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23:18:09

보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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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묘사되는 보부상 모습 (출처)

1. 개요2. 역사
2.1. 개항 이전2.2. 개항 이후2.3. 대한제국 시기 이후2.4. 일제강점기 이후2.5. 광복 이후2.6. 50년대 이후
3. 조직4. 분류
4.1. 소규모
4.1.1. 보상 (褓商: 봇짐장수)4.1.2. 부상 (負商: 등짐장수)
4.2. 전국단위
5. 창작물에서의 보부상6. 관련 문서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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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褓負商

행상인의 일종. 주로 보부상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부보상이라고도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보부상과 부보상이 동의어로 올라 있으나 한국전통상학회를 비롯한 학계에서는 부보상이 옳은 표현이라고 주장한다.#1, #2 보부상•부보상이라는 용어는 등짐장수인 부상(商)과 봇짐장수인 보상(商)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이 외에도 '장돌뱅이', '장돌림', '장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조선시대 등 전통 사회에서 장시를 중심으로 지게나 봇짐으로 물건을 가지고 다니며 판매하던 전문 떠돌이 상인, 또는 이들이 속한 단체를 말한다. 중세시대 유럽의 길드나 현대의 조합과 비슷한 뜻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2. 역사

2.1. 개항 이전

조선 건국 당시 부상 백달원이 석왕사를 증축할 때 도움을 주고, 이성계가 여진족을 토벌하다 부상입었을 때 보부상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 대가로 이성계는 보부상 조직을 허락하고 행상권을 그들에게 전담했다고 한다.

이후 보부상들은 여러 활약을 하는데 가령 임진왜란행주대첩에 수천 명이 참가하여 식량과 무기를 조선군에 보급하여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공헌했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에도 남한산성으로 식량을 운반하는 데 큰 역할을 하여 이후에 어염, 목기, 수철 등 다섯 가지 품목의 전매권을 부여받았다고 한다. 수원화성을 축조할 때도 보부상들은 석재와 목재 보급과 가공을 맡아 장안문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다만 이러한 설과 내용들은 당대 자료에서 확인되는 것은 아니고 19세기 이후 자료에서나 확인되는 지라 신빙성이 떨어진다. 애초에 보부상이란 표현도 19세기 이후 자료부터 등장한다. 다만 보부상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으로 부르던 개인, 집단이 형성되고 정립되던 시기가 그렇다는 것이지 떠돌이 상인이라는 존재 자체는 고대부터 여러 문화권에서 모습을 보인 만큼 보부상과 비슷한 역할을 하던 이동상인 자체는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미천왕이 소금장수를 했다는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2.2. 개항 이후

보부상단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는 시기는 개항 이후이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상병단(商兵團)이 조직되어 조선군에 군량을 보급한 것을 계기로 보부청이 설치되었다. 이는 1883년 혜상공국의 설치로 이어진다. 혜상공국의 설치를 계기로 보상과 부상이 완전히 합쳐졌고 이후 군국아문에 부속되었다. 1885년 혜상공국이 상리국으로 개칭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부상은 좌단(左團), 보상은 우단(右團)으로 구별하면서 통합하여 관리했다. 이들은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동학농민운동 때 정부군과 함께 동학군 토벌에 앞장서기도 했다.

2.3. 대한제국 시기 이후

독립협회가 활동하던 시기에 황국협회를 결성해 독립협회와 대립했다. 이후 고종이 독립협회와 황국협회를 모두 해산하자 정부는 독립협회 해산의 보상으로 황국협회의 청원을 받아들여 상무회의소를 보부상 중심의 상무사로 변경하였다. 상무사는 관료가 고위직을 겸임하는 형태의 국가어용상단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이 상무사 중 제주에 있었던 대정상무사는 제주교안 시기 세금징수관과 결탁한 천주교 세력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고한다.

일제 강점 이후 일제는 보부상 말살을 시도하여 전국의 보부상 단체는 거의 소멸되었다. 구한말 정치적 목적에 동원되다 보니 보부상단의 내적 발전보다는 외연적 확장에만 치우쳤고, 일제 자본에 밀려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2.4. 일제강점기 이후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물화를 전국 방방곡곡에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 또는 집단들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이로 인해 새로운 보부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특정 세력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간적 차원의 보부상. 즉, 요즘 말로 하면 민간배송업자 및 영세상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보부상들은 활발하게 활동했다. 보부상의 주류가 관영 보부상에서 민간 보부상으로 바뀌었다지만, 실제 모든 관영 보부상들이 정치적인 색채를 가진 것도 아니었기에 관영 보부상들 중에서도 세력에서 이탈하고 민간 보부상처럼 활동하는 경우도 많았다.[1]

보부상들의 주요 업무는 조선시대 때와 같이 지역 특산품을 가져다가 다른 지방에다 팔고, 그 지방의 물화를 사다 또 다른 지역으로 가져가서 파는 일이었다. 일제시대 때도 철도가 있었다지만 서울-인천, 서울-대구-부산처럼 큰 도시들끼리나 겨우 잇는 정도였고,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신작로)도 여럿 만들어졌지만 그래도 도로가 안 뚫린 곳이 훨씬 더 많았고 무엇보다 당시의 자동차는 일반 물화까지 옮기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했다. 때문에 이런 철도와 자동차를 사용하지 못하는 여러 일들은 보부상들이 순전히 사람이나 동물의 힘만으로 해결해야 했기에 보부상들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물화를 공급했던 것이다.

2.5. 광복 이후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보부상들은 활발하게 활동했다. 아직까지도 자동차는 부족했으며[2] 일제 시대 때는 일본이 동남아 지역에서 수탈해온 기름이라도 공급됐지, 광복 이후의 연료는 오로지 미군에게서 나오는 것밖에 없었기에 기름값도 말도 못하게 비쌌다. 때문에 여전히 전국의 생필품 공급은 보부상들이 활발하게 공급했던 것이다.

한국 전쟁 때도 많은 보부상들이 국군과 미군에게 탄약과 포탄, 식량, 각종 물자를 지원하는 역할을 자진해서, 또는 징집되어 수행했으며, 이는 북한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보부상만이 이런 일을 한 것은 아니고 보부상 이외의 민간인들도 참여했다. 자세한 것은 '지게부대(A-Frame)' 참조.

2.6. 50년대 이후

한국전쟁이 끝난 후로도 한참 동안 보부상들의 활동은 끊이지 않았다. 남북이 단절되면서 남상(南商)과 북상(北商)의 활동도 끊어지게 되었지만, 적어도 대한민국(남한)에서 보부상들은 꾸준히 활동해 왔다. 전쟁은 끝났지만 이 때까지도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는 인구가 적어도 삼만 명 어림은 되는 도시끼리만 연결되어 있었고 이 정도 규모의 도시를 보통 읍이라 했다. 실제 당시를 촬영한 기록물을 보면 '읍내' 정도는 돼야 자동차가 다닐만한 비포장 도로라도 있지 이 외에는 전부 지게로 옮기거나 소달구지 정도나 겨우 지날 수 있는 시골길이 전부였다. 때문에 많은 보부상들이 활동을 하며 산지와 산지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흔적이 남아있는 보부상단로는 울진부터 시작해서 봉화까지 이어지는 십이령길이 유명하다.

3. 조직

보부상은 행적이 일정하지 않고 생활이 불안정한데다, 각지를 돌아다니다 맹수나 도적에게 피해를 입기 쉽다보니 이를 막고자 조직을 형성하였다. 조직을 형성하다보니 조직원간의 규율과 상호부조에 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보부상들의 규약과 규율이 입의(立議)나 절목(節目)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보부상의 기구로는 보부상의 숙소인 도방과 의견 수렴과 의결을 맡은 임방이 있었다. 임방은 각 도, 군부터 읍단위까지 설치된 지방 기구였다. 임방은 상표가, 적립금, 벌전, 부의전, 왕실지원금, 상업세로 경비를 충당했으며 주로 상호부조와 동료간의 신의, 상도의 실천을 추구하며 자치적으로 운영했다. 임원들이 어지간한 일을 처리했지만 자체적으로 임원들이 처리하기 어려운 일은 관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보부상들은 오늘날의 상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규율을 갖춘 집단이었다. 단순 상인들이라기보다는 사실상의 준군사조직에 가까웠다.# 신의와 상도의를 중시하면서 남녀 분별에 엄격하다보니 이를 위해 규율도 엄격해진 것으로 보인다. 보부상 중에서는 처자를 같이 데리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보니 도방에서 남녀가 혼숙하는 경우 또한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풍기문란을 막기 위해 여자 보상들은 형수나 제수처럼 대접하도록 했고, 이를 어길 경우에는 엄하게 처벌받도록 규정되었다.

보부상은 대개 가족 없이 홀로 다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상단을 조직하여 상부상조하며 상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보부상들에게 상단은 강한 단결력과 엄격한 규율을 바탕으로 한 절대적인 것이었다. 때로 상단 내에서 연락할 일이 있을 경우 사발통문이라는 독특한 연락방식을 활용하였다.

소속이 다르더라도 같은 보부상[3]이 어려움에 처해있으면 항시 발벗고 나서야만 했고, 병에 걸린 동무가 있으면 일면식이 없는 이라도 병구완을 해야했으며 혹 상을 당하면 장례도 치러줘야만 했다. 아무리 바쁘고 장시가 열렸다고하더라도 행수의 지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수행해야 하며, 설혹 범죄에 연루되더라도 동료의 이름을 불어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존재한다.

만약 행수나 윗사람의 정당한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사전에 약조한 물건이 아닌 다른 것을 취급하거나, 도둑이나 사기, 겁간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이는 정해진 법도에 따라 사형(刑)을 내렸는데, 그 참혹함이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여러 사서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사극을 비롯한 대중매체에서는 무력이랑은 거리가 먼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상술했듯이 엄격한 규칙과 자체적인 무력도 갖춘데다 규칙 위반자에 대해선 사적제재를 가할 정도였다. 특히 보부상들이 자체적으로 형벌을 내릴 때는 육방관아의 관속들조차 형벌이 모두 끝나고나서야 개입할 수 있었으며, 이를 무시하고 형벌을 방해했다가는 관속들은 물론이고 양반까지도 서슴지 않고 해코지를 해서 일반 백성들은 물론이고 포졸이나 양반들까지도 자리를 피할 정도였다. 좀 과장된 의견이지만 형벌 집행을 방해하면 상대가 양반이거나 포졸이라 해도 해코지할 정도로 사실상 무력집단 정도를 넘어 조선시대의 조직폭력배의 원류로 보는 의견도 있다. 또한 구한말 황국협회 같은 경우 보부상들이 주축으로 모인 집단이라 일종의 정치깡패 역할도 했다는 의견도 있다.## 대한제국 시절의 정보기관 중 하나였던 대한제국 상무영 역시 보부상들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형벌을 방해하는 자는 관속이든 양반이든 해코지를 했다고 해서 이들이 굉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보부상을 포함한 상인 계층은 사농공상의 말석이라 대우도 매우 박했고 지방 관아의 돈줄이어서 법에도 없는 각종 잡세에 시달렸으며 그렇다고 해서 어디에 호소할 수 있는 곳도 없었다. 형벌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공격성을 드러냈다는 것도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안 된다. 조선시대는 법적으로는 금지되었지만 사형(私刑)이 꽤나 널리 행해졌다. 향촌 단위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몰매준다거나 머슴이나 노비를 주인이 멍석말이를 하는 것쯤은 그리 드문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보부상들이 자기들끼리 자기 구성원의 죄를 묻는다는데 애초에 간섭할 사람도 적었고, 사회적 시선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조선이 당시의 전근대 국가들 가운데서는 아주 높은 수준의 정부조직과 행정력을 구축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현대와 비교하기엔 전근대의 한계 자체를 뛰어넘는 정도까지 이르렀던 것은 아니고, 조선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의 전근대 사회에서는 공권력이 미처 미치지 못하는 사회의 구석구석은 사적 조직의 사적 질서로 인해 통제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세계에서 가장 빨리 근대국가화 과정을 겪은 나라 중 하나라고 해야 할 영국같은 나라를 보더라도 19세기까지 수도인 런던에서마저 치안판사직이 설치되어 있을 정도였다. 즉 "경범죄나 사소한 분쟁 정도는 그냥 학식있고 존경받는 동네 유지 어른이 알아서 판단하고 해결해라. 대신 국가는 '이 사람은 치안판사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인증하는 역할 정도는 할게" 정도인 상황이었던 것.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나타난 보부상들의 자치적, 자경적 조직을 무작정 '공권력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철저한 영향력을 끼치며 사적 폭력, 사적 제제 등으로 인한 사적 질서 유지 시도를 철저히 배척하게 된 현대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이것은 법 위에 군림하는 초법적 집단이었는가!' 식으로 설레발칠 일이 아니라는 것.

사실 보부상들이 자체무장을 갖춘 것은 당시 산적들을 비롯한 도적들이 존재하기도 했기에 필연적이기도 했는데, 이는 과거 실크로드에 도적들이 들끓어서 무역상들은 자체적으로 무장을 갖추거나 용병들을 대동했던 것과도 같다.

4. 분류

4.1. 소규모

'보상'과 '부상'으로 나뉜다.
보상과 부상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없었으며 그들의 힘이 커지고 상권이 뚜렷이 구분되면서 별도의 조직을 갖추었다.

4.1.1. 보상 (褓商: 봇짐장수)

상품을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장사했다.
걸어다니며 물건을 판매하기 때문에 싸고 무거운 걸 들고 다닐 수 없어서 주로 포, 면, 비단, 종이, 모시, 금, 은, 동, 인삼, 녹용, 수달피, 담비가죽, 갓 망건, 필묵 등 가볍고 작지만 값비싼 상품을 취급했다.
개항 이후엔 우산, 궐련초, 성냥, 옥양목, 광목, 사탕류 등 외국 상품도 판매했다.

4.1.2. 부상 (負商: 등짐장수)

상품을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며 장사했다.
생선, 소금, 나무그릇, 질그릇, 가마솥이나 무쇠로 만든 용기 등 무겁고 크지만 비교적 값싼 5가지 상품에 대한 전매특허권을 가지고 있었다.

4.2. 전국단위

전국단위로 활동한 대표적인 상인들은 지역에 따라 크게 다섯 가지 부류가 있다.
  • 경강상인: 서울(京)과 한강(江)을 거점으로 활동한 상인들이다. 서울로 들어오는 쌀을 전국 각지에서 조달하였다. 한강과 연안 수운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주 활동 무대가 서울이다보니 정경유착이 심했다.
  • 송상: 개성(송악)을 거점으로 상업 활동을 한 상인들이다. 주로 개성의 특산물인 인삼을 재배·판매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 유상: 평양(유경)을 거점으로 하던 상인들이다. 의주와 개성의 중간에 있는 지리적 특성상 만상과 송상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 내상: 부산(동래)을 거점으로 하던 상인들이다.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다. 왜관이 자리한 동래에서 일본산 수입품을 입수하여 조선팔도에 유통했다.
  • 만상: 의주(만부)를 거점으로 하던 상인들이다. 일반 보부상들과는 달리 중국과의 비공식 무역을 주로 했다. 즉, 국제상인들.[4]

5. 창작물에서의 보부상

게임에서는 보통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희귀한 아이템이나 효과가 좋은 아이템을 판매하거나 던전이나 사냥 도중 등장해 포션 등의 보급품을 판매하는 NPC로 나온다.

소설이나 드라마 등지에서는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걸며 귀찮게 하거나 떠돌면서 방랑하는 모습이 중점적으로 그려진다.

6. 관련 문서

7. 기타

  • 물물교환을 기본으로 하던 원시 형태의 보부상은 자급자족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 곳에서 문명세계의 물건을 전해주고 전통세계의 물건을 가져가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 계속해서 돌아다녀야 하는 직업 특성상 역마살과 연관짓는 경우가 있다. 이를 메밀꽃 필 무렵 등 보부상이 주인공급인 많은 작품에서 이러한 연관성이 나타난다.
  • 보부상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패랭이 모자에 목화솜을 올린 것인데 이 목화솜은 행상 중 입은 상처를 지혈하는데 주로 썼지만 보부상임을 알리는 상징이기도 했다. 야사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부상을 입었을 때 지나가던 보부상이 목화솜을 꺼내어 지혈을 해줬고 이러한 공으로 보부상들만이 패랭이에 목화솜을 올릴 수 있도록 했다는 일종의 명예로운 상징이라는 얘기. 처음엔 1개만 달고 다녔는데 이후 목화솜으로 행인을 구하는 일화가 또 다시 생겨서 1개가 더 늘어났다.
  • 은어로 가방에 짐을 많이 넣고 다니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도라에몽 내지 바리바리스타라고도 부른다. 상비약, 물티슈, 충전기, 우산, 구급상자 등을 같이 가지고 다니면 준비성이 철저하다고 들을 만한 기본적인 물건들을 넘어서 양말, 순간접착제, 스테이플러, 전기 드릴, 심지어는 간이 소화기까지[8] 별별 물건들을 다 가지고 다닌다.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필요할 상황이 올 때, 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한 친구나 사람들에게 물건을 빌려줄 때가 보부상들의 보람이라고 한다. 또 자연재해나 전쟁 등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생존가방을 만들어 여러 물건들을 갖고 다니기도 한다. 다만 가방이 너무 무거워지면 몸이 축나므로 조심하는 게 좋다.


[1] 경강상인, 시전상인처럼 서울에 세력을 두고 있는 상단들이 정치지향적이었지 원래부터 내상이나 송상, 만상 같은 지방 상단들은 장사에만 전념하고 싶어했다.[2] 한국에서 일반인이 자동차를 가지고 타고 다녔던 이른바 '마이카 시대'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최소한 3저 호황이 왔던 1980년대부터나 가능했다. 그 이전까지 자동차는 부와 권력을 가진 최상위 부유층들만 타고 다니던 사치품이었다.[3] 채장(債帳: 빌린 돈의 액수를 적는 장부)이 있는 이들만 같은 보부상으로 인정했다.[4] 현대로 치면 국제보따리장수들과 비슷하다.[5] 정착하는 삶과 방물장수로서의 떠도는 삶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형상화 되어 있다. 실제로 이 시를 지은 신경림은 2012년 6월 29일자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0대 때 삶에 대해 고뇌하면서 공사장이나 광산 등을 전전하다 방물장수들을 따라다니며 방랑했다고 밝혔다.[6] 실존인물이지만, 최인호의 이 소설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7] 작품 말미에 성기가 엿판을 맞추고 그와 동시에 팔 책과 잡동사니도 챙긴 후에 화개장터를 떠나게 되므로 엿장수 뿐만 아니라 보부상의 삶을 살게 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8] 실제로 소화기를 들고 다니던 한 청년이 거리에서 화재가 나자 소화기로 진압한 사건이 있다.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