3번째기사

"흉적이 조금 물러가고 종묘 사직이 다시 돌아왔으니 이는 참으로 대인(양호)의 공덕이라 감사함을 무엇으로 말하겠습니까. 절을 하여 사례하겠습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게 무슨 말씀이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이러한 예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상이 굳이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상이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銀段)으로 상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戰船)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대인에 있어서는 그렇지만 과인에 있어서는 참으로 미안합니다."
선조 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20일 정축 1번째기사[22]

"지난날 내가 국세가 위급함을 지나치게 걱정하여 풍진(風塵)001)(註 001)(풍진(風塵) : 전쟁.) 의 경보가 뜻밖에 생겨나고 수습할 수 없는 재앙이 조석 사이에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거듭 경들을 번거롭게 하면서 망령되이 물은 일이 있었는데, 끝내 방비책을 진달하지 않았다. 만약 적변이 갑자기 발생하면 팔짱을 끼고 앉아서 기다릴 것인가. 지난 임진년에 김성일(金誠一) 등이 망령되게 사설(邪說)을 주창하여 ‘왜적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내가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을 기롱하였고, 변방 방비에 뜻을 둔 사람들까지 배척하였으며, 심지어는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파견하는 것까지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다가 왜적이 깊이 쳐들어오자 유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南)은 체찰사(體察使)의 명을 받고서도 가지 않았고, 신립(申砬)은 시정의 건달 수백 명을 거느리고 행장(行長)의 10만 대군을 막다가 단번에 여지없이 패하여 나라가 뒤집어졌었다. 이제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선조 수정 실록 35권, 선조 34년 2월 1일 경오 1번째기사

"이번 왜란의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고 우리나라 장사(將士)[23]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殘賊)의 머리를 얻었을 뿐으로 일찍이 제 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는 바다에서 적군을 섬멸하였고, 권율(權栗)은 행주(幸州)에서 승첩을 거두어 약간 나은 편이다.

그리고 중국 군대가 나오게 된 연유를 논하자면 모두가 호종한 여러 신하들이 어려운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가서 중국에 호소하였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별도로 훈명(勳名)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생각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호종한 사람을 녹훈할 적에 아울러 녹훈하도록 말했었다. 그러나 이는 대신들이 의논하여 처리하는 데 달렸다."
선조 실록 135권, 선조 34년 3월 14일 임자 8번째기사[24]

"내 오늘의 일을 살펴보건대 우리 나라는 무략이 강하지 못하고, 조종조의 일로 말하여도 일찍이 한 번도 싸워서 승리한 적이 있지 않다.[25][26] 우리 나라의 무략은 고려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27] 알 수 없거니와 문치(文治)의 소치로 그렇게 된 것인가. 문장(文章)으로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 2백 년 이래 여대(麗代)의 문장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으로 보면 문장과 무략이 모두 고려 때만 못한 셈이다. 장수에 있어서도 고려 때에 미치지 못한다. 고려말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정세운(鄭世雲)은 20만의 군사로 천수문(天壽門) 밖에 결진하여 포휘하고 공격함으로써 끝내 대첩을 거두었다. 우리 나라에서야 어디에서 2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겠는가.[28] 이는 사람의 수효가 전조보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공사천(公私賤)은 날로 번성하는데 반해 군졸의 액수는 날로 감축되기 때문이니, 호령과 군정 또한 전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의(私意)로 헤아려 보건대 송(宋)나라 조정과 너무도 비슷하다. 자고로 국세가 이와 같으면 반드시 이적(夷狄)의 화를 받는 법인데 우리 나라의 일이 실로 염려된다. 무략만 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재집(宰執)들 중에도 병법을 아는 사람이 없고 신진 문사들은 전연 무사(武事)를 모르고 있다. 내가 조신(朝臣)들을 경홀히 여기는 마음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시세(時勢)를 알지 못하여 그렇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인가? 무신은 책망할 것도 없거니와 반드시 독서한 연후에야 고금 성패의 이치를 알 수 있다. 열 가지 일을 알아도 한 가지 일을 시행하는 자 또한 드문데 하물며 전연 옛글을 모르는 데야 말해 뭐하겠는가. 고사(古史) 뿐 아니라 병가(兵家)의 글을 아는 자 또한 전무하다."[29]

하니, 아뢰기를,

"과연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들과 병법을 논한 적이 있었는데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장(武將)은 활을 당기고 말을 달리는 일밖에 다른 기능이 없고, 문신은 오직 시구(詩句)의 연마만을 힘쓸 뿐이다. 내가 털끝만큼이라도 경홀히 여기는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경에게 숨기지 않고 다 말하는 것뿐이니 말로 본의를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왜적은 한당(漢唐)의 성세에도 당해내기 어려웠으나 북적(北賊)에 이르러는 하나의 양장(良將)이면 충분한 것인데도 이처럼 어려우니, 실로 통탄할 일이다. 축적이 많은 후에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옛사람이 부국 강병(富國强兵)이라고 하였으나 부강만을 위주로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축적이 있은 후에야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30]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에는 매우 부유하였는처럼 가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는 지역이 수천 리가 되지만 산천(山川)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생산되는 곳이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원의 1도는 극히 부성(富盛)하여 우리 나라의 물력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왜국 역시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지는 않다."[31] 그런데 왜국은 몇 개의 도로 나뉘었는지 모르겠다."
선조 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기해 1번째기사

3.1. 이순신을 향한 의심과 박대

사실상 선조가 대중에게 나쁜 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당대에도 이순신을 박대한 걸 가지고 욕을 많을 먹었지만 후대에 와서는 아예 박제가 되어 카카오맵목릉 리뷰 등 각종 포털사이트에서 별점 테러까지 당하고 있을 정도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세종대왕과 더불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이자 성웅으로 불리는 이순신을 아주 노골적으로 의심하고 박대했는데, 이는 당시 신하들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매우 부정적으로 비쳐졌다는 기록이 많다. 그 일련의 행위들은 군신 관계 이전에 인간 대 인간으로 봐도 정말 한심한 수준이었다는 평가에는 조선 시대나 현대나 별 이견이 없다. 심지어 평시에 그런 짓을 했다면 모를까, 이딴 짓을 한 시기도 정말 최악이었다.

선조는 전란 직전 현대에는 기록은 없으나 당시 전공을 올리던 원균을 전라좌수사에서 경상우수사로 영전시켰으며, 이후 원균의 허풍만을 믿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파직시켰다. 이후 원균을 그 자리에 임명하고 부산포로 진격하라는 명을 내려서 칠천량 해전의 참패에 일조하게 된다. 당시 구국의 영웅이자 현재진행형으로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장수를 의심이 가는 점이 있다는 이유로 적이 흘린 가짜 정보인지 사실인지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적의 본진인 부산을 공격해 부산으로 향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는 어명을 거역했다"라는 핑계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고문한 것이다. 이는 이순신 입장에서도 할 말이 많은 것이, 당시 가토는 이미 바다를 건너와 버린 상황이었기에 선조가 아니라 선조 할아버지가 살아돌아와서 그를 잡으라고 명령했어도 별 수 없었다. 는 원래 무능해서 원래 별 수 없지 않나... 애초에 이 일을 기획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자신과 가토의 널리 알려진 불화를 이용해 이순신을 제거하려 했는지, 아니면 진짜로 조선에서 가토를 제거하기를 바란 것인지 두 관점이 있고, 따라서 고니시와 가토가 짜고 친 고스톱으로 보거나 고니시의 예상과 다른 전개가 되었다는 것으로 갈린다. 물론 어느 쪽이든 결국 왜적에게만 좋은 짓 해 준 꼴이니, 다른 자도 아닌 국가의 지도자가 나서서 이적 행위를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은 본래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헐뜯고 있습니다. 만일 율로 다스린다면 마땅히 둘을 다 죄주어 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순신은 왜변 초에 병선(兵船)을 모아 적의 진로를 차단하여 참괵(斬馘)을 바친 공로가 많았고, 원균의 경우는 당초 이순신과 협력하여 역시 적의 선봉을 꺾는 성과를 올렸으니, 이 두 사람의 충성과 공로는 모두 가상합니다. 위에서 특별히 잘 화합시켜 진정시킬 수 있는 대책을 생각하시어 급히 선전관을 보내 하서하여 국가의 위급을 우선으로 돌보라고 권하면서 마치 한 광무(漢光武)가 가복(賈復)과 구순(寇恂)에게 하듯444)[32] 하신다면, 저 두 사람 또한 전혀 양심이 없지 않을 것이니 어찌 감격한 마음으로 성상의 명령을 공경히 받들어서 옛 태도를 버리고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성상의 뜻을 몸받지 않고 끝까지 깨닫지 못한 채 그전의 잘못을 영영 고집한다면, 그때에는 자연 나라의 법이 그들을 처리할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두 사람은 틈이 벌어질 대로 벌어졌으니, 원균을 체차(遞差)하여 그들의 분쟁을 지식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나의 생각에는 이순신은 대장으로서 하는 짓이 잘못된 것 같으니, 그중 한 사람을 체직시키지 않을 수 없다. 혹 이순신을 체차할 경우는 원균으로 통제사를 삼을 수 있거니와, 혹 원균을 체차할 경우는 다른 사람을 차출해야 할 것이니,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57권, 선조 27년 11월 28일 임인 2번째기사[33]
게다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막중한 임무가 지워진 자리에 무능한 주제에 허장성세만 높은 자를 떡하니 앉혀놔 조선 수군이 궤멸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국가를 다시 한 번 전란으로 내몰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조선 수군이 무너지자 무서울 게 없어진 일본군은 과거 임진년에는 발을 들이지 못했던 전라도를 마음껏 유린한다. 이 때 남원성과 황석산성, 그리고 전주성이 일본군에 함락되면서 수천의 백성과 군사들이 죽었고, 조선은 다시 한 번 아비규환에 빠진다. 특히 이 시기 이순신의 통제영이 있던 한산도는 물론이고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까지 일본군에게 넘어간데다, 이날 이후 이순신은 결국 자신의 본영인 여수에 돌아가지 못한 채 영면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선조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쳐도 정유재란의 원인은 거의 전적으로 선조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유재란 자체는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명나라에 말도 안 되는 중2병급 협상안을 내놓은 순간부터 이미 징조가 보이긴 했으나,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인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 만약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이 승전하거나 최소한 방어에 성공했다면 정유재란은 그냥 무력 시위 정도로 끝났을 수도 있다. 심지어 그때까지만 해도 이순신이 꾸준히 전력을 증강한 덕에 일본 수군을 충분히 막고도 남을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7년 전쟁기간동안 홀로 200척을 해먹는 지휘관 원균만 아니었다면 정유재란은 거의 확정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 정론이다.[34]

게다가 원균의 무능함을 미리 몰라봤던 것이야 뭐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그 밑천이 진작에 다 드러난 칠천량 해전을 겪었으니 원균이 졸장 중의 졸장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다 드러난 판에도 최종 인사 책임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자꾸 속 보이는 정치질을 시도했다. 선조는 칠천량 해전이 원균을 임명한 자신의 책임이 아닌 엉뚱한 하늘의 잘못이라고 끝까지 책임을 회피했고, 명량 해전에서 13척으로 300척으로 알려진 일본 수군의 대함대를 상대로 믿을 수 없는 승전을 거둔 이순신을 두려워하며 그가 전사하는 그날까지도 경계하고 시기했다. 일례로 전후 원균이 이후 이순신, 권율과 동일한 선무공신 1등으로 서훈된 것도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시기와 견제로 인한 발로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나마 원균에게 권율, 이순신과 동일한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가 아닌 종1품 숭록대부가 추서된 건 아무리 그래도 칠천량 해전이라는 졸전을 일으킨 원균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수군 명장 이순신, 육군 명장 권율과 동일한 반열로 대우하는 건 이들에 대한 모욕이고 지나치다고 신하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신하들은 그나마 선조의 눈치를 봐서 원균을 2등으로 올려놨지만 신하들 입장에서는 원균의 이름이 공신 목록에 올라가 있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결국 선조가 이순신을 그렇게 싫어한 이유는 그저 하찮은 질투심 탓인데 이에 그치지 않고 나중에 자기 아들인 광해군에게도 똑같은 이유로 똑같은 짓거리를 해대서 조선의 미래마저 심하게 훼손시키게 된다.

무엇보다 이순신이 잡혀간 정유년은 이순신 개인에게도 매우 불행한 해였다. 아들이 압송되었다는 소식에 어머니 변 씨가 83세의 고령임에도 수도 한양에 투옥된 아들을 보려고 무리하게 여수에서 올라오다가 배 위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선조를 비롯한 수뇌부들에서 나온 수군 폐지론에 맞서가면서 애써 길러낸 최강의 조선 수군은 한순간에 궤멸되었다. 더군다나 이순신이 아끼던 셋째 아들 이면은 의병으로써 활동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인 아산으로 쳐들어온 일본군과 장렬히 싸우다 죽었다. 이는 어머니의 죽음만큼 이순신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정유재란이 확대되지 않았다면 이순신의 아들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며 내려보낸 교지를 보면 당시 모친상 중인 이순신이 통제사 임무를 거절할까 봐 왕이 신하에게 자신의 잘못을 비는 문구가 적혀 있긴 하다. 어찌 보면 파격적인 교지이긴 하나, 문제는 선조가 이순신의 통제사 직책은 돌려주면서 정작 그의 품계는 돌려주지 않아 휘하 수사들이 맞먹으려 까불어도 뭐라 할 수 없는 애매한 지휘권을 돌려주는 식으로 끝까지 찌질하게 굴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시기한 것마저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정유년 12월에 선조는 이순신이 상중이라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여 그에게 고기 반찬을 하사했다. 이 대목은 어찌 보면 신하의 건강을 염려한 자비로운 왕의 선물로 볼 수 있으나 이순신의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는 선조가 내린 고기 선물을 결코 순수한 의도라고 볼 수 없었을 것이고, 막말로 고인드립 내지 패드립으로 간주될 수 있는 저열한 짓거리였다. 실제로 이날 난중일기에 이순신은 선조가 고기 반찬을 하사한 일을 가지고 “비통, 비통하다”[35]라고 적었다.[36] 아무튼 이순신은 다시 복귀하여 징하게 질척대는 이런 저런 견제에도 명량 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선조는 칭찬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이순신의 이름이 높아지자 매우 불편해했으며, 여기에 대한 포상조차 주지 않았다. 그나마 정2품 정헌대부로 품계가 복귀된 것도 명나라 경리 양호가 "도대체 왜 이런 전공을 세운 장수에게 치하를 하지 않은 거냐"라며 계속 압박했기 때문이다.[37]

선조와 이순신 양측이 처해있는 입장과 전공, 나라를 위한 희생 정신, 부하 관리와 민심의 안정화까지 종합해 결론짓자면 선조의 능력과 선택은 명백히 이순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선조가 어떤 감정과 속셈으로 이렇게까지 이순신을 홀대했을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방계 혈통이라는 정통성 컴플렉스로 인한 자격지심이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송고종이나 숭정제처럼 고군분투하는 장수를 모함으로 아예 죽여버리는 최악의 멍청이 짓까지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38]

3.2. 명나라 도주 계획

상이 영변 행궁(行宮)에 납시어 호종한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최흥원(崔興源)이 아뢰기를,
"상께서 정주(定州)로 이주하고 싶으시더라도 우선은 여기에 머무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세자는 여기에 머무를 것이니 여러 신하들 중에 따라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다."
하였다. 정철이 아뢰길,
"세자가 지금은 여기에 머물다가 끝내는 정주(定州)로 갈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귀성(龜城)이나 강변(江邊) 등처로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세자가 여기에 머무르면 힘이 분산되어 조정이 모양을 이루지 못할 성싶고 인심도 역시 요동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종하는 관원을 여기에 많이 머물게 하고 나는 가벼운 행장으로 옮겨갈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우선 평양의 소식이 오는 것을 기다려 봄이 어떻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머물자고 권하는 것이나 피하자고 권하는 것이 각각 소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다시 갈 만한 곳이 있겠는가. 그러나 말하여 보라. 만약 있다면 내가 따를 것이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왜적의 기세가 꺾이면 북도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가산 군수(嘉山郡守) 심신겸(沈信謙)이 행재소(行在所)에 와 있었는데, 상이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가산까지의 거리를 물어보도록 하니, 입계(入啓)하기를,
"90리 길입니다. 그러나 큰 강(江)이 둘이 있고, 가산에서 의주(義州)까지는 촌락이 다 비어 있으므로 인연(人煙)이 매우 드뭅니다."
하자, 철이 아뢰기를,
"서북 지방은 조금 완전하여 우리 나라 강토가 아직은 다 함락당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피할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강계(江界)는 사람들이 모두 방어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랫사람들은 어느 곳이든 못 갈 곳이 없겠지만 나는 정주(定州)로 피해야겠다. 평양이 함락당하면 함경도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괵이 아뢰기를,
"평양이 함락당하면 우리 나라는 보전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자, 철이 아뢰기를,
"임진(臨津)은 왜적이 주인이 되고 우리가 객(客)이 되었지만, 평양은 우리가 주인이 되고 왜적이 객(客)이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김정목(金庭睦)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왜적이 만약 뗏목을 만들어 일시에 진격해 오면 그 예봉(銳鋒)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는 피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요동으로 들어갈 것을 의논하고 있는데 요동으로 일단 들어가면 조종(祖宗)의 종묘(宗廟)·사직(社稷)을 장차 누구에게 부탁하시겠습니까."
하자, 철이 아뢰기를,
"1주(州)·1읍(邑)만 가지고서도 역시 도모할 수 있습니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중국이 우리를 받아주지 않고 왜적이 또 뒤에서 핍박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정주(定州)로 이주한다는 분부가 있자 인심이 동요되고 있으니 잘 생각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괵이 아뢰기를,
"시종신(侍從臣)을 보내어 조치하는 일을 우선 멈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괵이 아뢰기를,
"이 지경에 이르러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전일에 왜적과 통신(通信)한 일이 있었으니 중국에서 그다지 믿어주지 않을 성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요동에 들어갈 수 없단 말인가. 왜적의 문서(文書) 중에, 그들의 장수를 8도에 나누어 보내겠다고 하였으니, 우리 나라 지방에서는 피할 만한 곳이 없을 성싶다."
하였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신축 5번째 기사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 갈 만한 지역을 말하지 않는가. 내가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하였다. 상이 세자(世子)를 이곳에 주류(駐留)시켜 두고 떠나는 것이 괜찮겠느냐고 하문하자, 철(澈)이 아뢰기를,
"만약 왜적의 형세가 가까와지면 동궁도 어떻게 여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하고,[39]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신축 7번째기사

상이 이르기를,
"요동으로 가든지 다른 곳으로 가든지간에 부질없이 의논만 할 것이 아니라 속히 결정하여 그 때를 당해서 갈팡질팡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니, 대신들이 아뢰기를,
"당초에 요동으로 가자는 계책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의논을 들은 뒤로는 신민들이 경악하였으나 달려가 하소연할 곳도 없었으니 그 안타깝고 절박한 실정이 난리를 만난 초기보다 심하여 허둥지둥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왜적들이 가까이 닥쳐왔지만 하삼도가 모두 완전하고 강원·함경 등도 역시 병화(兵禍)를 입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수많은 신민들을 어디에 맡기시고 굳이 필부(匹夫)의 행동을 하려고 하십니까.[40]
그리고 명나라에서 대접하여 허락할는지의 여부도 예측할 수 없으며, 일행 사이에 비빈(妃嬪)도 뒤떨어져 갈 수 없는데, 요동 사람들은 대부분 무식하여 복색(服色)도 다르고 말소리도 전혀 다르니, 비웃고 업신여기며 무례(無禮)히 굴면 어떻게 저지하겠습니까. 비록 요동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곳의 풍토와 음식을 어떻게 견디시렵니까. 생각이 이에 이르자 눈물이 절로 흐릅니다. 요동으로 가는 문제는 신들은 결코 다시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명나라 병사들이 비록 많이 왔지만 우리 나라에서 향도하는 군사가 없어서는 안 되니 이 향도군을 모집하는 것도 시급합니다. 본주(本州)에 토병(土兵)들이 거의 1천 명쯤 되니, 지금 비록 무너져 흩어졌지만 만약 과거(科擧)로써 소집한다면 그들을 모으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병조(兵曹)에서 내일 활쏘는 것을 시험보이려고 하니, 상께서 당분간 여기에 머무르셨다가 다시 왜적의 소식을 들은 다음 수상(水上)을 경유하여 벽동(碧潼)에 이르러 며칠 머무르시다가 또 강계(江界)로 가 형세를 보고 또 설한령(薛罕嶺)을 경유하여 함흥(咸興)에 이르시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4일 임자 1번째기사

신잡(申磼)[41]이 아뢰기를,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필부로 자처하기를 좋게 여긴다면 이 땅에 있더라도 피란할 수 있을 것입니다."[42]
...
신잡은 아뢰기를,
"여기 있는 군신(群臣)들이 누군들 국가를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가[43]가 우리 땅에 머물러 계신다면 거의 일푼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일단 요동으로 건너가면 통역(通譯)하는 무리들도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것은 물론, 곳곳의 의병들도 모두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제장(諸將)[44]들은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만을 두려워합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일 기축 1번째기사
선조가 단순히 도망쳤다고 해서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데, 결국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라는 점이다. 결과론적으로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것은 의도야 어떻든 마냥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힘든 선택이었다. 도망을 안 쳐서 왕이 잡혔다면 조선은 그대로 멸망했을 것이다. 비정하지만 혹 사로잡히지 않고 죽었다면 세자를 새 왕으로 옹립하고 버틸 수라도 있는 반면, 현직 왕이 생포당하면 그대로 패배 확정이기에 나라를 위해서라도 왕은 유사시 안전한 곳으로 도망칠 필요가 있다.[45]
임용한: 일단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다라는 것에 대해서 좀 변명이랄까? 해명을 좀 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너무 좀 감정적으로 대응하는게 있어요. 예를 들면 수도를 버리고 후퇴하는 건 서양 사람들 입장에선 하나도 문제가 안 돼요. (허준: 그럼요.) 단 이건 있어요. 봉건 영주가 적이 쳐들어 왔는데 도망가잖아요? 그러면 그 주민들한테 모든 인망을 잊(잃)어버려요. 왜? "내가 영주로도 군림하고 평소에 세금받는 거는 너희들을 지켜주기 위해서야!" (라는 것이 당시 사회 시스템이었으니까요.) 근데 산적이 쳐들어 왔는데 보안관이 도망을 쳤어. 그럼 보안관은 끝이죠. 근데 왕은 보안관이 아니에요. 보안관(일)부터 전체 조직을 관리하는 사람이지. 그래서 전쟁을 포기하고 자기 할 일을 안 했느냐가 우리가 최종적으로 판단할 일이지 피했다나 피난 갔다는 것을 갖고 우리는 비겁하다라고 말할 순 없는 거에요.[46]
(토크멘터리 전쟁史)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18:22~19:15)
현대에도 국가 원수가 잡히거나 사망하면 거의 패배하는데, 과거는 특히 더했다. 당시 일본의 병법도 적장만 잡으면 끝이라는 논리 하에 전국시대를 보냈고[47],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1순위 목표로 선조의 신변 확보를 두고 한성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선조의 도피로 인해 예상치 않게 전쟁이 길어져 조선군이 재집결한 시간이 벌어지고 일본군은 각지에서 보급로가 끊기고 충무공의병의 활약, 명나라의 지원군 등으로 인해 전쟁은 장기전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48][49][50]

일본군은 최단 시간 내에 한양을 점령했으나 정작 목표였던 왕의 확보에는 실패하면서, 오로지 한양만을 위해 진격하느라 외면했던 각지에서 의병과 관군이 튀어나오며 전쟁의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다시 말해 왜란이 터지고 빠르게 명나라로 향해 원군을 요청한다는 선조의 선택지는 사실 그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아야 한다.[51] 다행히 그 선택지가 먹혀들었고, 명의 원군을 얻어냈으며,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관군과 의병이 일어날 시간도 벌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침략을 당한 전쟁에서 승전해 나라를 지켜냈다는 결론은 적어도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으나... 선조가 도망을 간 이유가 조선의 승리를 위한 자신의 옥체 보전이 아니라 그저 일신이 살고 싶어서 튀었다는 것이 문제다. 한마디로 선조의 행보는 전쟁 수행을 위한 일시 후퇴와는 전혀 상관없이 국가의 존망을 책임지기 싫어서 벌인 도주였다. 위에서 말한 대로 선조의 후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후퇴 이후 다시 병력을 모으고 방어선을 재정비하는 등의 일본군에 맞서 조선을 지키려는 행보가 있었어야 하는데,[52] 선조는 그 부분에 있어서 매우 부족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진짜 문제는 피난이 아니라 당장의 군사적 대응은 당시 겨우 10대 중후반이었던 세자인 광해군과 신하들에게 모두 떠넘겨 버린채[53] 아예 나라를 버리고 요동을 넘어가려 했다는 것이다.[54] 이렇게 되면 가타부타 이야기할 필요 없이 그냥 대단히 적극적인 선조의 행위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져버릴 수 있었고, 그건 누가 봐도 조선이 망해도 상관없으니 나는 살겠다는 제스처였다.[55][56]

특히 이 요동 도주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선조가 막판에 나라를 버릴 수 없다고 마음을 돌려서 안 간 게 아니고 명나라 측에서 일국의 왕이 전쟁 중에 왜 나라를 버리고 외국으로 오냐며 받아주지 않아서 도망을 친 것이다. 선조가 어찌나 빠르고 간단히 나라를 버렸는지 명나라 조정에서 선조가 도주하는 것이 계략이고 몸을 피하는 척해서 일본과 내통하여 명나라를 치려는 음모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농담이 아니고 국가원수가 싸움다운 싸움도 안 해보고 토끼더니 "지원좀"도 아니고 "망명할게" 하면 이상하게 볼 일이 맞다. 게다가 일본군의 진군속도는 가히 경이로울 지경이라 아무 전투도 없이 진격한 것과 거의 동일할 정도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본인이야 "안남국도 멸망당한 뒤 입조하니 전쟁이 끝나고 회복시켜줬다"며 다시 돌아올 마음을 밝혔지만, 안남국의 사례[57]는 정말 운이 좋았던 하나의 고사일 뿐, 왕이 나라를 떠나고 멸망한 사례는 훨씬 많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었다. 더욱이 무슨 대단한 계획이 있어서 몽진하는 것도 아닌, 자기 목숨 하나 보존하겠다고 나라와 백성의 목숨을 몽땅 버리고 도망쳐서 명과 조선 둘 다 위기에 몰아넣은 작자 따위에게 망명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신하들도 매우 강경하게 반대했다. 6월 13일 기사에서 선조가 요동으로 들어가기 위해 정주로 가겠다고 은근슬쩍 운을 띄우자 정철이 평양의 소식을 기다려야 하며 아직 강토가 완전히 함락되지 않았으니 중국으로 가면 안 된다고 간언하지만 끝까지 도망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며, 8월에 이르러서는 선조가 총애하는 신하인 신잡조차 선조에게 대놓고 요동을 건너는 순간 왕이 아니라 필부가 된다며 필부가 되기를 원하면 이 땅에서도 피란할 수 있다는 강도 높은 비판으로 반대했을 정도였다. 의역하자면 정 요동에 가고 싶다면 퇴위하고 서인이 되어 가거라라고 선조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실제로 선조의 행적에 대해서 실망한 명과 조선의 조정에서는 광해군을 왕으로 추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움직임까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진짜로 선조가 요동으로 넘어가면, 신하들이 반발하며 선조를 폐위하고 광해군을 왕으로 추대했을 수도 있다.[58] 조선시대가 한국사 왕조들 중에서 왕이 강력했다고 하나,[59] 이 시기 선조의 권위는 그의 실책들 때문에 밑바닥이었다.[60]

더불어 선조는 의주로 도주하는 과정에서 임진강에서는 배를 불태우고 평양성에서는 앞에서는 평양성을 지키겠다고 백성을 속이고는 밤에 몰래 도주하는 등 백성들의 피난을 방해하는 행보로도 욕을 먹고 있다. 게다가 병법에 대해서도 무지해[61] 전과의 보고에 대하여 사실관계 확인을 명확히 하지 못해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실적을 부풀린 장수를 그 자리에 앉혀서 조선의 모든 함대를 괴멸시켜버린 사건을 초래했으며[62] 일본 육군의 육상 보급선을 흔들어놓은 의병 지휘관들에게 이후 공신들의 공과를 논함에 있어 행한 하대는 옹호할 거리가 있을 수 없다.

그저 순전히 개인적 안위만을 생각해 적극적으로 나라를 버리려고 했고 결국 그것을 보다 못해 조선을 지키기 위해 명과 신하가 합심해서 왕을 폐위시키려는 상황까지 만든 것은 결국 선조 본인이었다. 또한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왜적이 따라올까봐 임진강의 배를 모두 불태워 백성들마저 도망칠 수 없게 했으며, 평양성으로 도주 후 평양을 지키겠다고 선언해놓고 야반에 몰래 도망친 점은 도저히 옹호를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옹호하기 힘든 추태를 보인 탓에 현대에는 런조(Run + 선조)라는 새 묘호(?)를 받고 신나게 까인다.

3.3. 전쟁으로 떨어진 권위

사신은 논한다. 상(上)이 200년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당저(當宁)452)[63] 에 이르러서 남김없이 다 멸망시켜 놓고 겸퇴(謙退)하면서 다시는 백성의 윗자리에 군림(軍臨)하지 않고자 하여 하루아침에 병을 이유로 총명(聰明)하고 인효(仁孝)한 후사(後嗣)에게 대위(大位)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 심정은 진실로 서글프나 그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대신(大臣)으로서는 눈물을 흘리며 봉행(奉行)하더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극력 간쟁(間爭)하여 반드시 승락(承諾)을 받고서야 그만두려 하는가. 왜적이 물러가기 전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왜적이 물러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환도(還都)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환도한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중국의 조사(詔使)가 공관(公館)에 있으므로 할 수가 없다고 하고, 조사가 돌아간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세자(儲宮)가 어려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세월을 끌며 말을 바꿔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마치 어린아이가 서로 희롱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사리(事理)인가. 당시에 세자의 나이가 이미 약관(弱冠)이었고 학문도 고명(高明)하였으며 덕망도 이미 성숙하였으니 대위(大位)를 이어받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난을 평정하고 화를 종식시켰을 것인데, 계속 어린 세자(沖嗣)라고 하였다. 옛부터 약관의 어린 세자가 언제 있었던가. 끊임없이 간쟁하여 상의 훌륭했던 생각을 중지시켰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7일 무오 5번째기사[64]
선조가 붕당의 상호 견제를 통해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고는 하나, 숙종의 환국과 영조의 척신정치와 마찬가지로 선조가 택한 왕권 강화 시도의 방식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국가적으로 전혀 유익하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된다. 실제로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는 광해군 시기 봉산옥사, 계축옥사로 대표되는 대북의 폭주와 연관이 없다 할 수 없고, 더 나아가면 인조반정과 대북의 몰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선조는 한 술 더 떠서 가족 관리 측면에서도 평가가 매우 좋지 못하다. 우선 일찍부터 여색을 탐한다는 비판을 들었으며, 특히 후궁들이 뒷배를 믿고 워낙 횡포를 부려 대 원성이 심각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몽진 도중 선조가 특히 총애했던 후궁 인빈의 가마는 백성들에게 돌을 맞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은 선조의 총애를 받는 척신이었고, 이산해와 결탁해 정철을 실각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김공량은 내수사 별좌 시절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유명해 부정축재를 일삼았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그의 탐학질로 인해 폭동을 일으키자 진압하거나 사태 해결은커녕 강원도로 도망가는 추태를 벌였다. 이런 사례는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아들일 때도 나타난다.

더불어 선조가 전쟁 중에 보였던 온갖 추태 때문에 권위가 너무 떨어져서, 평시라면 반역에 버금가는 하야 요구가 대놓고 제기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선조 25년 11월 7일 상소가 바로 그것이다.
유학(幼學) 남이순(南以順)·송희록(宋希祿)이 상소하여 백성들 뜻에 의해 동궁(東宮)에게 선위(禪位)할 것을 청하니, 비망기(備忘記)로 일렀다.
"전에 동궁으로 하여금 전단(專斷)하게 하도록 전교하였으나 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것이 어떤 일이기에 한갓 말뿐이었겠는가. 그만둘 수가 없다. 나는 평소 고질이 있어 날로 심해지는데 40이 되도록 죽지 않을 줄은 평소 생각조차 못했었다. 근일에는 두눈이 침침하여 곧 장님이 될 상황이니 비록 그대로 왕위에 있고자 해도 그 형세가 어찌할 수 없으니 마땅히 전의 뜻에 따라 근신(近臣)을 보내 내 뜻을 유시(諭示)하여 모든 크고 작은 일을 먼저 결단한 후에 아뢰게 하라. 이곳에서는 다만 사대(事大)와 청병(請兵)하는 일 하나만을 조치할 것이니, 이 역시 적을 토벌하는 일이다. 내선(內禪)하는 일 또한 나의 평소 뜻으로서 즉시 행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곳이 중국과의 경계여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까 염려되어서이지 감히 욕심을 내어 무릅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은 마땅히 적을 섬멸하기를 기다려 시행해야 하니, 이런 뜻을 아울러 알라."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7일 계해 3번째기사
상술되었듯 선조는 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이순신을 비롯한 인재들을 잘 등용했는데, 왜란이 터지고 이몽학의 난이 발생한 이후로 생긴 의심병과 타고난 이기주의로 인해 나중에는 이들을 모두 숙청하기에만 바빠 신하들 사이에서도 긴장과 경계심을 이끌어 쓸데없이 적을 만든 것도 있었다.

게다가 세자인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며 왜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동안, 정작 본인은 어떻게든 적을 막을 생각은 안 하고 오히려 압록강을 건너 명으로 도망가서 살 궁리나 하고 자빠져 있으니 대체 누가 왕인지 헷갈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당시 조선 조정의 대신들 입장에서도 임진왜란 시기에 보여 준 선조의 모습은 너무나도 무책임하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었다. 선조 25년 6월 18일 기사를 보면 요동으로 피하려는 선조에게 서인인 정철과 남인인 류성룡이 양위를 요구하러 갔다가 서로 눈치만 보다가 나왔을 정도다.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11월에 이르러서는 남이순, 송희록 등의 유생들 또한 '동궁에게 양위하라' 며 상소를 올리며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선조가 반정당한 왕들 수준의 정치적 입지에 몰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막말로 이 정도의 실책이라면 정말 반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지만, 제 그릇에 맞지도 않는 권력에 대한 욕심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렬했던 선조는 역으로 이 양위 파동을 자신의 끈 떨어진 권위를 다시 세우는 데 이용했다. 선조는 조선 종묘 역사 중에서 선위 선언을 가장 많이 남발한 임금인데, 알다시피 그 선위 파동은 전부 속 훤히 들여다보이는 쇼에 불과했다. 그래도 꼴에 왕이라고, 어쨌든 전쟁 중에도 신하들은 선조를 말리며 자신의 충심을 보여야 했고, 세자인 광해군 역시 쉴 새 없이 대궐 뜰에 엎드려 어명을 거두어 달라며 빌어야 했다. 아래는 임진왜란 발발 첫 해와 이듬해에 벌어진 선조의 선위 소동에 대한 선조 실록의 기록이다.
윤두수 등이 세 번 아뢰고, 양사(兩司)와 【대사간(大司諫) 이해수(李海壽), 사간 이유징(李幼澄), 장령(掌令) 이시언(李時彦), 헌납(獻納) 김정목(金廷睦), 지평(持平) 길회(吉誨)·이광정(李光廷). 】 옥당(玉堂) 【응교(應敎) 구성(具宬), 정자(正字) 윤경립(尹敬立). 】 및 정원이 모두 차자를 올리니, 상이 일렀다.
"고질 때문에 사람들 뜻에 따르고자 하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 이처럼 소란을 떠니 우선 후일을 기다리겠다."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8일 갑자 4번째기사

상이 정원에 전교하였다.
"이제 평양을 이미 탈환하여 명나라 군사가 전진하니 부흥을 기약할 만하다. 다만 거리가 점점 멀어져 소식을 듣거나 책응(策應)하는 등 여러 일이 이 한 모퉁이에 있어 모두 그 편의를 잃었다. 과매(寡昧)한 사정은 지난번에 이미 모두 다 말하였다. 날이 갈수록 병이 고질화되고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심해지니 하루라도 그대로 무릅쓰고 있어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며 위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것이 어떤 일이라고 늘 말하면서 변명하는 자같이 하겠는가. 거기다가 요즈음은 중국 관원을 접대하는 일 때문에 추위를 무릅쓰고 애를 썼더니 한질(寒疾)이 더욱 심하여 전진하기에 쉽지 않은 형편이다. 그러니 승지를 보내어 어보(御寶)를 받들어 먼저 동궁(東宮)에게 선위(禪位)한 다음 빨리 안주(安州)로 나아가도록 하여 협력하여 책응하는 것이 옳다. 나는 뒤를 따라서 출발하도록 하겠다. 다시 말하지 말고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13일 무진 1번째기사

영의정 이하가 임시로 대리하라는 것을 정지하도록 세 번 계청(啓請)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렇게 무익할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어찌 사람에게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하는가. 대신을 귀중히 여기는 것은 국가를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기 때문이다. 경들의 이 말은 아마도 대신의 말이 아닌 듯하다. 필부의 뜻도 오히려 빼앗을 수 없는데 경들이 어찌 병이 들어 흙으로 만든 등신 같은 사람을 구박할 수 있겠는가. 천리나 되는 먼 변방에서 반년 동안 풍상(風霜)에 찌들었으니 죽지 않은 것만도 이미 이상한 일이다. 마음 병과 눈병 그리고 머리 병과 다리 병이 반복해서 몸에 얽혀 반신(半身)이 온전하지 못하고 온몸이 모두 아파 방에 드러누워 땅속으로 들어가기만 기다린다."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27일 임오 1번째기사[65]

비망기(備忘記)로 전교하였다.
"나는 젊어서부터 병이 많아 반생(半生)을 약으로 연명(延命)하고 있는데, 이는 약방(藥房)의 제인(諸人)들도 다 같이 알고 있는 바이다. 전일 옥당(玉堂)에 내린 비답(批答)에 ‘인간 세상에 뜻이 없다.’고 한 말에서 더욱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니 지금 다시 말하지 않겠다. 겨울이면 방안에 틀어박히고, 봄·가을에도 정원(庭苑)을 돌아본 적이 없었다. 난리를 만나고부터는 온갖 고생을 다하였는데 이런 기력을 가지고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진실로 이치 밖의 일이니, 천도(天道)가 무지(無知)하다 하여도 가할 듯하다. 전에도 민박(悶迫)한 뜻을 가지고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호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조의(朝議)에 저지당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원수인 적을 토벌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리상 병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강서(江西)에 머물면서부터는 몇 달을 먹지 못하였고, 지금은 오직 죽만을 마실 뿐이다. 밤이면 병풍에 기대어 밤을 새우고 낮이면 정신이 혼란(昏亂)하여 멍청이가 되는데, 그런 와중에 광병(狂病)·목병(目病)·비병(痺病)·습병(濕病)·풍병(風病)·한병(寒病) 등 온갖 병이 함께 일어나서 이 한 몸을 공격하니, 한 줌의 원기(元氣)로써 어찌 그 병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광병으로 말하면 때때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곡(哭)을 하기도 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고함을 치며 달려가기도 하며, 무언가를 보고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놀라 머리털을 곤두 세우기도 하니, 예로부터 어디에 광병을 앓은 임금이 있었던가. 목병으로 말하면 두 눈이 어두워 사물을 분별할 수 없어 모든 계사(啓辭)의 글씨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머지 않아 소경이 될 것인데, 예로부터 어디에 소경의 임금이 있었던가. 비병으로 말하면 몸의 반쪽이 허약한 데다가 안개와 이슬을 맞은 뒤로는 그 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오른쪽 수족을 전혀 움직일 수 없고 밤이면 쑤시고 아픈데 손으로 만져도 감각이 없어 마치 마른 나무 토막 같으니, 예로부터 어디에 한쪽 수족만 가진 임금이 있었던가.
이 밖에 고질이 된 더러운 병들은 일일이 들어 말할 수도 없다. 가을이 아직 깊지 않았는데도 갖옷을 껴입고 있으니 쇠약하여 숨이 거의 끊어지려는 형세가 하루도 넘기지 못할 것 같다. 이러한데도 체면을 무릅쓰고 그대로 임금 노릇을 한 사람은 일찍이 전고에 없었던 바이니,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 지금은 흉적이 이미 물러갔고 옛 강토(疆土)도 수복되었으므로 나의 뜻이 이미 결정되어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세자(世子)가 장성하여 난리를 평정하고 치적을 이룩할 임금이 되기에 충분하니 선위(禪位)에 관한 여러 일들을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8월 30일 신해 2번째기사

세자(世子)가 내선(內禪)441)[66] 의 명이 내렸다는 것을 듣고 즉시 예궐(詣闕)하여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신은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어 어려서부터 학식(學識)이 없었으므로 비록 장성하긴 했으나 덕업(德業)이 전혀 없습니다. 분수 넘게 세자가 된 뒤로 능력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난리를 만날 즈음에 질병이 생겨 반년 동안을 고생하였으므로 정신이 희미하여 평범한 일을 처리하는 것도 결코 감당하기 어려운데, 어찌 감당할 수 없는 명이 변변치 못한 이 몸에 내릴 것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명을 들으니 놀랍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심정을 통찰(洞察)하시고 속히 성지(聖旨)를 거두시어 신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분수를 보존할 수 있게 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미신(微臣)의 민박(悶迫)한 심정을 천지 신명이 굽어 살피고 계시니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8월 30일 신해 7번째기사

세자가 새벽에 대궐에 나아가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기를,
"신이 민망 절박하고 답답한 심정에서 날마다 혈성(血誠)으로 대궐 뜰에서 호소하였으나 오래도록 유음(兪音)은 받지 못하였고 성지(聖旨)는 더욱 엄하니 두려움에 떨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어제 성상의 비답을 보건대, 심지어 ‘병이 들어서 감당할 수가 없게 되면 자식으로서는 마땅히 부모의 마음으로 마음먹어야 한다.’고까지 하셨는데, 꿇어앉아 재삼 읽으니 감격하여 눈물이 흐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어리석다고 하더라도 부모의 마음을 받들어 따르는 것이 곧 자식된 직분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성상의 명을 감히 따를 수가 없었던 것은 실상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을 위하고 성상을 위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날이 갈수록 천청(天聽)은 더욱 막연하게 되고 있으니, 가슴 조이며 안절부절하다가 통곡할 뿐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용렬하고 불초한 점과 시세의 어렵고 위태로운 점에 대해서는 전후 남김없이 모두 말씀드렸으므로 성상께서는 반드시 충분하게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매양 민망 박절함으로 인하여 천위(天威)를 번거롭혀 드렸습니다. 물러와서 생각해보니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만 그보다 더 중한 것이 있기 때문에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의 유음(兪音)을 받지 못하면 만번 죽는 한이 있어도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슴속에 있는 진심으로 다시 감히 우러러 번거롭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미미한 정성이나마 통촉하시어 특별히 가엾게 여기시어 속히 윤허하여 주신다면 이는 병들어 죽게 된 목숨이 천지 부모의 은혜에 의해 보존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에 있어서도 매우 다행스러울 것입니다.
신은 앓던 병이 다시 극심해져서 심신(心神)이 이미 저상되어서 기(氣)가 막히고 말도 어눌하여 민망스럽고 망극한 심정을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간곡한 정성을 제대로 아뢰지 못하여 성상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을 것으로 여겨져 머리를 들고 대궐문을 우러르며 애절하게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이러한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세 번 더 깊이 생각하셔서 속히 윤허의 명을 내리심으로써 국가의 무궁한 복이 연장되게 하소서. 신은 민망 절박하여 간절히 비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 땅에 엎드려 아룁니다."
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7일 무오 1번째기사[67]

좌의정 윤두수(尹斗壽)가 백관을 인솔하고 선위하지 말 것을 계청하면서 재차 아뢰니 답하였다.
"민망스럽고 절박하여 눈물까지 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 견딜 수만 있다면 어찌 감히 그렇게 했겠는가. 서울에 돌아가서 능침(陵寢)을 배알한 다음에는 즉시 나의 뜻을 받아 주겠는가? 그렇게 해준다면 지금은 억지로라도 따르겠다."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8일 기미 1번째기사

봉서(封書) 한 장을 도승지 심희수(沈喜壽)에게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봉서를 대신들에게 내리라."
하였다. 그 봉서의 대략에,
"과인(寡人)이 왕위에 있은 지 20여 년 동안에 지성으로 사대(事大)해 온 것에 대해 황천(皇天) 후토(后土)는 진실로 내 마음을 알 것이다. 불행히도 역적(逆賊)이 창일하여 나라를 잃고 서쪽으로 파천(播遷)했다가 다행히 황제의 위령(威靈)을 힘입어 환도(還都)하게 되었는데, 온갖 병이 얽히고 설켜 감당하지 못할 듯싶다. 세자(世子)가 영예(英睿)하고 배신(陪臣) 중에 현명한 사람이 많이 있으니 족히 봉번(奉藩)544)(註 544)(봉번(奉藩) : 번방(蕃邦)으로서의 할 일을 해감.) 하게 될 것이다. 이에 선위(禪位)하고자 한다. ……"
하였다. 이어 비망기(備忘記)로 이르기를,
"이 봉서를 소매속에 간직했다가 연회가 끝날 즈음에 승지에게 보이고 나서 장 도사(張都司)에게 친히 주려고 했는데, 뜻밖에 장 도사가 갑자기 일어나므로 나도 창황하여 주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 일은 이미 마음에 맹세했으므로 끝내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오늘 송 경략이 한 말을 보건대 매우 불칙했다. 나의 죄는 진실로 주벌을 받아야 하지만 배신들을 무슨 까닭으로 베려 하는가? 이른바 ‘구인(句引)’이라는 것은 또한 무슨 말인가?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게 될 것이다. 바라건대 경들은 국가를 위해 침착한 마음으로 선처해 간다면, 나 한 사람만 경들에게 두터운 은혜를 받는 것일뿐만 아니라 사직(社稷)에 대한 충성도 큰 것이 되니, 구구하게 고집할 생각을 하지 말라.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다."
하였다.
선조실록 44권, 선조 26년 11월 16일 병인 5번째기사

동궁이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망극하고 미안한 분부를 또 내리셨다 하니 놀랍고 몹시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미신(微臣)의 못난 점과 나랏일의 망극함을 다시 거론하여 성청(聖聽)을 더럽히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근자에 성지(聖旨)가 엄준하여 신을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셨는데 신은 본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황제의 명이 이미 내려져서 피할 길이 없으니, 하루 바삐 달려 내려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병에 걸려 이토록 지체하고 있으므로 두렵고 떨려서 밤낮으로 근심하는데다가, 더구나 이 막대한 명이 어려움이 많은 때에 또 내려졌으니, 두루 돌아보아도 떨어져 죽을 것만 같아 몸 둘 곳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위로 종사(宗社)의 큰 계책을 생각하시고 몹시 절박한 미신을 굽어 살피어 다시 성은(聖恩)을 내리시어 하루 속히 성명(聖命)을 거두소서. 그러면 신의 어리석은 분수가 잠시나마 편안할 수 있을 뿐더러, 국가와 백성 모두가 더없이 다행할 것입니다. 못내 하늘을 바라보고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축원하는 바입니다. 삼가 엎드려 아룁니다."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17일 정유 9번째기사

윤11월 16일: 선위에 관한 일을 유성룡에게 전교하다
윤11월 16일: 유성룡이 선위하는 일이 시기가 아니라고 비밀히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선위하는 일의 불가함을 비밀히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재차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네 번째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7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다섯 번째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윤11월 18일: 유성룡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선위하는 일에 관해 대신에게 전교하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4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네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5일: 심수경·유성룡·윤두수가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5일: 유성룡이 2품 이상과 육조 당상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유성룡이 2품 이상과 육조의 당상을 거느리고 재차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유성룡이 2품 이상과 육조의 당상을 거느리고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이헌국·이제민·이수광·박동현 등 간원과 헌부가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6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문관이 올린 차자
윤11월 27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양사가 선위의 불가함을 합계하다
윤11월 27일: 정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다시 아뢰다
윤11월 27일: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네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한 홍문관 부제학 이기와 직제학 백유함 등이 올린 차자
윤11월 27일: 이헌국·이제민·이수광 등 헌부와 간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7일: 이헌국·이제민·이수광 등 헌부와 간원들이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정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양사가 합계하여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양사가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8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문관 부제학 이기 등이 올린 차자
윤11월 28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다시 올린 차자
윤11월 29일: 정원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양사가 합계하여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대신이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대신이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양사가 다시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양사가 세 번째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해풍군 이기 등이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다
윤11월 29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분관 부제학 이기 등이 올린 차자
윤11월 29일: 선위의 불가함에 대해 홍문관 부제학 이기 등이 다시 올린 차자
12월 1일: 영의정 유성룡 등이 4번에 걸쳐 선조의 양위를 적극 반대하다
12월 1일: 왕 세자가 돌아오면 양위하기로 하다
선조 26년 11월부터 12월까지 벌어진 선조의 선위 소동에 대한 선조 실록의 기록
그러나 문제는 선조의 양위 파동과 세자 홀대가 후계자 교육의 실패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 탓에 이후 조정에 피바람이 불어닥치는 원인을 제공했다. 개중에 선조 옹호론자 중에는 광해군이 선조의 잠재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견제하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당시 광해군은 라이벌이 어쩌고를 떠나서 결국 선조가 언젠가는 왕 자리를 물려주어야 하는 아들이자 후계자였다. 당현종당숙종에게 한 것처럼 제위를 평화롭게 물려주지는 못할망정, 정식으로 세자 책봉이 되지 않은 것을 빌미로 세자인 광해군의 지위를 흔들려고 해서는 안 되었다. 이는 왕이기 이전에 사사로운 부모자식간의 관계로 보더라도 매우 파렴치하고 패륜적인 행위였다. 심지어 선조는 전쟁 후에 맞아들인 후처에게서 태어난 영창대군을 이용해 공공연히 광해군의 입지를 위협하고, 형제간의 갈등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더구나 전쟁 직후 선조는 47세, 아들 광해군은 24세였는데 선조의 경우 평균 수명이 짧았던 당시의 시대를 감안할 때 이미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설상가상으로 이 때부터 선조는 소화불량, 편두통, 신경질환을 심하게 앓으면서 건강까지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미 능력이 검증된 장성한 세자가 존재했기에 보통 이 때가 되면 세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거나 대리청정을 시키는 게 상식이다. 당장 조선 초기의 태종이나 세종의 경우 세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거나 대리청정을 시켰다.

광해군이 특별히 성정이 못되었거나 선조에게 불손하게 굴었던 것도 아니고, 결국 광해군은 왕자이므로 어차피 선조의 뒤를 이어 왕의 자리에 오를 인물이었다. 광해군을 잘 키워 성공적으로 양위만 했더라면 그가 임진왜란 시절 분조를 성공적으로 이끈 것도 결국 '내가 자식을 이렇게 잘 키웠으니 광해군도 이 정도씩이나 된 것이다'라면서 방귀 좀 뀔 수도 있었다. 어차피 임진왜란 때 피똥싸며 고생도 했겠다, 태종마냥 적당한 시점에서 상왕으로 물러났더라면 광해군도 아버지에게 인정받아 행복했을 것이고, 계축옥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선조도 괜히 쓰잘데기없이 정치질하면서 지 혼자 스트레스 받지 않고 아랫목에 배 깔고 귤이나 까먹으며 느긋한 말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잇속 챙길 욕심만 가득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선조는, 다른 사람도 아닌 제 자식인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긴커녕 전쟁이 끝나자 마자 보란듯이 새 중전을 들여 적자를 낳는 것에 열중했다. 더불어 광해군에게 대리청정과 양위도 절대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사사롭게 질투와 시기를 숨기지 않았다. 당시 선조에게는 정비인 의인왕후가 사망한 이후로 왕비가 없었기에 중전을 새로 들이는 것은 조선의 법도 상 아무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선조가 대놓고 적통대군의 탄생을 대놓고 노리며 신하들조차 안좋게 볼 정도로 계비 간택을 서둘렀고, 결국 계비인 인목왕후가 기어코 영창대군을 낳자 대놓고 영창대군을 총애하면서 후계 구도를 개판으로 만들었다. 이후에도 선조는 계속 권력을 독점하며 영창대군을 빌미로 광해군을 견제하는 등 파국의 씨앗을 남겼다.

이러한 선조의 주제넘은 권력욕과, 그 때문에 발생한 후계구도 붕괴는 가뜩이나 전쟁으로 혼란하던 조선 왕실의 질서를 완전히 박살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 굳이 쓸데없는 부통령을 같이 뽑는다거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무런 실권도 행사하지 못하는 국무총리를 당선되자마자 먼저 선임하는 것은 단순히 유고 대체뿐 아니라 이것이 권력의 질서라는 차원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선조는 스스로의 업보로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킨 주제에, 자기 외에는 누구도 권력의 칼자루를 쥐어 주지 않겠다는 권력독점욕으로 후계자들 간의 질서와 관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음은 물론 후대 종묘에도 크나큰 폐를 끼쳤다.

때문에 조정신료들은 이런 분열된 후계자들의 구도 속에서 혼란에 빠졌다. 도무지 누구를 세자이자 차기 왕으로 모셔야 할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68] 광해군과 영창대군 중 어느 쪽에 줄을 서도 윗줄부터 썩어버린 이 끈을 함부로 꽉 잡을 수 없으니 조정이 완전히 분열되어 버렸고, 차기 권력으로써 온갖 궂은 일은 다한 광해군과 그의 지지세력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된 끝에 그들이 영창대군을 숙청 대상 톱으로 세우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이는 선조 사후 광해군의 즉위 이후에 벌어진 계축옥사로 현실화 된다.[69] 또한 그런 광해군의 견제에 휘말려 애꿎은 인목왕후(영창대군의 친모)와 정명공주(영창대군의 친누나)마저 사실상 폐위되어 갖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오죽했으면 광해군이 폭군이자 암군으로 역사에 길이 남은 악인임에도 불구하고 폐주될 때 백성들의 동정을 받았겠는가. 저런 한심한 아버지 밑에서 전시군주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 나름의 전쟁 영웅이었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3.4. 공신 책봉 문제

전란이 종료되면 의례 공신 책봉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공신 책봉에도 많은 문제가 있어 전후 선조의 평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는데 바로 선무공신 책봉문제이다. 선조는 전란 후 전란에서 공을 세운 장수에게 주는 선무공신[70] 왕을 따라 호종한 자들에게 주는 호성공신,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자들에게 내려준 청난공신을 선정하였는데 문제가 되는 부분이 호성공신과 선무공신이다. 아래는 선조실록에 기록된 공신 책봉 과정이다. 애초 등급이 확정된 호성공신과 달리 고작 18명을 선정하는 선무공신은 선정 과정에서 추가 혹은 누락이 계속 발생하고, 심지어 등수까지 변경이 일어난다.
사신은 논한다. 공로에 보답하는 것은 국가의 막중한 행사이다. 막중한 행사인데도 사람들에게 가볍게 시행하였으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호종한 것을 녹공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육지(陸贄)[71]가 일찍이 말하였다. 가령 육지가 조금이나마 공로에 보답하는 방도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시에 호종한 신하들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더구나 요리나 하고 말고삐나 잡던 천한 자들까지 모두 익운의 반열에 참여시켜 이름이 맹부(盟府)020)(註 020)(맹부(盟府) : 공신을 기록한 문서.) 에 들어 있는 자가 35인이나 되게 하였으니 어떻게 후세의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 정왜(征倭)의 공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비록 중국 장사(將士)들의 공이라고는 하나 대진(對陣)하여 승전한 공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호종한 신하들은 많이 참여시키고 싸움에 임한 장사들은 소략하게 하였으니, 공에 보답하는 방도를 잃었다고 할 만하다.
선조실록 159권, 선조 36년 2월 12일 기해 5번째기사

이순신의 장계에, 이름이 일등에 든 사람은 권준이순신(李純信) 두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운(鄭運) 같은 사람에 있어서도 이름이 1등의 셋째 번에 들었고, 본디 역전(力戰)한 사람으로 일컬어져 왔는데, 상께서 수효가 지나치게 많다고 경계하셨습니다. 정운이 이미 녹공되지 않았으니 배흥립도 마땅히 삭제되어야 합니다.[72]
선조실록 161권, 선조 36년 4월 28일 갑인 2번째기사

비망기로 이르기를,
"원균을 2등에 녹공해 놓았다마는, 적변이 발생했던 초기에 원균이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해 주기를 청했던 것이지 이순신이 자진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왜적을 토벌할 적에 원균이 죽기로 결심하고서 매양 선봉이 되어 먼저 올라가 용맹을 떨쳤다. 승전하고 노획한 공이 이순신과 같았는데, 그 노획한 적괴(賊魁)와 누선(樓船)을 도리어 이순신에게 빼앗긴 것이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어서는 원균이 재삼 장계를 올려 부산(釜山) 앞바다에 들어가 토벌할 수 없는 상황을 극력 진달했으나, 비변사가 독촉하고 원수가 윽박지르자 원균은 반드시 패전할 것을 환히 알면서도 진(鎭)을 떠나 왜적을 공격하다가 드디어 전군이 패배하게 되자 그는 순국하고 말았다.[73] 원균은 용기만 삼군에서 으뜸이었던 것이 아니라 지혜도 또한 지극했던 것이다.
당(唐)나라 때 가서한(哥舒翰)이 가슴을 치면서 동관(潼關)을 나섰다가 마침내 적에게 패전하게 되었고, 송(宋)나라 때 양무적(楊無敵)이 반미(潘美)의 위협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싸우러 나갔다가 적에게 섬멸된 것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고금(古今)의 인물들을 성공과 실패만 가지고는 논평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원균이 지혜와 용기를 구비한 사람이라고 여겨 왔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운명이 시기와 어긋나서 공도 이루지 못하고 일도 실패하여 그의 역량이 밝혀지지 못하고 말았다. 전번에 영상이 남쪽에 내려갈 때 잠시 원균을 민망하게 여기는 뜻을 가졌었는데, 영상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공로를 논하는 마당에 도리어 2등에 두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정운(鄭運)은 배흥립(裵興立)의 일 때문에 삭제하였다. 이순신이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구원하러 가기를 의논할 적에 정운이 극력 찬동했었고, 왜적을 토벌할 때에도 정운의 공이 많았었다. 결국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으니 이는 정운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배흥립이 범람하다는 것 때문에 마땅히 녹공해야할 정운까지 아울러 삭제할 수는 없는 일이니, 정운을 녹공해야 함은 의심할 것이 없다.[74]
회복(恢復)하게 된 공로가 오로지 중국군에게 있었으니, 청병(請兵)하러 가서 소청을 얻어낸 사람들을 호종하지 않았다 해서 빠뜨릴 수는 없다. 심희수·유몽정이 이미 청병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은 참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 사람들은 버려 둘 수 없으니 다시 참작해야 한다.
...
하니, 회계하기를,
"이번의 공신은 원수(元數)가 너무 많으니, 전에는 이렇게 많은 적이 없었습니다. 원균은 당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해상의 대전에 참여하였고, 뒤에는 주사(舟師)를 패전시킨 과실이 있었으니 이순신·권율과는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낮추어 2등에 녹공했던 것인데,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올려서 1등에 넣겠습니다.[75]
정운은 수록하겠습니다만, 심희수와 유몽정은 청병하여 소청을 얻어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삭제하여 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하자,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위 헌공(衛獻公)이 망명했다가 위나라로 돌아올 적에 교외에 이르러 수종했던 사람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준 다음 들어오려 하자 유강(柳莊)이 말하기를 ‘만일에 모두가 사직을 지켰더라면 누가 고삐를 잡고 따라갔을 것이며, 모두가 따라갔더라면 누가 사직을 지켰겠습니까. 임금께서 나라에 돌아와 사정(私情)을 쓰려 하시니 불가한 일이 아닙니까.’ 하니, 나누어 주지 않았었다. 환시는 나라 임금의 가노(家奴)로서 녹훈한 일은 고찰해 볼 데가 없다. 원균은 주함(舟艦)을 침몰시키고 군사를 해산시킨 죄가 매우 컸다.
선조실록 163권, 선조 36년 6월 26일 신해 2번째기사

공신(功臣)들의 명칭을 정하여 대대적으로 봉(封)했는데,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始終) 거가(車駕)를 따른 사람들을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奏請)한 사신(使臣)들은 선무 공신(宣武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람은 청난 공신(淸難功臣)으로 하고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있게 명칭을 내렸다.
호성 공신 1등은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崐壽)인데 충근정량갈성효절협력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力扈聖功臣)이라 하고,...모두 86인인데 내시(內侍)가 24명, 이마(理馬)가 6명, 의관이 2명이고, 별좌(別坐)와 사알(司謁)이 또 2명이다.
선무 공신(宣武功臣) 1등은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 세 대장인데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76] 2등은 신점(申點)·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이억기(李億祺)인데 효충장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기원(鄭期遠)·권협(權悏)·유사원(柳思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인데 효충장의선무 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는데 모두 18인이다.
청난 공신(淸難功臣) 1등은 홍가신(洪可臣)인데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2등은 박명현(朴名賢)·최호(崔湖)[77]인데 분충출기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3등은 신경행(辛景行)·임득의(林得義)인데 분충출기청난 공신(奮忠出氣淸難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으로 봉했는데 모두 5인이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임진년의 왜변을 만나 종사(宗社)가 전복되고 승여(乘輿)가 파천했으며 원릉(園陵)이 화를 입었고 생령들이 해독을 받았으니, 말하기에도 참혹한 일이다. 다행히 황은(皇恩)이 멀리 미침을 힘입어 팔도(八道)가 다시 새로워졌으니, 임금의 도리에 있어 논공 행상(論功行賞)하여 공로에 보답하는 특전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호종신(扈從臣)을 80여 명이나 녹훈(錄勳)하였고 그 가운데 중관(中官)이 24명이며 미천한 복례(僕隷)들이 또 20여 명이나 되였으니, 또한 외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이르러서는 주군(州郡)에서 불러 모은 도적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토평한 것이 어찌 공이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만든 것이 당초 어찌 이처럼 구차한 데에 쓰려고 한 것이겠는가. 아, 김응남(金應南)은 신묘년100)(註 100)(신묘년 : 1591 선조 24년.) 에 부경(赴京)하였을 적에 정신(廷臣)들의 의논을 극력 변론하여 실제 상황을 들어 주문(奏聞)함으로써 마침내 황상(皇上)이 감림(監臨)하게 하였으니, 그의 공이 진실로 크다. 그리고 신점(申點)은 중국에 있다가 국가가 병화(兵火)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서 7일 동안이나 먹지도 않고 울면서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주청했으니, 중국군이 나오게 된 것은 과연 누구의 공이겠는가. 정곤수(鄭崐壽)는 구원병을 주청하고 군량을 주청한 공로가 있고, 이호민(李好閔)은 사명(辭命)을 전담한 공로가 있고, 이순신·원균·권율은 혈전(血戰)한 공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삼공(三公)은 조금이나마 대책을 결단한 일이 있었으니 부득이하다면 이들 몇 사람만 녹훈했어야 했다.
선조실록 175권, 선조 37년 6월 25일 갑진 7번째기사
이상이 실록에 기록된 공신 책봉 과정이다. 선무공신은 1등에 이순신과, 권율, 원균을 포함하여 총 18명인 반면 호성공신은 80명이 넘어가며 그 신분도 다양하다.[78] 1602년 4월 공신도감이 공신록에 들 만한 장수 26명을 추려 올린 기사를 보면 선조는 선무공신의 숫자가 늘어나는 걸 꺼린 정황이 분명하다. 일단 선무공신에 원균이 1등으로 들어간 것은 전적으로 선조의 의지였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 원균옹호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79] 애초 원균은 신하들이 2등에 놓았으나[80] 선조가 원균의 공이 작지 않다며 1등으로 강제로 올렸으며, 그래도 이순신의 공을 부정은 못해 이순신을 1등 중에서도 원훈에 봉했다.[81]

이 선무공신 가운데 대다수는 이미 죽어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호성 공신과 비교했을때도 그 수가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이전에는 선무공신 가운데 의병장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처음은 의병장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관군이 된 사람들로서 선무2등공신 권응수이정암이 있다.[82] 대표적인 의병장인 곽재우는 1600년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 왕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경상좌병사직을 내버리고 낙향해 대놓고 왕의 권위를 무시했는데, 공신도감에선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넣어주려고 했기 때문에 이때 선조의 신뢰를 잃지 않았다면 이름을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김천일, 고경명, 김면, 조헌, 이정형, 이수일 등 이때 선무공신에 들지 못한 의병장들은 사후 추증이건, 생전에 중용되건 어떤 식으로든 대우를 받긴 했다. 별도로 이몽학의 난 진압으로 선정된 정난공신에 최호 등 일부 무장들이 들어가기도 했다.

공신 책봉 관련해서 진짜 할 말 있는 쪽은 의병이 아니라 관군, 특히 이순신 밑에서 활약한 수군 장수들이다. 소소한 전과는 꾸준히 세웠지만 큰 공은 없는 고언백도 들어갔는데[83] 정운, 우치적, 배흥립, 안위, 김응함은 공신도감에서 들어갈만 하다 했음에도 선조의 견제로 전부 못 들어갔다. 정운은 선조가 공신수가 너무 많다고 경계하는 바람에 기각,[84] 임진년부터 정운과 함께 활약한 배흥립도 같은 이유로 기각, 1594년에 거제현령으로 제수되어 임진년 해전에는 참여할 수 없었던 안위는 임진년에 공이 없다고 기각. 전공 많은 수군 장수들을 이런 식으로 다 자르고 무의공 이순신과 권준 둘만 위에서 뚝 잘라서 집어넣었다.[85]

선조의 공신 책봉이 비난받는 이유는 원균에 대한 무리한 1등 공신 책봉과 전란으로 선정된 공신임에도 갖은 이유를 들어 선무공신은 그 수를 줄인 반면, 자신을 호종하고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호성공신은 그 수가 선무공신의 4배 이상이 되는데 있다. 한마디로 자신과 함께 의주까지 도망친 관료들 위주로 공신을 책봉한 것.

원균을 1등으로 강제로 올리기 위해 선조가 한 발언을 보면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한 공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비록 도성을 버리고 도망은 쳤으나 결국에는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선조 자신 역시 똑같은 공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이른바 재조지은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호성공신(선조를 호송한 공을 세운 신하들, 그러니까 피난길 식구들)은 86명인데(내시가 25명이다), 선무공신(무장 혹은 대명 외교의 성과를 거둔 자)는 18명이다. 이 중에는 원균도 포함된다.

오죽했으면 이덕형은 본인이 호성공신이 되자 더러워서 못하겠다는 생각으로 호성공신을 거절했는데 진짜 임금 면전에서 저렇게 말하면 불경죄가 되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으므로 일본 및 명과의 외교 교섭 문제 때문에 선조의 곁을 떠나 있었던 시간이 길어서 본인은 임금을 충분히 모시지 못했다는 적당한 명분으로 둘러댔다. 이항복도 분개하긴 마찬가지였으나 이항복은 장인어른이 선무공신에서 제외당할까봐 호성공신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았다. 이렇듯 사람들 사이에서는 선조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되려 선무공신을 영광스럽게 생각한 반면 호성공신을 부끄럽게 생각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86]

3.5. 왕자 관리 실패

선조의 자식 농사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망했는데, 광해군과 어린애들을 제외하면 왕자들의 정신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단순히 능력이 부족하거나 부패한 정도가 아니라, 횡령, 폭행, 강간, 연쇄살인을 저질러 왕족만 아니었으면 즉시 목이 잘릴 수준의 흉악범들이었다. 순화군은 수원으로 귀양을 간 뒤 귀양지에서도 온갖 흉악한 짓을 저질러, 백성들과 지방관들이 도망을 가 수원이 허허벌판이 될 정도였다. 민란이 일어났거나 왜구가 침략한 것도 아닌데, 사람 하나 때문에 수원처럼 규모가 큰 고을이 망할 지경이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순화군의 범죄가 일 단위로 적혀 있으니 그 행패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하다. 임해군 같은 경우 순화군을 넘을 수준의 패악질을 벌여 신하들이 대놓고 죽이라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평시에는 물론 웬만한 전시에도 신하들이 왕에게 자식들을 죽이라고 하면 대역죄로 처벌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대놓고 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임해군의 패악질이 단순히 왕족이라는 이름으로 면죄를 받기엔 매우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왕족 중에서도 단연 최악의 인성을 가졌다 꼽을 수 있는 임해군, 순화군, 정원군이 모두 선조의 자식들인데, 선조는 죄를 저지른 자식들을 훈계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감싸고 돌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성격도 유전적 영향이 상당 부분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 역사상 손에 꼽힐 흉악한 망나니들이 한 대에 나온 것을 보면 선조의 왕자 교육 방식 수준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알 수 있다. 임해군 등 일부 왕자들이 저지른 만행은 임진왜란 때 항전하는 백성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쳤고, 결국 백성들이 임해군과 순화군을 일본군에게 넘겨버리는 반역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큰 처벌을 면했다. 일본군도 오죽했으면 임해군을 넘겨버린 조선 백성들을 멸시하거나 욕하기는 커녕 그럴 만했다며 이해했을 정도였다.[87] 이들 3인방에 묻히지만 늦둥이 아들인 흥안군, 경평군 또한 잦은 비행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그 중 경평군은 조카인 인조가 직접 실성했다고 할 정도였다.[88]

그나마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며 활약하여 대신들의 인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차남 광해군조차도 의심이 많고 권위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인물이 되어버려서, 정작 왕위에 오른 후에는 암군이자 폭군으로 흑화했다. 조선 왕 가운데 친국(親鞫)[89] 실행 기록 2위이라는 업적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90] 재위 시작부터 재위 내내 궁궐 공사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여 백성의 고혈을 심학게 쥐어짜고 민생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어 끝내 의심병과 궁궐병 때문에 참다 못한 신하들에게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망하기에 이르렀다.

재위 중반 들어 슬슬 후계자를 선정하자는 움직임[91]이 나왔는데, 서장자 임해군은 워낙 자질이 엉망이라서 차순위 광해군에게 시선이 쏠렸다. 왕조 국가에서 후계자 선정은 필연적으로 왕의 권위와 연결되는 문제라 전쟁 이전의 선조는 세자 선정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가 전쟁 이후에 도저히 책봉을 미룰 수 없게 되자 광해군을 책봉한다. 광해군은 세자로서 임무를 잘 해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이 사이 왕으로서의 권위가 심각하게 추락한 선조의 가장 큰 정적이 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선조의 이런 행적은 매우 부적절한 게, 광해군은 적장자가 아닐 뿐 엄연한 선조의 생물학적 자식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정적으로 삼을 일이 과연 몇이나 존재하는가?[92] 그나마 있는 사례를 꼽자면 형제가 많아 그 중 하나가 미리 선수를 쳐서 쿠데타를 벌여 아버지의 권력을 찬탈하고 경쟁자를 숙청하는 경우(태종)가 말이 되는 상황인데 형제들이 하나같이 변변찮은 광해군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이다. 영창대군 이전까지는 적장자가 없었던 상태였기에 광해군을 책봉한다고 해서 선조의 권위가 떨어질 리는 없었고, 본래 아들이 걸물이면 그렇게 키워낸 아버지의 권위도 올라간다. 선조 자신의 괴상한 감투 욕심, 관심병이 아니라면 광해군에게 힘을 실어줘도 선조는 전혀 손해볼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거기다가 광해군은 선조에게 불손하게 굴지도 않았고, 권력욕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던데다 세자로서의 능력이 없는 인간이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왕이 될 자질을 가진 인물이었다.[93]

때문에 정종이나 태종처럼 세자에게 양위를 하거나, 세종처럼 대리청정을 맡겨보거나, 아니면 다른 일반적인 왕들이 하는 것처럼 아들에게 신뢰를 보여주는 수준이면 족했다. 문제는 선조는 권력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는 왕인데다 질투심도 심했기에 권력을 끝까지 양보해 주지 않았고, 후계자인 광해군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티를 계속 내며 정신적으로 크게 압박했다는 것이다. 이는 선조의 비정상적인 자기애에서 기인하였으며, 쓰레기라는 말을 들어도 마땅한 자식들에게는 애정을 쏟았으나 조금이라도 자질을 보이는 자식은 자신의 라이벌로 보고 지나칠 정도로 냉정하게 굴었다. 결국 광해군을 몰아낼 명분은 없지만 견제는 해야 하는 불편한 관계를 10년 이상 지속해야 했다. 이 와중에 전쟁 직후인 1600년에 광해군의 큰 심리적 지지자인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광해군은 선조의 견제에 더욱 심리적으로 내몰리기만 했는데, 광해군을 다독이던 의인왕후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엄밀히 말하면 왕비 대우 정도만 하고[94] 인빈 김씨[95]만 총애하며 거의 홀대하다시피 해 스트레스를 준 남편 선조의 책임도 분명 있었다. 그리고 광해군은 의인왕후와 달리 성격도 정반대에 가깝고, 눈치 없고 철없는 행동으로 본인을 자극하는 계모 인목왕후를 더욱 미워하였고 이것은 광해군이 엇나가고 폐모살제를 저지르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처벌할 수 없다면 교육이라도 시켜야 한다. 아무리 왕족이 특별해도 왕의 자식이라고 못된 짓만 골라서 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다. 아무리 왕의 아들이라도 개망나니짓만 하고 다니면 백성들은 "왕이 저 모양이니 왕자도 이 모양이지!"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다. 게다가 그것을 넘어서 애당초 왕족이라 해서 뭐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왕족을 처벌하는데 신하들은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다. 즉, 왕족이라도 사고를 쳤다간 논란거리에 오르고 신하들이 처벌하라는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선조는 이것에도 제대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 이미 임진왜란 전부터 임해군, 순화군의 행동은 막장이었지만, 선조는 이를 단속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결국 임해군과 순화군이 일본군에 붙잡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선조는 그 후에도 이 둘을 방치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악행에 맞는 처벌은 차치하더라도 아들들에게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고 당부라도 해야 하건만 선조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임해군은 광해군 즉위 후 역모 혐의로 유배되었다가 죽었지만, 영창대군 때와는 달리 이항복이덕형 등 일부 이들이 은전론[96]을 펼친 걸 빼면 당파를 가리지 않다시피한 채 임해군을 처벌하라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순화군은 패악이 얼마나 지나쳤는지, 결국 선조도 더는 봐줄 수 없었고 신하들의 재촉에 못 이겨 순화군을 폐서인하여 가택 연금시켰다. 당대에 순화군의 악행이 어찌나 극심했는지 순화군한테서 아버지를 살린 자식이 효자로 인정받았을 정도였다. 게다가 임해군은 그래도 남의 재산을 뺏는 짓만 주로 했지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인 것은 아니었는데 순화군은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는 살인범이었다. 임해군조차 살인을 일삼는 순화군에게 질색하여 지나치다고 질책할 정도였다.

3.6. 말년의 인재 등용 실패

상기한대로 전란 전에 선조의 인재등용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권위가 떨어지고 욕심을 너무 부린 탓인지 나이가 들어 사람 보는 눈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인지 집권 후반기 인사에서 계속 실책을 저질렀다.

대표적인 예가 선조 말기 영의정을 독점했던 재상 유영경인데, 그는 선배들인 이산해, 이항복, 이덕형 등 명신들에 비해서 이렇다할 능력이 없고 왜란 중에도 보신주의적인 행태만 보이며 제대로 된 신하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윗사람의 심기를 잘 읽고 그걸 그대로 청하는 아첨꾼의 능력이 뛰어나서 줄을 잘 대고 승진하더니 북인 파벌의 영수에 영의정까지 올라간 것. 문제는 그 다음인데 당시 선조가 세자 광해군을 싫어하고 영창대군을 밀어주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노골적으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미는 정치적 도박수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광해군에 대한 선조와 조정의 압박이 심해졌다. 결국 유영경은 광해군의 원한을 사면서 그의 즉위 이후 자신의 업보를 그대로 돌려받는다. 유영경은 광해군 즉위 이후 대북의 탄핵을 받아 영의정 자리에서 쫒겨나 파직과 삭직을 거쳐 유배당한 다음, 끝내 광해군의 명으로 유배지에서 자결하고 시신마저 도로 끄집어내 부관참시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나중에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난 뒤에야 명예회복이 되었다.

그밖에 유영경을 비롯한 탁소북이 워낙 유영경의 거수기 체제다보니 "유영경당", 유당(柳黨)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질이 좋지 못한 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장악하는 등[97] 여러모로 건전하지 못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말년의 세자에 대한 견제 등을 볼때, 왜란 중에 끝도 없이 박살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친위 세력만을 조성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98]

계비인 인목왕후 또한 실패한 인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인목왕후는 흔한 "광해군 명군설"만큼 악랄한 여걸도 아니었고 역심을 품은 것도 아니었지만, 양반집 귀한 아가씨로 자라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라 눈치도 없었고 처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이미 왜란 당시 충분히 활약해서 세자로 확정된 것과 다름없는 광해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친자 영창대군이 벌써 세자가 된 양 설레발을 치며 궁중 법도를 어기고 영창대군을 세자처럼 차려입히는 위험한 실책을 저질렀다. 또한 인목왕후는 자신의 중궁전 소속 나인들이 광해군의 동궁 소속 나인들을 핍박하거나, 광해군 앞에서 방자하게 구는데도 이를 제어하지 못하며 측근관리에 있어서 무능한 모습만 보였다.[99] 인목왕후 본인도 광해군의 동궁 소속 나인 100명을 멋대로 데리고 가버리는 등, 수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도 치부에 힘을 써서 재물을 모으는데 열중하여 세간의 눈총을 사기도 했다. 결국 인목왕후도 광해군의 원한을 사고 그의 즉위 이후 보복을 정통으로 맞아 계축옥사로 아들 영창대군은 폐서인이 되어 유배지에서 비명횡사하고 아버지 김제남부터 형제들까지 싸그리 처형당해 친정이 멸문당하는 걸로도 모자라[100] 본인마저 딸 정명공주와 함께 비공식적으로 폐서인당해 서궁에 유폐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나 다시 대비로 복권될 때까지 생필품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도저히 일국의 대비라곤 상상치 못할만큼 극심한 생활고를 겪으며 온갖 고생을 하는 비극을 겪고만다. 이는 나중에 인조가 즉위한 뒤에도 변하지 않아서 딸 정명공주의 남편인 홍주원에게 어구마(왕만이 탈수 있는 말)까지 하사하는 등,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생각이 짧다고밖에 할 수 없는 행동을 자꾸 범했다.[101] 인목왕후의 간택에 선조 본인 의중이 상당히 반영된 전후 사정을 생각하면 모르긴 몰라도 외모가 선조의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별 고민도 없이 왕비로 간택되고만 것이 그녀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 때문인지 목릉카카오맵 리뷰 별점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102]

3.7. 치세의 핵심 업적이 부족하다는 견해

당대의 인선 사항과 관련해서 화담 학파의 박순, 허엽, 퇴계 학파의 류성룡, 김성일[103] 등은 물론 서인인 정철 등이 명종 대에 출사한 점을 들어 명종 대에 이미 사림계가 정국을 장악했고 선조는 그것을 이어받았을 뿐이라는 시각도 있고 명종 대에 비해 이렇다할 업적이 없다는 학계의 비판도 존재한다.[104] 직전을 폐지해[105] 국고를 통일시키고[106] 경국대전의 주석서[107]를 편찬하는[108][109] 등의[110][111] 입법실적[112]이 있었던 명종 대에 비해서 치세의 명군이니 하는 헛소리들이 나오는 전란 전에 25년간 확실히 제도적 개선이나[113] 그 밖에 관(官)이 주도하는 문화사업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할만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즉 25년간 그 인재를 가지고 장기적 관점에서 무슨 발전에 기여했느냐 하는 지적이다.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기의 한문학 융성이 있지 않았느냐고 할 수 있는데 그것에 선조가 기여한 부분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 명종 대에 사단칠정논변이 명종의 업적은 아니지 않은가? 민간주도라는 성격에서 정조 대에 문예부흥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여기에 있다.

일단 통치(내정) 면에서 보면 노비 인구 증가, 토지 잠식, 군역과 요역의 문란 같은 중종 대에 제기되고 이어진 민생문제에 대한 개혁담론들이 선조 대에 활발히 논의되었다.[114] 물론 선조 시기의 긍정적 면모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선조 시기의 긍정적 면모를 말한다면 조선은 건국 이후로 체제의 모순이 쌓여 와서 다양한 병폐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는데 선조 시기에 이에 대한 공론화가 점차 시작되었다. 특히 공납제도와 관련해서는 대동법프로토타입인 수미법(收米法)을 율곡 이이 같은 신하들이 제시하자 선조 또한 농업국의 한계에서는 적절한 정책이라며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본인의 한심한 추진력과 무원칙하고[115] 보신적인 행태로[116] 제대로 된 결실을 맺지도 못했으며[117][118] 문제는 논의가 점차 진행되면 될수록 당대에는 지주들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만 보이며 그 어떠한 진전도 없이 제자리걸음만 걸었다는 것이다.[119][120] 물론 전란 전에 논의되었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전란 중에 처음으로 공포하고[121] 했으나 얼마 못가 폐지되었다.

사실 이상한 말이 아닌 것이 선조에 대한 옹호론이 대중적 비난에 대한 반동에서 상당부분 비롯된 면이 있고 명확한 결과물이 없으니까 그 의도나 능력이 훌륭했다는 식의 변명으로만 대부분 점철된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당장 본 문서 선조(조선)/평가긍정적 평가만 봐도 이렇다할 업적이 있는가? 명군의 치세라 불리는 전란 전에 25년 그조차도 아니 그 시기야말로 조선 역사상 붕당정치가 가장 비효율적으로 작동된 시기였다. 성리학이 교조화 되고 붕당정치가 문제가 많았다고 흔히 일컬어지는 현종 대에 숙종 대에 그정도로 아무 결론도 못내리거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122] 같은 하나마나한 일을 하려다가 바로 백지화 되는 식의 지지부진한 시기가 반세기 가까이나 이어졌는가?[123] 그리고 여기에서야말로 선조라는 인간은 전란 전후 가릴것 없이 자기보신 외에 대체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가 의아할 정도로 군주로서 일관되게 보였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약간의 비판의식만 있었더라도 치세의 명군이니 하는 헛소리들은 애초에 나올 수 없었다.

3.8. 강약약강

선조의 인사는 자신이 정점임에도 불구하고 강약약강의 모습을 매우 강하게 보여왔다. 일례로 선조는 신립 하면 거의 껌뻑 죽는 모습을 많이 보여왔으며[124], 녹둔도의 일은 되려 이일의 목을 베어도[125] 말이 되는 상황인데도 이일은 커녕 만만한 하급군관이던 이순신이경록을 백의종군 시켰다. 다만, 이일은 선조에게 이순신이경록의 목을 베라고 했지만 선조는 적과 싸워 이긴 장수들의 목을 베는 게 얼척 없는 짓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이순신이경록을 죽이지는 않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에도 그저 명나라라고 하면 껌뻑 죽는 모습을 보여왔으며, 심지어 몽진을 가면서도 어떻게든 명나라 등 뒤로 숨을 궁리만 했다. 그나마 제4차 평양성 전투를 이겼기에 망정이지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으면 선조는 계속 한반도 밖으로 나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곽재우, 김덕령 등 의병장들을 잔인하게 조져서 결국 김덕령을 사망하게 했다. 결국 선조는 자신이 무서워하는 상대에게는 아예 납짝 엎드리는 반면 만만하게 보이는 상대는 잔인하게 찍어 눌렀다.

4. 논란

4.1. 선조의 온전치 못한 정신상태

선조가 유독 멘탈이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로, 그가 앓고 있던 심질, 현재로써는 조현병으로 추정되는 정신질환을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나는 본시 심질(心疾)이 있어 때 없이 발작하는데 지금 걱정과 병이 겹치고 있으며, 성격 또한 소졸(疏拙)하여 잡다한 일을 좋아하지 않은 지 오래이다. 그런데 어찌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하여 번거로이 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혹 나를 사랑한다면 제발 다시 거론하지 말라.
선조실록 22권, 선조 21년 5월 21일 계묘 1번째기사

나는 본디 불민한 사람으로 반생(半生)동안 신병을 지니고 있어 심질(心疾)이 더욱 심하기 때문에 평소 생각하는 것은 금궤(金櫃)속의 약일 뿐, 인사(人事)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 만약 여러 날 고집한다면 반드시 광질(狂疾)이 발작할 터이니, 이는 조정이 인군을 사랑하는 뜻이 아닐 것 같다. 제발 제경(諸卿)의 덕을 힘입어 일찍 물러나 쉬었으면 하니,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말라.
선조실록 22권, 선조 21년 윤6월 1일 임오 1번째기사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존호 올리는 일에 대해 재차 아뢰니, 답하기를,
"나에게 본시 심질(心疾)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정신이 혼미하고 기분이 좋지 않아 허리의 둘레가 점차 줄고 있는데 대신들은 어찌 가엾이 여길 줄 모르는가. 만약 해야 할 일을 하여 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수 있다면, 어찌하여 감히 그대로 따르지 않겠는가."
하였다.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12월 21일 갑오 3번째기사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선조의 정신건강은 임진왜란으로 벼락 끝까지 밀리면서 그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옛날 제(齊)나라에 맹인 재상 조정(祖珽)이 있었지만 어찌 맹인 임금이 있었는가. 거기다가 심질(心疾)이 날로 고질이 되어 불을 대하고도 춥다는 소리가 나오고 눈을 씹어도 오히려 열이 생긴다. 때로는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 달리며 혼미하여 동서를 구별하지 못해 좌우에서 모시는 자들이 모두 아연 실색을 하는데, 유독 경들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병 가운데 한 가지만 있어도 백성들 위에 군림할 수가 없는 것인데 더군다나 몇 가지가 겸해 있고 허다한 죄악을 지은 자이겠는가. 내가 하루를 더 왕위에 있으면 백성들이 하루를 더 걱정하게 된다.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8일 갑자 3번째기사

전에 여러번 나의 충정을 토로하였으나 다 시행이 안 되어, 밤에는 잠을 못 이루고 낮에는 먹지를 못하여 심병(心病)이 날로 심해지고 눈은 날로 어두워지니 기무(機務)에 관한 일을 감당하기 어려운 형세이다. 근래에 장소가 자주 올라오는데 어찌 채용할 만한 말이 없겠는가마는 ‘비변사에 내리라.’고만 하였다. 혼미하고 잘못됨이 이러하니 마음이 괴롭다.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23일 기묘 3번째기사

지난밤에는 심병이 더욱 위급하여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슬프게 울기도 하여 좌우(左右)의 사람들이 놀라와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옛날부터 이와 같은 임금이 있었던가? 일찍이 어떤 종류의 변고(變故)를 만났는데 나에게 심병이 없다고 여기는가?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 1월 29일 갑신 2번째기사

병세(病勢)가 날로 악화되어 깊이 고황(膏肓)에까지 들어가서 죽음에 임박하여 조석(朝夕)에 달려있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심질(心疾)이 더욱 심하여 이제는 미친 증세로 변하였으며 그 동안 놀라왔던 증상은 차마 다 말할 수가 없다. 무릇 미친 증세가 있는 사람은 약으로 다스릴 수가 없는 것이어서 반드시 인사(人事)를 사절하고 문을 닫고 홀로 있으면서 몸은 마른 나무처럼 되게 하고 마음은 불꺼진 재처럼 되게 한 지 10여 년 뒤에 가서야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증세를 끝내 다스릴 수가 없게 되어 갈수록 더욱 심해질 것인데, 더구나 서무(庶務)를 재결(裁決)하고 군기(軍機)를 책응(策應)하기를 기대하는 일이 이치에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민망하게 여기는 정사(情事)는 단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늘 생각하고 내일도 생각하고 이달에도 생각하고 다음 달에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반복하면서 생각해봐도 끝내 그대로 있을 수가 없다. 이대로 미루어 나가면서 즉시 결정짓고 물러가지 않는다면 뒷날의 일이 더욱 더 차마 말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속히 시행하도록 하고 다시는 번거롭히지 말라.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4일 을묘 2번째기사

한번 보고는 가슴이 뛰어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였다. 혼매한 나의 심사를 경은 아마 살필 수 있을 터인데도 오히려 이해해 주지 않으니, 다른 사람이야 말할게 뭐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두렵고 민망 절박하여 마치 돌아갈 데가 없는 곤궁한 사람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심병(心病)이 날이 갈수록 더욱 극심해지고 정신도 날이 갈수록 더욱 쇠모해지고 지려(志慮) 또한 날로 더욱 폐색해짐으로 인하여 일의 처리가 날로 더욱 전도되고 언어도 날로 더욱 착오를 일으키고 있다. 이와 같은 처지인데도 억지로 왕위에 무릅쓰고 있다는 것은 진실로 이렇게 해야 할 이치가 없는 일임은 물론, 사세를 참작하여 헤아리지 못하고 분개한 말만을 하고 있으니 망령됨이 더욱 심하다.
선조실록 51권, 선조 27년 5월 28일 을사 4번째기사

더욱 한없이 마음이 아파오며 답답하기 짝이 없는 속에서도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질병이 고황(膏肓)에 깊이 박혀 정신이 없어지고 단지 형체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제는 양쪽 귀가 완전히 먹었고 두 눈이 모두 어두워져 지척의 사이에서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없고 몇 줄의 글도 자획(字劃)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심병(心病)마저 생겨 날로 더욱 고질이 되어 하는 말이 잘못되기만 하고 하는 일도 어그러지기만 하여 혼망(昏妄)과 전도(顚倒)를 거듭하고 있으니 놀랍고 당황스럽다. 두 팔은 삼대처럼 뻣뻣하고 두 다리는 잘 펴지지 않아 사지(四肢)와 백체(百體)가 아프지 않은 데가 없는데 특히 가슴 속의 답답한 기운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있다.
죽을 날이 이미 가까와져 의술(醫術)이나 약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이러면서도 정무(政務)를 듣고 학문을 강론하고 온갖 기무(機務)를 수작(酬酢)하다니, 천하에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 때문에 하루 넘기기가 1년 같으며 낮이나 밤이나 눈물만 흘리므로 질병이 갈수록 더해지는데 그런데도 이 몸은 매여 있는 형편이다. 아, 예나 이제나 돌아갈 데가 없었던 궁한 사람을 말하자면 어찌 한이 있겠는가마는 나와 같은 사람이 어찌 다시 있었겠는가
선조실록 78권, 선조 29년 8월 27일 임술 1번째기사

상이 이르기를,
"나에게 민박(悶迫)한 일이 있다. 여러 병이 있는 가운데서도 담증(痰症)과 흉통(胸痛)이 더욱 심한데 금년 겨울 추위가 유별나서 흉통이 자주 일어나 머리를 내밀 수가 없다. 근일에 행례(行禮)하는 일로 인하여 자주 옷을 벗느라 조섭(調攝)을 잘못하여 감기에 걸렸다. 수일 전부터 흉통이 크게 일어나 아파서 울부짖느라 숨이 끊어질 것 같아 거의 살지 못할 지경이다가 크게 토(吐)하고 나서 겨우 면할 수 있었다. 몸이 나른하고 기운이 지탱할 수가 없는데 기무(機務)가 몰려들고 있다. 평소에도 좌수 우응(左酬右應)하다 보면 현기증이 나서 재결을 할 수가 없었는데 더군다나 병중이겠는가. 참으로 인생살이가 난감하다.
...
나의 수척한 병의 증상에 대해서는 중국 관원 역시 말을 했다. 만일 내가 먼저 죽으면 경들도 후회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나와 경들은 처음부터 사이가 없었는데 어찌 괴롭게도 편벽된 의논을 고집하여 나의 고민을 풀어주지 않으며 병을 구원하지 않는가. 장차 원통함을 품고 죽어 지하에서 서로 만나면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좋게 처리하라. 영접하고 위로하는 예(禮)를 대행하게 하는 것이 어찌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겠는가. 감히 적에게 봉작을 했다 해서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병세가 이러하므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만일 기운이 허하고 다리에 힘이 없어 허다한 읍양(揖讓)과 수작(酬酢)을 하는 즈음에 혹시 넘어져 실수라도 하면 중국인들에게 웃음을 살 것이니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다. 이상이 나의 고민이다. 그러나 이 일은 마땅히 아뢴 대로 행하겠다. 이 뜻을 함께 언급하는 바이다."
하였다.
선조실록 84권, 선조 30년 1월 6일 정유 5번째기사

지금 병 때문에 침상에 앓아 누워 있는데도 구름 쌓이듯이 많은 국가의 기무(機務)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응수(應酬)하느라 일각(一刻)도 쉴 수가 없다. 아, 병을 무릅쓰고 일을 한다 한들 나랏일에 있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몸만 손상시킬 뿐이다. 또 반드시 나라를 상망(喪亡)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대신들이 유의할 일이 아니겠는가. 심질(心疾)이 더욱 극심해져서 전광증(顚狂症)으로 크게 부르짖으며 인사(人事)를 살피지 못하니 곁에 있는 자들이 놀라 탄식하지 않은 이가 없다. 이는 심장이 먼저 상한 것이어서 상하지 않은 것이라곤 오직 한 줌의 기(氣)뿐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선조실록 97권, 선조 31년 2월 25일 경진 2번째기사

평소 심병(心病)이 있으므로 늘 눈을 감고 조용히 숨쉬어도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는 실정인데, 요즈음 계사(啓辭) 때문에 온갖 생각이 가슴속에 맺혀 낮에도 눈썹을 펴지 못하고 밤에도 눈을 붙이지 못하여 허리가 날로 가늘어져 황황하고 답답한 나머지 마치 경들에게 죄를 거듭 얻는 듯하니, 이것은 경들이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다.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오늘은 정계(停啓)할 것인가고 여겼다가 이윽고 계사가 다시 들어오면 그때마다 두려워 실의(失意)하고 심화(心火)가 끓어오르는데 오늘도 이러하고 내일도 이러하니 참으로 슬프다.
선조실록 177권, 선조 37년 8월 21일 기해 3번째기사

또 이르기를,
"나는 하나의 심병(心病)을 앓는 사람이다. 내가 말하면서도 말의 시비를 알 수 없다. 또 내가 일전에는 입으로 토설하지 못하여 벙어리 같았는데 오늘날 이 자리에서 경들과 함께 말할 줄을 예측하였겠는가."
하였다.
선조실록 193권, 선조 38년 11월 3일 계유 1번째기사

비망기로 시약청에 전교하였다.
"중풍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중풍에 가까운 것인가? 여러 가지 병 중에 심병(心病)이 극히 중한 것이다. 어제는 일의 까닭을 몰랐는데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부축하고서 조심스럽게 말하였으므로 놀라고 의혹하여 정신이 더욱 상하고 심기(心氣)가 더욱 크게 발하여 스스로 부지할 수가 없다. 알고서 약을 쓰는 것이 좋겠다.
선조실록 217권, 선조 40년 10월 11일 경오 2번째기사

비망기로 일렀다.
"나는 본디 질병이 많아서 평일에도 만기(萬機)의 정무는 절대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지금은 병에 걸린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조금도 차도가 없어 정신이 혼암하고 심병이 더욱 침중하다. 이러한데도 왕위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 세자 나이가 장성하였으니 고사에 의해 전위(傳位)해야 할 것이다. 만일 전위가 어렵다면 섭정(攝政)하는 것도 가하다. 군국(軍國)의 중대사는 이처럼 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속히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선조실록 217권, 선조 40년 10월 11일 경오 3번째기사

답하기를,
"이와 같이 하고서 조섭하고자 한다면 이는 먹기를 거절하면서 살기를 구하는 것과 같으니 가련키 그지없다. 그러던 중에 심병이 갑자기 발작하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몹시 민망스럽다. 오직 이 일념뿐 그밖에 다른 생각은 없다."
하였다.
선조실록 217권, 선조 40년 10월 11일 경오 4번째기사
특히 선조는 심질을 이유로 여러 번 양위 소동을 벌였다. 하지만 후세의 해석도 선조의 양위 소동을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 쓴다고 해석할 정도인데, 당시의 대신들은 오죽할까? 대신들은 '이제 민망하고 답답합니다'라고 대놓고 일축할 정도였다.[126] 그럼에도 결국에는 심질이 심해져 실어증에 걸리거나 새벽에 쓰러지기도 하는 등 실제로 선조의 정신질환이 심했으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납득이 갈 것이다.

4.2. 선조와 이순신

전라좌수사 시절까지만 해도 이순신과 조선군에게 선조는 은인이었다. 그것도 난중일기에 임진년 공 정도르는 선조에 대한 은혜를 다 갚기에는 부족하다고 쓰여있을 정도다. 선조는 의외로 국방 및 군사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 지식도 제법 갖춘 임금이었다. 우선 '북쪽 변방에서 오랑캐가 중요한 농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니 해당 책임자인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을 징계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탄원서가 두 사람의 상관이었던 이일에 의해 올라온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 10월 16일 신미 1번째기사
이는 이전에 여진족 침입 당시 전장에서 도주한 죄목에 대해 현장에서 참수하라는 왕명이 내려졌고 그 사례의 예에 해당하지 않으니 사형은 안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이순신이경록은 삭직 및 백의종군 처분에 처해졌다. 이후 1589년에 하삼도 병사 및 수사 선발에 대해 비변사에서 올라온 목록에서도 확인된다.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서득운을 전라 병사로, 이혼을 우수사로, 신할을 경상 좌수사로, 조경을 제주 목사로 삼고자 한다. 이옥과 이경은 본처(本處)를 고수해야 하고 이빈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으니 경솔히 수용(收用)할 수 없다. 또 이경록(李慶祿)·이순신(李舜臣)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議啓)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7월 28일 계유 1번째기사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선조실록 25권, 선조 24년 2월 16일 계미 2번째기사
전라좌수사 임명엔 당시 진급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이유로 사간원에서 체차(遞差)[127]를 청하자 감싸주기도 했다. 위의 이야기대로 평화로웠던 시절엔 원균을 쫒아내고 이순신을 앉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을 보는 눈이 아주 날카로웠음을 알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원균은 후에 경상우수사로 다시 부임했기 때문이다.[128] 선조는 원균도 상당히 높게 평가했기 때문에 아마 이순신과 함께 왜군들이 침공해올 바다를 방어하게 시킬 생각으로 자신이 신뢰하는 두 인물을 수군에 앉혔을 것이다. 자기 딴에는 투톱으로 생각한 셈. 선조가 야심차게 그려낸 이 큰 그림은 훗날 절반만이 옳았음이 아주 참혹하게 드러난다. 아무튼, 해당 사간원의 말을 선조가 씹어버린 후 이틀 후 다시 사간원에서 이순신을 쫒아내라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체차시키소서. 나주(羅州)는 남쪽의 거진(巨鎭)으로 본시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이름난 곳인데 변경(邊境)에 일이 생기면 원수(元帥)는 영(營)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웃 고을 수령과 본주(本州)의 판관들이 모두 무변(武弁)인 만큼 군대를 이끌고 적을 방어하는 데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할 것 없습니다. 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체차하고 재략이 있는 문관을 각별히 골라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 나주 목사는 천천히 발락(發落)하겠다."
하였다.
선조실록 25권, 선조 24년 2월 18일 을유 1번째기사
이리저리 길게 말을 늘어놓으면서 이순신을 끌어내리라고 아우성치는 사간원의 상소를 일축하면서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깊은 신임을 보였다. 선조는 종친도 아니고 나라에 명망높은 사대부도 아니었던 이순신을 사간원이 경악할 정도로 엄청나게 빠르게 승진시켰는데 당시 이순신의 벼슬의 변동을 살펴보자면 이렇다.

현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수로 승진했으니 짐싸서 부임할 준비를 하라는 교지가 와서 준비를 하고 있었더니 다시 첨절제사로 승진했다는 교지를 받아서 읽고 있을 무렵에 다시 전라좌수사로 임명하겠다는 교지가 날아온 것이었다. 수군절도사는 정3품으로서 당상관에 드는 직책이었고 타인으로부터 영감으로 불리며 존대받는 위치였다.[129] 종6품으로서 지방의 현감에 불과했던 이순신이 품계로 무려 9단계를 2년만에 건너뛰어 전라도 수군의 절반을 다스리는 수군절도사로 초고속 승진한 것이다. 사간원이 이순신을 시기하거나 능력을 낮잡아 봐서 상소를 올린 것은 아니었고 조선사에 유례가 없는 고속 승진이라 우려의 여지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었다. 선조의 강력한 후원이 없었다면, 이순신은 임진왜란 개전까지 지휘권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초반까지만 해도 선조는 이순신이 승리할 때마다 승진시켜주기 바빴다.[130] 그도 그럴 것이 전란 발발 후 육지에서는 번번한 승전이 없는 반면 바다에서는 자신이 특별히 발탁한 이순신이 싸우는 족족 대승을 거두니 의주까지 도망가 있는 선조 입장에선 이순신의 승전 장계가 반가울 수 밖에 없다. 선조는 당시 속속 날아오는 이순신의 승전보와 왜군의 수급을 보고 뛸듯이 기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직접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고 치하하라는 명을 많이 내렸다.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李舜臣)은 밖에서 의논하기를 어떠한 사람이라고들 하는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쓸 만한 장수입니다. 원균(元均)으로 말하면 병폐가 있기는 하나 몸가짐이 청백하고 용력(勇力)으로 선전(善戰)하는 점도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 동궁(東宮)이 남으로 내려갔을 때에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불러도 오지 않았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원균이 당초에 사람을 시켜 이순신을 불렀으나 이순신이 오지 않자 원균은 통곡을 하였다 합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군사를 청하여 성공하였는데, 도리어 공이 순신보다 위에 있게 되자, 두 장수 사이가 서로 벌어졌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의 사람됨으로 볼 때 결국 성공할 수 있는 자인가? 어떠할는지 모르겠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알 수 없습니다마는, 장사(將士)들은 이순신이 조용하고 중도에 맞는다 합니다. 그러나 지금 거제(巨濟)의 진(鎭)에는 원균을 보내야 하니, 거제를 지키는 일이라면 이 사람이 아니고 누가 하겠습니까."
하였다.
선조실록 76권, 선조 29년 6월 26일 임술 2번째기사

상이 이르기를,
"통제사 이순신은 힘써 종사하고 있던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그 사람은 미욱스럽지 않아 힘써 종사하고 있을 뿐더러 한산도(閑山島)에는 군량이 많이 쌓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는 왜적들을 부지런히 사로잡았다던데, 그후에 들으니 태만한 마음이 없지 않다 하였다. 사람 됨됨이가 어떠하던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많은 장수들 가운데 가장 쟁쟁한 자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전쟁을 치르는 동안 처음과는 달리 태만하였다는 일에 대해서는 신이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절제(節制)할 만한 재질이 있던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생각으로는 경상도에 있는 많은 장수들 가운데 순신이 제일 훌륭하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81권, 선조 29년 10월 5일 무진 1번째기사
그러나 이순신의 명성이 너무 올라가버린 임진왜란 중반에 가면 선조가 이순신을 정말 싫어한 것이 확실하다.[131] 파직 건에 대해서는 누가 봐도 무리인 게 뻔히 보이는 데도 잡아온 후 임금과 조정을 기만했다고 고문[132]을 한 것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결국 백의종군으로 끝나긴 했지만 이원익정탁이 총대 메고 나서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있어났을지는 상상에 맡긴다.[133] 여기서 신하들도 이순신 조지기에 반대하지 않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선조가 대놓고 "얘 잘못 없는건 지나가는 개도 알지만 내 마음에 안들어. 이새끼 조질건데, 반대하는 놈은 같이 조져지고 싶은 놈으로 알거임" 수준으로 밀어붙여서였다. 물론 이원익정탁이 나섰을 때 이순신을 백의종군하게 하고 이 둘에게도 뭐라 안한걸 보면 정말 그랬을 리는 없었겠지만 그럴거라는 분위기 정도는 조성되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전사했을때 선조의 반응도 가관인데 이순신의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전해들은 선조는 무덤덤하게 뒷일은 내일 비변사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답해 소식을 전하는 신하가 도리어 놀랐다는 반응이 적혀있다. 이런 경향은 그 뒤에도 이어져 이순신은 장례 문제에 관해 예조가 알아서 처리하라거나 # 차례 순서가 구애 받지 않는 상황임에도 등자룡의 장례를 먼저 치루겠다고 짧고 냉담하게 반응한다. # 그것도 비변사에서 충의를 지닌 명장 그 자체였던 이순신의 장례에 대해 강조한 상태임에도 이런다. # 훗날 도독인 유정이나 여러 명나라 장수와 선조를 마주할때 이순신과 같은 이들이 나라를 위해 몸바친 것이 안타깝다고 말하거나 이순신은 충신이라고 말하는 등 한마디씩 그에대한 말을 하는데 ### 그때마다 말을 넘겨 짚는다.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구국의 영웅이 죽었는데 보인 반응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차가운 반응이였다.

즉 선조가 이순신에 냉대한 것은 왕정 체제의 운영자인 군왕으로서 난세의 유력 무신인 이순신을 경계한 것이 컸겠지만, 개인적인 시기, 질투, 열등감 등도 많이 들어갔다고 봐야할 것이다. 정적으로서 이순신을 경계하는 것은 이순신이 살아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전사한 이상 그 후광과 세력을 그대로 이어받을 후계자가 있는게 아니라면 더 이상 견제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적으로서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경계는 이순신이 전선에서 선조의 출격명령을 여러번 어기자 선조는 '무신이 조정을 가벼이 여기는 풍습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발언과 함께 이순신에 대한 징벌을 행했던 것으로 볼 때, 조선 왕국 자체가 전쟁영웅인 이성계가 건국한 국가이자 문치주의 왕국인만큼, 제2의 전쟁영웅의 출현과 무신정권의 탄생을 경계하는 전통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위기상황에서 이를 안가리고 숙청을 시도한 결과 칠천량 해전이라는 임란 최대의 비극을 초래했기에 아무리 옹호적으로 봐줘도 근시안적이라는 비난은 피하기 어렵다.[134]

다만 이순신 스스로 의심을 자초한 것도 있긴 하다. 여기다 이일과의 마찰, 온갖 모함과 백의종군을 여러번 거친것만 봐도 이순신 개인의 정치력은 0% 가깝다. 굳이 이순신이 아니더라도 사심 없이 그저 본분에만 충실하고 높은 명성에 비해 스스로를 변호할 수단은 하나도 마련해 두지 않는 명장들은 내쳐지거나 죽는일이 많았다. 이순신도 그런 케이스 인 것이다. 이순신이란 구국의 영웅에게는 안타깝지만 만일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더라도 이후 여러 공신들이 조정을 떠나버린 것을 생각하면 가장 큰 명성을 차지한 이순신에 대한 견제는 어느정도 예상되는 일이 었다.

그럼에도 선조는 일본군이 아직 부산포에 진을 친 상황에서 개인적인 감정, 근시안적인 판단 하에 권력 조차 없는 이순신을 무작정 밟으려 들었다. 이런 결정은 이순신이 충성의 상징이 된 후대에 들어서 선조가 두고두고 악평을 듣는데 가장 큰 일조를 하고 말았다. 견제의 수단이라도 잘 정했다면 좋았겠지만 선조의 인격적 그릇은 작았고, 가장 거대한 공헌과 승전보를 안겨주며 나라를 구한 신하에게 할만한 견제라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수단을 선택하고 말았다. 물론 자기말을 잘따라줄것 같은 원균이 제2의 이순신이 되어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저지른 도박이었겠지만 원균은 그저 전공 가로채기에 열심히인 공갈빵과 다름없는 인물이었고 결국 칠천량 해전 대패로 이어짐과 동시에 국가의 전운이 통째로 뒤집혀 엎어질 정도로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정부차원에서 견제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견제의 의도가 어찌됐든 그 결과가 칠천량 해전이라는, 희대의 대패전이라는 점에 그 의도조차 타당하다고 평가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를 이해하는 것과 그것이 이해할만 한 일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고 상식적으로도 가장 거대한 전과를 올린 장수라면 견제를 하더라도 일단 상황이 수틀리면 바로 다시 원상복귀시킬 수 있도록 선을 맞추고 견제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당시 선조는 무정부 상태고 뭐고 국가 자체의 존망이 걸린 상황임에도, 국가가 전복되면 정부고 뭐고 없는데도 본인의 자존심을 우선한 것이다.

4.3. 방계승통 열등감 낭설

선조에 대해 방계 출신으로 즉위한 것이라 정통성 문제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꼈다는 주장이 대중에게 몇년 전부터 널리 퍼져있는 상태다. 그러나 이는 유교 종법과 조선 왕실에 이해가 부족해서 나온 주장이다. 종법을 안다면 선조의 정통성은 결코 문제가 있거나 컴플렉스를 느낄 상태라고 보기 어렵다. 요지부터 언급하자면, 조선 중기 당시의 예법(법리적)으로나 풍토상(문화/도덕적)으로나 선조의 정통성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명종에게 정통성 있는 아들이 있었다면 또 모르겠는데, 애당초 명종의 후계자인 순회세자는 일찍 죽었기에 명종이 죽으면 유교 예법상 아래 항렬의 조카들 중에서 후계자를 고르는게 당연했다.

명종이 설령 직접 지명하지 않고 갑자기 죽었어도 왕실 여성 웃어른과 대신들이 상의해서 명종의 조카 중에 가장 적합해 보이는 사람 한 명을 골라 왕위를 물려주는게 당연한 절차인데, 심지어 선조는 명종이 죽기 전에 이미 낙점을 받은 상태였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명종은 사망하기 2년 전에도 한번 심하게 병을 앓고 사경을 해맨 적이 있는데, 이때 이미 명종이 죽을 가능성을 걱정한 신하들이 조카들 중에서 한 명을 후계자감으로 정해두라고 에둘러 권했기에 명종 본인이 직접 조카들 중에 하성군으로 골라서 자신의 병수발을 들게했다. 자기가 급사하는 돌발 상황이 일어날 경우에는 하성군이 사실상의 후계자라고 인정한 것이다. 다만 이때는 명종이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났고, 아직 젊은 자기가 직접 아들을 낳아서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는지[135] 하성군을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고 사저로 돌려보냈기에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2년 뒤 명종이 다시 병으로 급사하자 명종의 정실 왕비인 인순왕후가 직접, 추가로 회의할 필요도 없이 이미 2년전에 명종 본인이 점지했던 하성군을 불러 바로 명종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명종이 직접 명시적으로 정식 후계자로까지 인정하지는 않은 것이 선조 입장에서 약간의 아쉬운 점일 뿐 절차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조선의 왕실 법도에 따르면 혈연 관계보다 종법 계통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선조의 종법상 아버지는 엄연히 명종이었다. 양자로 입적된 이상 생부는 친척에 해당하며 덕흥군은 신하의 지위에 머물렀기 때문에 따라서 선조는 추숭은 커녕 덕흥대원군의 제사에 절도 할 수 없었다. 즉위 초에 덕흥군 봉사손(자신의 큰형 하원군)을 1품 세습으로 하려다 신하들 반대로 무산되고 한참 지난 즉위 39년차에 잠깐 얘기만 나왔던 게 전부였다.[136] 혈연 관계로만 따져도 중종의 7남인 덕흥대원군의 3남인 선조는 중종의 차남 명종과는 삼촌과 조카 사이로 매우 가까운 촌수다. 혈통상 멀기 때문에 열등감을 가져야 한다면 이후 국왕들 중에선 훨씬 더 먼 사람들도 많았다.[137]

서자를 차기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자기의 생부를 적극적으로 추숭하려 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적자가 아니라서 열등감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 왕실은 사대부와 달라서 서자라도 문제 없이 승통이 가능했고,[138] 따라서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적자로 입적하는 상식이었기 때문에 서자나 서손 출신이라서 열등감을 느낄 일이 없었다. 열등감을 느끼려면 선조보다 종법질서상 앞서는 대체 왕실 후손이 있어야 하나, 당시 명종의 친조카 하성군이던 선조보다 앞서는 순위의 후보자는 없었기 때문이다.[139] 즉위 초반에 그 흔한 역모 사건도 찾아볼 수 없다. 정통성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려면 쿠데타로 왕이 된 세조, 중종, 인조 같은 케이스에나 해당된다.[140]

51세 때 19세의 인목왕후를 계비로 들이고 영창대군을 총애한 걸 방계 콤플렉스의 증거라 주장도 있는데 내명부 수장인 왕비가 죽으면 새로 왕비를 간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종 이후의 왕들은 모두 그렇게 했다.[141][142] 외려 그렇게 하지 않은 문종은 결국 계유정난 당시 단종의 보호자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143] 새 왕비 간택은 일종의 보험이다.[144] 또한 이때 이미 선조는 광해군을 적대시하고 있었으므로, 계비를 들여 적자를 세자로 삼으려 한 것은 딱히 방계로서의 콤플렉스가 아니라 그저 광해군을 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왕위를 넘기기 싫어했을 뿐이라고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선조는 그 혈통적 명분 때문에 역모가 일어난 적도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선조가 임진왜란 몽진길에 올라 호종하는 군사들의 수가 적었음에도, 이보다 훨씬 강한 군사력을 지닌 장수들과 의병장들도 감히 왕권에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왕권이 강력했다. 이는 물리적 무력을 압도하는 그 어떤 정신적 사상이 당시 조선 지배층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145][146] 혹자들이 선조가 정통성 컴플렉스를 가진 증거라고 주장하는 임진왜란 중에 선조가 보인 의심병이나 불안 증세 같은 건, 정통성 컴플렉스 때문이 아니고 그냥 선조의 성격 자체가 그런 사람인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더 적절하다.

[1] 선조에게 발탁되기 전에 이순신은 만호 직을 두 번 역임했는데 한 번은 전라좌도수영 휘하 발포 만호, 다른 한번은 함경도 북병영 휘하 조산보 만호였다. 정3품인 전라좌수사로 임명되기 전까지는 종4품 이상의 직책을 역임한 적이 없었으며 조산보 만호에서 파직되고 백의종군을 마친 이후에는 한직을 전전하고 있었다.[2] 당해 5월에 설치된 선혜청은 광해군의 이 비망기로부터 직접적인 설립 배경을 찾을 수 있다....기사의 밑줄 친 부분에서처럼 각 읍의 해묵은 포흠과 긴급하지 않은 공물 등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서 ‘하나의 국’을 별도로 설치하는 방안은 이원익의 차자에서 나온 것이나, 그 논의의 발단이 된 것은 광해군의 비망기였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8-9)[3] 선혜청은 공물을 ‘作米’하던 관행을 공식화하여 운영함으로써 외방에서 그때그때 차출해 쓰던 현물과 노동력이 서서히 대동세 안에 수렴되기 시작하였다....이처럼 경기선혜법은 17세기 전반 당면한 재정현안을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되었으며, 경기선혜법을 시행을 통해 정해진 원칙, 즉 공물을 일관된 기준의 대동세로 거두고, 민역 동원을 給價체제로 전환하는 방식은 이후 중앙의 재정구조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29)[4] 참고로 선조 대에 그나마 꼽을 수 있는 문화사업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편찬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중단되고 대부분이[147] 광해군 초에 허준이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 받아서[148][149] 작성되고 완성되어[150] 간행되었기에[151] 일반적으로 허준의 개인저작이거나 광해군의 전후복구 내역 중 하나로 간주된다.[5] 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당장에 조선이 '자국이 침공을 당하는' 전쟁 대비에 미흡했다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타국을 침공하는' 전쟁에는 더 어려울 수 밖에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이 할 수 있는 것은 전쟁 준비밖에는 없다. 태종 때 대마도를 정벌했는데 그 후에 재정벌을 하지도 않았고 태종 생전에는 다음에는 10만 대군으로 초토화시켜버리겠다는 등 열심히 협박만 했다. 물론 협박은 잘 먹히기는 했다. 대마도도 조선의 공격이 현실이 되는 것에 기겁했고 마침 중국에서도 왜구를 작살을 내버려 깨갱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계해약조를 맺어 문제를 종결시켰다.[6] 징비록을 비롯한 현대 사극에서는 조정이 했던 전쟁 준비는 일부러 무시하면서 백성들과 지역 양반들의 안보 불감증에는 너무 쉽게 면죄부를 주기에 모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선조를 비롯한 조정에서는 전쟁 준비를 할 만큼은 했다. 진짜 문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상식을 무시한 엄청난 규모의 침공을 너무나도 빠르게 감행했던 것 단 하나 뿐이었다.[7] 동아시아 역사상 10년 만에 요와 송 두개의 제국을 무너뜨렸던 금나라가 그나마 예외지만 이것은 금나라가 유목 제국으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 대부분은 일단 몇 년씩 준비를 했다.[8] 이 급박한 전쟁 준비는 당연히 상당한 민심 이반을 불러왔는데 조선 남도 민심이 굉장히 흉흉해져셔 경상감사 김수는 지역유림과 크게 부딪쳐서 뒷날 곽재우가 그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소리치는 지경이었고 김수는 역으로 곽재우가 위험한 놈이라고 조정에 보고하는 판이었다. 이광이 파견된 전라도에서는 개전 직후 왜적에 맞서야 할 군병들이 소요사태를 일으켜 관리를 공격하고 성을 점거하는 바람에 왜군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전에 이들부터 진압해야 했다.[9] 다만 원균이 초기에 자기 휘하의 함대로 일본군 저지를 막지 않고 육지로 도주해 버린 것이 큰 오점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상우수영은 조선 수군 중에서 최대 규모였기에 원균이 나가 싸워서 지더라도 상당한 피해를 입혀줬을 것이고 이겼다면 우리가 오늘날 임진왜란 때에 찬양하는 영웅으로 이순신, 권율 그리고 원균을 꼽았을지도 모른다. 이 경우 원균이 적을 이긴 후 "얘네들 막 병력 몰고 쳐들어 오는데요?" 라고 알리면 조정에서는 미리 짜놓은 메뉴얼에 따라 병력을 진격 루트가 될 경상도의 병력들을 제승방략에 따라 모아놓았을 것이고 더 좋은 점은 원균이 적을 막고 있었으니까 조정에서는 한결 여유가 있어서 상주 전투와 같은 어이없는 졸전은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도 병사는 다 흩어지고 어제까지 농민이던 사람들로 싸우는 일까지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152][10] 결국 군량도 뜯고 공물도 또 뜯는 식으로[153]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애초에 군량 자체도 못 모았다.[154] 사기를 치려다 제대로 치지도 못한 셈이다.[11] 사간원에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양전(量田)하는 일이다. 】 (선조 34년 2월 28일)[12] 언급된 정황이 불분명하고 이후[155][156] 십 년 이상[157] 관측되는 세수 증가분이 없기에 결수 증가분에 논란이 있다.[13] 12) 오인택은 임란 직전 결총을 300,000만결로, 癸卯量田(1603)의 결총을 광해군 3년(1611)에 집계된 삼남의 結總數 542,000여결로 파악하였다.(오인택, 1995, 朝鮮後期 癸卯·甲戌量田의 推移와 性格 역사와 세계 19, 345쪽 참조) 이는 광해군대 호조판서 황신이 추계한 결총수로 판단되며 이것이 증보문헌비고에 그대로 반영된 듯하다. (增補文獻備考 권148, 田賦攷 八) 다만 이 결총수는 삼도가 아닌 8도에 걸친 전결수이다. 또한 황신은 계묘양전 당시 田品이 낮게 책정되어 결수 산정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당대의 전결수를 자신이 직접 산출하였다. 따라서 이 542,000여결을 계묘양전의 결총수로 직결시키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황신이 산출한 결총수에 대해서는 아래 각주[158]를 참고하라.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6-7)[14] 평소에 전라도는 44만 결(結)이었는데, 난리 후에는 절반쯤 경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보고한 바는 6만 결 뿐이니, 나라에서 손실보는 것이 그 얼마이겠습니까. 다른 도 역시 이런 식이라면 국용(國用)이 어찌 넉넉하겠습니까....인구수는 평시에 비해 겨우 10분의 1입니다. 그런데 평시에는 사족(士族)만 전장(田庄)을 소유하고 백성들은 모두 없어 다 함께 아울러 갈아 먹었는데, 난리 후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경작하기 때문에 개간(開墾)한 것은 평시에 비해 크게 감소되지 않았으나, 전제(田制)가 이와 같으므로 잔약한 백성들만 유독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결(田結)의 숫자는, 전라도가 40여 만 결, 경상도가 30여 만 결, 충청도가 27만 결인데, 근세 이래로 잇따라 하지하(下之下)로 세를 받아들여 비록 평시라 해도 세입이 겨우 20만 석이어서 국초에 비하면 절반이 줄어든 것입니다. 그런데 난후에 팔도의 전결이 겨우 30여 만 결로, 평시 전라도 한 도에도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 나라의 모양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 양전(量田)하는 한 가지 일은 반드시 큰 어려움을 물리치고 실행한 연후에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폐단 또한 많을 것이나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선조 34년 8월 13일)[15] 호조가 아뢰기를, "경상 좌우도의 전결이 임진 왜란 전에는 40여만 결이었는데, 계묘년046)(註 046)(계묘년 : 1603 선조 36년.) 에 양전해 보니 단지 4만 3천 4백 결이었습니다. 그런데 본조에는 평상시의 전적(田籍)을 증빙할 만한 자료가 없습니다. 이번에 양전할 때 본도로 하여금 따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평상시 시행한 장부에 ‘어느 지방은 원전(元田) 몇 결에 측량한 결수는 얼마이다.’라는 내용을 명백하게 치계하도록 하여 증빙하고 상고하여 처치하는 자료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인조 1년 8월 4일)[16] 난리를 겪은 후 국가의 재용(財用)이 제모양을 갖추지 못하자, 지난 을사 연간에 비로소 공안(貢案)을 상정(詳定)하였으나 세입(歲入)이 평소에 비해 10분의 2, 3도 못되었습니다. (광해 3년 7월 20일)[17] 5년이 지나서 대체되었다.[159] 지속가능성이 없는 감세정책의 사례라고 해야할 것이다.[18] 임진왜란 이후 절수 관행은 더욱 확대되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중의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 왕자와 공주에게 어전(漁箭)·염분(鹽盆)·시지(柴地) 등을 임시변통으로 떼 주었는데, 이를 절수로 표현하였다. 이후 이를 선례로 하여 왕실과 왕족에 대한 궁방전 절수가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궁방전은 일명 궁장토(宮庄土)·사궁장토(司宮庄土)라고도 하였다. 조선후기에 후비·왕자대군·왕자군·공주·옹주 등의 궁방에서 소유하거나 또는 수조권(收租權)을 가진 토지이다. 이는 궁방의 소요 경비와 그들이 죽은 뒤 제사를 받드는 명목으로 지급되었다. 절수(折受)[19] 임진왜란 이후 각 궁방은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주인 없는 진황지와 한광지를 입안절수(立案折受)의 방식으로 불하를 받아 개간하였다. 즉, 정부가 각 궁방의 청원을 받아들여 주인 없는 토지를 떼 주어 개간하여 소유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 절수는 궁방에 토지소유권을 부여한 것이지만, 정부가 수조지(收租地)를 궁방에 할급하여 절수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정부가 가졌던 일반 민전의 수조권을 궁방에 양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형성된 조선후기의 궁방전이 이른바 무토면세전이었다. 궁방전 절수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민전 침탈 등 여러 문제점이 생겨났고, 정부 재정에도 점차 부담을 주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궁방전을 혁파하지는 못하고 더 이상 절수하지 않고 축소하는 수준에서 정리되었다. 그 결과가 『속대전』의 결수 제한으로 나타났다. 절수(折受)[20] 선조 임금과 조총(鳥銃)[21] 선조의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그의 인품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내용이다.[22] 위의 문장을 쉽게 해석하자면 명에서 온 경리인 양호에게 선조가 아부를 떨며 왜군을 무찌른 공적이 이순신과 같은 관군들과 의병들에게 있는데 엉뚱하게 그 공을 양호 덕분이라고 말한 것과 양호가 이순신이 명량 해전의 승리를 축하해 주기 위해서 백금과 각종 고급품들을 보내주었는데 선조는 그것이 원래 장수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짓인데 왜 보냈냐고 따진 것이다. 즉 외국 신하도 칭찬해주는 자국의 성웅을 왕이라는 사람이 "그냥 자기가 할 일을 한 것뿐이지 뭐 대단한 거라고"라며 보잘것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린 것이다. 오히려 양호가 이에 맞서 이순신을 감싸주어 "아니, 칠천량 해전 때문에 작살나버린 조선 수군을 다시 통합하고 적은 수의 함선으로 왜군들을 무찔러 나라를 구한 그런 충신에게 왜 그런 말을 하시오?"라고 따졌다. 명량해전 항목을 보면 양호는 이순신과 직접 만나고 싶었으나 돌아갈 길이 멀어 어쩔 수 없이 소소한 답례로 보내는 물건들이라도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편지를 쓰고 갔다.[23] 장수와 병졸을 아울러 이르는 말[24] 요약해서, 이번 전쟁이 이긴 것은 모두 명나라의 덕분이고 우리나라는 한 일이 별로 없다. 그리고 그 명나라가 우릴 도와준 이유는 나와 함께 중국에 가서 명에게 호소한 대신들 덕분이기에 일본도 토벌하고 땅도 회복한 것이다.라는 말이다! 목숨바쳐 싸운 자국군들의 희생정신과 공적을 폄하하는 말이다.[25] 그야말로 개소리로 자신의 조상인 이성계 부터 원나라와 명나라에도 무시무시하다는 평가를 받은 무패의 장수다. 거기다 태조이래 15~16세기 조선군은 여진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귀화한 여진족인 동청례(童淸禮)가 조선의 강성함을 금나라[160]에 비유하며 다른 여진족들을 회유했던 기록도 있다.[161] 이렇기에 임진왜란 전만해도 중국인이 조선을 두려워한다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도 있으며 옛 고구려, 고려의 명성과 여진족과의 전투의 성과까지 임진왜란 직전 명나라에서 조선의 인식은 강군이었다.[26] 명나라에서 조선의 위상이 추락하게 된 이유인 임진왜란 초반 조선의 고전도 알고 보면 왜군이 너무 강한 것이지 조선이 약한게 아닌 것이 당장 명나라군도 왜군을 상대로 벽제관 전투,사천성 전투등에서 크게 패했다.[27] 근데 고려도 카다안의 침입당시 쿠빌라이한테 "당태종도 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는가?" 라고 디스당한적이 있으며 이를 보면 무작정 고려가 왜란시기 조선보다 국방에서 더 나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멸망하지 않았다 뿐이지 어쨌거나 몽골에 굴복한 건 사실이고 그 몽골을 상대로 치열한 전쟁을 치르느라 국력이 쇠하고 전 국토가 초토화되는, 문자 그대로 나라의 이름만 내걸려있는 상황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시기와 비교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애초에 무신정권여몽전쟁으로 나라가 개판된게 고려의 자업자득이니 이걸로 고려를 쉴드하는건 어불성설이다.[28] 근데 이것은 당대 조선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동시기 명나라도 1억이 넘는 인구와 장부상 300만 병력이 무색하게 실질 동원가능병력은 50만에 이마저도 질적으로 좋지 못한 병력이 태반이었는데 이에 비하면 임진왜란 직후 전국토가 황폐화 되었음에도 자체적으로 수천의 기병으로 여진정벌을 나갈 여력이 있던 당대 조선의 인구대비 병력동원은 대단한 것이다.[29] 정작 이 시기 조선군도 군소 여진 부락들을 상대로는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했다. 여기서 조선군은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30] 즉 변경의 군사거점.[31] 정작 일본에서 포로 생활을 한 강항간양록에는 당시 일본인들마저“조선은 진실로 낙국(樂國)이요, 일본은 진실로 더러운 나라다.”라고 조선을 부러워 했다는 기록이 있다.[32] (註 444) 가복(賈復)과 구순(寇恂)에게 하듯 :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장수끼리 대의(大義)를 들어 화해를 시킴. 가복(賈復)과 구순(寇恂)은 서로 감정이 있었으나 광무제(光武帝)가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못했는데 두 범이 서로 다투면 되겠는가." 하여 서로 화해를 시켜서 절친하게 되었음. 《후한서(後漢書)》 권16 구순전(寇恂傳).[33] 아직 요시라 사건을 계기로 이순신을 내치기 수년 전임에도 이미 이순신 대신 원균으로 갈아치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34] 물론 가장 큰 책임은 되지도 않는 억지와 모함으로 이순신을 음해하여 파직시키고 졸렬하기 짝이 없는 지휘로 말아먹은 원균에게 돌아가겠지만, 원균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원균을 그 자리에 임명한 최종 책임자가 선조인 만큼 선조의 책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21세기 민주 국가에서 대통령이 이랬어도 탄핵은 기본이요 사회적 매장감인데,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가 밀어닥쳐도 임금이 부덕해서 하늘이 벌을 내린 것이라고 하던 조선 시대다. 정작 원균도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말을 뒤집었으니 단순 허풍을 넘어 임금에게 사기를 쳤다고 봐도 될 수준이다. 원균은 권율에게 육군이 돕지 못해 못 싸우고 있다며 책임전가로 음해를 가하다가 장형까지 맞은 적까지 있다.[162][163][164][165] 어쨌든 선조의 멍청한 판단 탓에 조선이 아주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조선 수군의 9할 이상이 몰살당한 칠천량 해전은 정유재란이 크게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일본군을 저지하지 못했으면 극단적으로는 나라가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 벌어졌을 수 있었던 만큼 실로 끔찍한 실책이었다. 한 마디로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멸망했다.[35] 정조 대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본에는 왕이 내린 선물을 비통하다고 한 표현이 위험해서 그대로 옮길 수 없었는지 “감동, 감동이다”라고 수정했다.[36] 사실 모친상을 당한 신하에게 고기 선물을 내린 사례는 세종도 있다. 바로 황희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이다. 하지만 세종의 의도는 선조와 명백히 달랐는데, 세종은 어떠한 불순한 의도 없이 순수하게 신하를 위해 내린 것이었다. 애시당초 세종은 끝까지 황희를 중용하고 큰 처벌을 내린 적이 없지만, 선조는 이순신을 정당한 이유 없이 의심하고 푸대접하다 자신의 명령을 한 번 어겼다고 그것을 졸렬하게 빌미로 삼아 바로 백의종군시키고 유배까지 보냈으며 그 때문에 충격을 받아 이순신의 어머니가 사망했다. 그런데 그 상중에, 그것도 무슨 목적으로 보냈는지 뻔히 다 보이는 고기를 내놓았으니 이순신에게는 그냥 "너 엿 먹어봐라" 정도도 아니고 패륜적인 모욕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이순신이라고 해도 일기에 대놓고 비통하다는 글을 썼을 정도면 정말 선조가 증오스러웠던 듯하다.[37] 이를 소재로 한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시기를 하며 무슨 상을 줘야 할지 고민하던 중 윤두수가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에 "사명을 걸고 싸웠으니 면사첩(지난 죄를 사하는 증서)을 줍시다"라는 말에 동조하여 보내는 선조의 찌질한 전개로 나왔고, 이를 받은 이순신은 조용히 책에 끼어 덮어버리고 휘하 장수들은 13척으로 300척 이상의 일본군을 이긴 장수에게 어떻게 이런 개망신을 주냐며 분개했다.[38] 사실 선조가 했던 짓을 보면 이순신에게 무슨 죄라도 뒤집어씌워서 죽이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큰 공이 있는 임진왜란 이후 이순신을 숙청하자니 이순신은 너무나도 큰 공을 세운 장수라서 명나라 황제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장수였고 정탁을 비롯한 조정 신하들의 여론도 신경써야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백의종군으로 박탈시켰고,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였기 때문에 선조 본인의 손으로 직접 죽이는 짓까지는 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선조는 이순신을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니라 죽이고 싶어도 상황 탓에 끝내 죽이지 못한 것에 가깝다. 만약 선조가 윗선(명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입장이었다면 달랐을 가능성도 크다. 이순신 자살설 또한 바로 이 때문에 나온 음모론이다.[39] 차마 왕에게 대놓고 막말을 하지 못해 완곡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정철이 듣고는 기가 막혀서 "아비로서 어찌 아들을 전쟁터에 두고 떠난다고 하느냐"며 그를 질책하는 것이다.[40] 쉽게 말하면 '니가 왕이냐, 필부냐? 그럴 거면 왕 자리도 내버리고 가지 왜?' 고 깐 거다. 자기 왕에게 하는 짓이 하찮은 놈 같다고 한 건데 그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당연하게도 조선왕조실록에서 대놓고 왕에게 필부를 운운하며 왕의 행동에 반대하는 예는 사실상 선조가 처음이라고 볼 정도이다. 그 연산군에게도 필부라는 말은 없었는데…….[41] 신립·신급(申礏)·신할(申硈)의 형.[42] 요동으로 가겠다는 선조에게 대놓고 요동가면 왕위에서 사퇴할 것을 요구한다.[43] 선조의 어가[44] 여기있는 군신들을 말함[45] 실제로 이렇게 도망을 치려다 실패하여 붙잡혀서 패전한 전쟁이 바로 병자호란이고 그 결과는 삼전도의 굴욕이었으며, 명나라도 나중에 이 비슷하게 망했으니[166] 왕이 잡히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는 역사가 증명한다.[46] 상술한 다른 사례에서도 볼 수 있지만,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은 선조를 빨리 잡기 위해 하삼도에 대한 교두보를 확보하지도 않고 곧바로 한양을 향해 닥돌했는데, 선조가 도주하면서 이 계획이 틀어져 후속 대책을 세우느라 한 달이나 진격이 지체되었고, 이 틈을 타 조금이라도 해놨던 전쟁 준비를 기반으로 한 의병들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걸 마주해야만 했다.[47] 일본군은 조선에서 엄청난 피해를 보면서도 장수들만큼은 반드시 지키려 했다. 반대로 전투 시에는 적장부터 노리려 한 것 또한 당연하다. 일본군의 무사들이 딱히 충성심이 높아서가 아니라, 주군을 잃은 무사들은 떠돌이 낭인이 되어 죽음보다 비참한 삶을 살다 죽기 때문이다. 이에 충실한 대표적인 장수가 시마즈 요시히로이며, 자세한 내용은 노량 해전시마즈의 퇴각 문서를 참조하면 좋다.[48] 분명히 국왕을 비롯한 전쟁을 책임질 사령부가 적군에게 생포되는 것은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고, 때문에 됭케르크 철수작전처럼 후대에 크게 인정받는 철수 작전도 분명히 있다. 당연하지만 왕이 잡히면 그 순간 구심점을 잃은 조선은 질 확률이 증가하므로 도망치는 것 자체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겁쟁이라고 놀리든 뭐든, 나라를 위해서라도 국가의 상징인 왕은 살아야 한다. 사실 제일 좋은 것은 도망칠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겠으나,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라면 제대로 도망치는 건 욕을 먹긴 커녕 일을 잘 한 것으로 칭찬해 마땅한 행동이다.[49] 왕이든 대통령이든 적에게 잡힐 경우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점은 분명히 사실이므로 이승만이든 선조든 피난 자체로 비판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물론 이승만은 피난을 해서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피난하려는 사람들을 안심시킨 후 자기만 튀었기 때문에 욕을 먹는 것이다. 일단 왕이 붙잡힐 경우 최선의 경우가 인조가 청나라에게 당했던 수모. 좀 나쁜 경우가 원나라의 부마국·속국이 된 고려 말기의 경우이며, 최악의 경우가 식민지가 되어서 나라가 사라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고 이것이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이 출성항복을 끝까지 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 이유 중 하나이다. 대통령의 경우도 그 정치적 파급력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고, 전쟁은 공산군의 승리로 그대로 끝날 수 있는 문제이다. 이승만의 경우는 수도 함락이 기정사실화 되었을 때의 패닉과 그로 인한 혼란을 막아야 했다. 실제로 고려 현종은 거란의 2차 침공 당시 무사히 피난하는 데 성공하여 공세종말점에 도달케 하여 회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이 틈을 탄 양규 등이 반격의 기회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덤으로 현종은 전쟁의 최고 에이스인 강감찬에게 궤장을 주고 손수 모자에 꽃도 꽂아주는 등 대접을 제대로 해 줬으니 선조와 철저히 대비되는 임금이다. 다만 선조도 공을 세운 장수들을 푸대접하지만은 않은 것이 니탕개의 난에서 신립이 공을 세우자 자기가 먼저 신립을 마중나갔고, 심지어는 자기가 직접 곤룡포를 벗어서 신립에게 입혔을 정도로 신립의 공훈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사실 선조가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은 몽진을 시작한 후다.[50]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수도를 쭉 지키면서 전선 유지를 독려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라는 훌륭한 반례가 21세기에 존재하긴 하지만 이것도 사실상 도박에 가까운 위험한 행동이다. 그러한 도박이 제대로 먹혀 들었으니까 망정이지. 다만 젤렌스키와 선조를 비교하는 것을 옳지 않은 것이 현대 우크라이나는 민주주의 국가고, 조선은 절대왕정 국가다. 조선은 왕가 곧 나라이니 잡히거나 죽으면 끝이지만, 젤렌스키의 경우 죽어도 내각의 다른 인물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51] 왜란 당시에 선조는 도망만 쳤고 이순신권율이 잘 해서 전쟁을 이긴 것이란 판단은 굉장히 짧은 이해다. 전술했듯이 우선 그 이순신과 권율을 등용한 군주가 바로 선조이고, 도성까지 점령당한 판국에 국가 원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인 외교적 방법으로 명군의 파병을 얻어낸 것도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사실 명군이 별 활약도 없이 민폐만 끼쳤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명군은 존재 자체도 큰 도움이 되었다.[167] 일본군 입장에서는 적을 둘이나 한꺼번에 상대해야 하니 상대적으로 부담감이 더 컸다.[52] 선조도 나름대로 전시 대응체계를 가동하기는 했다. 임진강 방어선, 평양성 방어선 등 병력 모으고 방어선을 짜기는 했다. 문제는 둘 다 담당 지휘관의 삽질로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것. 그래서 전국에 격문을 돌려 의병(조선이 의병들이 스스로 일어나서 승리한 민중의 승리라고 보는 시선도 있지만 조선은 의병들을 신속하게 정규 군사체계에 편입시키고[168] 군권과 식량 조달을 위한 조세권을 주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했다.)을 소집, 즉 민방위 체계를 작동시키고 혹여나 자신이 잡힐 경우를 대비하여 세자였던 광해군에게 권한 일부를 이양하여 전시 체제에 돌입하였다. 일본군의 진공이 생각보다 빠르고 신속하여 오버를 한 경향이 있다.[53] 물론 선조는 조선의 명맥 자체가 망하지는 않게 구심점을 삼도록 자기 딴에는 버리는 패인 광해군을 던졌는데 아마 선조는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고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 모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예상 외로 광해군이 뛰어난 활약을 하면서 선조가 쩌리가 되는 효과가 생겨버렸다. 그리고 선조는 자신의 실책으로 잃은 권위를 내내 광해군을 갈구면서 회복할 생각을 한다. 이는 나중에 멀쩡한 황제를 버려두고 칭제를 했음에도 대계적 관점에서 아들을 인정하고 기꺼이 태상황으로 물러난 당현종과 너무나 대비되는, 누가 봐도 근시안적이고 한심한 일이었다. 당현종은 권력에 집착했고 자식에게는 상당히 잔혹한 인물이었음에도 배포는 컸고 아직 총기는 남아있었는지 나라의 통합을 위해서 자식의 권위를 높이는 방법을 선택했다.[54] 국내에서 피난을 하며 버티는 게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다른 나라로 튄 왕이 난이 평정된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는 확률이 생각보다 그렇게 높지 않다. 몽골의 침입 때 고려가 강화도에 짱박혔음에도 어쨌든 나라를 유지한 건 그래도 그것이 국내였기 때문이었다.[169] 그렇기에 기를 쓰고 신하들이 반대했고, 명나라는 처음에는 선조를 일본의 첩자라고 의심했다가 나중에 진실을 알고선 기가 찼으며, 조선의 명맥을 유지할 왕이라는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신하들이 양위를 해서 '왕'의 권위를 광해군에게 넘겨줄 생각까지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신하들이 왕을 적대하는 지경까지 간 것. 이에 관한 비판은 너무나 중대하여 아래 "명나라 도주 계획"에서 별도로 다룬다.[55] 하다못해 손자인 인조도 이렇지는 않았다. 이괄의 난 때는 호남으로 도주했는데 이때 신하들이 영남으로 도주하느냐 호남으로 도주하느냐 의견이 갈렸는데 김류는 충의로운 선비가 많으니 왕의 뜻에 따라 일어설 이들이 많을 거라며 영남으로 가자는 의견에 문을 숭상하는 영남보다는 무를 숭상하는 호남이 낫다고 해서 호남으로 갔다. 즉 반격을 위해서 호남으로 간 거다.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도주하긴 했어도 이 역시 이런 일에 대비한 매뉴얼에 따른 것이었으며, 병자호란 당시의 몽진 역시 할아버지가 제 목숨 하나 살겠다고 토낀 것과는 다르다. 인조 자신도 남한산성에서 45일간 맞서긴 했으며 그 사이 왕을 지원하러 온 병력이 왔고 대체적으로는 숫자 때문인지 지는 게 많았지만 광교산 전투 등 이긴 전투도 없잖아 있었다. 비록 졌기 때문에 왕이 도망을 못 치면 어떤 꼴이 벌어지는지를 본인 스스로 증명해버린 게 문제지만, 마음가짐만은 할아버지랑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다.[56] 흔히 현대인들에게 전황이 매우 좋지 않다고 말을 하지도 않고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라며 서울 사수 의지를 표명하는 왜곡 방송을 틀어놓고 야음을 틈타 대전으로 도주한 6.25 전쟁 초반 '런'승만과 함께 엮여서 런조로 까이지만, 살펴보면 이승만과 비교하는 것도 실례인 수준이다. 일단 이승만은 옆나라도망칠 생각은 없었고(...) 적어도 한강 인도교 폭파는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어 공세종말점을 앞당기는 한편 그렇게 번 시간을 활용해 UN군의 충원을 기다리고 국군을 확충하고 반격할 기회를 모색하려는 군사적 의도가 있었지만 선조는 애초에 세자인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며 그렇게 번 시간을 가지고 국왕인 선조 자신이 어떻게 하겠다는 그런 식의 계획조차도 없이 전쟁을 완전히 포기하고 나라가 침략자들에게 망하든 말든 명나라로 도망칠 계획만 잡고 무리수를 둬 가며 강행했다. 차라리 반대로 했다면 욕이라도 안 먹었을지도 모른다.[170][57]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짐작컨대 후 쩐 왕조 얘기일 가능성이 높다. 명나라가 복국하…는 것 같더니 아예 점령해버렸지만.[58] 이러한 일들은 결국 선조가 광해군을 경쟁 상대로 여기게 되고 결국 광해군이 이 시절 보여주었던 총명한 모습을 다 잃고 암군으로 전락하는데 일조한다.[59]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시간이 다소 지난 뒤 고구려의 왕이었던 보장왕을 안동도호부의 도독에 앉혔는데, 이는 고구려 유민들에게 옛 왕이 우리를 섬기고 통치하니 너희도 충성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었다. 조선에 비하면 지방 분권적인데다 이미 멸망한 나라의 옛 군주에게 모여들 민심이 이 정도였다.[60] 만에 하나 선조의 목적대로 요동 망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미 해외로 도망간 국왕을 위해서 상술했던 의병이나 명나라의 원군이 얼마나 소극적으로 변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좋은 예시로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 황실이 일제에 협조하게 되고 일제의 특혜를 받아 호의호식하게 되자 유림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이나 독립운동이 약해졌고 동시에 복벽이니 군주제니 하는 것도 약해져 1919년쯤 되면 모두가 방향은 달라도 군주정이 아닌 공화정을 외치게 된다. 물론 이때야 공화국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 새 왕조가 수립되었겠지만 어쨌든 진짜로 선조가 도망쳤다면 선조는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거나 광해군이 어찌어찌하여 유지시켜도 귀국을 못하거나 귀국해도 탈문의 변 같은 사건이 없는 이상은 다시는 왕으로 복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망명 전에 선조가 폐위당하고 광해군이 즉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추태 때문에 파병 온 이여송을 일국의 국왕인 선조가 버선발로 나가 맞이한 사실 등은 선조가 국격을 얼마나 가볍게 해서 실추시켰는가를 가늠하게 하며, 그 절박함이나 명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전쟁 내내 이여송을 비롯한 명군 장수들로부터 면박을 당하는 단초가 되었다.[61] 육군과 수군에게 부산으로의 진격을 계속해서 명령했다. 당시 부산이 일본군의 상륙지점이라는 점을 보면 분명 부산에 있는 일본군을 다 없애면 큰 타격을 줄 수 있는건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곳을 일본이 그냥 방치할 리가 없으며 기본적으로 육지에서 싸우는 건 육군이 할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조선 육군과 수군 모두 선조의 명령대로 부산의 일본군을 공격할 형편이 안 되는데도 계속 공격하라고 닥달하여 육군 총사령관인 권율과 해군 제독인 이순신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상륙작전은 왜 생각해보지 않냐고 하겠지만 일본 육군+수군을 육군의 협력 없이 조선 수군만으로 감당한다는 건 말이나 되겠는가? 오죽하면 이순신이 거듭 그럴려면 육군이 이쪽으로 와서 합동으로 작전해야 한다고 했겠으며 심지어 그 멍청한 원균마저 나중에는 이를 깨달았겠는가?[62] 물론 당시에는 실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다. 오죽하면 나중에(칠천량 해전 후) 원균을 까던 신하들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 전까지는 이원익 등 일부를 빼면 원균의 실체를 모른 채 그런대로 싸우는 장수 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원균이 허위보고를 올려도 알 길이 없던 당시 상황도 문제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조를 실드칠 수 없는 노릇인게 아무리 원균이 공을 부풀리더라도 그게 이순신의 공을 능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잘하고 있던 이순신을 끌어내리고 원균을 세운다는 건 누가 봐도 삽질 오브 삽질이다. 게다가 이순신에게 명을 내리고 '어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면시키고 백의종군시키며 욕을 보이고 지휘권과 명예를 박탈한 것은 전적으로 선조의 권한으로 일어난 일이다. 따라서 그 책임과 이후 일어난 원균의 실책도 온전히 선조의 잘못이 원인으로 일어난 결과로 읽힐 수 밖에 없다.[63] (註 452) 당저(當宁) : 현재의 임금을 가리키는 말. 본래는 임금이 조회 때에 서 있는 곳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64] 요약하자면 "열심히 나라 멸망시키고 갑자기 왕 그만하겠다는데 아주 훌륭한 생각이다. 근데 왜들 시답잖은 핑계로 말렸냐. 말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매우 안타깝다" 라는 뜻이다. 보다보다 열받은 사관의 심정이 드러난다.[65] 앞선 선조 25년 요동을 건너는 것은 필부나 하는 짓이라고 신하들이 비판한 것을 활용해 자신을 병이 들어 흙으로 만든 등신 같은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냥 보면 선조가 아프니까 선위하겠다는 것 같지만 선조의 저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선조를 병이 들어 흙으로 만든 등신이라고 해버리는 불충을 저지르는 것이다.[66] (註 441) 내선(內禪) : 세자(世子)에게 왕위(王位)를 물려 주었으나, 아직 즉위(卽位)의 예(禮)를 행하지 않은 것.[67] 9월 1일부터 6일자 까지의 세자의 상소를 중간에 생략하였는데 선조의 선위 소동으로 인해 광해군은 8월 30일부터 7일까지 매일 아침 대궐에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선위를 거두어줄 것을 요청하였다.[68] 그리고 선조의 행위로 신하들이 누구를 따라야 할지 혼란에 빠졌다고 했는데 정작 신하들의 혼란은 그리 크지 않았다. 위에 서술된 대로라면 초기 광해군은 대규모 숙청을 벌이거나 눈치 보느라 소극적인 행보를 보여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광해군 초에 숙청이 있었지만 이는 유영경과 그 일파를 대상으로 하였을 뿐이고 북인 주류, 서인, 남인도 있는 당시 조정에서 유영경 일파는 북인 중에서도 소북, 소북 중에서도 탁소북, 탁소북 중에서도 일부에 불과했다. 유영경은 그에 대한 선조의 총애로 커보여 그렇지 실제로는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손쉽게 날려버릴 정도로 별것 없는 인물에 불과했던 것. 당연하겠지만 신하들 대부분은 대북이 적극적으로 광해군 편이라 그렇지 그렇다고 서인, 남인 등이 영창대군 편이었던건 아니다. 선조 역시도 영창대군을 편애하긴 했지만 건강이 나빠지자 세자에게 선위나 대리를 할 생각이 있다고 한 것이나 어쩄거나 진짜로 광해군에게 왕 자리를 주었으니 진짜 광해군을 쫓아내고 영창대군을 앉히고 싶다는 것보다는 영창대군이라는 무기로 광해군을 압박하고자 했던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당시 사정상 광해군을 쫓아내고 영창대군을 앉힌다고 하면 찬성할 이도 없고...[171] 당장에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숙청한 대표적인 사람은 겨우 유영경과 임해군 정도로 그나마도 임해군은 자기 처신 잘못으로 괜히 의심 사 죽은거고 평소 행실이 워낙 개판이라 당파를 초월하고 임해군을 처단하라고 외친 사람이라 아무 문제가 없었다.[172][69] 계축옥사에서 반역의 수괴로 지목된 영창대군은 폐서인이 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갔고, 결국 그곳에서 만 8세의 어린 나이에 살해되어 비명횡사했다.[70] 처음은 왜적을 정벌했다는 뜻의 정왜공신이었으나 선무공신으로 최종확정된다.[71] 陸贄, 중국 당나라 시대 관료이자 학자.[72] 충무공의 승전장계를 보면 알겠지만 장수와 병사에 이르기까지 그 공을 세세히 적어 보고했으며, 그 보고 과정에서 충무공은 1등, 2등, 3등이라고 순위를 매기지 않았다. 다만 권준과 무의공 이순신은 임진왜란 기간동안 충무공 휘하에서 경상우수사, 충청수사로 승진까지 하였고 전란이 끝난 후에도 주요 요직을 맡고 있었다. 정운은 전란이 터진 그 해 너무 일찍 전사하였고, 배흥립은 끝까지 생존하였으나 어찌보면 수사로 승진은 못하다 보니 조금 묻힌 감이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호성공신에 비하면 결코 선무공신의 수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끝내 정운과 배흥립은 선무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다.[73] 선조의 책임 회피용 발언으로 부산 진격을 명한 것은 비변사도, 권율도 아닌 선조 본인이다. 비변사와 권율은 선조의 명을 전달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애초 원균은 본인이 통제사가 되면 부산을 공격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장계를 이미 올렸다.[74] 이미 선조는 선무공신의 수가 많다고 정운과 배흥립을 빼라고 했었고 다시 녹공하라고 말을 바꾸나 최종적으로 정운은 들지 못한다.[75] 이것이 소위 원균옹호론자들이 이야기하는 원균의 선무일등공신 근거이다. '그래도 공이 있기 때문에 1등에 선정되지 않았겠냐'는 것이 그 논리인데 실록을 보면 알겠지만 애초 원균은 2등이었다. 그마저도 선조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2등에 녹훈한 것인데 선조의 무한한 원균 사랑과 책임 회피용으로 원균은 결국 1등에 책봉되고 만다.[76] 원균이 비록 1등에 들었다고는 하나 이순신과 권율은 이미 정승의 반열에 올라 두 사람은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이며 원균은 그보다 한단계 낮은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숭록대부로 차이가 있다. 또한 이순신은 선무 1등 공신 3인 중에서도 으뜸인 원훈으로 선정되었다.[77] 최호는 칠천량 해전 당시 충청수사로서 전라우수사였던 이억기와 함께 끝까지 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한 몇 안되는 장수 중 한 명이다. 공신에 선정이 되긴 했으나 최호는 선무공신이 아닌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해서 청난공신에 선정되었다.[78] 문제는 호성공신 중에는 왕조안 신성군, 정원군 등도 있는 등 호성공신의 선정 기준은 굉장히 개판이었다. 호성공신을 봉해도 납득될 만한 사람들만 봉했다거나 최소한의 선을 보아가며 봉했다면 욕을 덜 먹었을텐데 이 신성군과 정원군이 선조가 가장 총애하는 인빈의 아들들임을 생각해보면 그 선정 기준은 굉장히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79] 역사저널 그날 시즌2에서도 원균이 선무공신 1등에 포함되었다는 거 하나만으로도 원균에 대한 되도않는 재평가에 들어갔다.[80] 그나마도 왕 눈치 봐서 올린 것. 즉 신하들은 누구나 원균을 1등으로는 죽어도 불가능할 것이라 본 거다. 사실 1등은 고사하고 원균이 공신이라는 것에 책봉되는 것조차 납득이 가지 않았다는 게 당대 문무백관들의 논지였다. 당연한 게 일국의 해군 전체를 아예 씨를 말려버린 짓을 저질렀는데 공신이라면 누가 생각해도 어이 집나갈 노릇이다.[81] 시호는 인조 때 붙여진 것이다.[82] 권응수는 박진과 함께 경주성 전투에서 싸웠고 이정암은 연안 전투의 주인공(이 공으로 이정암은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83] 1602년 4월 공신도감에서 26명을 추려내며 대놓고 겨우 고언백도 들어갔는데 고언백 정도의 공을 세운 장수는 많으니 이대로면 섭섭하고 원통하게 여길 사람이 많을거라 보고했다.[84] 앞서 말했지만 선무공신은 호성공신의 반도 안 된다. 그럼 그렇다고 정운이 원균급 인물로 올라갈 자격이 없는 거냐면 이순신 휘하에서 맹장으로 활약할만큼 대단한 장군이었다. 그런데도 공신이 많다고 못 올려준다는 게 넌센스[85] 무의공 이순신과 권준은 이순신 밑에서 수사로 승진할 정도로 일단 눈에 두드러지는 공을 세웠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전란 후 벼슬도 올랐으니 공신으로 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이유로 당시 원균 휘하에 있었으나 이순신 장군이 아껴 경상 좌수사로 승진까지 했던 이운룡 역시 3등 공신에 봉해졌으며, 수군 출신으로 공신으로 봉해진 마지막 인물은 정유재란 당시 전사한 기효근이 있다.[86] 생각해보면 당연하다할만도 할 것이 선무공신은 선조의 의도대로 수를 최대한 추렸던 만큼 오히려 선무공신에는 공신이 될만한 자들이 들어간 편이고(한 명 빼고) 반대로 호성공신은 수를 최대한 늘이다 보니 별 허접스런 사람들도 다 들어갔을 것이다. 실제로 그 많은 호성공신 중에 현대에까지 위인으로 기억되는 인물은 이항복, 류성룡, 허준, 이원익, 정탁 정도지만 선무공신 중에 왜 이런 사람이 들어갔냐 싶은 사람은 원균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호성공신이 마냥 폄하받을 사람들은 아니다. 임진왜란 초기만 해도 나라와 임금을 버리고 도망치려던 사람도 많았다고 하니 왕을 따라 의주까지 따라간 이들이 비난받을 사람들은 아니고 실제로 마냥 선조에게 예스맨인 것도 아니라서 아니다 싶을때는 선조를 비판하기도 했다.[87] 다만 함경도에서는 이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과 조선인 순왜들의 횡포로 나중에는 정문부의 북관 대첩으로 대표되는 의병 투쟁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된다.[88] 물론 이는 조선 시대에 역모가 아닌 비행을 저질렀다고 종실의 일원, 그것도 왕의 아들을 중형에 처하는 임금은 거의 없다는 것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건 명군, 성군 소리를 듣는 태종, 세종, 문종, 성종 등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역대급 군왕들조차 왕실은 철저하게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함을 당연하게 여겼다. 과실을 저질러도 최대한 보호[173]하고 왕족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이는 단순한 법적,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전근대 전제 왕조 국가들에서 왕실의 힘과 위신은 곧 국왕 자신의 권위와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역모가 아닌 이상 신하들의 말에 따라 왕자를 처벌하는 선례를 만들 국왕은 없었다. 예외라고 해야 영조 정도인데, 이쪽은 성격이 워낙 유별난데다 세자와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세손이라는 확실한 대체재가 존재했다. 심지어 신하들은 제발 왕세자를 핍박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간언을 올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영조의 이런 행보는 왕위 계승자가 극히 귀해지는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또한 영창대군처럼 역모를 저지르지 않아도 정치적 위험 인물의 경우 왕에 의해 숙청되기도 했다.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되던 시기에 자신 같은 신세에 이른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89] 그 애비도 친국을 자주 실시하며 옥사를 즐기는 등의 가학적이고 잔악한 모습을 보였다.[90] 1위는 영조이나 영조는 재위 기간이 광해군의 3배 이상인, 조선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임금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실제 1위는 광해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91]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기를 기점으로 보면 선조의 나이 42세,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이 단명한 왕들을 빼면 보통 50대에 죽었음을 생각해 보면(선조 본인도 50대에 죽었다.) 책봉할 시기가 된 건 맞았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92] 단 이것은 동양사나 일반인의 기준일 뿐 서양사나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들은 다르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눌 수 없다는 진리, 영국의 유명한 왕 리처드 1세도 본인의 아버지를 치고 나서야 왕이 된 것을 보면 인성 이전에 권력이라는 무서움이 있다. 즉 단순한 사항으로 아들이니 인정하는 것이 아닌 권력이라는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 훗날 아들과 원수를 진 흥선 대원군 같은 사례도 있었다.[93] 실제로 재위 초반 4년까지는 괜찮았다. 박시백화백 광해군평가[94] 여담으로 훗날 영조는 한술 더 떠서 정비 정성왕후를 왕비 대우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겨우 딸 하나만 낳은 숙의 문씨가 자신보다 품계도 높고, 세자인 아들과 여러 옹주들까지 낳은 영빈 이씨에게 대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조차도 내명부 수장이자 왕비인 정성왕후가 아니라 국왕인 영조에 대한 발언권이 강했던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직접 해결해야 할 정도로 정성왕후는 왕비 대우를 영조에게 못 받다시피했다.[95] 신성군 사후 눈치 빠르게 광해군의 편에 붙으면서 광해군과 사이가 좋아지긴 했지만, 광해군 입장에서 인빈 김씨는 어렸을 때부터 본인을 아끼고 키우며 친아들처럼 여긴 적모 의인왕후만큼의 애정이나 친밀도는 없었고 애초에 신성군 생전까지는 본인을 견제했기에 그녀의 속내는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결국 이를 반증하듯 인빈 김씨 사후 인빈 김씨의 아들들도 광해군의 숙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96] '죄가 있는 놈이긴 한데 불쌍하니 은전을 베풀어주자' 정도가 되겠다.[97] 당연하지만 1인 독재 당이 정권을 장악하면 비판을 할 수 없게 되니 건전성이 몹시 악화된다.[98] 거기에 이순신을 견재하려고 똥별 원균을 중용하다가 조선수군 전체를 말아먹고 정유재란까지 확전하여 나라를 멸망직전으로 몰아가는 등 공과 과가 너무나도 극명하기에 이런 극과 극인 결과물 때문에 '선조가 뽑은 명신보다 죽인 명신이 더 많다'며 악평하는 사람도 있다.[99] 정작 이 나인들은 광해군이 즉위하자 바로 꼬리를 내리고 영창대군이 역모에 휘말리자 자신들이 언제 인목왕후의 나인이었냐는 듯 있지도 않은 거짓 고변을 하면서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100] 그나마 인목왕후의 가장 어린 남동생 하나가 살아남아 완전한 멸문은 피했다.[101] 사실 이정도면 인목왕후 성격상 엄격한 조선 왕비 간택 과정에서 진작 걸러졌어야 되는 정도인데 동서고금 막론하고 왕비 자리는 정치적 지위이기도 하기에 성격만 좋아서 되는게 아니고, 눈치도 빨라야 하며 이에 따른 사회성도 좋아야한다. 의외로 선량한 인성 자체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인목왕후의 행적들을 보면 글에 조예가 깊고 재능이 있으며 광해군을 왕위로 인정하는 교서를 내리고, 눈치 없는 행동 몇 번 한것을 제외하면 딱히 광해군을 건드릴 생각은 하지는 않았기에 아예 지능이 낮은 것 까지는 전혀 아니며 인성이 악랄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서 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왕비 자리에 있기에는 평범한 사람 이상의 눈치가 필요했던 것이고 딱 평범한 사람 수준의 그 눈치 없는 행동들을 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입헌군주국에서도 왕비의 자질에 꽤 문제가 되고 부적합하다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 인목왕후를 제외한 다른 왕비들은 적어도 인목왕후를 제외하고는 이정도로 눈치가 없이 종종 돌발행동을 하는 경우는 없었으며 그나마 비슷한 폐비 윤씨도 정황상 산후우울증을 극심하게 앓기전까지는 매우 정상적이었다.[102] 선조왕릉의 카카오맵 별점은 왜 1.4인가 (이명지의 IT뷰어)[103] 통신사로 왜에 다녀오고 전쟁을 우려하는 황윤길과 상극의 의견을 낸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후술할 선조의 문제점상 분명 책임을 김성일에게 모두 돌려 참형을 명할 수도 있었는데 주변의 옹호가 있었다고는 하나 결국 그에게 기회를 준건 선조 본인이었다.[104] 사림세력의 집권 이후 조정은 이전보다 덜 부패했을지 몰라도, 국정 운영 및 현안에 대한 해결 능력이 더 향상되거나 효율적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림의 집권 이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나타난 ‘동서분당’은 그러한 비효율이 표현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선조 대 당쟁의 양상과 전개 양상 이이를 중심으로>[105] 백관의 직전은 진작 없어졌는데 거승의 위세는 그대로 있으며, 육경으로 있는 사람들은 황공히 죄를 기다리는데 승려들은 기뻐 날뛰며 서로 축하하니 매우 성덕에 누가 됩니다. (명종 11년 6월 9일)[106] 특정수입(직전수조)-특정지출(녹봉) 연계해체[174][107] 嘉 註 011(註 011 “청주본”에는 행을 바꾸지 않았다.)靖三十四年正月日 註 012(註 012 ‘청주본’에는 “二十日”로 되어 있다.) 崇政大夫 行兵曹判書 兼知經筵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 成均館事 臣 鄭士龍 謹序。 (經國大典註解 經國大典註解 前集 經國大典註解 前集 卷首 經國大典註解 前集 序)[108] 다.≪수교집록≫ ≪경국대전≫이 시행된 후 성종 24년에≪대전속록≫을, 중종 38년에≪대전후속록≫을 간행하였고, 명종 9년(1554)에는≪經國大典註解≫가 이루어짐에 따라 명확한 통치의 기본법제가 완비되었으며, 법조문의 해석·적용상의 疑義도 밝히게 되어 법의 충족성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李珥를 비롯하여 인조대의 崔鳴吉, 숙종초의 朴世采 등이 變法更張論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5.≪경국대전≫의 편찬과 계승 > 6) 법전편찬의 계승과 법사상의 변화 > (1) 속록 등 법령집의 편찬)[109] 특히 사찬(私纂) 주해서에 머물러 전란 중에 실전될 뻔한 《후집(後集)》[175]을 공공기록물로 보존조치한 것도 평가할만 하다.[176][110] 이외에도 명종 대에 수교들은 인조 대에 《각사수교(各司受敎)》[177]로 정리되었고 선조[178]광해[179] 두 왕은 사실상 입법실적이 전무에 가까웠기[180][181] 때문에 중종 대에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이후 조선은 명종 대에 마무리된 법체계와 명종 대에 발령된 수교로 반세기 이상을 버틴 셈이다.[111] 공납제도와 관련해서는 명종 대에 군현에서 현물로 거두어들이던 공물을 쌀이나 포목으로 거두고 이를 사주인 등에게 지급하여 공물을 마련하던 방식인 사대동(私大同)이 등장했고[182] 이에 대응해 중앙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시혜적 목적의 공물작미(貢物作米)도 명종 대에 최초로 관찰된다.[183][112] 선조 대에 발령된 입법실적이 처참한 것은 국정에서 핵심적인 이호예(吏戶禮) 삼전(三典) 통틀어 후대에 쓸만한 조(條)가 꼴랑 9개(《이전(吏典)》 3개;《호전(戶典)》 5개;《예전(禮典)》 1개)에 불과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184] 반면 《수교집록(受敎輯錄)》에 등재된 명종 대에 발령된 조(條)는 50개(《이전(吏典)》 7개;《호전(戶典)》 14개;《예전(禮典)》 29개)이다. 전란 전에 기록부족을 거론할 수도 있겠으나 《병전(禮典)》 군제조(軍制條) 수교(受敎)를 보면 41개인 이 항목에만 무려 12개를 선조 대에 박아 놓았으며 전란 전후 가릴 것이 없이 년도(4년;4년;6년;13년;13년;15년;20년;24년;35년;37년;37년;38년)도 굉장히 꾸준하고 고르게 분포되었다. 역대국왕 통틀어도 압도적 1위인데 한마디로 관심 있는 부분에만 몰입했다고 할 수 있다.[113] 이는 <각사수교>를 책으로 묶은 관서는 승정원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12)(12)(具德會, 1997, <<各司受敎>.<受敎輯錄>.<新補受敎輯錄> 解題> 서울대학교 규장각 영인본 참조.)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졌던 '丙子'년은 1636년(인조 14, 崇禎 9)으로 보이는바,(13)(13)(이 '병자'년조는 앞의 '萬歷 元年 癸酉'(1573, 선조 6) 기사의 흐름을 잇는 것으로 보면 萬歷 4년(1576, 선조 9)가 되겠고, 뒤의 '己巳'(인조 7, 崇禎 2)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면 1636년(인조 14, 崇禎 9)가 될 수 있다. 그 내용으로 보건대 <각사수교>를 필사한 뒤에 이와 관련되는 내용을 추기한 것으로 볼 수 있겠으며, 그렇게 본다면 후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명종 연간의 <각사수교>를 필사하고 거기에 추록을 추기하여 책으로 묶은 것으로 보인다. 명종 이후 선조, 광해군 연간에는 수교를 정리하여 輯錄하려는 논의가 이루어졌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후기 法編纂推移와 政治運營의 변동>, 177)[114] 전라 감사가 치계(馳啓)하였다. "영암(靈巖)·강진(康津)·해남(海南) 세 고을은 양영(兩營) 사이에 끼여 있는 데다가 제주가 곧장 갈 수 있는 길목의 요충지여서 공부(貢賦)가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나 많습니다. 특히 을묘 왜변(乙卯倭變)을 겪은 뒤로는 방비에 대한 제반 일이 매우 많아 백성들이 심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세 고을에는 녹미(鹿尾)·녹설(鹿舌)·쾌포(快脯)가 생산되지 않으니 장록(獐鹿)이 많이 생산되는 제주에 옮겨 정하게 하소서. 교서관의 책지(冊紙)와 장흥고(長興庫)의 견양지(見樣紙)는 정공 도감(正供都監)018)[185] 으로 하여금 일이 덜한 내륙 지방으로 옮겨 마련하게 하소서." (선조 4년 9월 12일)[115] 반면에 선조는 때로는 동인을, 때로는 서인을 지지하며 대립을 이용했다. 국왕이 개혁의지가 부족하고 명확한 국정목표나 개혁의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깊어지고 고착화되어갔다. 선조는 성종처럼 교화라는 정치비전을 목표로 내걸고 서로 대립하는 세력을 중재하지 않았다. 또한 조광조 일파의 희생을 바탕으로 훈구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던 중종처럼 어느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동서분당 초기에 명확한 정치비전과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신하들 간의 대립을 조정하였다면,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 원한이 당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116]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설치하였다. 이준경(李逡慶) 등이 건의하여 국(局)을 개설하고 상밀하게 의논함으로써 대납(代納)의 간람(奸濫)한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청에 따라 설치한 것으로, 삼공(三公)이 주관하고 식견 있는 조사(朝士)를 선임하여 낭속(郞屬)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폐단을 없애고 백성에게 이익을 주기 위하여 설치했던 것인데, 상의 뜻이 전례를 따르기에만 힘쓰고 대신들 역시 경장(更張)을 싫어해서 단지 문서로 필삭(筆削)하며 감정(勘定)만 하였으므로, 결국 아무 이익도 없었다. (선조수정 3년 11월 1일)[117] 조칙(詔勅)을 맞이하는 습의(習儀)를 1차는 8일에, 2차는 13일에 할 것으로 개정하여 부표(付標)해서 아뢰었다. 상이 우성전(禹性傳)이 아뢴 바에 따라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혁파하였다. (선조 5년 9월 30일)[118] 며칠 전에 수찬 우성전(禹性傳)이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혁파할 것을 청하여 상이 따랐는데, 오늘 대간이 혁파하지 말고 시의(時宜)에 합당한 것을 가려 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 5년 10월 6일)[119] 광해군 시기는 경기도 외에도 최초로 임시적인 공물작미(貢物作米)들이 광역단위로 시행되기도 했는데 선조 40년 정미년에 이루어진 공물작미(貢物作米)의 근거라고 알려진 기사[186]는 광해 9년 정사년의 오기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즉 광해 9년 정사년에 충청전라 해읍에서 공물작미(貢物作米)가 실시된 것이다. 이충(李沖)은 선조 대에 호조판서가 아닌 광해 대에 호조판서이고 병진년은 정사년 바로 전해이다. 병진년 이후 납입할 충청전라 해읍의 공물을 정사년에 작미(作米)해서 납입할 것을 광해군이 결재했다는 기사이다. 광해군 의문의 1승 이충(李沖)이 호조판서로 있을때 실제로 했었던 다음의 발언[187]을 참고하라[120] 하는 짓은 딱 중종 같은 암군인데 막상 중종보다 제대로 한 것이[188] 많은가 하면 중종이 명군으로 보일 지경이니 그렇지도 않은 것이 문제다.[121] 결국 군량도 뜯고 공물도 또 뜯는 식으로[189]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애초에 군량 자체도 못 모았다.[190] 사기를 치려다 제대로 치지도 못한 셈이다.[122] 공물을 일부도 대체가 불가능한 예산 규모인 1결당 2두를 책정해놓고 그마저도 군량미로 먼저 쓰려고 했었다. 대국민사기극이 따로 없었다.[123] 사실 견제와 균형이라는 허울 좋은 이미지가 덧입혀진 선조 대에 붕당정치는 통념에 가깝다. 그 시기 조차도 그러한 건전한 정치 발전은 커녕 후대에 숙종 대에 환국 보다 더한 살육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대동(大同)과 균역(均役)으로 대표되는 양대의 경장(更張)을 완수해 붕당정치가 제대로 된 성과를 낸 시기는 오히려 일당 우위하의 정국에서 한쪽이 정책을 추동한 때였다.[124] 신립이 북방에서 오랑캐를 토벌하고 한양에 입성하자 선조는 자기가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신립에게 입혀줬다.[125] 적전도주죄. 당시에는 이게 참수가 가능한 죄목이었고 실제로도 신각이 이 누명을 써서 죽었다.[126] 과거 태종이 이런 식으로 민무구와 민무질을 숙청했던 사례도 있었으니 덜컥 양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127] 동사,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다.[128] 전라좌수사보다 경상우수사가 격이 더 높다. 왜냐면 일본이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했던 유성룡의 천거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조판서시절 유성룡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권율을 광주목사에, 원균을 경상우수사로 천거한다.이때문에 유성룡의 천거를 두고 "원균옹호론"의 논거로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129] 사극에서 흔히 다른 부하들이 이순신을 '장군'으로 지칭하는데 이순신은 1591년부터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의 품계였기에 영감으로 불러야 맞다. 제일 정확한 호칭으론 수사 영감. 이순신이 정헌대부가 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후로는 통제사 대감으로 불렸다.[130] 첫 승전인 옥포해전에서 가선대부, 2차 출동 승전 후 자헌대부, 3차 출동인 한산대첩이 있은 후엔 정헌대부로 1차례씩 승진을 시켜주고 1593년 8월엔 삼도수군통제사 직을 신설하고 초대 통제사로 임명한다.[131] 전쟁이 발발해 이순신을 의심하기 시작한 이후론 류성룡에게 이순신이 글을 아냐고[191] 갑자기 모르는 사람 대하듯 물어보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진짜 믿을 수 있는 인물인지 의심스러워서 의문을 가지는 거지 선조가 바보라서 진짜 잘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192][132]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출소 후 멀쩡히 말도 타고 사람들과 술을 마신 걸 보면 고문은 그래도 약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갖춰놓고 안했을 뿐이지 사실상 죄도 없는 사람을 파직한것도 모자라 붙잡아와서 가둬놓고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한 것은 고문이나 다름이 없다.[133] 정유년 3월 13일 실록을 보면 이순신이 의금부로 압송되자 선조는 '참으로 역적이다.' '이젠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이제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라고 명하는 부분이 나온다.[134] 또 그런 측면에서 이해해주려 해도 구체적인 조건들을 따지고 들면 힘들다. 이성계는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전쟁 영웅으로서의 명망뿐 아니라 당장 기용 가능한 육군 병력을 전부 쥐어짠 5만여명의 통솔권을 가지고 있었다. 조민수와 지휘권을 반으로 나눠놨다곤 해도 그간의 군공이 그저 그랬던 조민수에 비하면 이성계는 화려한 전공으로 군영 내에서 실제 영향력 차이가 확연했다. 게다가 그 중 질적 주력은 이성계 집안의 사병가별초였고, 이들은 당시 고려 육군에서도 가장 강력한 부대였다. 여기에 더해 이성계 집안은 함경도와 만주 일부 지역에 걸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문이었다. 반면 이순신은 정치 활동을 일절 안하는 완고한 인물이라 이성계와 같은 권력을 가지진 못했다. 거기다 인원수가 적은 수군이라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다른 수만명의 육군을 이끄는 장수들이 적극 동조할 가능성도 매우 낮았다. 이성계가 배극렴, 박위 등 자신과 비슷한 계급의 장수들에게까지 교분으로 개인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것에 비해서 이순신은 자신의 상관인 도원수 권율이나 체찰사 이원익과 만나 술이나 한잔 마시는 정도였지 병마절도사와 같은 요직에 있는 인물들과 친분을 쌓은 바가 없다. 류성룡과 깊은 친분을 가지긴 했으나 이것이 중앙 정치에서의 권력 문제와 크게 연결되지도 않았다. 이순신의 집안 자체도 일반적인 사대부 집안이었지 이성계와 같은 대가문은 아니었다.[135] 명종은 송인종-송영종의 예를 받아들여 후계자로 책봉은 하지 않고 공인 정도만 하는 정도로 의사표시를 했다. 왜냐하면 책봉 후에는 무를 수 없는게 유교 예법이기 때문에 친자가 태어나면 정쟁이 생기거나 둘 중 한 명의 목숨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136] 훗날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는 자신의 아버지 정원대원군을 어떻게든 원종으로 추숭시켰는데, 비정상적인 무리수였기 때문에 반정 공신 가운데도 이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다. 인조가 명목상 인목대비의 양자였으나 항렬은 손자 뻘이라 어거지 논리라도 주장한 것이고, 명종의 아들 항렬인 선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137] 고종 역시 종법으로야 사도세자의 직계지만, 혈연으로만 놓고 따지만 인평대군의 후손이었다. 그 왕들도 먼 방계 출신임으로 인한 정통성 컴플렉스를 크게 가지고 있진 않았다. 철종과 고종 역시 선왕이 승하한 당시에 남아있던 왕족들 중에선 가장 높은 정통성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애당초 계승할 때 그런 상황까지 고려해놨기 때문이다. 선조보다 훨씬 먼 방계였고 조정의 상황도 훨씬 열악했던 고종조차도 방계 컴플렉스의 흔적이랄 건 그다지 찾아보기 힘든 막강한 왕권을 행사한 편이다.[138] 사대부도 원래 예법으로는 율곡 이이 처럼 친척이나 조카 대신 서자가 승통해야 하나 서얼은 과거 응시가 불허되므로 가문의 격이 떨어져서 양자를 들이는게 일반적이 된 것일 뿐이다. 조선 왕조의 모범인 중국 왕조와 향신 계층은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승통했고, 황제들도 후궁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139] 명종의 조카들은 의외로 정실부인에게 낳은 종친들이 적었고 덕흥대원군의 세 형제 정도였는데, 양자는 되도록이면 정실 소생의 친척에게 그리고 어릴때 들이는게 관례였다. 왜냐하면 어제까지 같은 신분으로 교류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주군으로 모시는걸 당시에도 껄끄러워 했기 때문이다. 작은형 하릉군은 중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직첩이 박탈되어 '전 하릉군' 이었고, 큰형 하원군도 장자라서 입양을 못하는 게 아니라 후에 기록으로 보면 행실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140] 서자나 서손 출신으로 승계하거나 세자가 된 왕, 왕세자가 조선 후기 영조, 경종, 효장세자, 사도세자, 문효세자, 순조, 철종 등이 있다. 왕비가 소생이 없기 때문에 후궁에서 낳았지만 왕비의 자식으로 인정 받으며 적장자로 세워졌지 누구도 출신이 후궁이라하여 부적격이라 여기지 않았다.[141] 조선 외척사 : 광해군 (1) - 인목왕후의 간택과 선조말 정국의 변동[142] 조선외척사 : 광해군(2) - 문화유씨의 성장과 광해군의 세자시절[143] 수렴청정할 대비가 없다보니 결국 신하들이 이를 대신할 이른바 '황표정치'라는 것을 하다가 수양대군 등 왕족들에게 꼬투리를 잡힌 게 바로 계유정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144] 선조 재위기를 예시를 들어 가정해보자, 당시 세자인 광해군이 갑자기 급사하고 선조 또한 급사하게 되면 이지(광해군의 아들)이 즉위할 가능성이 높은데 선조 사망 년도로 쳐도 이지는 겨우 10살인지라 만일 대비가 없다면 수렴청정할 사람이 없다. 물론 왕족들과 신하들이 조용하던 시대라면 모르겠지만 이 시기는 다행히 권신은 없었지만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 같은 막장 왕자들이 있던 시대다. 당연히 이러면 계유정난 시즌2 행이다. 이러니 차라리 대비라는 보험을 들어놓으면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므로 계유정난 시즌 2같은 일을 방지할 수 있다. 당시 평균수명이 낮다는걸 감안하면 50이 가까운 선조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셈이고 광해군 역시도 젊지만 언제 죽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145]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를 무력으로 손에 넣었지만, 그의 천하는 그가 죽기 전부터 불안한 조짐이 보이더니 그가 죽자마자 흔들리기 시작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사실상 남에게 넘어가고 결국 오사카 전투로 인해 완전히 무너진다. 임진왜란 내내 선조는 굴욕을 여러번 겪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딱히 굴욕이란 걸 겪은 것 같지 않았으나, 그들이 죽은 후 그들의 체제의 운명을 생각해 보면 선조는 임진왜란 때 보인 행보로도 무너지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직 그의 생존으로만 보장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146]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애시당초 오다 노부나가의 집안부터가 가신의 가신 집안이었는데 힘만으로 정상에 오랐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 때문에 변사하자 그 자리를 오다 노부나가의 선례를 따라 냉큼 가로챈 인간이었다. 당연히 정통성따윈 없다시피했고 그나마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고 조선에서 들여온 성리학을 정식으로 채택함으로써 안정화되었다. 그래도 도쿠가와 막부조차도 오고쇼같은 직책을 만들어서 쇼군의 승계를 보장받으려 했을 정도다. 거기다 역대 쇼군들은(도쿠가와 막부 외에 가마쿠라, 무로마치 막부 포함해서) 대부분 다른 다이묘들이 공가의 벼슬을 받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이런 벼슬자리는 쇼군들에게 반역할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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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편찬이 아직 절반도 못 되었는데 선조가 세상을 떠났다. 새 왕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경술년(1610년, 광해군 2)에 비로소 이 사업이 끝나서 왕에게 바쳤다. 이 책의 이름을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고 지었으며 모두 25권으로 되어 있다. (『월사선생집』권39, 서, 동의보감서)[148] 죄인 허준(許浚)의 죄악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라 다시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배된 후에도 기탄없이 방자하여 태연스럽게 출입하기를 평인과 다름없이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잠상인(潛商人)들과 내통하며 꺼리는 일이 없습니다. 본래 흉악 패려한 사람으로서 항상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뜻밖의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청컨대 위리 안치를 명하여 출입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허준에 대해서는 그가 어찌 방자하게 원망을 품는 일이 있겠는가. 내버려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광해 1년 4월 21일)[149] 전교하였다. "허준(許浚)은 호성 공신(扈聖功臣)일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근래에 내가 마침 병이 많은데 내국(內局)에는 노성한 숙의(宿醫)가 적다. 더구나 귀양살이한 지 해가 지났으니,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는 충분하다. 이제 석방하는 것이 가하다." (광해 1년 11월 22일)[150] 전교하기를,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 의방(醫方)을 찬집(撰集)하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유리(流離)하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건대, 선왕께서 찬집하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숙마(熟馬) 1 필을 직접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방서(方書)를 내의원으로 하여금 국(局)을 설치해 속히 인출(印出)케 한 다음 중외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 하였다. 【책 이름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인데, 대개 중조(中朝)의 고금 방서를 널리 모아서 한 권에 모은 다음 분류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 (광해 2년 8월 6일)[151] 내의원 〈관원이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하삼도(下三道)에 나누어 보내서 간행하게 할 일을 앞서 이미 계하하여 각도에 공문을 발송한 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책 수가 매우 많고 공사가 적지 않기 때문에 각처에서 탈보(頉報) 및 장계가 올라온 것이 전후로 한둘이 아니었지만, 각도에 재료를 준비해서 해가 바뀌면 즉시 나누어 간행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이 책은 다른 책과 달라서 두 줄로 소주(小註)를 써놓아서 글자가 작아 새기기가 매우 어려우며, 약명(藥名)과 처방은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사람의 목숨에 관계가 되는데 애초에 본책(本冊)이 없어서 필사본으로 한 부를 간행했을 뿐이므로 다시 의거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만약 외방(外方)에 맡겨 두면 시일이 지연되어 일을 마칠 기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착오와 오류가 생겨서 결국 쓸모없는 책이 되어 버릴까 염려스럽습니다. 신들이 이것을 염려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본원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여 활자로 인쇄하여 과거에 의서(醫書)를 인쇄해 낼 때처럼 의관(醫官)이 감수(監修)하고 교열(校閱)한다면 반드시 일의 성취가 빠르고 착오가 생길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해사(該司)의 물력(物力)이 곤란하기는 하나, 한 달에 들어가는 요미(料米)와 가포(價布)를 계산해 보면 미(米)·태(太)가 아울러 18석이고 무명이 20여 필인데 그 공정이 1년의 공사에 불과하므로 통계가 크게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해사로 하여금 혼자 마련하게 한다면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삼도가 앞서 재료를 마련해 놓았으니, 들어갈 무명을 헤아려서 각각 수송하여 경국(京局)을 돕게 한다면 공사간에 다 편리하고 이로울 것입니다. 신들이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 계획이 제일 낫습니다. 감히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 3년 11월 21일)[152] 물론 원균이 이 정도 수준이 되었다면 여기에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경상좌수영 등에도 소식을 알려 "지금 왜놈들 쳐들어 왔는데 빨리 와주셈" 이라고 하면 이순신, 이억기 등의 모든 수사들이 당연히 왔을 것이니까 일본군 입장에선 조선 수군의 대규모 함대와 해전에서 맞붙어 이기는 것부터 고민해야 할 것이며 최악의 경우 아예 해전에서 진 것 때문에 전쟁 자체를 포기하거나 설령 수군을 격파했다고 치더라도 이미 그 뒤에는 부산진성, 동래성에서 준비해 두었을 것이며 그것을 또 격파해도 제승방략으로 모인 조선군이 상대할 것이다. 그러니까 해전에서 조금 더 대응만 잘 했었어도 일본군의 임진왜란에서의 난이도는 훨씬 더 상승했을 것이다. 일본군도 한번에 10만명이 밀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1군, 2군, 3군 이러한 식으로 릴레이 방식으로 왔기 때문에 첫 1군쯤이야 원균에게 능력과 의지가 뒷받침 되었다면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규모 때문에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시간은 최소한 이순신과 이억기를 불러올 시간은 된다. 어쨌든 원균이 싸우기만 했다면 조선은 2중 3중 방어망을 구축하고 조선 수군이 결집해서 일본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153] 비변사가 아뢰기를, "해주(海州) 16사(司)에서 납입할 공물을 이미 반감하였는데, 이제 만일 전수를 감해 준다면 경중(京中)에서 쓸 것도 부족할 것이 염려됩니다. 요역마저 감한다면 중국군의 지대(支待) 등에 관한 물자가 다른 데서는 나올 데가 없으니, 감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전(內殿)의 공상(供上)까지도 이미 인근의 관아에 나누어 보냈으니, 본주의 공물은 비록 반수만 감한다 하더라도 은휼(恩恤)을 입는 것이 많을 듯합니다." 하니, (선조 27년 11월 16일)[154] 그러나 이 대공수미법은 시행된 지 1년도 못되어 폐지되고 말았다. 징수한 쌀의 수량이 예정과는 달리 매우 적어서 군량 조달에 차질이 생겼을 뿐 아니라, 정부의 소요 물품을 구입하는 일도 여의치 못하여 수시로 원래의 현물로 징수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155] 국가의 경비는 오로지 세입(稅入)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국가로서는 이보다 더한 급무(急務)가 없는 것입니다. 근년에는 1년의 세입이 겨우 4만여석에 이르고 있는데 1년의 경비는 7만여석을 믿돌지 않아 부족한 숫자가 거의 반이나 됩니다. (선조 39년 6월 25일)[156] 신들이 삼가 듣건대, 삼 년 동안 농사지어서 일 년 먹을 저축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나라가 나라꼴을 갖추지 못한다고 합니다. 지금 국가의 경비는 7만여 석인데 세입은 4만여 석에 불과합니다. (광해 1년 5월 29일)[157] 근래에 조세가 들어오는 것은 많지 않은데 경비는 날로 넓어져서, 1년 동안 들어오는 쌀로 반 년의 비용도 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응당 서울로 바치는 수는 겨우 5만여 섬뿐인데 1년에 필요한 쌀은 10만여 섬이며, 불시에 필요한 수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일을 담당하는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광해 12년 6월 15일)[158] 13) 黃愼, 秋浦集권2, 地部獻言啓 六條別單 “且我國六等之分 各以其道有禹貢上下之分 各以其州 是以京畿黃海江原兩界 則五六等多而二三等少 下三道 則一二等多而五六等少 此祖宗朝已定之舊規也 癸卯量田則不然 下三道五六等之多與上五道無異 田結之減縮 專由於此也 至於各道各邑流寓人所耕之地 則量田時雖以時起懸錄 旋卽移徙抛荒者 亦多有之 而收稅差役 每責於本土之人 偏受其弊此亦不可不 亟爲之變通者也 臣試以平時各道田結之數 較之於今日見在田結...(표 참고)八道見在田結 僅過平時全羅道田結之數而已....”(*밑줄은 필자) 황신이 추산한 임란 전과 광해군대 전결규모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93] 한편 유형원은 임란 전 8도의 토지규모를 1,515,591결로 산출하였다.(磻溪隨錄 卷6, 田制攷設 下)[159] 호조가 아뢰기를, "반정(反正)한 초기에 재성청(裁省廳)과 대동청(大同廳) 등을 설치하고 전후의 공안(貢案)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갑진년116)(註 116)(갑진년 : 1604 선조 37년.) 에 상정(詳定)한 것이 가장 적었기 때문에 계해년117)(註 117)(계해년 : 1623 인조 1년.) 이후로는 갑진년의 공안대로 시행할 것으로 결정해서 각 도에 알렸었는데, 임술년118)(註 118)(임술년 : 1622 광해 14년.) 조의 미수된 공물 등은 경술년119)(註 119)(경술년 : 1610 광해 2년.) 의 공안에 의하여 그대로 바치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 각 해사(該司)의 비용이 부족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년120)(註 120)(갑자년 : 1624 인조 2년.) 환도(還都)한 뒤에 호조와 예조가 함께 의논하여 대신(大臣)에게 결재를 받고, 또 양사(兩司)의 장관에게 물어서 견감할 만한 것은 견감하고 아래에서 감히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부표(付標)하여 입계(入啓)해서 성상의 재가를 받았으므로 견감한 것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인조 4년 10월 22일)[160] 여진족들은 금나라를 세우기전에도 고려가 무려 17만 대군을 동원하였음에도 갈라수 전투에서 패하는등 상당히 고전시켰고 금나라 시절에는 2차 여요전쟁에서 멸망직전까지 갔던 고려와는 달리 요나라를 상대로 멸망위기까지는 가지 않고 버티던 북송에게 정강의 변이라는 굴욕을 줬는데 그런 금나라도 실패한 군사적 업적을 조선 성종은 달성했다고 금나라 후손이 직접 인정하는것이다.[161] 대금(大金)은 바로 우리 원조(遠祖)로 그 강성함이 더할나위 없었지만, 올적합(兀狄哈)을 치려 하되 마침내 얻지 못했습니다. 근년에 올적합이 우리 동북 변방을 침범하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대군을 일으켜서 정벌하여 그 가옥을 불태워 탕진시켜서 편안히 살 수 없게 하니, 올적합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종(諸種)의 야인에게 종이 되고 말았소. #[162] 물론 약간의 변명을 해주자면 현대인들이야 원균이 무능한 장수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임진왜란 당시의 인물들은 칠천량 해전 이전까지는 원균이 무슨 전공을 세워 경상우수사가 될 정도의 인물이었고, 큰 실책은 아직 저지르지 않았으니 인물 됨됨이를 파악할 수 없었다는 것 정도는 알아두자. 그러나 원균은 임진왜란 전 인사 행정이 멀쩡하게 돌아갈 때도 자기 혼자 인사고과 최하점을 받아 탄핵당하는 등 무능한 밑천을 어느 정도 드러냈던 인물이었다. 더불어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개전 초기에 대규모의 경상우수군을 날려먹기까지 했지만, 당시 인력난에 시달리던 조선군에서는 도망갔거나 패했다고 일일이 다 죽이면 그 당시 경상도에 있던 관군 지휘관 중에 살아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일 뿐이다. 김시민, 박진, 유숭인, 이광악, 박홍 등은 모두 자질을 인정받은 지휘관들이지만 임진왜란 초기에 패했거나 공포에 질려 달아났던 전적이 있다. 이런 분위기 덕에 운 좋게 목숨줄을 달아뒀던 것이다. 게다가 원균의 이미지 메이킹과 처세는 현대 기준으로 봐도 정말 기가 막힌 수준이었다. 임금뿐만 아니라 당파를 불문하고 조정 중신들까지 전부 속여넘겼다. 칠천량 해전 이전에는 원균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던 이원익조차 평시에는 못 쓸 인물이지만 용맹하여 전시에는 쓸 만하다는 지금 보면 정신 나간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욕을 얻어먹을 소리를 했다. 원균은 무인으로서의 역량과 인격을 자기 포장과 처세술로 맞바꿈한, 정치가에나 어울리지 장군으로서는 절대 써먹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163] 그리고 아무리 원균이 이순신을 일방적으로 모함하고 음해했다고 하지만 결국 그를 믿지 못하고 시기한 나머지 파직시키고 백의종군하게 만든 것은 모두 선조의 손으로 직접 한 일이다. 긍정적 평가로 상술된 선조의 인재 등용은 선조가 류성룡의 추천이 있었든 없었든 선조의 선택에 의해 행해진 일이었고, 마찬가지로 이순신의 파직 역시 선조의 선택이었다. 원균도 원균대로 한심한 인간이지만 그에 앞서 절대적인 인사권을 가진 전근대 국가의 국왕인 선조가 비록 자기 명령을 거역했다는 죄는 지었더라도[194] 그 이외의 실책은 없는 유능한 장수를 함부로 파직하고 그 자리에 무능한 자를 올려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으니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무능한 장수를 자기 마음에 안 들어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르고, 자기 마음에 드는 유능한 장수로 앉혔다면 '결과는 좋았다'거나 '사실은 인재를 보는 엄청난 눈이 있어서 그랬다'라고 비호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195][196][164] 승기가 보이는 상황이라고는 하나 상대를 얕잡아보고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이순신이 없어도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을 압도한다라는 낙관만으로 유능한 장수를 팽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당장 위에서 선조와 비교 대상이 된 한고조 유방이 비정하다는 소리를 들었을지언정 후세에 욕을 먹지 않는 것은 항우를 죽임으로써 전쟁을 확실히 끝난 뒤 후환이 없을 만한 시점을 노려 한신을 비롯해 경포, 팽월을 토사구팽했기 때문이다. 토사구팽은 토끼 사냥이 끝난 후사냥개를 삶아죽이는 거지, 토끼 사냥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사냥개를 삶는 게 아니다. 거기다 유방은 비록 일부 지방 내정에 혼란이 있었을지언정, 제위에 오른 후 공신에게 적절한 보상과 벼슬을 내려 중앙집권을 확고히 했다. 반면 선조는 전시에 내정과 외정 모두가 혼란스러웠지만, 민심은 땅에 떨어졌을지언정 대소신료들이 왕권을 존중하고, 제일 큰 우군인 명나라도 조선의 국방을 지켜주고자 돕던 상황이었다. 그마저도 점차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우군인 명도, 아군인 조선도, 적군인 일본도 모조리 지쳐가는 마당에, 육해군 전체에서 최고의 전공을 올리고 명망이 드높던 장군을, 적절한 대체제와 전술 전략 없이 헌신짝 내던지듯 버려버린 것이다.[165] 또한,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태도를 토사구팽이라 말한다면 다른 대표적인 토사구팽 사례들과 선조 및 이순신의 사례를 비교해 볼 필요도 있다.[197][198][199][200][201][202][203] 그런데 위의 인물들의 행적에 비해 이순신이 '왕의 권위를 위협했다'고 하는 행동은 현대로 치면 초급장교 즉 군관을 비롯한 하위무관들의 부족으로 인해 자기 영역에서는 직접 과거를 열어 현지에서 관리를 등용하면 안 되겠느냐고 요청했다는 그것 하나뿐이다. 물론 시대와 상황의 차이를 감안하면 중앙집권체제인 조선시대 기준에서 감히 일개 장수가 나라의 관리를 직접 등용하겠다는 것은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겠다"는 식으로 들릴 정도로 도발적으로까지 받아들여질만한 요청임은 사실이고, 선조에게는 "어? 이 놈 봐라. 지역 군벌 만들려는 거 아닌가?"라는 위협으로 받아들였을 수는 있다. 하지만 '토사구팽'이라는 점에서 보면 다른 유명 토사구팽 사례들에 비해 선조의 (국내 정치적) 기반은 단단했고, 상술한 이순신의 행동이 선조의 위상에 끼친 위협은 그리 대단치 않았다. 즉 분명 심기가 좀 거슬릴 만한 일이기는 하나 봐 주려면 얼마든지 관대하게 봐 줄 수도 있었던 대단치도 않은 일로 유능한 장군을 함부로 토사구팽하려 들고, 그나마도 실패하여 국가의 안위까지 위협했다는 점에서 비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다못해 이순신에게 단순히 경고만 하는 선에서 끝났어도 선조는 실제보다 욕을 훨씬 덜 먹었을 것이다.[166] 정통성을 보유하고 있던 숭정제가 북경에서 그냥 자결하는 바람에 남명은 구심점 없이 여러 정권이 난립하여 교통 정리가 안 되었고, 그래서 청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했다. 덤으로 청나라는 도망을 안 쳐서 망한 점은 명나라와 비슷하나, 이쪽은 특정 권신배신할 가능성을 배제한 탓에 그 권신 때문에 망한 케이스다. 명나라(남명 제외)가 신하의 배신이 아니라 순수하게 반란군에 의해 멸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167] 비록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전선을 고착화시키기도 하고 민폐도 많았지만 명나라군의 전투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조선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조선이 거둔 승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정유재란 때는 명군이 지상군의 주력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5만~7만 4천 명 가량, 정유재란 때 파견된 명군 규모가 무려 9만~11만 7천 명이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나라 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역시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 군의 이러한 활약이 없었다면 설사 히데요시가 죽었더라도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김시덕의 임진왜란 열전) 김응서 vs 고니시 유키나가③[168] 참고로 의병장은 전부 양반이었다. 물론 그 양반들 밑에 자발적으로 모인 건 결국 민중이니 민중의 힘도 없는건 아니다.[169] 이쪽은 그냥 본토 방어를 완전히 포기하고 니들이 한반도 점령하든 말든 우리도 한반도 약탈하면서 강화도에서 버틸 거다 수준의 마인드였기에 선조보다 나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무신 정권은 한반도 본토를 방어할 의지 자체가 없는 상태로 몽골이 쳐들어오면 도망쳤다가 몽골군이 물러나면 다시 본토로 군대를 보내서 세금만 약탈해갔다.[170] 그나마 비슷한 예를 찾으라면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의 페타르 2세가 있는데 자신의 당숙이던 페타르 왕자는 친독 정책을 펼치며 국가를 보존했는데[204] 페타르 2세가 반독 성향 측근들과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친연합 내각을 설립했다. 물론 페타르 2세도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려했지만 쿠데타 과정에서 충분히 독일에게 모욕적인 행동을 한 것에 모자라 친연합 내각을 내세우자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이 사태를 자초한 왕이니 유고 국민들을 통합시켜 끝까지 싸워야 마땅했겠지만 영국으로 도망쳤다. 덕분에 유고는 거의 무혈에 가깝게 독일에게 점령당했고 잃어버린 명예는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들이 목숨을 걸고 항쟁하면서 지킬 수 있었다. 그 덕에 전후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은 페타르 2세에게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주재 어디 왕노릇하려나며 강하게 반발하며 항쟁 영웅 티토를 지도자로 내세우고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하기에 이른다.[205][171] 당시 그 둘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다. 광해군은 세자가 되기 전부터 자질을 인정받은데다 임진왜란으로 세자가 된 후 분조 활동을 통해 전쟁영웅이 된 상태였으며 즉위 당시 32세였으나 영창대군은 이제 겨우 두세살 어린아이였다. 거기다가 영창대군의 후원인이 될 인목대비나 그 아버지인 김제남이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당장에 인목대비도 선조의 선위, 대리도 가능하다는 말에 동참하는 교지를 내릴 정도로 자기 아들도 자신도 광해군의 경쟁 상대가 못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172] 나중에 인조반정 세력이 내세운 구호만 봐도 폐모살 즉 광해군이 임해군 죽인건 명분거리가 못된다는 거다.[173] 세종은 유달리 형제와 자식에게는 넘어갈 건 넘어가 주고 따듯하게 대했다. 그나마 큰아버지 정종의 자식이자 자기 사촌에게는 엄격하고 냉정하게 대했는데 그래도 죽이지는 않았다. 그나마 죽인 사람이 한 명 있는데, 어머니가 바람을 피워서 정종의 자손임이 확실치 않은 자가 정종의 아들이라고 계속 떠벌려대고 세종 본인의 경고까지 무시해서다.[174] 물론 이후로도 직전세의 명목은 한동안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말기로부터 국가재정의 부족을 이유로 직전 명목을 혁파하려는 논의가 속출하고 있었다. 또 직전세의 환급을 중지하고 그것을 국고로 귀속케 하는 시도가 단속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더구나 16세기에 가서는 연분등제가 ‘下下’로 책정되는 것이 관례화하자 직전세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명종대에 가서는 유명무실해진 명목조차 흉년의 빈번, 변방의 소요 등에 따른 국가재정의 부족으로 소멸되었다.061)061)(金泰永,<朝鮮前期의 均田·限田論>(≪國史館論叢≫5, 1989), 金泰永, 위의 책, 140∼141쪽. 李景植,≪朝鮮前期 土地制度硏究≫(一潮閣, 1986), 李景植, 앞의 책, 265∼279쪽.) 그리고 이로써 적어도 고려 초기 이래 운용되어 온 관인층에 대한 신분제적「分給收租地제도」는 우리 나라 역사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2. 과전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 1) 과전법체제의 붕괴)[175]후집(後集)》 《호전(戶典)》에 있는 조문[206]의 예시를 하나만 보자면 주해의 대상인 원래의 조문[207]과 대조해 봤을때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상을 당하거나 사망"이라는 대전제를 두 번 반복하지 않고 경우를 나눠서 전자(기한 이전)는 다시 경우를 제한하고 후자(기한 이후)는 경우를 제한하지 않아 논리적 관계를 명료하게 하는 《후집(後集)》의 조문이 원래의 조문보다 훨씬 간결하고 해석 또한 명확하게 되는 것을 단박에 쉽게 알 수 있다.[176] 『경국대전주해』의 편찬 때에 부수적인 작업으로서 주해관들이 『경국대전』의 간단한 자구를 주석했는데, 이것은 국왕의 결재를 받지 않고 참고용으로 간직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해관인 안위가 1554년 3월에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 : 忠淸道觀察使)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에서 안위에게 『경국대전주해』와 자구 주해를 함께 인쇄, 간행하게 하여 10월에 청주에서 발간한 것이 있다. 이것은 『경국대전주해』를 전집으로 하고 자구 주해를 후집으로 하여 꾸며져 있는데, 이 후집도 유권적 해석으로서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출처: 경국대전주해 (經國大典註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77] 각사수교[178] 선조 대에 발령된 입법실적이 처참한 것은 국정에서 핵심적인 이호예(吏戶禮) 삼전(三典) 통틀어 후대에 쓸만한 조(條)가 꼴랑 9개(《이전(吏典)》 3개;《호전(戶典)》 5개;《예전(禮典)》 1개)에 불과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208] 반면 《수교집록(受敎輯錄)》에 등재된 명종 대에 발령된 조(條)는 50개(《이전(吏典)》 7개;《호전(戶典)》 14개;《예전(禮典)》 29개)이다. 전란 전에 기록부족을 거론할 수도 있겠으나 《병전(禮典)》 군제조(軍制條) 수교(受敎)를 보면 41개인 이 항목에만 무려 12개를 선조 대에 박아 놓았으며 전란 전후 가릴 것이 없이 년도(4년;4년;6년;13년;13년;15년;20년;24년;35년;37년;37년;38년)도 굉장히 꾸준하고 고르게 분포되었다. 역대국왕 통틀어도 압도적 1위인데 한마디로 관심 있는 부분에만 몰입했다고 할 수 있다.[179] 다만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 같은 업적[209]은 이후 백년간 개혁의 효시[210]가 되었다.[180] 수교집록[181] 이는 <각사수교>를 책으로 묶은 관서는 승정원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12)(12)(具德會, 1997, <<各司受敎>.<受敎輯錄>.<新補受敎輯錄> 解題> 서울대학교 규장각 영인본 참조.)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졌던 '丙子'년은 1636년(인조 14, 崇禎 9)으로 보이는바,(13)(13)(이 '병자'년조는 앞의 '萬歷 元年 癸酉'(1573, 선조 6) 기사의 흐름을 잇는 것으로 보면 萬歷 4년(1576, 선조 9)가 되겠고, 뒤의 '己巳'(인조 7, 崇禎 2)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면 1636년(인조 14, 崇禎 9)가 될 수 있다. 그 내용으로 보건대 <각사수교>를 필사한 뒤에 이와 관련되는 내용을 추기한 것으로 볼 수 있겠으며, 그렇게 본다면 후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명종 연간의 <각사수교>를 필사하고 거기에 추록을 추기하여 책으로 묶은 것으로 보인다. 명종 이후 선조, 광해군 연간에는 수교를 정리하여 輯錄하려는 논의가 이루어졌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후기 法編纂推移와 政治運營의 변동>, 177)[182] 時務에 보다 적극적이었던 일부 관료와 재향 사족들은 이러한 실정의 개선을 위하여 국지적으로나마 나름대로 匡救策을 마련하고 시행하여 갔다. 大同除役으로도 일컬어졌던 이른바 私大同은 그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명종말기에 처음 시행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사대동은 몇몇 군현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그 군현에 부과된 모든 京納物(중앙정부와 왕실에 바치는 공물과 진상물들)을 군현 내의 모든 田土에서 균등하게 징수한 쌀을 가지고 시장에서 구입하여 납부했던 데서 대동법의 선구를 이루는 관행이었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183] 호조가 아뢰기를, "청홍도 관찰사 민기(閔箕)가 해미현(海美縣)이 가장 잔폐하였기 때문에 견감(蠲減)할 일을 【유민(流民)의 전답(田畓)에 요역을 면제할 것, 미수 공물을 양감하거나 이정하거나 쌀로 대신 바치게 할 것, 미수 소금을 풍년이 든 뒤에 수납할 것, 미납된 선상대포(選上代布)를 견감할 것, 왕년의 공채(公債)를 양감할 것 등 95조목이었다.】 조목별로 열거하여 계문하였습니다. 해미현의 잔폐가 더욱 심하니 진계(陳啓)하는 것이 과연 마땅합니다. 풍년을 기다려 미수염(未收鹽)을 거두고 공물(貢物)을 쌀로 대신하게 하는 것은 본조(本曹)의 공사(公事)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묵은 토지에 대하여 요역(徭役)을 면제하고, 공물을 이정(移定)하는 것과 왕년의 공채와 선상대포와 미납공물을 견감하는 것은 모두 특은(特恩)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품계하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진지(陳地)의 요역을 면제하고, 공부(貢賦)를 다른 관아로 이정하며, 미납공물과 선상대포는 반감하고, 왕년의 공채는 3분의 2를 감하라." 하였다. (명종 17년 7월 28일)[184]수교집록(受敎輯錄)》 전체 986개(《이전(吏典)》 115개;《호전(戶典)》 161개;《예전(禮典)》 130개;《병전(兵典)》 181개;《형전(刑典)》 392개;《공전(工典)》 7개) 중 이호예(吏戶禮) 삼전(三典) 406개(《이전(吏典)》 115개;《호전(戶典)》 161개;《예전(禮典)》 130개)[185] (註 018) 정공 도감(正供都監) : 각 고을의 공물을 균등하게 징수하기 위하여 특별히 설치한 관직.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선조(宣祖) 3년 11월 조(條)에 "정공 도감을 두었는데 이는 이준경(李浚慶) 등이 민폐를 구제하기 위하여 특별히 도감을 두어 삼공이 이를 관장하고 조정 선비로서 재주와 학식이 있는 사람을 뽑아 낭관에 충차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186] 지난 정미년058)(註 058)(정미년 : 1607 선조 40년.) 에 이충(李沖)이 본조의 판서로 있을 때에 전라도와 공홍도 등의 바닷가 고을의 공물을 병진년059)(註 059)(병진년 : 1616 광해군 8년.) 이후의 것에 대해서 제사에 필요한 공상(供上)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미(作米)하도록 하여 경비에 보태자는 일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광해 12년 6월 15일)[187] 공물을 작미(作米)하는 일에 있어서는, 이번에 본 호조에서 각사를 취사 선택해서 작미하거나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체 전의 규정에 의거해서 하였으며, 제향(祭享)과 어공(御供)에 관계되는 것은, 성상의 분부에 따라서 작미하는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광해 9년 3월 8일)[188] 성종 본받겠답시고 《동문선(東文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覧)》, 《대전속록(大典續錄)》 이것들을 각각각 《속동문선(續東文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이것들로 이른바 속찬증보(續撰增補)[211] 한 것 정도의 업적은 남겼다.[189] 비변사가 아뢰기를, "해주(海州) 16사(司)에서 납입할 공물을 이미 반감하였는데, 이제 만일 전수를 감해 준다면 경중(京中)에서 쓸 것도 부족할 것이 염려됩니다. 요역마저 감한다면 중국군의 지대(支待) 등에 관한 물자가 다른 데서는 나올 데가 없으니, 감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전(內殿)의 공상(供上)까지도 이미 인근의 관아에 나누어 보냈으니, 본주의 공물은 비록 반수만 감한다 하더라도 은휼(恩恤)을 입는 것이 많을 듯합니다." 하니, (선조 27년 11월 16일)[190] 그러나 이 대공수미법은 시행된 지 1년도 못되어 폐지되고 말았다. 징수한 쌀의 수량이 예정과는 달리 매우 적어서 군량 조달에 차질이 생겼을 뿐 아니라, 정부의 소요 물품을 구입하는 일도 여의치 못하여 수시로 원래의 현물로 징수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191] 한문을 읽을 줄 아느냐는 뜻이 아니라 유학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묻는 것이다.[192] 이순신은 무관이다. 무관의 경우 유학적 소양을 문과보다는 덜 해도 되었는데(정작 이순신은 평균적인 무관과는 다르게 문관에 가까울 정도로 배운 사람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무과시험에서도 유교 경전 독해 시험이 있었기에 문관만큼은 아니더라도 무관에게도 유교 소양이 필수였다. 국교가 유교인 국가라 당연하다면 당연할 일. 실제로 고려시대에는 무관들의 글이 짧거나 심하면 아예 문맹도 부지기수라 총사령관은 문관이 맡고 무관은 바로 밑에서 실무자 역할밖에 못 했다. 강감찬서희도 사실 문관이었다.) 선조의 경우 어쨌거나 혼란한 상황속에서 유교적 소양, 정확히 말해서 충효가 중요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류성룡에게 이순신이 글을 아냐고 물어보는건 적절한데 만에 하나 이순신이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여태껏 승승장구해오던 이순신의 반란은 이몽학[212]의 반란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할 수 있고 임진왜란이라는 최악의 악재 속에서는 끔찍한 악몽이다. 그나마 충효라도 확실히 갖추고 있다면 반란만은 피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점을 다 떠나더라도 이미 역사상 힘 있는 무신이 나라 뒤엎는 일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