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11:50:42

사발통문

동학농민혁명
東學農民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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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동학 농민 혁명4. 기타

1. 개요

파일:external/murutukus.kr/q08200044.jpg
계사(1893년) 11월 일
(서명)[1]
각 마을의 마을 집강(執綱) 귀하
위와 같이 격문을 사방에 빨리 전달하니 사람들의 논의가 비등하였다.
매일 멸망할 것이라고 노래하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하며 기일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이때에 도인(道人)들은 전후의 방책을 토의·결정하기 위하여 고부(古阜) 서부면(西部面) 죽산리(竹山里) 송두호(宋斗浩)의 집으로 도소(都所)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순서를 결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목을 베어 매달 것.
1.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1. 군수에게 아첨하여 백성들을 괴롭힌 탐관오리들을 처단할 것.
1.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한양으로 곧바로 진격할 것.
위와 같이 결의가 이루어지고 따라서 군사전략에 능하고 여러 일에 민첩한 지도자가 될 장...[2]
동학 농민 혁명의 사발통문 출처
사발통문(沙鉢通文/Round-Robin)은 일, 봉기, 사건 등의 행위를 할 때, 주동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이름을 적은 문서. 이름을 둥글게 적는건 계 같은 모임에서 쓰기도 했지만 사발통문은 그냥 기록 해두는 문서가 아니라 최대한 멀리 내용을 전파하기 위해 여러사람이 돌려 보는 문서이다.

2. 특징

과거 조선은 일반인이 사용 할 통신망이 없었고, 소문도 돌고 돌다 보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기 어려웠다. 당연히 그냥 소문 정도라면 흘러흘러 가도 별 상관 없지만 호소문이나 격문, 아니면 사실관계가 중요한 통보서 같은 것은 말로 전하다 보면 와전될 수도 있고 하니 역시 종이로 기록해야 정확했다.

특히 보부상들이 애용했는데, 떠돌아 다니는 보부상의 특성상 여러 사건사고가 많이 있었고 보부상 집단에 전파하기 위해 썼다. 보통이라면 상위 조직에서 하위조직 그리고 말단 보부상까지 일방적으로 통지하는 통보서 같은 역할을 했지만 그 외에 여러 역할로도 쓰였다. 예컨데 어느동네에서 모모가 보부상 누구와 원한지고 도망치고 있으니 찾으면 잡아라. 같은 내용이나 어느동네 사는 누구가 보부상 모모에게 원한을 졌으니 언제 모여서 혼내주자! 라던가 어느동네 사는 보부상의 누구의 가족이 언제 죽었으니 찾아가라 등등. 다만 보부상의 경우 특별히 사발을 둘러 이름을 쓰지 않는 통문만 사용하기도 했다.
사발종이에 엎어둔 후 사발 둘레를 따라 한 사람씩 세로쓰기로 둥글게 이름을 적은 특성 덕분에 누가 시작점인지 알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그냥 일렬로 이름을 늘어놓을 경우 그 순서를 바탕으로 발신인들의 서열이 들통나거나, 반대로 맨 앞에 적힌 사람이 덤터기(?)를 쓸 위험이 있기 때문에 나온 아이디어.

이름의 경우 내용의 사실을 보장하는 인물들이 돌아가며 이름을 쓰기도 했지만 그 내용을 읽고 유통시킨 사람의 이름을 적어 두 번 돌아오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도 했다.

나중에 조선 후기에 민란에서 자주 사용 되었는데 사발통문의 특성상 여러 사람에게 빨리 전파하기 좋았고, 한 명의 주동자가 아니라 여럿이 동등하게 힘을 합쳤다는 의미도 있어서 사용되었다. 원형 구조의 특성상 이름을 적는 순서에 의미가 없었으므로 12시 방향에 주동자의 이름이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구한말기 이후엔 사발통문을 돌리기만 해도 법으로 잡아가게 했다.

최근까지 남아서 사발 돌린다사발 풀다 같은 표현을 쓴다. 이 경우는 퍼뜨리겠다, 유포시키겠다 같은 의미이다. 타짜(영화)에서도 고니가 사용하는 용례가 있다.

3. 동학 농민 혁명

가장 유명한 사발통문은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전봉준 등이 정소(呈訴)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작성한 사발통문이다. 이 사발통문에는 탐학을 저지른 고부군수 조병갑의 목을 베고 서울까지 올라간다는 목표가 적혀 있는데 이는 동학 농민 혁명이 다른 민란과 달리 처음부터 대규모 반란을 염두에 둔 계획적인 봉기임을 의미한다. 서명자는 전봉준,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김도삼, 송주옥, 송주성, 황홍모, 최흥열, 이봉근, 황찬오, 김응칠, 황채오, 이문형, 송국섭, 이성하, 손영호, 최경선, 임노홍, 송인호까지 총 20인이다.

현재 남아 있는 동학 농민 혁명의 사발통문은 1968년 12월 정읍시 고부면에 있는 송후섭(宋後燮)의[3] 집 마루에 묻힌 족보 사이에서 나왔다. 이 사발통문은 고부 민란이 벌어지기 2달 전인 1893년 11월에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발통문이 정말 전봉준이 거사를 모의하면서 작성한 진본인지 논쟁이 있었으며, 지금은 당시 사발통문에 서명한 어느 동학교도의 회고록을 필사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전봉준의 사발통문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참여자들의 서명,[4] 두 번째는 현실에 절망한 민중들의 한탄, 세 번째는 도인들의 결의사항이다. 이 중 첫 번째는 1893년 11월 작성된 사발통문의 일부임이 확실하다고 보지만 두 번째 부분은 사발통문을 돌린 뒤의 어느 시점에서 민심을 기록한 것이라고 본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학자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한데 11월경 전봉준 등이 사발통문을 작성했을 때 결의한 사항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이듬해 3월 전봉준이 무장에서 기포했을 때 결의한 사항이라는 견해도 있으며, 12월에서 이듬해 1월 고부민란이 발생하기 전 사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사발통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동학농민운동 기록물의 일부로 2023년 6월 등재되었다. 부패한 정부와 외세에 저항한 민중봉기운동으로써의 세계사적 의의를 인정했고, 특히 당시 사발통문은 동학농민운동이 우발적인 사고가 아닌 계획적인 민중봉기였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기록물으로써 가치를 인정받았다.

4. 기타

분데스리가의 우승 트로피 마이스터샬레(Die Meisterschale)도 사발통문과 유사한 점이 있다. 분데스리가 창설 이전부터 이 트로피를 들어왔던 역대 우승팀들의 우승년도와 이름이 트로피 앞면에 원형으로 빼곡하게 새겨져있다.

프랑스에서도 왕에게 뭔가 요구할 때 주동자를 알지 못하게 둥근 리본 형식으로 이름을 쓰는 ruban rond(뤼방 롱, 둥근 리본)이라는 방법이 있었다. 영어권에서는 round robin(라운드 로빈)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이 말은 '리그전'의 의미로 변형되어 쓰인다.

일본어로는 가라카사렌판조(傘連判状, 산련판장)이라고 하며, 잇키를 시도할 때 맹세문으로 사용되었다.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서 이것이 모리 모토나리의 모리 가문의 고유 정책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모리 가문이 아키 고쿠진 잇키의 지도자격 가문이었기 때문. 실제로 아키 고쿠진 잇키의 산련판장도 몇 개 남아있다.


[1]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교도 20인의 서명이 있다.[2] 이후 내용은 찢겨져서 알 수 없다.[3] 사발통문에 서명한 송대화의 아들이다.[4] 서명 앞에 있어야 할 통문 부분은 찢겨져있다.